시인의 욕망|신현락(시인)
며칠 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한 중진 시인의 문학강연회를 다녀왔다. 오랫동안 교직에 몸담고 있다가 몇 년 전에 퇴직하여 창작과 강의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은 그 전에 보던 모습보다 좀 더 자유스럽게 보였다. 강연이 끝나고 아이들의 질문시간이었다. 지리하게 질문이 이어지던 중 한 아이가 뜬금없이 ‘선생님, 문학이 무엇이에요?’라고 질문하였다. 시인은 순간 당황하는 듯하다가 참 좋은 질문이라며 그 아이를 칭찬하고 자기가 쓴 책을 주겠다며 책에 사인을 하였다. 아마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하는 수순이리라고 짐작하며 나 또한 ‘과연 무슨 대답이 나올까?’ 내심 기대가 되었다. 여기에 다 옮길 수는 없어도 그 시인의 대답은 ‘문학이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점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질문을 한 아이뿐만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해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대답을 듣고 문득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 떠올랐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이에 대한 성찰의 기록이다. 지금도 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 나오는 수도원장의 죽음을 둘러싼 여러 의혹들을 보면서 알로샤가 취했던 ‘진실한 인간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라는 관점을 기억한다. 고결한 생을 살았던 수도원장이 죽자마자 시신이 부패한 것을 보고 성직자나 의학자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알로샤는 수도원장을 인간으로 이해했던 것이며 그 깨달음은 사실 수도원장이 알로샤에게 주었던 메시지이기도 하다. 알로샤의 관점은 문학이 인간을 보는 관점을 대변해준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라도 문학은 그를 피고인이나 정신병자가 아닌 인간으로 이해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정의는 마치 시에 대한 정의처럼 오류의 연속이다. 어떠한 정의도 인간의 한 속성에 대한 것일 뿐 전체성을 아우르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단순화를 무릅쓰고 나에게 인간을 정의하라면 ‘인간은 정말 못 말리는 욕망의 덩어리’라는 말을 하고 싶다. 어린 영아를 보면 순수한 욕망의 덩어리라는 생각이 든다. 영아는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칭얼대며 보채고 운다. 인간은 먹고 자고 싸는 본능적인 욕구에서부터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 예뻐지고 싶은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자기완성에 대한 욕망, 평화스럽게 죽고 싶은 욕망까지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사는 존재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가장 크고 궁극적인 욕망은 무엇일까? 언젠가 서경보 스님의 책에서 ‘인간의 욕망 중에 가장 큰 욕망은 재물욕이다.’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아마 대학 무렵에 읽었던 것 같은 데, 그때만 해도 인간의 욕망 중에 재물에 관한 욕망이 가장 크다는 사실에 별로 공감을 하지 못하였다. 그때의 내 생각에는 사랑에 관한 욕구나 자아성취에 관한 욕구가 가장 크고 궁극적인 욕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시절엔 참 지독하게 가난하여서 등록금만 간신히 낼 정도였고 책이며 기타 들어가는 경비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였다. 대학시절 나는 거의 책 없이 공부하였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책만 보면 무조건 사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곤 한다. 돈이 없었으니 그 흔한 미팅이나 낭만적인 데이트를 한 번도 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가난하였어도 그때는 재물욕이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이라는 데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요즘 ‘쩐의 전쟁’이라는 드라마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직장 동료들의 대화를 듣다 보니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나도 대강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 같은 문외한도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면 패가망신 한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최근에 우연한 기회에 사채업을 하는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경제의 규모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하며 제도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들이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물론 과도한 이자로 인해 채무자와 가족, 그리고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자와 원금을 받기 위해 비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사채업자들의 잘못도 그는 인정하였다. 그러나 높은 이율을 알고도 돈을 빌려가서 갚지 못하는 채무자의 잘못도 크며 자기들은 돈을 빌려주고 돈을 받는,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이지 무슨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이자와 원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망하는 사채업자도 많으며 돈에 관한 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사채업은 정부에서 아무리 규제해도 존속할 것이라는 그의 말의 결론은 ‘인간은 돈 앞에서 가장 약하다.’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인간은 돈에 관한 욕망, 즉 재물욕이 가장 강하다.’라는 것으로 정리되는데 요즈음의 나는 이 말을 전적으로 부정할 자신이 점점 없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최근 대두되는 인문학의 위기도 따지고 보면 인문학이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이기에 일어난 사태이다. 대학에서 국문학과는 폐지되는 대신 부동산학과, 휴대폰학과가 새로 생겨나는 사태를 무작정 개탄만 할 수는 없다. 이제는 재력이 사람들의 신분을 결정하고, 경제력이 곧 국력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더 많은 재물을 보유하기 위해 가진 수단을 다 동원한다. 대기업의 총수도 상속세를 아끼느라 편법으로 주식을 조작하고, 재산권 다툼으로 형제간에 송사를 벌이고, 종합부동산세를 아끼느라 위장으로 이혼하는 사례도 흔하다. 돈 앞에선 부부간의 정도, 가족의 윤리도, 도덕의식도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다.
