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는 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모를 것이니까요.
현재 우리가 다 알고 있고
다 아는 내용만으로 대화가 되면
우리가 깬 것이지요.
둘중에 하나라도 깨어있지 못하면
모르는 것은 답답한 일이 되지요.
그래서 차후로 돌립니다.
역시 스님의 법문은 부드럽습니다.
아마도 자등명이 스님의 말씀에 이렇듯 귀를 기울이고
의심을 던지는 것도
스님의 그런 부드러움때문이지 싶습니다^^
또한, 자등명의 물음이 반론이라하니 거북하셨다면
스님의 표현을 따라 "보완"이전의 의심이라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스님께 드린 의심의 요지는
논사들의 지도에 따르되
스스로 충분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씀해 주시면 서로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해도
서로 모르는 것은 자꾸 말해보았자
헤깔려서 엉뚱한 곳으로 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또한, 법(진리)이 일체에 두루하지 않는 것이라면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요.
아는 것은 아는 것이란 별개가 되니
지금의 모르는 것(아는정도)에 법이 없다면
공부를 지어바짜 헛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공부를 지어 누구나 깨달을 수 있으며
누구나 이미 깨달음 속에 있다는 말은
모른다는 생각, 즉 우리의 한계된 앎 속에서도
이미 참다운 법이 있기 때문일 것이며,
참다운 법이 우리의 한정된 앎 속에 이미 있기에
그것만 살펴도 충분히 발견될 수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를 헤깔리게 하는
잘 이해안되고 알수 없는 것은 잠시 보류함이 옳지,
논사들이 말했다고 해서
부처님께서 말했다고 해서 무작정 말할 것이 아닌 듯 합니다.
자신이 이해한 후에
듣는 이를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을때
그때 말하는 것이 좋을 듯 해서
자등명이 이렇듯 스님께 당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늘 그러셨듯
누구나가 알 수 있고, 확인 할 수 있는
쉬운 것, 쉬운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불쾌했다면 자등명의 부족함때문이나
부족하기에 '부족함의 相'에 메이지 않으려는
공부인의 정진이라 어여삐 보아주시면 좋을 듯 합니다.
자등명
--------------------- [원본 메세지] ---------------------
*인연까페에 이런 의견이 올라와 답변한 것입니다.
열린절 가족 여러분도 참고하세요.
.. 자등명님
이름답게 열심히 사유하고
공부하시는 군요.
윤회나 순환은 보통 진리라고 하지만
제가 주장하는대로 하나의 현상일 뿐이며
그것이 보편적으로 진행되는 현상이기때문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자등명님의 설명과 같이
원소의 부분,혹은 전체적인 유기적 결합 및 부분,혹은 전체적인
분해의 모습을 현상에서 보아 된다,되었다고 보면서
옛 인도인 이래로 설명해온 방식을 이른 것일 뿐입니다.
불교적으로 이야기 하면 원인과 결과가 전혀 다른 것이냐하면
그렇지도 그렇지 않지도 않다는 얼핏 미묘한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전법(前法=옛모습,상태 등의 의미)이 멸하면
현법(現法=지금 모습,상태 등의 의미)이 생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전법과 현법이라고 구분해서 말하는 것일 뿐
전혀 다른 존재이기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감각과 언어가 한계가 있기때문에 오는 표현력 및 인식력 부족현상인 것이죠.
다만 그래도 제 이야기에서 의문을 삼을 수 있는 것은
물질,육체의 윤회(순환)라는 것은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간다할 지라도 정신 또는 업식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그렇게 물질,육체의 부분이 되어서 한덩어리로
따라다니는 것이냐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지요.
답은 물론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7일과 7번의 견해는 애매할 수도 있지만
제 의견이 아니고 과거 논사스님들의 지도에 따른 것이므로
님도 고민하시고 정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이 부분은 현 상태에서 님과 저의 대화로는 증명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점 애석하지만 서로 더 공부해야지요.)
4유가 모두 존재인 점은 분명하지만
중유의 단계에서 우리의 전5식과 6식이 육체와 분리되는 과정과
순서에 따라 사유와 중유는 구분이 되고
그렇기때문에 그 시절에 천도를 하는 것이며
생유에서 사유까지도 세포의 지속적 생성과 소명리 있기때문에
천도를 할 필요가 있으나 그것은
수행에 의해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재계이므로
굳이 천도라는 형식을 밟지 않는 것이며
생전예수재도 그 의는 비록 있다하나
초기불교에서는 물론 없던 방편이지요.
생전예수재는 수행으로 바꿔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반론보다는 제 의견으로 보완하시는 것이
어떨까 생각되는 데요,어떠신지?
