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국제시장...2 영화와 나의 주변과...
아아! 국제시장 1. 현봉학박사와 흥남철수를 올린 뒤에 여러분들이 카톡에 댓글도 달아주시고 블로그에 자신들의 경험담을 써주기도 하셨다.
그중에서 어느 지인이 써주신 것 중의 하나가 '현봉학 박사의 업적은 가히 노벨 평화상 감이라 생각된다'는 글이었다. 그 말을 듣고보니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 못한 일로도, 아니면 의도는 그렇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최고의 평화 해체무기이자 협박 수단이 되어 버린 대량살상무기인 핵무기 개발에 이용당하고도 노벨평화상을 받은 분도 있는데...
그런데 나중에 정작 현봉학박사 본인은 흥남철수로 인하여 이산가족 100만이 생겼다는 사실에 괴로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자책할 일이겠는가? 10만이 죽임을 당해서 어차피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 이산했어야 할 운명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나는 이산가족인 채 대한민국에 사는 것이 한 가족 모두 요덕 수용소에 사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어릴 적 고추친구는 국제시장과 광복동 야시장이 생활의 터전이었다. 덕수의 아버지가 흥남비료공장 노무담당이었다고 나오는데 이 친구의 아버지는 흥남비료공장의 재무를 담당했다고 한다. 세상은 참 넓고도 좁은 것... 인간생활에서 관계란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그런데 국제시장과 광복동 야시장에서 상당한 기간을 장사를 하며 국제시장의 애환을 처절할만큼 체험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살았던 이 친구는 그 시절을 되돌아보고 싶지 않아서 영화를 보고 싶은 생각이 아직 나지 않는다고 했다. 국제시장 이야기를 글로 쓰려면 얼마나 많은 글을 써야할지. 몇 권의 책이 만들어질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지금은 목사가 된 이 친구의 이야기이다. ------------------------------------------------------------------------------------- 덕수가족의 부산 피난 생활이 시작된다. 다행히 덕수네에게는 국제시장에서 '꽃분이네' 가게를 내어 장사를 하던 고모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꽃분이네 골방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한 덕수네 가족... 그러나 대개의 피난민들은 일단 거제도에서 어려운 피난 생활을 시작한다. 많은 피난민들은 살림이 그리 넉넉치 않은 거제도 주민들이 자신들의 방을 피난민들에게 거저 내어주고 기거하게 했던 사실들을 증언하고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참으로 순박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경상도 소년 달구와 친구가 된 덕수... 소년 덕수의 함경도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나도 집에서는 저렇게 말을 하고 자랐기 때문이다. 단, 오리지날 함경도 말은 어른에게라도 덕수가 하듯이 '...했슴다.','하겠슴다.' 보다는 '...했소.'라는 표현을 더 써왔다. 그러다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경상도 말로 급격히 바뀌었지만 아직도 같은 함흥 출신 이산가족인 아내와는 반 경상도, 반 함경도 말을 하며 살아간다. 영화에서의 몇 가지 옥의 티중의 하나가 덕수나 덕수 엄마의 함경도 말의 상대적 자연스러움에 비해 덕수 아버지의 함경도 말은 함경도 말이 아니다. 평안도 말이 3분의 2쯤 섞인 함경도 말이니 이건 시나리오 작가의 착오가 아닌가 한다.
덕수와 달구는 당시의 많은 피난민 소년들이 했던 것과 같이 구두닦이를 하고 차를 탄 미군들이 던져주는 쵸콜렛 때문에 같은 처지의 길거리 깡패소년들에게 된통 엊어맞기도 한다. 전 직장에서 6년간 사장으로 모셨던, 평안북도 영변출신이던 고 김명관사장 같은 경우도 자주 하셨던 이야기 중의 하나가 진해 피난시절에 구두닦이, 껌팔이를 했던 일화이며 특히 노조와의 협상시나 젊은 직원들과의 대화시에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러쿵 저러쿵 인생에 대해 논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시기도 했다. 1957년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던 나의 경우도 피난 한참 뒤인 1957~8년 경까지도 미군 트럭이 지나가면 '쪼꼬레또 기부미'라고 쫓아갔던 기억이 있다. 1958년 까지는 미국에서 원조해준 탈지우유를 학교에서 배급받아와서 물에 타먹던 기억도 나고 딱딱한 간식으로 쩌서 사탕처럼 빨아먹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중의 일이지만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던 학생들을 위해 미국에서 원조받은 옥수수가루로 옥수수죽, 떡을 급식했던 국민학교 시절의 기억도 지금까지 생생하다.
영화에서 덕수의 구두통 위에 발을 척 얹고는 큰 배 만드는 꿈을 쏟아내던 정주영회장. 그가 만든 그룹에서 34년을 일해온 나는 그가 구두통에 발을 얹고 앉는 순간 바로 알아보았다. 사실 젊었던 시절에 안경을 쓰지 않았던 정주영회장을 쉽게 알아보라고 영화에서는 검은 테 안경을 씌웠지만 사실과 다르다.
