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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참회
1. 사성제, 팔정도
2. 악-선-지선-삼매-혜
3. 참회와 계율의 관계
4. 기독교의 여정
5. 기독교와 불교의 여정
6. 의식과 무의식의 특성
7. 주관과 객관
8. 나----->너 죄의식, 죄책감
너----->너 분노, 억압
나----->나 자괴감, 괴리감
이상 세가지의 저장되는 원리와 삭제의 방법
9. 죽을때 체험 되어지는 동영상
10. 참회하고 나서의 꿈의 4가지 형태
11. 억압과 두려움만 사라지면 평화이다.
1. 사성제 팔정도
참회(회개)는 불교와 기독교의 일원상의 여정에서 맨 처음을 장식한다.
불교에는 사성제(四聖제)와 팔정도(八正道)가 있다.
사성제란
1.고통이 있다.
2고통의 원인이 있다
3.고통을 멸하였다.
4.고통을 멸하는 길이다.
위의 고통을 멸하는 길로서 팔정도가 있으며 팔정도의 맨 마지막 정정(正定, 바른 선정)을 자세히 풀어놓은 팔선정이 있다.
팔정도는
1.바른견해(正見)
2.바른생각(正思惟)
3.바른말(正語)
4.바른행동(正業)
5.바른생활(正命, 직업)
6.바른노력(正精進)
7.바른집중(正念, 주시)
8.바른선정(正定)
이다.
이중 바른견해란 사성제에 대한 바른 고찰이며, 이것을 요약하여 이야기한다면 바로 갈애(渴愛)의 해탈(解脫)이며 무아(無我)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바른생각, 말, 행동, 생활(직업)이 되기 위한 방편이 바로 계율(戒律)이다.
바른노력, 집중은 바로 바른선정(禪定, 사맛디, Samadhi, 삼매)을 위한 방편이다.
선정이라는 말은 팔리어로는 사마디 즉 삼매이다. 붓다 시절에는 삼매라고 불리어졌던 것이 한문으로 바뀌어 지면서 선정으로 되었다.
그리고 바른삼매를 통하여 혜(慧, 지혜)에 이른다.
그러므로 계, 정, 혜(계율, 선정, 지혜) 삼학(三學)이라고 한다.
헌데 이중 계율(戒律)은 참회(懺悔)로 대체될 수 있다.
즉 참, 정, 혜 삼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원각경이라는 경전에서
원각보살이 붓다에게 세상의 수많은 방편을 세 가지로 요약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때 붓다가 설하길 삼마발제, 선나, 사마타 세 가지를 공 굴리면 성불인데 이것이 안 되는 이는 참회가 부족한 것이니 삼칠일 즉 21일을 의심 없이 참회하라고 하신다.
삼마발제, 선나, 사마타는 모두 삼매(三昧)의 종류이다. 그 당시 질문을 던지던 이들은 모두 보살(아라한이라고 하며 붓다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공부가 많이 된 이들 이다.)이다. 즉 삼매가 되고 있는 이들 이다. 그러므로 삼매를 좀더 정진(精進)하면은 종래에 해탈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헌데 우리 일반인들처럼 삼매가 아니 되는 이들은 먼저 참회를 21일 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은 계율다음에 삼매를 하여도 좋을 것이며 참회하고서 삼매에 들 수 있다고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렇다면 계율과 참회는 어떠한 것을 하여도 그 다음에 삼매에 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계율과 참회의 목적은 “바른생각”이다.
누군가 “바른생각”을 한다면 말, 행동, 생활(직업)이 다 바를 것이다.
이유는 말, 행동, 생활 은 모두 생각하고 나서야 나온다.
즉 “바른생각”인 사람은 말도 행동도 생활도 모두 바르다.
허나 “삿된생각”인 자는 바로 “바른생각”으로 바뀌어 보라고 하여도 바뀌기가 쉽지 아니하다.
에고(개아個我)로 오랜 세월 살아온 우리들에게, 바로 “바른생각”이 되라고 하는 것은 쉽지가 아니하다.
그러므로 계율이라는 방편으로서 바른말, 바른행동, 바른생활을 하게 되면 생각도 바르게 될 것이다.
계율이란 지금부터 미래의 어느 날까지 잘 지켜나가다 보면 미래의 어느 날엔가 “바른생각”이 되는 것이요.
참회(회개)란 지금 이 시점에서 과거의 잘못 살아온 것들을 전부 뉘우치고는 바로 지금 “바른생각”이 되는 길이다.
삼매란
“바른생각”도 놓아버린 것이다.
팔삼매(팔선정)에는 일심(一心)의 네 가지 삼매가 있으며 그것마저 놓아버린 무심삼매(無心三昧)의 네 가지가 있다.
무심(無心), 무아상태는 본래마음만이 오롯이 드러난 상태이다.
왜 “바른생각”도 놓아야할까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유는 악(惡, 不善) - 선(善) - 지선(至善)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또는 "악(惡, 不善) - 선- 악에도 선에도 머무르지 아니 한다" 의 여정이다.
(그림)
선악법(善惡法)이란 사람들만이 아는 법이기 쉽다.
동물이 동물을 죽여서 먹는 것은 배고픔 때문이다.
동물이 동물의 영역을 침범하면 싸워서 내쫓게 되며, 상대가 도망갈 때는 쫓아가서 죽이지 아니하는 것이 대개의 경우다.
허나 사람은 왕왕 선악이라는 개념으로 죽인다. 유희로 죽이기도 한다.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도 죽이기도 한다.