--------------------- [원본 메세지] ---------------------
우리스님 답변 감사합니다^^
49재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순 없었으나
스님의 친절함은 참 감사합니다^^
하지만 49재나 예수재 혹은 윤회에 대한
스님의 주장은 그럴 듯 하지만 왠지 잘못된 견해인 듯 합니다.
먼저, 스님의 윤회에 대한 견해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산소와 수소 등의 원소가 수소 결합한 아미노산 등의 결정체가 식물의 뿌리를 통해 흡수되거나 광합성 작용을 통해 잎으로 흡수되어 식물을 구성했을 때, 이 식물을 채식동물이 뜯어먹고, 채식동물을 사람이 잡아 먹고,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게 될 경우 더빨리 분해되지만 매장을 할 경우 미생물에 의해 원소로 다시 분해되는 과정을 밟게 될 것이다.
이렇게 원소로 출발해 다시 원소가 되는 과정을 흔히 생태계의 순환(循環)라고 부르며, 순환을 불교에서 윤회(輪廻)고 하는데 순환이든 윤회든 돌고 돈다는 의미 외에 다른 것은 아니다. 원소가 미생물이 되고, 미생물이 식물이 되며, 식물이 채식동물로, 채식동물이 육식 돌물로, 육식동물이 사람으로, 사람이 미생물로, 미생물이 원소로 되는 이 싸이클에서 앞의 과정은 전생이요, 뒤의 과정은 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스님의 순환에 비유한 윤회는 조금 더 생각하면
'과연 순환(윤회)하는가?'하는 의문을 낳게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여기로 간 것을 '갔다'고 할 수 없듯
원소가 원소로 된 것을 '됐다'거나 '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원소가 원소로 되었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이기에
'되었다'는 말을 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삶)를 다시 살펴보면
미생물도 원소이고, 동물도 원소이며
아미노산도 원소이고, 산소,수소도 원소이듯
이미, 일체존재가 원소 아닌 것이 없는데 대체 무엇이
'...되고 ...되고 ...되었다.'는 것입니까?
스님의 말씀대로라면 모두 원소인데 과연 '순환(윤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스님의 '...되고..되는' 윤회(순환)관은
"돌고 돈다"고 볼 수 없으니 이미 윤회도 순환도 아닌 듯 합니다.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스님의 49재의 설명중 "7일 단위로 변한다"거나 "7번"과 같은 애매하고
확인할 수 없는 말들은 되려, 사람들을 우매와 맹목으로 이끌뿐
존재의 이해나 사람들의 삶에 있어 아무런 이익이 없는 듯 합니다.
그럼 또, 스님의 49재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중유의 상태에서 보통 7일 단위로 새로운 삶의
형태로 태어나게 되는데 늦어도 49일째 되는 날에는 모두 다 새 몸을 받게 되므로 49재를 지내 불보살님의 위신력을 빌어서, 이왕 태어날 존재이면, 괴로움이 적고 즐거움이 많은 존재의 세상에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즐거움이 극에 달하고 괴로움이 없는 이상향인 극락세게에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 49재를 지내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답변에선
"'4단계의 삶에서.... 중유는 별개의 삶(존재)"이라 하셨지만
중유가 "새 몸을 받게 되므로(생유로)"라는 말씀이나 혹은,
"모든 단계가 금을 긋듯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어서" 라는 스님의 표현에서도
이미 별개가 아닌 것을 별개라 하신 것이니
그 실상은 중유역시 다른 삼유에 다르지 않은 것이 되고
다르지 않으니 중유역시 여전히 '원소(스님의 윤회(순환)론에 비추자면)' 라 할 것입니다.
즉, 중유역시 별개의 존재(삶)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49재의 이치가 중유의 삶(원소)에서 반드시 적용되는 것'이라면
여전히 원소(삶,존재)인 나머지 삼유역시 예외가 없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유(四有)중 어는것도 별개의 존재가 아닌
"순환하는" 하나의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스님의 말씀처럼
이렇듯 어디에나 49재의 이치가 통한다면
기왕이면 생,본,사유의 삶의 모습에서 가르치시면 좋을 것을
왜 굳이 확인하기 힘든 애매한 "중유"의 삶의 모습을 내세워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하시는 것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스님~
스님께서 '7일 단위로 변한다'는 중유의 삶의 모습에 대한 주장을
과연, 누구에게 확인시킬 수 있으며, 어떤 논리로 증명 하실 수 있겠습니까?
굳이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를 그럴 듯 하게 꾸며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누구도 확인한 적 없고, 확인할 수 없는 존재의 모습이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로 하여금 맹목과 우상의 씨앗만 키우지 않겠습니까?
저는 스님께서 여지껏 그러셨듯
친절하시면서도 삶에 이로움이 있는 법문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