뒷줄 중앙이 정주영 회장 -1953년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가 피난시절부터 조선업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정주영회장 회고록 '이 땅에 태어나서'를 보면 조선업에 처음 관심을 둔 것은 1960년대 전반이 확실하다고 되어 있고 1966년에 이춘림 전 현대중공업 회장과 이틀에 걸쳐서 요코하마조선소, 가와사키조선소, 고베조선소 시찰한 것을 계기로 조선소를 만들어 큰 일을 하겠다는 구상을 피력했다고 쓰여 있다.
여하튼, 피난 수도 부산에서 앙드레김-김봉남 등등이 등장하고 세월이 좀 지난 후엔 가수 남진, 또 그 뒤엔 씨름선수 이만기 등이 등장해서 각각 그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서독 광부와 간호사...지금의 대한민국을 일으켜 숨을 불어 넣은 일 중의 하나이다. 부산 우리 가족이 살던 옛 시청앞 집에서 불과 2~300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았던 자갈치시장에서 생선상자를 만들어 파는 곳에 취직해서 일하던 중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동생을 위한 덕수의 선택은 서독 광부...
(현대화된 자갈치 시장)
많은 청년들이 서독으로 가서 계약기간 후에 돌아오기도 하고 거기에 눌러 앉은 분들도 있다. 1988년 우리 회사에서 서독에 기술연수를 간 직원들의 독일어 통역의 대부분을 이 분들이 맡게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7년에는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대통령이 부산을 방문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학교 아래 지금의 부산역이 있는 초량부근의 대로에 나가 양손에 태극기와 독일기를 들고 열심히 손을 흔들어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의 신문)
독일과 대한민국, 같은 분단국가였는데 한쪽은 벌써 25년 전에 통일이 되고 나머지 한쪽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대치를 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광부로 죽도록 고생했던 덕수와 간호사로 갖은 궂은 일을 하던 영자의 풋풋한 사랑... 영자의 임신과 귀국과 결혼...
그러나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또한번 강요하는 현실... 월남전이 한창이던 월남-베트남으로 가기로 한다. 매일 오후 다섯 시면 거행되던 하기식. 영화에서 하기식 장소는 용두산이다.
용두산에 있는 고교 은사 살매 김태홍선생님의 시비(詩碑)
부산타워에서 내려다보이는 국제시장... 하기식 장면의 현장인 공원광장... 저 아래 옛날 우리집 건물도 보인다. 용두산공원은 정말 나의 발길이 안 닿은 곳이 없을 정도로 구석구석 친근한 곳이다. 영도 남항동에서 2학년 말인 1958년 12월 8일에 시청앞 남포동으로 이사 와서 1년을 영도다리를 넘어다니며 남항국민학교에 다니다가 1960년, 4학년 올라가면서 용두산 밑의 동광국민학교로 전학을 해서 매일 용두산 옆길을 따라 학교를 갔다. 아니, 그 전부터 주일 아침 저녁, 수요일을 영도에서부터 대청동 미공보원 옆의 교회까지 자주 용두산 계단을 올라 중앙성당 옆을 지나 교회로 갔으니... 고추 친구들과 같이 놀았던 곳이 여기요, 버드나무 가지 채찍싸움 하던 곳이 여기다.
(부산타워에서 내려다 본 지금은 주차장이 된 옛 동광국민학교 터)
덕수와 영자가 남진과 나훈아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부산에서 살아온 덕수가 나훈아가 아닌 남진을 더 선호하는 부분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당연히 부산 초량 출신인 나훈아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의문은 월남 이야기에서 풀렸다. 월남이야기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이야기는 재미있게 전개된다. 월남전에서의 주요 장면 중의 하나가 가수 남진과의 만남이다. 결과적으로 생명의 은인이 된 남진을 더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덕수는 돈벌러 월남에 갔지만 우리 가족 중에도 작은형이 1967년 백마부대의 일원으로 월남의 전장에 가서 1년 후인 1968년에 무사히 돌아왔다. 귀국시 배에서 작은형이 찍은 사진이다. '환영 이순영군'
국민학교와 중학교 동기인 윤태호사장도 월남참전용사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중앙부두 월남 파병선이 정박해 있는 곳에서 거행된 파월장병 환송, 환영식에 여러 번 단체로 동원되어 태극기 흔들고 애국가 부르던 기억도 생생하다. 위의 사진의 왼쪽, 검은 교복들이 학생들이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으로 볼 때 빠뜨릴 수 없는 일이 바로 중동 건설 진출인데 뼈빠지게 고생한 덕수의 인생여정 중 중동행은 빠져 있다. 월남에서 당한 부상 때문이라고 이해되지만 영화 시간의 조절도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관객들의 눈물을 가장 많이 쏟게 만드는 장면... 1983년 6월30일 하루 예정으로 방송을 시작했다가 6.25전쟁중 헤어진 이산가족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11월 14일 까지, 총 138일, 453시간동안 생방송으로 진행된 이산가족찾기. 총 10만명의 이산가족이 신청하여 53,536명이 소개되고 10,189명이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가족과 재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많은 시청자들의 눈물을 자아냈던 상봉 남매)
온 국민을 눈물의 도가니로 밀어넣으면서 진행된 이 프로그램은 당시 함흥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고 피난온 장모님의 눈에 눈물이 마르지 않게 않게 만들었다. 당시에 나는 장모님과 같이 살았는데 회사에서 퇴근하여 들어오면 항상 TV앞에서 넋놓고 계시는 장모님을 보았다. 그뿐인가? 이산과 관계없는 사람들의 눈에서도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게 했던가? 가족이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하는 장벽... 이걸 그대로 놓고 어느 누가 인도주의를 말할 수 있으며 인권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는가?