“선악법”을 아는 우리들은 어찌 보면 동물보다 못하다고 종종 이야기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선(善)에는 대부분 조건이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상대는 우리를 사랑하지 아니 하였을 경우 그 사랑은 종종 미움으로 변한다.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천국에 가려는 보상심리가 있기도 하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게 하려는, 즉 에고(ego)를 충족시키려는 보상심리가 있기도 하다.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는 착한 이들은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은 못 견뎌 한다.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는 것은 선한 것이다. 허나 다른 이의 거짓말로 인하여 스스로 화를 참을 수 없고 나아가 상대를 해치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선일 것이다.
(조건 있는)선이란 늘 악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조건 있는 선”을 포기하고 지선(至善)으로 향한다.
또는 악에도 선에도 머무르지 아니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선악법의 구분 말고 어찌 살수 있을까?
도덕(道德)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도덕의 목적은 참 행복이지 싶다.
참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질서와 안전이 있지 않을까 싶다.
예로서
아이들이 장난감으로 집을 어지럽히고는 정리를 안했다고 하자.
엄마가 그 아이를 나쁜(악, 惡)아이로 규정하게 되면 일단 엄마 자신이 화가 나게 된다.
말이 되었건 행동이 되었건 종종 폭력적이 된다.
허나 그 아이가 질서를 어지럽힌 것이 된다면 아마도 타이르게 될 것이다.
집이 어지러우면 우리 모두가 불편할 것이요. 그것은 아이에게도 불편할 것이요.
나아가 아이가 사회에서 그러할 때에 아이에게도 불이익이 돌아올 것이라는 설명식으로 타이르게 될 것이다.
이 둘은 차이가 있다. 아이가 나쁜 행동 즉 악으로 규정이 되면 그 아이에게도 이미 선악 법으로 세상을 보는 눈과 마음이 형성이 된다.
위와 같을 때
그러하다면 악에서 선으로 가지 아니하고 바로 선악을 떠나면 되지 않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러한 방편들이 있기도 하다. 대개 삼매로 직접 들려하는 방법들은 선을 거치지 아니하고 선악을 바로 벗어나려는 방편들이기도 하다.
허나 이러한 것은 순서를 벗어난 것이어서 용이하지 아니할 듯 하다.
불교적으로 본다면 수많은 생을 무지(無知, 無明)에 의하여 업장(業障)을 지었다.
그러한 업장을 참회하여 닦지 아니하고 바로 선악에 머무르지 아니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러한 이들은 이치적으로 본다면 이미 전생에 참회를 하였다고 밖에 볼 수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회개(참회)는 필히 거쳐야 할 여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참정혜”에는 크게 세 가지 이치가 있다.
1. “참정혜”를 순서대로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셀 수 없는 오랜 세월의 생을 개아(個我, 에고)로 살아오며 수없는 업장을 쌓은 우리가 바로 삼매(본래마음)에 든다는 것은 쉽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참회로 먼저 큰 것들을 닦아야 할 것이다.
2. “참정혜”는 또한 세 가지를 같이 병행하여 닦아나가는 것이다.
서로 유기적이라는 이야기다.
누군가 참회가 온전히 되어서 무의식에 쌓인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으로 이미 대삼매(大三昧)이며 해탈(解脫)일 것이다.
허나 참회를 통하여 삼매가 이루어지고 혜가 드러나기 시작할 때에
더욱더 참회가 되면 더 삼매가 깊어지며 더 깊이 혜가 드러나는 그러한 유기적인 관계이다.
3. 위에서 의문이 드는 것이 그렇다면 참회하나만으로도 온전히 에고를 다 녹이면 결국에 본래마음이 다 드러날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든다.
참회 하나만으로는 너무도 불가(不可)한 세월이 걸릴 것이다.
또는 참회가 어느 정도 깊어지면 삼매는 절로 되어진다.
삼매로만 가려 하면은 너무도 불가한 많은 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러할 때 혜로써 넘어가며 그러할 때 삼매(Samadhi)가 빠른 세월 안에 더 깊어질 것이다.
기독교의 여정은 아래와 비슷할 듯 하다.
(그림)
1. 회개
2. 너희들 중 죄짓지 아니한 자 저 여인을 돌로 쳐라
3.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4.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5.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밀어라
6. 원수를 사랑하라
“수고로이 짐을 진자들이여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니.......”
에고에 의하여 만들어진 번뇌는 참으로 무거운 짐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수고로이 짐 진”이라 하셨을 것이다.
1.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있을 듯싶다.
1.천국이 가까웠으니 얼른들 회개하여야 한다.
2.회개하면은 우리의 마음이 천국에 가까워진다. 즉 수고로운 짐이 덜어진다.
2. 너희들 중 죄짓지 아니한 자 저 여인을 돌로 쳐라........
예수를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이 창녀인 사마리안 여인을 예수 앞에 데려 왔다고 들었다.
예수가 십계명대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한다면, 살인을 교사했다고 비방되어질 것이요.
살려주라고 한다면 십계명을 예수 스스로 어겼다고 하여 곤란한 입장에 처할 상황이었다.
즉 이리하여도 저리하여도 곤란한 지경에 처하실 위기였다.
그때 예수가 무언가를 땅에 쓰셨다고 한다. 무엇을 쓰셨는지는 성경에도 아니 나왔다고 들었다.
그리곤 곧바로 일어나서 “너희들 중 죄짓지 아니한 자 저 여인을 돌로 쳐라”고 하셨다.
자식을 소중히 사랑하는 많은 부모들은 자식이 사회적으로 잘못된 일을 하였을 때마저도 차마 “죄”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어서 종종 편지를 쓰기도 한다.
