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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진 자의 비유(용서에 관하여, 마 18: 21-34)
마태복음 18장 21절에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여쭈니 예수님께서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고
난 바로 뒤(마
18:
23-35)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탕감하여 주는 주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던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하여 주지 않고 갚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간청하는 동관을 기다려 주지 않고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임)
이에 보다 못한
다른 동관들이 그 종에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준 주인을 찾아가 그 일을 고하니 주인이 종을 불러다 말합니다.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그리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하고 옥에 가둡니다.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동장 35절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우리 타락한 인간의 종의 근성(타락성)인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형제의 눈에 티는 볼줄 알면서 제 눈의 대들보는 깨닫지 못한다고 한탄하시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용서를 한다는 자체가 이미 저의 심령에는 사치임을 통감합니다.
저 자신은 구원의
대상이지 구원의 주체가 아닙니다.
즉 용서를 받아야
할 대상이지 용서의 주체가 아닙니다.
더구나 심판의 주체는 더욱 될 수 없는 구원의 대상, 용서의 대상일 뿐입니다.
용서는 죄가 없는 자,
죄를 사해줄 수 있는 자가 죄 있는 자에게 베풀 수 있는 은총이지 죄사함을 받은 자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그 자체가 교만이요 건방이라고
느꼈습니다.
은총을 입은 자는 그저 감사함으로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용서할 수 있는
자격자가 용서를 논하십시오.
저는 용서를 할
만한 그런 자격이 없는 은총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용서를 논하지 못합니다.
다만 저는
아버지께서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사랑하기 위해 힘쓰고,
사랑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시늉이라도 해 보려고 발버둥칠 뿐입니다.
그래서 저의
심령에는 미움을 둘 수가 없고 비판의 그림자는 더더욱 드리울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저의 큰 죄를 사해주셨는지 절절히 느끼기 때문입니다. (말씀 참조)
그래도 미움의 싹이 돋아나고 비판의 그림자가 비칠 때는 저의 심령이 심히도 괴롭습니다.
저는 저를
칭찬해주고 사랑해주는 자보다 저를 핍박하고 비난하고 음해하는 자가 더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를 사랑해주고 칭찬해주는 이가 더 아름답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그런 이중인격에 괴로워 합니다.
보고: 무지개왕국 종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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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된 말씀
죄는 들추지 말고 구해주어라
만일 하나님이 받기 위해서 섭리해 나오셨다면
이 땅은 망하는 것입니다.
주기 위해서 나오신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는 아들을 고대해 오신 아버지의 심정을 풀어 드려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가 죄지은 자를
어떻게 동정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가 지은 죄를 나무라기보다
그를 동정하는 마음이 앞서서 그 죄를 잊어버리는 자리까지 어떻게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 여자는 무엇을 잘못했다고 말하거나 저 남자는 어떻지 하고 결점을 들추기 전에 먼저 불쌍한 마음이 앞서는 심정적 자세가 갖추어지면 하늘의 역사는 발전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인류를 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에 여러분도 그런 마음으로 불쌍한 자를 구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책임자의 사명입니다.
구해 줄 때에는 구원받는 사람의 힘보다도 내
힘을 더 소모시키고, 그 사람의 소원보다도 내 소원을 더 가중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구해 준 후에
내가 보람을 느낀 것을 상속해 주어야만 구원받은 사람도 산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족적인 메시아의 사명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부탁하고 싶은 것은, 어떠한 자리에
가든지 부디 아버지의 아들딸이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타락하여 효의 자리를
잃어버린 것과 천사장이 타락하여 종의 자리를 잃어버린 것을 동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수습해서 이것을 다시 복귀 시키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기에 여러분 자신들의 사랑의 마음과 하나님이 지금까지 사랑할 수 없었던 그 사랑의 마음을 가중시켜서 하늘 것으로 바쳐
드리겠다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이렇게 가는 여러분이 되면, 여러분은 앞으로
정상적인 발전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알겠지요? 「예.」(선집 29권178-179쪽)
출처: http://cafe.daum.net/rainbowKINGDOM/HcXx/23
부모를 죽인 죄인(말씀)
사탄세계에 있어서 굴하지 않고 절개를 세워 하늘을 대하여 충성하고 부모를 대하여 효성하는 도리를 세워 놓아야 하는 것이 통일교회의 사명입니다.
노래 부르고 춤추는 자리에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도상에서 세워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셨으니 다시 십자가로 오시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예수님은 고향을 등지고, 부모를 등지고, 형제를 등지고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와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통일식구들은 물론이거니와 세계의 30억 인류, 또 지금까지 왔다 갔던 선조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냐?
죄인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느냐 하면 살인강도 죄입니다.
의붓자식이나 종을 죽인 살인강도가 아닙니다.
죄 중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가장 큰 죄를 저지른, 아버지를 죽인 살인강도입니다.
얼마나 큰 죄인지를 여러분들,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를 죽였어요, 안 죽였어요?