우리 문학에서도 이러한 소재로 글을 쓴 사람들이 많다. 일례로 30년대 김유정 소설의 주인공들을 보면 돈 때문에 자신의 마누라를 남에게 빌려주기도 하고, 마누라를 팔아서 도박 밑천으로 마련하기도 한다. 그렇게 궁핍해진 농촌현실의 시대적 배경의 원인으로 일제의 수탈 정책을 들 수 있지만 돈 앞에서 전통적인 가치관이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가를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정도 차이는 있을망정 아마도 30년대 농촌의 일반적인 풍경이 그러하였을 것이다.
앞에서 예를 든 소설가 김유정은 폐병을 치료할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였다. 그가 죽기 얼마 전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닭고기를 실컷 먹고 싶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결국 그는 닭고기를 실컷 먹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는데 대부분의 문학가는 이처럼 가난을 숙명처럼 달고 살았다. 이재에 밝지 못한 것은 시인들이 더 하다. 서울 생활을 접고 삼수갑산으로 들어간 김소월 시인은 신문지국을 경영하면서 돈을 빌려주는 일도 하였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어디까지 사실인지 몰라도 김소월 시인같이 선량한 사람이 돈을 빌려 가서 갚지 않은 사람들에게 모진 행동을 했을 리 만무하니 당연히 망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가 젊은 나이에 술과 아편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을 당시에 상황이 눈에 선하다. 천상병 시인은 또 어떤가? 한 잔의 막걸리로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시인의 천진함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이라고 하는 재물욕도 천상병 시인에겐 티끌에 불과하였다.
60년대의 김관식, 천상병, 김종삼 시인같이 삶 자체가 시가 되는, 무욕·무위의 삶을 사는 시인들을 저간에는 보기가 힘들다. 현대의 시인들은 옛날의 시인에 비해 꽤 영리한 삶을 사는 것 같다. 대부분의 시인이 직업을 가지고, 생활을 책임지면서 시를 쓴다. 적절히 명예도 얻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기 위해 적금도 붓고, 노후를 위해 연금도 꼬박꼬박 낸다. 시인도 사람이기에 재물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을 탓할 수는 없으리라. 사실 시인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 욕망이 은유의 옷을 입고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그 결핍감을 직접적으로 채우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은 욕망을 달성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으리라. 달성하여 행복할 수도 있고, 실패하여 불행할 수도 있으리라.
우리는 시인이 부유한 생활을 한다고 비난하지 말아야 하고, 가난하다고 궁핍함을 동정할 필요도 없다. 다만 시인이라면 욕망이나 결핍, 행복이나 불행, 부유함과 가난함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욕망은 결핍이 채워졌다고 그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욕망을 낳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은 집―한 곳에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 집에 머무르면 욕망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시인은 욕망하되 욕망에 머무르지 말고, 인간적이되 인간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시인에게 더 궁극적인 욕망은 재물욕보다 좋은 시로써 이름을 남기고 싶은 명예욕이겠지만, 둘 다 욕망인 점에서는 같은 것이다. 그러니 시인 노릇하기 얼마나 어려운 일인 것인가. 돈도 되지 않은 시를 쓰면서 그나마 명예마저도 마음에 두지 말라고 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시인이 가져도 좋을 욕망이란 무엇인가? 전망 좋은 곳에 오두막을 짓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소박한 소망? 진실에 기초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 인간이 살아야 하는 평화로운 누리에 대한 열정? 지고의 선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상? 그런 이상을 향한 헌신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 그 모든 것을 초월하고 싶은 자유? 나는 잘 모르겠다. 당신들은 아시는지…….
첫댓글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모든 인위적인 행위는 직, 간접적으로 '욕망'에 근거한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어떤 욕망인가도 중요하겠지만 그 욕망을 성취하는 방법이나 과정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정도'를 따른다면 시인도 어떤 욕망을 가져도 되지 않겠어요? 어려운 문제는 그 '정도'라는 것이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다는 점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