바리새인들 입장에서는 예수가 적군으로 보였을망정, 원수가 없는 예수 입장에선 바리새인들도 소중한 자식과 같지 않았을까?
차마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죄”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으셨기에 땅에다 글로 쓰지 아니 하였을까? 그러나 글로 써서만은 알아듣지 못하기에 하는 수 없이 일어나서 말로서 하신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여본다.
3.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조건 있는 선”은 번뇌로 저장이 된다. 스스로의 마음을 속일수가 없기 때문이다.
혹여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으면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아니할까?
아버지 하나님. 처음에 저는 천국을 가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허나 이제 온전히 하나님께서 제 안에 거(居)하시고 저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축복뿐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고 저에게 이러한 길을 보여주셔서 너무도 감사합니다.
만약 천국에 저의 자리가 있다면, 이제 저 대신 다른 이를 그곳에 보내주소서.
4.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아끼라(사랑하라)......
이웃을 내 몸과 같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비유가 아닌 “똑같이, 하나로서, 이꼬르=” 라는 이야기일 듯싶다.
붓다의 말씀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아무리 세상을 둘러보아도 나만큼 사랑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남들도 그와 같이 스스로를 사랑한다. 허니 우리가 우리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사랑받으려면 남들도 그와 같으니 그들에게도 그와 같이 사랑을 주어야 하지 않는가?”
5.왼뺨을 맞으면 오른뺨마저 내밀라.
참으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한다면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밀 수 있을 듯싶다. 그러나 그러하지 못할 때 참으로 이웃을 “나”처럼 여기는지 한번 의심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러한 경지의 사랑은 에고(개아)를 벗어나고 있는 중인 것이다.
동물은 물론 사람이라도 위와 같이 할 수 있는 경우는 오로지 상대를 너무도 사랑할 때뿐이다. “조건 없는 사랑”일 때뿐이다. 우리가 흔히 “희생” 또는 “순복”이라고 부르는 단어일 때뿐이다. 허나 “희생”이라는 단어는 옆에서 그러한 상황을 지켜본 사람이 쓰는 “단어”일 뿐이다. 어머니가 극한 상황에서 자식을 위하여 생명을 던질 때에 스스로 “희생”이라고 여기지 아니 할 것이다.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조건 없는 사랑)에 생명까지도 다 내어 던질 수 있을 뿐인 것이지 희생이라고 여긴다면 목숨을 두려워하는 개아는 그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순복도 그러하다.
6.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람으로서 사랑할 수 있을까?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이러한 말씀을 하였다고 들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잔을 제게서 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여 주소서. 그러나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어쩌면 너무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셨다.
우리에게 마지막에 개아를 예수처럼 버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내안에 거하시게 하는 모범을 보이셨을 것도 같다.
허나 곧 말씀하셨다.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이러하시고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박히셔서 십자가 아래에 자기를 못 박음질한 로마 병사들을 보며 말씀하신다.
“아버지 하나님. 저들은 저들이 한 짓을 모르나이다. 저들을 용서 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한 짓을 모르나이다............
저들은 철이 없습니다..................
예수에게는 아무런 분노도 동요도 없었던 것이다.
“저들을 용서 하소서” 예수님은 이미 용서고 무엇이고도 없으셨다.
다만 아버지 하나님이 저들을 벌 하실 것이 두려워서 용서하라고 하신다.
참으로 “원수를 사랑” 하신 대목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로마병사들이 원수이다. 허나 예수에게는 원수자체가 없으셨던 것이다.
그 로마인들이 바로 예수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는 그들을 너무도 “사랑하신”것이다.
철없는 아이가 실수로 자기를 장애인이나 죽게까지 하였을 때 우리는 과연 담담할 수 있을까? 사랑하지 아니 하고는 힘이 들것이다.
위에서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여 생명을 던지는 “조건 없는 사랑”을 이야기 하였다.
차이점은 그 어머니는 자식을 위하여서만 “조건 없는 사랑”이었다는 이야기며 예수는 모든 인류 나아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조건 없는 사랑” 즉 “절대사랑”이었다는 것이다.
절대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사랑받는 대상이 있다면 불가한 일이다.
사실은 예수 자신이 “사랑자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조건적으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사랑하지 아니 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사랑자체였기 때문에 완전자였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사랑밖에는 없으셨을 것이며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게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을 것이다.
“사랑자체”이신 분은 어느 곳에 살고 있을까? 그분 계신 곳은 어디가 되었건 그곳이 천국일 것이다. 그분이 설사 지옥에 계셨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지옥이 그분에겐 천국이 될 것이다. 사랑자체인 사람에게는 세상의 장소가 중요치 아니 하다. 그 자신이 이미 전체요 천국이요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누군가 물어 보았을지도 모른다.
"예수시여 어느 정도 되면 천국에 갈수 있을까요?“
또는
“예수시여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원수를 사랑할 정도면 사랑자체이다. 사랑자체이면 어느 곳이건 이미 천국이다. 즉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면 천국에 들 수 있다”고 말하셨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예수는 사랑자체였기 때문에 “전체자”였기 때문에, 개아가 아니었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으며 우리에게 말로가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친히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사하여주기 위하여 “대속”하신 것이 맞을 듯 하다.
우리도 예수를 쫓아 예수가 하신데 까지 즉 “원수를 사랑하라”의 경지가 된다면 마음속에 아무런 번뇌도, 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아가 종종 사랑을 위하여 개아를 포기하는 경우를 우리는 본다.
어머니가 자식을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맞는다든지 하는 경우이다.