여러분은 원리를 배웠으니 아버지를 죽인 죄인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게 무슨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으로 보내신 예수님은 우리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를 잡아 죽였습니다. 그런 죄인입니다.
그 입으로 무엇을 먹고 그 몸뚱이를 좋게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러한 죄인들만 사는 이 세상에서 제일이 되어 무엇하겠다는 것입니까?
아무리 참혹한 명사를 쓰더라도 참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들이 지은 죗값으로 본다면 배를 찢어 죽이고 한꺼번에 수천 명을 독수리 밥이 되게 하여 없애버려도 시원치 않을 악당들입니다.
나가고 싶은 사람은 나가십시오.
이런 말 듣기 싫어 나가고 싶은 사람은 나가라구요.
원리를 배우고 보니 우리는 참아버지를 죽인 자식입니다. 그렇지요?
부모를 죽인 죄인이에요.
살인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한 부모를 죽인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죄인인데 집을 짓고 편안히 살려고 그래요?
일제시대에 죄가 없는 데도 선생님은 감옥살이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는 오뉴월 삼복 더위에도 꿇어앉아 있었습니다.
조금만 잠을 자면 대꼬챙이로 찌르고, 찬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건 약과입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을 원칙적으로 다스리려면 그렇게 다스려도 하늘의 법도에 걸리지 않습니다.
원칙에 걸리지 않습니다.
다 변명할 수 있습니다.
조건에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맞고 또 맞아서 만민의 속죄의 제물로 사라진다 할지라도 한이 없다 하는 생각을 갖고 선생님은 지금까지 생활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추우면 또 끼어 입으려고 하지요?
여러분들은 북풍한설에 얼어죽고, 벼락을 맞아 죽어도 마땅한 죄인들인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죄인인 것을 느껴야 하는 우리입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자식을 낳아 안고 다닙니까?
옛날에는 한 나라의 왕을 죽여도 8족을 멸하고 9족을 멸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벌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아버지를 죽인 죄인이라는 것을 느껴야 됩니다.
그런 자리에서 회개해야 됩니다.
죽어 마땅한 이런 자식들을 구하기 위하여 하늘은 특사를 내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이라는 명사, 용서라는 명사만 듣고 죽어도 한이 없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고 죽어도 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아버지가 또 옵니까?
살아서 또 옵니까? 또 오란 말입니까?
기성 교회 목사들, 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합니다.
오면 또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런 사정을 알기나 하고 오, 주여!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목사들 개개인을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의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들을 용서해 주고, 구원해 주겠다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발걸음, 다시 찾아와야 할 입장에 선 부모의 그 사정이 얼마나 딱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부모를 죽인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나에게 그러한 피가 흐른다면 칼로 찢어 가지고 그 피를 전부 다 뽑아 버려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긋지긋하다고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고생 고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리라도 하나 잘라 병신이 되어 그 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간다면 면목이라도 세울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앞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길이 구원받는 길이요, 이런 길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기성교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오, 주여! 남의 집 아들딸은 다 죽더라도 우리 집 아들딸은 죽지 말게 해 주십시오.
세계는 망해도 우리 나라는 잘 되게 해 주십시오. 합니다.
말은 청산유수야.
떡에 기름을 바르면 미끄럽게 잘 빠지는 것과 같이 기도가 줄줄 나옵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어떠한 길을 가야 하느냐?
부모를 죽인 죄의 한을 풀기 위한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십자가의 길을 가다가 죽었으니 그 한을 풀기 위해서는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을 풀 도리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죽인 후에 그분이 부모인 줄 알게 될 때는 그 무덤을 파 가지고 시체를 붙들고 울고 울어도 한이 없는 것이요, 일생을 십자가의 형틀을 거꾸로 달려 보낸다 해도 지은 죄의 한을 풀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무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끝날의 인생들 앞에는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인들은 그런 인생을 보내자는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으로 왔던 예수님은 어떠한 입장에서 죽었는가?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의 멍에를 씌워 부모를 죽인 그 자식들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 눈물과 피와 땀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서 십자가의 길을 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용서해 주기 위한 터를 닦은 것입니다.
통일교회 신도들이 가는 길은 부모이신 예수께서 가셨던 골고다의 길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가시밭길과 같은 골고다의 길을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죄인의 입장에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기반을 쌓아 놓고 갔습니다.
원래 그런 용서법은 없습니다.
천도에도 부모를 죽인 죄를 용서해 주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아바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며 죽음과 바꾸어 그러한 도리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구원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사람들은 무엇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해서 살아야 할 것이냐?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을 목표로 살아야 합니다.
종의 몸이라고 하는 것도 과분한 말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의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하기 위한 길을 가야 됩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도 그 길을 갔는데 아버지를 죽인 죄인인 우리는 백 번 천 번이라도 이 길을 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죽은 나를 살리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무덤길을 가셨으니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리며 가야 합니다.
이 길은 타락의 후손들에게는 운명길입니다. (선집 13권 50-54쪽)
출쳐: http://cafe.daum.net/rainbowKINGDOM/HcXx/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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