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비를 집성하다
이진호
고희를 넘겨 팔순에 이르렀는데 산목 함동선 시인은 팔팔하다. 교직을 퇴임한 후부터 줄곧 우이동에서 날마다 명륜동 작업실로 오가는 걸 보면 그 정열이 어디서 그리도 발산되는지 부럽다.
산목 시인은 그리 크지도 않고 그리 작지도 않아 보이는 이로 하여 우리나라 표준에 이르러 쉽게 접근하는가 보다.
산목 시인은 전형적인 교수요, 시인이요, 선비의 모습을 갖추고 언제고 쉽게 우리와 만난다.
우리가 산목을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그의 건강이나 열정보다 그의 독보적인 시세계이다.
‘디지털 시대에 살면서도 아날로그식으로 느리게 살면서 가슴에서 머리로 가는 긴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는 최근에 발간된 그의 시집 밤섬의 숲 책머리에 피력한 대로 그는 서둘지 않고 약삭빠르지 않고 덤벙대지 않는 그의 시의 광맥을 서서히 캐내어 오고 있는 아주 비중이 큰 시백詩伯이다.
느리고 굵고 선명한 그의 걸음법은 내 삶의 근원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산목의 시는 마치 샛별과 같은 영원한 빛으로 발하고 있는 시심으로 오늘도 후학들에게 비추어 주고 있다. 내가 산목 시인을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15년 전 여름이다. 그전에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가끔 만나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지만 개인적인 접촉은 그때가 처음이다.
당시 산목 시인은 한국문학비韓國文學碑 제3집 발간에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바쁘지 않으면 가까운 곳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는 산목 시인 전화로 수유역 근처에서 만났다. 문학비 책자에 나의 작사로 된 새마을 노래 「좋아졌네」를 등재登梓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내 노래가 문학비에 실린다는 뜻밖의 사실에 놀랐다. 이런 일이라면 전화로 부탁해도 선뜻 응할 일인데 직접 만나서 요구하는 산목 시인의 정중한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후배인 나는 정말 몸둘 바를 몰랐었다. 더욱이 찻값까지 지불하면서 자료를 부탁한다고 악수를 청했다. 산목 시인은 서둘지 않는 여유로움과 호들갑스럽지 않는 침착함과 상대방을 배려하는 그 온유함까지 지닌 우리나라의 고유한 선비의 모습을 지니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 후 1993년 11월 30일 청한출판사에서 한국문학비 제3집이 출간되어 다음 해 이른 봄 산목 시인은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문학비를 수년간 답사한 끝에 한국문학비로 상재하게 된 것은 살아 있는 우리들뿐만 아니라 저승의 우리 외로운 혼백들과 천지의 심금을 가즈런히 두루 울리는 넌즛하고도 두드룩한 처사로 안다’ 고 미당 서정주 선생은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그렇다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 목전의 이익만 급급하는 나머지 이런 일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데 산목 시인은 굵은 정을 가지고 선비로서의 어렵고 힘든 일을 이루어 놓았다.
이는 우리 한국인의 복이요, 우리 문인들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제1집 한국문학비(1978), 제2집 한국문학비(1982)의 증보판으로 낸 제3집 한국문학비(1993)는 1948년 최초로 세운 상화尙火 이상화李相和 시비에서 최근에 세운 윤곤강 시비에 이르기까지 시비, 사비詞碑, 동요비 등의 현대문학비와 한글로 된 고전시비古典詩碑, 민요비民謠碑 등의 고전문학비를 한데 묶어 총 277기에 이르는 금석문의 집성은 금석문을 통한 한국문학의 형성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채록했다.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체계적인 금석문을 집대성한 것은 한국 최초가 아닌가 생각된다.
제2집 발간 이후에 세무사인 박응화 씨의 시비산책 그리운 마음 표적삼아(1987.6.10)가 문연사에서 출간되었고, 이어서 사진작가이자 시인인 김구림 씨의 한국문학비를 찾아서(1995.12.15)가 문학아카데미에서 출간되어 나왔다.
필자는 산목 시인의 영향을 받아 1995년 1월호부터 2005년 2월호까지 「한국문학비 순례」를 115회에 걸쳐 안도섭 시인이 발간하는 월간문학지 문학21지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산목 시인의 금석문 집성을 알게 모르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산목 시인은 시작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수십 년간을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하여 있는 문학비를 찾아다니며 소재를 밝히고, 촬영하고, 실측하고, 탁본하며 채록하였으니 그간의 어려움은 어떠했으며 한편 기쁨이 또한 어떠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산목 시인의 치열한 문학의식과 금서문 발굴 작업에 임한 열정이 해내고야 마는 집념으로 드디어 제3집 한국문학비(1993)를 완성한 것이리라.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바라는 마음으로 돌에 글을 새기는 것에 대한 이해와 돌을 대하면서 그 돌의 쉽게 변하지 않는 모습에 끌려 그 신비성과 그 석비石碑의 역사적 문헌적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면서 돌에 미친 선비였으리라. 자기가 추구한 목표를 향해 신들린 사람처럼 일해 간다는 것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산목 시인의 끈질긴 노력에 새삼 그의 집착과 애정과 열정에 고개가 숙여진다.
2007년 가을 한강 유람선상 예식장에서 문학평론가 이유식 교수 댁 혼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산목 시인과 이수화 시인과 자리를 함께하면서 시정詩情의 정담을 나눈 적이 있다. 필자는 산목 시인을 만나서 기뻤다. 부담 없는 편안한 자리가 되어서 우리는 꽤 오래도록 선상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때에도 산목 시인의 여유로움과 온유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산목 시인이 시작에 몰두한 노시인의 업적을 생각하여 이수화 시인은 명년도 한국글사랑문학상 수상 후보자로 추천하면 좋겠다는 언질을 필자에게 주었다. 그러나 산목 시인의 명예에 대한 생각이 어떨지 걱정이 되어 넌지시 말을 건넸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공연한 말을 꺼낸 게 아닌지 후회도 되었다. “어느 개인이 주는 상이 아니고 문학단체에서 주는 상인데 나로선 영광스럽지요.” 산목은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 주었다. 까탈스럽지 않은 그 여유로움과 넉넉함이 오늘 새삼 그를 돋보이게 했다. 드디어 심사위원회에서 수상자로 결정되어 2008년 제8회 글사랑문학상을 드리게 되었음을 우리 글사랑문학회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오늘도 산목 시인은 우이동에서 명륜동 작업실로 옮겨 시를 얘기하며 후학들을 만나고 있으리라. 그의 치열한 문학의식, 불타는 열정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온유함과 쉼 없는 노력에 의한 느림의 미학은 후학들에게 본보기로 전해지리라.
<아동문학가, 한국글사랑문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