허나 예수는 한사람 몇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서도 아니요. 인류 전체를 위하여 몸을 던졌고, 그것도 우리가 보기에 원수들에게 던져 주었다. 이것은 개아로서는 불가한 일이다.
그분은 “전체자”였던 것이다.
우리가 일원상의 여정을 회개로부터 시작하지 아니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또는 원수를 사랑하라.........등을 먼저 할 수 있을까?
아마도 힘이 들것이다.
위의 회개로부터 시작한다면 아마도 하나하나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의 차에 따라서 시간의 차가 날 뿐일 것이다.
회개한 이는, “나 역시 그러하게 죄로 살아왔는데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로 자연히 옮겨간다.
그러나 “조건 있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닐 것이다.
종종 어떤 이들은 일주일동안 번뇌가 쌓인 것을 털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무서우시기도 하여서 조건 있는 회개를 하기도 한다.
엎드려서 두 손 모아 기도 한다고 하나님께서 그 마음 모르실리가 만무한 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기도한다.
어떤 이들은 이루어지며 어떤 이들은 아니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내안에 거하셔셔 모든 행사를 그분이 하시고 또한 그 결과도 하나님께 돌릴 수만 있다면 그 기도는 이루어질 것이다.
허나 빌 기는 하나님께 빌었으나, 모든 행사는 하나님께서 하시고 그 결과의 “과실”은 자기가 가지려하는 개아적 또는 이기적 마음이라면 그 기도는 이루어지기가 어려울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의 여정
기독교 하나님: 아담 -(자유의지) - 선악과(善惡果) - 원죄(原罪)
불교 무아 : 생각(몸) -의지적 힘 - 선악업(善惡業) - 고(苦, 괴로움), 번뇌
불교는 물론 생각 전에 무명(無明)에 의하여 행(行)이 생기고.......등의 앞선 이야기가 별도로 있다.
기독교식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흙덩이인 아담을 빚으셨다.
그리고는 숨(자유의지, 생각)을 불어 넣어주셨다.
이미 숨을 불어 넣어주신 것이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신 것과 같다.
그리고는 에덴동산에서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다.
다만 선악과만은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
즉 에덴동산은 천국과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허나 사탄이 뱀으로 변하여서 이브를 꼬였다.
“저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니까 먹지 말라고 하신거야”
그 꼬임에 선악과(善惡果)를 먹게 되고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그때부터 원죄(原罪)가 생긴 것이다.
누군가 물어왔다.
1.하나님께서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므로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을걸 아셨을 터인데 저러하게 선악과를 만드셨으니 안 좋은 하나님이다.
2.따 먹을걸 미리 몰랐다면 전지전능하지 아니하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과 같은 모습으로 만드셨다고 한다.
그 모습이란 겉모양일 수도 있겠지만 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이 흙덩이에 숨을 불어 넣어주실 때에는 이미 당신처럼 만들고 싶으셨을 것이고
움직이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움직이지 아니하는 흙덩이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움직인다는 것은 정보이다. 정보는 생각의 기본단위이다.
무엇이 되었건 움직이는 것은 생각이 있는 것이다. 생각은 자유의지이다.
이미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을 것도 아셨으리라 추측이 된다.
허나 어쩔 수가 없으셨던 것은 아닐까?
움직여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이 그것만은 자유의지로 따먹지 아니하길 바라셨고, 하는 수 없이 따 먹었을 때에도 이제 자유의지로 선악을 알아 버렸으니 그 원죄의 고통을 받아보고는 다시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하여서 돌아오라는 말씀은 아니었을까?
돌아온 탕아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자유의지로 “선악 법”을 택하면 금수보다 못 할 수도 있으며
다시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택하면 이제 신성에 들 수 있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이야기 해보겠다.
붓다의 옛길이라는 책에 보면
제자가 붓다에게 업(業)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
“업이란 의지적 힘이다”라고 붓다가 답하신다.
의지적 힘이란 자유의지와 같은 것이다.
모든 의지를 내서 행하는 것 즉 유위(有爲)행은 모두 “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현은 모두 무위(無爲)로 법을 삼는다는 금강경 내용과 배치되는 것이 유위이다.
즉 의지를 내는 것은 “개아(個我)” 라는 이야기다.
개아가 사라진 이는 즉 무아(無我)인 이는 함이 없다는 이야기다.
행위자 없는 행위라는 이야기이며 “흐름에든 자”라는 이야기 일 것이다.
위의 “의지적 힘이 업이다”라는 말은 애초에 무지(무지, 무명無明)에 의하여 개아가 형성된 과정과 연관되어져야 한다.
즉 개아가 자유의지를 부리면 업이라는 이야기다.
개아가 사라지면은 즉 무위의 행이 되면, 행위자 없는 행위가 되면 업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개아가 행위의 주체가 아니며 온전히 하나님이 행사하는 행위가 되면 업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또는 불성이 행하는 행위가 되면 업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자유의지(自由意志)라는 단어 자체가 그러하다. 전체자가 행하는 뜻인 것이다.
“스스로 말미암은 이” 즉 원인도 결과도 없이 “전체인 이”가 된다.
개아가 행사하는 의지적 행위는 모두 선악 법에 기초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는 한 괴로움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것이 또한 번뇌이기도 하다.
붓다는 또한 업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셨다.
생각 업 - 1.의업(意業)- 탐(貪),진(嗔),치(癡)
생각한 후에 짓는 업 - 2.신업(身業) 3.구업(口業)
즉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다.