덕수가 들고 있던 팻말에 쓰여진 아버지와 막순이의 생년을 보면 미국으로 입양간 막순이는 1945년생 해방동이이고 배를 떠났던 아버지는 1910년 생... 흥남철수 때 막순이의 나이가 우리나이로 여섯 살이니 장남인 주인공 덕수의 나이는 짐작컨대 10살 정도로 4~5학년 정도인 1940년생 정도가 될 것이다. 나에게는 덕수와 비슷한 나이인 1940년생 큰형님, 1942년생 큰누님, 그리고 막순이와 같은 나이로 월남전 참전용사인 해방동이 작은형과 47년생 작은누나가 있다. 같은 세대를 살아온 그들은 덕수만큼 고생한 것은 아니지만 때에 따라서 나름대로의 고뇌를 안고 살아 왔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등에 업혀온 형이 하나 있었는데 그만 거제도 장승포에서 내려서 거제(현재의 거제면 서상리)로 가는 도중에 죽어서 길옆에 그냥 묻었다는 것이다.
덕수가 들고 있던 팻말에 쓰여진 고향 흥남시 천기동... 내가 섬기는 교회의 은퇴장로님 중의 한 분인 한형진장로님은 바로 고향이 흥남 천기리라고 하신다. 나의 부친이 쓰신 책 '아담 너는 보았는가?'에도 흥남철수 당시의 이야기에 천기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신기한 일이다.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많은 전쟁고아들이 미국으로, 유럽으로 입양가고 그곳 국민으로 자란 사연들... 흥남에서 배에 오르다 놓친 동생 막순이를 그나마 찾게된 것으로 관객들은 또 얼마나 눈물을 흘렸던가?
이제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되고 살만한 세월이 되니까 자식들의 눈에 고집불통 영감쟁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 덕수... 자식들은 아버지의 고집이 재산상의 불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초장동, 천마산 중턱쯤일 덕수의 집값이 얼마가 될 지, 꽃분이네 가게를 팔면 얼마가 될지는 잘 모르지만 자식들은 아버지더러 해운대 쪽으로 이사를 하자고 강요하다시피한다. 아버지 덕수가 지금까지 왜 꽃분이네를 처분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 고집불통 아버지가 답답하게 보이고 쪽팔릴 뿐이다. 아버지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가족을 위해서 살아왔는데 말이다.
아버지만한 아들 없는 셈이다. 나의 경우를 봐도 9남매를 키우시느라 90평생 동안 정말 많은 것을 희생했을 아버지가 원하시던 것을 제대로 하지 않고 외면한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겨우 아이 하나 낳아놓고 그것 하나도 제대로 키우기가 어렵다고 했던 세월 아니던가? 60대 중반에 들어서 후회해본들 천국에 가신 아버지는 말이 없으시다.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주절거려 보았다.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을 터이고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 세대, 형님들의 세대는 모두는 아니겠지만 대개 그렇게 살았다. 부모라서, 장남이라서, 덕수처럼 어려도 가장이라서... 희생에, 희생에, 희생을 거듭하면서... 아내 영자의 말처럼 자기를 위해서 살지 못한, 자기의 인생에 자기가 없는 삶을 살아온 세대의 페이소스가 코끝을 찡하게 한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덕수가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눈물이 그 많은 덕수의 눈에서, 어머니의 눈에서, 아버지의 눈에서 흘렀을까?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더 있을까? (끝)
다음 블로그 '옛정자 그늘.' http://blog.daum.net/oldpavilion 파빌리언
스크랩은 제 블로그에서 하실 수 있습니다.
* 2013년 12월에 부산 국제시장 구석구석과 보수동 헌책방 골목등을 찍은 수백 장의 사진이 있었는데 저장해 놓은 외장하드에 문제가 생겨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 배경음악으로 선택한 것은 모짜르트작곡 Laudate Dominum (주님을 찬양하라)이다. 이산의 아픔, 전쟁의 폐허를 딛고 대한민국을 이만큼 일으켜 세워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뜻에서다. |
출처: 옛정자 그늘. 원문보기 글쓴이: 파빌리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