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시인을 만나다|시집 속 대표시 – 박노식
나는 왜 노박덩굴을 사랑하는가 외 4편
노박덩굴 꺾어서
흰 벽에 걸어두었지
절로 껍질 벌어지고
붉은 열매 나왔네
저 씨앗들은 왜 이리 황홀할까
그건 외롭기 때문, 하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생존의 슬픔이지
누구나 무관심하니까
누구나 무정하니까
그래서 깊은 눈(眼)에 띄게 하려고
그러니까 살아보려고
속으로 맺혀버린 거야
붉은 멍,
오랜 자학,
“새야, 어서 날아와 나를 물어가 다오.”
지난 한 계절
노박덩굴과 함께 살았네
제 몸을 비우는 것처럼
제 맘을 태우는 것처럼
간절하니까
절박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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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아주 사소한 독백 하나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하여
파도가 불러서 우리가 왔지
고갱의 병식, 시엔의 수영, 가셰 박사의 현묵, 탕기 영감의 동근, 테오의 상순
자은도* 수평선 뭉게구름 위에 만월처럼 둘러앉아 압생트를 마셨지
난 미친 게 아니야, 색채 속에 갇힌 것뿐이야
그날 밤도 그랬어, 나의 모든 것이 어두우니까 눈빛이 날 밖으로 인도한 거야
하늘은 바다보다 더 깊어, 그래서 내 눈도 깊어진 건데 그만큼 눈물이 많아
그러니까 그 별은 바다 위의 별이지만 실은 나의 눈물 자국이야
파도가 불러서 우리가 왔지
파도가 불러서 우리가 왔지
*전남 신안군 자은면에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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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의 겨울눈
눈 그친 저녁,
목련의 겨울눈은 알사탕 같은 흰 꽃을 달고 있지
시린 꽃
찬 별들이 내려와 잠시 세든 방
머잖아 떠나야 할 정든 집
그래서 별들의 저녁 인사는
“오늘 밤도 한없이 아프자!” 이렇게 노래하는 거야
왜? 빛나야 하니까
왜? 지상의 모든 벗들을 위해서니까
그래서 숙아,
견딜 수 있겠어?
이 바늘 같은 추위를 버틸 수 있겠어?
저 회색의 촛불
목련의 겨울눈을 봐
아프니까 빛나는 눈빛처럼
속으로 울고 속으로 맺고 속으로 틔우고 속으로 피워봐
아침 햇살이 별안간 둥근 문을 열어줄 때
그 순정은
겨울 별자리가 곧 떠날 채비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목련꽃은
겨울의 찬 별들이 피워낸 눈물방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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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리를 건널 때
함께 와서
건너가고 건너오는 다리는 낯선 무지개의 눈썹 같아서 서로를 스미게 한다
길은 허공에 있다
먼저 건너갔으므로 쉽게 잊히는 것처럼 비약적인 걸음은 많은 흔적을 남긴다
드나드는 일, 다리 위에서의 기억은 오래 가고
비 내리는 공휴일은 종일 집에 갇혀 꽃을 본다
“어디야? 지금 뭐 해?”
가장 사랑스러운 마음은 상대방에 대해 궁금해하는 말
비를 맞으며 손을 잡는다
허공에서 꿈을 꾸듯 새들은 구름 속으로 미련을 옮길 줄 안다
홀로 다리를 건널 때 무지개의 눈썹은 사라지고 얼굴은 야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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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걸레
당신은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건물 두 동棟을 오가며 쓸고 밀고 닦고 비워내는데 삼십여 년을 보냈고 홀로 사남매를 키웠습니다 건물 주위와 복도와 계단과 강의실과 창틀과 화장실이 생의 전부였습니다 무릎과 허리와 손목의 수술 자국이 지난 세월만큼 시려서 아직도 빗자루와 밀걸레와 물수건과 락스 통이 당신의 눈에 남아 있습니다 손을 쥐면 손끝에 박힌 옹이가 자갈을 만진 듯 무뎠습니다 연속극을 시청하던 어느 날 화면 속에 건물 미화원의 뒷모습이 비칠 때 당신의 입술이 그믐달처럼 무겁게 패인 것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