붓다는 생각자체가 “업”이라고 규정하신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개아가 하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즉 위에서 보듯이 개아=생각업=탐진치 이다. 탐진치로 짓는 생각은 모두 업(業)이라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또한 불교에서는 선업(善業)도 업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유는 앞서서 이야기 하였듯이 “조건 있는 선”이란 늘 언제든지 악으로 오락가락할 수 있는 선이기 때문이다. 또는 “조건 있는 선”이란 위에서 보듯이 무언가 탐을 바라고(보상을 바라고) 행동한 선(善)이라는 것이다.
허나 일단은 악에서 선으로 먼저 가야한다. 그래야 악도 선도 떠나서 지선(至善)이 될 수가 있다.
악한 이가 선악을 모두 버리고 지선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듯 하나 그러하기가 불가(不可)하다.
어느 종교 어느 마음공부를 막론하고 대다수가 탐진치와 두려움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탐진치를 흔히 불교의 전유물로 보는 이유는 단지 붓다가 탐진치를 강조 하시고 또한 탐진치로부터 벗어남이 해탈이라고 짤막하면서도 강한 메시지를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종교와 마음공부의 위대한 분들로부터의 이러한 말씀 덕분으로
우리 인류는 현재 치(어리석음, 교만, 자만, 아만 등등)를 하든 안하든 그것은 번뇌를 쌓으므로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성냄)을 하 든 안하든, 그것은 갈등을 쌓게 하며 나쁜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으며, 그것을 아니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여기까지가 현주소 이다.
탐이 번뇌를 쌓게 하는 것인지를 대다수의 우리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은, 아마도 아직 숙제인 듯하다.
신에게 순복하거나, 또는 마음공부로 참나가 되고자 하는 이들 중 어떠한 소수는
지금 갖고 있는 탐을 (또는 진과 치마저도) 다 남겨 놓고서도, 천국에 가거나 또는 참나가 되고자 하는 지도 모른다.
마음에서 그것을 다 빼어내라고 모든 종교가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남겨놓고서도 참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아마도 있지 아니할 듯 하다.
깨달으려고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자.
1. 생사해탈
2. 온전한 평화
아마도 위의 대부분 포함될 것이다.
온전한 평화란 참 행복을 이야기 하는 것이기도 하다.
번뇌가 사라지면 온전한 평화일 것이다.
이것에 찬성하지 아니 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다.
허나 “온전한”이란 말이 의미하듯이 상대적 행복이 아니고 절대적 행복은 번뇌의 소멸이 아닐까?
즉 재물이 되었건 명예가 되었건, 번뇌가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평화가 아닐 것이다.
허나 마음에 번뇌가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온전한 평화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하다면 우리는 번뇌의 “원인”만 알면 이제 번뇌를 없앨 수 있다.
번뇌의 원인이 무엇일까?
탐진치 와 생노병사를 떠나서 번뇌의 원인이 따로 있을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아마도 다른 번뇌의 원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탐진치가 번뇌의 원인이었으며, 그러한 탐진치를 부리는 것이 바로 “개아”인 것이다.
즉 번뇌의 제1원인은 “개아”이고 제2원인은 “탐진치”인 것이다.
이것을 떠나서 번뇌라고는 있을 수가 없다.
탐진치를 마음에서 빼어내고 개아마저 다 빼어내면 그러므로 저절로 온전한 평화가 될뿐더러 생사해탈까지 이루어지는 것이다.
탐진치 거의 빼어냈을 때 마지막 까지 남는 것이 전체가 되고자 하는 탐심이다. 또는 개아의 이럴까 저럴까 하는 모습이 자나 깨나 24시간 동안 조견이 된다. 미세한 그 모습마저 커다란 번뇌로 다가 오기 때문에 마지막에 결국 개아를 소멸하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할 때 “전체”가 된다. 자나 깨나 “전체”가 된다.
그러하므로 생사해탈이 동시적으로 되게 된다.
누군가가 번뇌의 원인인 “개아, 탐진치”를 남겨 놓고서 2차적인 수행방법으로 번뇌를 사라지게 한다면 그것은 일정 분 효과가 있을 것이다.
허나 계속 번뇌를 짓고 쌓으면서 없애는 악순환이 될 것이다.
일심이나 무심공부를 먼저 하여도 잘 아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에 탐진치로 인하여 쌓여진 번뇌를 먼저 참회건 다른 무슨 방법으로 일단 씻어내고, 이제부터 탐진치 아니하며 2차적인 수행방법으로 닦아 나가야 온전한 평화일 것이다.
실은 탐진치를 마음에서 빼어내 간다면 2차적인 수행방법이 의미가 없어진다.
저절로 일심 무심 등등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몸과 마음이 나가 아니다”라는 길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별도의 수행이 필요 없이 마음에서 저절로 번뇌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어려울 때 탐진치를 잘 다스리고 종래에 마음에서 빼어내어 간다면 시간이 필요할 뿐 저절로 번뇌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개아”가 “나”가 아니라고만 하면은 “본래나”이다.
라마나 마하리쉬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다고 들었다.
즉 “참나”가 아니라는 착각만 벗으면 된다..........고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전자는 무아 쪽에 치중한 이야기요.
후자는 참나 쪽에 치중한 이야기가 되는 듯한 뉘앙스이다.
다 같은 길이다.
헌데 혹여 소수의 우리들은
“이야, 무척 쉽구나! 수행 필요 없이 저러하게 착각만 벗으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하다. 쉽다면 무척 쉽다.
허나 마하리쉬 이야기는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닐 듯싶다.
참나가 아니라는 착각을 벗기 위하여 탐진치를 빼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마하리쉬가 “에고의 완전한 소멸”을 이야기 하였다고 들었다.
그것은 바로 탐진치의 소멸과 또한 무아를 이야기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탐진치를 빼어내는 노력 없이 “착각만 벗으면 돼, 착각만 벗으면 돼!” 한다면 그러한 노력은 아무리 긴 시간을 지난다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게 될 것이다.
허나 탐진치를 빼어내면서 “착각만 벗으면 돼” 한다면 그러한 공부는 긴 시간을 요하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허나 누군가 착각이 아니고 진지하게 “몸과 마음이 나가 아니다”라고 여긴다면 그는 즉각적으로 탐진치를 놓아 버리게 된다. 이러한 경우는 예외이다.
붓다는 생각이 “업”이라고 규정하고서는 생각을 버리고 또 버리고........계속 버리라고 하였다.
마하리쉬는 “에고의 소멸”이라고 쉬이 와 닿게 이야기 하였다.
언 듯 보기에는 “생각을 전부 사라지게” 하는 것 보다는 “에고의 소멸”이 쉬울 듯 하다.
허나 “에고가 온전히 소멸하였다는 것”은 “개아가 사라졌다는 것”이며 또한 “생각이 온전히 휴식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같은 이야기이나, 아마도 마하리쉬는 우리가 공부를 너무 어렵게 여기지 아니하게끔, 처음부터 포기 하지 아니하게끔 이야기 한 것일 수도 있다.
흔히 불교에서 말하는 제6식이 바로 에고일 것이며, 에고의 남김 없는 소멸은 이미 8식(무의식)이 소멸되었다는 이야기가 성립이 된다.
마하리쉬도 종래에 “마음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들었다.
결국 “마음의 죽음”이 “에고의 소멸”인 것이다.
전체의 이야기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본래마음-무아-무심-일심-선-악
본래마음이 되기 위하여 무아가 되어야 하며, 그러하기 위하여 무심이 되어야하며, 그러하기 위하여 일심이 우선 되어야 하며, 그러하기 위하여서는 선(善)하게 되어야 한다.
무아는 무심이요 무심은 무아이지만, 무심의 깊이가 다르며, 무심이 되었다가 아니 되었다가 하는 이유가 온전히 무아가 아닌 이유이기 때문에, 순서가 다르게 놓여진다.
선에서 일심으로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은
우리의 “선”이라는 것은 “조건이 있는 선” 이기 때문이다.
이러하게 “선”이라는 것은 “악”과 서로 조건적으로 오가는 또는 의존적으로 기대어 서 있기 때문에, 둘 다를 넘어서서 지선(至善), 즉 “조건 없는 선”으로 향하는 길이 “일심” 나아가 “무심”인 것이다.
위의 것을 다른 방법으로 풀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본래마음(무아) -무심-일심-선-악
개아로서의 “무아”는 온전한 본래마음이자 온전한 절대유(絶對有) 이기 때문이다.
말로 설명하기가 곤란하여서 본래마음-무아 식으로 나열 하였지만은 이러하게 되었을 때는 본래마음이라는 것이 마치 실체로서, 마음과 따로 있는 무엇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다.
허나 본래마음이라는 것은 그저 마음에서 개아심이 사라지면은 “본래의 마음”이므로 “무아=본래마음 또는 절대유”로 보는 것이 조금 더 타당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본래마음 전까지 즉 악에서 무아 전까지에 걸쳐서 모든 “탐진치”가 있다고 여기면 되겠다.
위에서 “선”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대다수의 종교와 마음공부에는 “계율”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특정 종교의 계율을 모르더라도, 그 계율들을 대충 틀리지 아니하게 떠 올릴 수 있다.
대다수의 계율은 “선”하기 위한 또는 탐진치 하지 아니 하기 위한 보편적인 지침이기 때문이다.
한번 계율을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자.
1.거짓말을 하지 말자.
거짓말을 하면은 번뇌가 생길 것이다.
책 앞머리에서 “나는 남으로부터 당하고 싶지 아니한데, 남에게 하면은 죄의식 내지 죄책감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남으로부터 거짓말을 당하면 화가 나듯이, 나 역시 남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면 죄의식이 생기며, 이것이 바로 갈등이며, 번뇌인 것이다.
탐진치 중 대체로 “치”의 문제이기 쉽다.
그리고 “입”으로 짓는 죄를 짓지 아니하여 “선”으로 가자는 것이다.
2.살생을 하지 말자.
1번과 같은 이치로, 번뇌가 생길 것이다. 또한 탐진치 중 “진”의 문제이기도 하다.
또는 살생을 한 이유가 “탐”에 있는 경우도 왕왕이다.
그리고 “몸”으로 죄를 짓지 아니하여 “선”으로 가자는 것이다.
3.도둑질 하지 말자.
갈등이 생길 것이며, 이러한 갈등이 바로 번뇌이다. 또한 탐진치 중 “탐”의 문제이며, 탐 중에서도 “재물”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몸”으로 죄를 짓지 아니하여 “선”으로 가자는 것이다.
4.간음하지 말자.
약속된 이성이 아닌, 다른 이성을 탐하였을 때, 갈등 즉 번뇌가 생길 것이다.
또한 탐 중에서도 “성욕”에 관한 “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죄를 짓지 아니하고 “선”으로 가자는 것이다.
또한 “몸”으로 죄를 짓지 아니하고 “선”으로 가자는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보편적으로 번뇌를 일으키게 되는 것 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고서, 그것을 하지 아니하게 되는 “지침”을 만들어 보면 그것이 바로 “계율”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한 계율들은 대다수가 “탐진치”의 내용 안에 속할 것이다.
또한 “신구의(身口意, 몸 입 마음)”로 짓는 것에 포함 될 것이다.
사실 마음이 바르면(선하면)은 몸으로 하는 행동도, 말씨도 바르게 된다.
그러할 때 갈등(번뇌)은 대부분 없게 된다.
허나 마음이 선하지 아니할 때, 계율을 잘 지킴으로써 “바른생각”이 되게끔 하는 것이다.
마음을 “선”하게 하는 데는 계율 외에도 “회개, 참회”가 있다.
그러므로 계율과 참회라는 것은 마음을 “선”하게 하는 것이며, 선하게 한다는 것은 마음속의 악마와 천사와의 싸움에서 “천사”가 이기기 시작했다는 말이 되며, 그러할 때 둘의 싸움인 갈등이 점점 옅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며, 즉 번뇌가 사라지기 시작하여서 평화가 깃들기 시작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허나 “선”이라는 것이 “조건 있는 선”인한 여전히 “악”이란 것에 기대어 있게 된다.
이것을 뛰어 넘는 것은 “조건 없는 선”으로 가는 것이다. 그러할 때 온전한 평화이다.
위의 여정은 악을 지나서 선으로 가서, 선도 지나서, 둘 다에 머무르지 아니하여 본디의 본성이 온전히 드러남을 말하는 것이다.
원수도 사랑할 수 있을 정도의 “조건 없는 선”이 되면 이미 “전체”요 “온전한 평화”가 된다고 하더라도, 머리로 이해하는 “개아”로서는 그러하게 되기가 힘이 들다.
그러므로 본디의 참나의 상태가 자주 되어 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삼매”이다.
그리고 종래에는 “개아”로서는 “무아”가 되어야 만이 모든 “악”은 온전히 소멸이 되며, 번뇌의 씨앗은 모두 소멸된 것이다. 이것이 “온전한 에고의 소멸”이다.
또는 빼어낼 것을 모두 마음에서 남김없이 빼어낸 것이며, 이것이 바로 본래마음이다.
돌아와서 불교의 여정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생각 - 의지적 힘 - 선악 업 - 괴로움, 번뇌
위의 모든 것은 하나의 유기적 관계이다.
생각 = 의지적 힘 = 선악 업 = 괴로움 이라는 이야기 이다.
생각이 조금 더 외향적이 된 것이 의지적 힘이요
의지적 힘이 조금 더 외향적으로 나타난 것이 선악의 행동이요.
그것의 결과가 괴로움인 것이다.
“생각이 나다”라고 여기면 위의 흐름은 일사천리로 벌어지는 것이다.
“생각과 몸이 나”라고 여기면
1. 개아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벌어진다.
사람이 아니고 벌레라고 하여도, 누군가 죽이는데 “죽이세요”하며 가만히 있지 아니한다.
2. 그러므로 개아를 보호하려고 한다.
3. 개아를 유지하려 한다.
4. 확장하려 한다.
5. 탐(욕망)하게 된다.
6. 진(성냄)하게 된다. 서로 간에 탐을 하니 성냄은 필경 생기게 된다.
7. 치(어리석음)하게 된다. 탐과 성냄에 의하여 교만, 자만, 아만 등등의 어리석음이 생긴다.
8. 이러한 결과로서 번뇌, 괴로움이 생긴다.
탐이란 재물, 명예, 즐거움, 이성, 취미, 목숨 등등만이 아니다.
“다른 이를 내식으로 바꾸려는 것은 탐 중에서도 큰 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이를 내식으로 바꾸려고 한다.
허나 아무도 내식으로 바뀌어 지진 아니한다.
예로서 후배가 어느 날 찾아와서는, 동거녀가 자기 말을 아니 듣는다며, 자기 말을 듣게 하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그녀도 그대에게 바뀌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있는가?”
“네”
“그대가 그녀에게 바뀌라는 것과 그녀가 그대에게 바뀌라는 것을 한번 이야기 해보시게”
듣고 보니 그녀가 그에게 바뀌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좀더 쉬운 것이었고
그가 그녀에게 바뀌라고 하는 것은 좀더 어려운 것들이었다.
다시 한번 답을 달라고 하기에
“폭력을 써봐”라고 하였다.
물론 후배는 그 방법은 아니 된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러하다. 폭력은 몸의 행동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상대의 마음을 오히려 증오로 변하게 할 것이다.
그 방법 외에 다른 것은 이제 하나밖에 없다고 하자
그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였다.
“자네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다 바뀌어줘 봐. 그러면 어느 날쯤 그녀도 자네가 원하는 식으로 바뀌어져 있을 것이네. 허나 자네가 100%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녀 역시 100% 바뀔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아니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네.”
그 후배는 그러하게 하기는 힘이 들 듯 하다고 하였다.
어쩌면 이것이 대다수 우리의 현주소이다.
“나는 바뀔 수 없지만 너는 바뀌어야 한다.”라는 것 말이다.
후배가 자리를 일어날 즈음 넌지시 한마디 더 일렀다.
“아마도 자네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다 바뀌고 나면은, 더 이상 그녀에게 자네 식으로 바뀌라고 이야기 안하게 될 수도 있다네.”
신이 오셔서 강제로 우리에게 바뀌라고 하여도 바뀌기 싫어하는 것이 우리이다.
신의 은총과 사랑에 의하여 감동을 받고 스스로 바뀌어 지려고 할 때만이 바뀔 수 있을 뿐이다.
누군가 강제적으로 바뀌라고 하는 것은 대다수의 우리는 받아 드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우리는 서로 간에 그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동으로 말로 폭력이 생겨지는 것이다.
번뇌를 닦는 방법으로서 돈수(頓修)와 점수(漸修)가 있게 된다.
즉 누군가가 바로 무아에 대한 “바른견해”를 가지고서 “생각과 몸이 내가 아니다”로 갈수가 있다면 번뇌에 이르기까지에 벌어진 여러 절차를 내버려두고도 본성(本性)이 드러날 수가 있다.
허나 이 길은 그리 쉬운 길은 아니며 또는 이러한 길에 들어설 수가 있다는 것은 이미 여러 생(生)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닦아왔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다.
다른 길은 점수이다. 점진적으로 닦아나가는 방법이다.
현재에 결과물로서 쌓인 번뇌가 있으며 그 번뇌는 어리석음이 야기한, 성냄에 의하여 쌓였으므로 그것부터 참회로 닦아서 성냄과 어리석음을 어느 정도 소멸하고, 성냄의 원인이 탐이므로 그 탐을 닦고서, 그것의 원인이 개아소멸에 대한 두려움이니 그것을 벗어나는 길로 가는 것이다.
현재에 누구나 번뇌가 있다.
이러한 번뇌는 과거번뇌와 미래번뇌이다.
과거번뇌는 살아오며 실체적으로 쌓인 번뇌이다.
미래번뇌는 아직 오지 아니한 비실체적인 것에 대한 번뇌이며 주된 것이 “근심과 바램”이다.
근심걱정 바램이란 개아소멸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보다 근원적인 것이기에
나중에 하여야 할 문제이다.
그러므로 과거번뇌 먼저 사라지게 하고는 그 다음에 미래번뇌를 닦게 된다.
의식과 무의식
(그림)
앞에 그림은 공심을 나타낸 것이다. 뒤에 그림은 공심의 표현인 의식과 무의식이다.
의식(불교에서는 제6식)이 있다.
잠재의식(불교에서는 제7식인 말라식)이 있다.
무의식(불교에서는 제8식인 아뢰야식)이 있다.
여기서는 의식과 무의식을 이야기 해본다.
무의식이라는 것은 현대용어를 차용한 것이다. 의식이 다 끊어진 삼매의 상태도 “무의식”이다. 허나 삼매에서는 의식뿐이 아니고 아뢰야식까지도 다 끊어진 상태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삼매상태의 “무의식”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며, 아뢰야식을 무의식으로 쓰는 것일 뿐임을 밝혀둔다. 즉 프로이드 등이 연구했던 그러한 “무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생각(마음)이란 의식과 무의식의 통칭이다.
허나 우리는 흔히 의식만을 생각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림에서 보듯이 의식과 무의식은 단절되어있다.
의식으로서 무의식을 들여다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심리학자인 프로이드 등은 무의식을 알고자 하여서 무의식의 표현인 꿈을 연구하기도 하였다고 들었다.
우리는 한 낯, 꿈(또는 잠꼬대), 깊은 잠 의 세 가지 상태에서 서로 단절이 되어있다.
누군가는 잠이 들은 “꿈속”에서도 깨어있고
누군가는 꿈 없는 “깊은 잠” 속에서도 깨어있다.
이러한 것은 본성이 드러나면서 세 가지 상태가 연결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의식으로서는 세 가지 상태에서 단절이 아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특성을 한번 알아보자.
의식은 분별지(分別智) 이다.
무의식은 직관지(直觀智) 이다.
본성은 지혜지(智慧智) 또는 깨어있음이다.
무의식은 영상으로 찍는다.
의식은 그 영상위에다가 분별을 하여 주객으로 이러저러하게 분석을 한다.
예로서 경치를 볼 때에 무의식은 그 경치를 사진으로 찍어서 저장하며
의식은 그 경치가 아름답다 어떠하다 하며 분석을 하여서 그 그림위에다가 써놓는 것과 비슷하다.
혹여 본성을 지혜지 또는 순수각성, 순수의식이라고 하니까
아! 저것도 의식이 확장된 어떤 것인가 보다 하고 여길 수도 있다.
하나 그러하지 아니한 이유가 만약 생각으로 따져본다면, 순수의식이란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이다. 즉 무심상태이다.
허나 무심이라고 혼절이나 죽음이 아니며 모든 생각이 사라진 그 상태에 묘심(깨어있음)이 있다.
이것을 한번 다음과 같이 표현해보겠다.
생각의 기본단위는 정보다. 정보의 최소단위는 찧고 빻고 혹은 주관과 객관이다.
한 생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면 하나인 것 같지만
이미 한 생각이란 것 자체가 두개인 것이다.
마치 컴퓨터가 0 과 1 이라는 이진법이 최소 단위인 것과 같다.
순수의식이란 0 과 1의 두개가 사라진 것이다.
생각이 사라져본 체험이 없다면 한 생각이 남아있을 때가 마치 생각이 애초에 비롯된 제일처음으로 여기겠지만 사실은 그 한 생각(두개의 정보)이 사라지면은 그 한 생각이 비롯되기 전, 즉 애초의 순수의식이 드러난다. 자세한 내용은 책 말미의 삼매에서 다루기로 한다.
의식 : 응용프로그램, 비인과(非因果), 비운명(非運命)
무의식: 기본프로그램, 인과(因果), 운명(運命)
컴퓨터 식으로 한번 설명해본다.
컴퓨터를 만들 때 1+1=2, 2+3=5처럼 딱딱 맞아 떨어져야만 프로그램을 만들 수가 있다.
만약 1+1=2 도 됐다가 1+1=9 도 된다면 애초부터 프로그램을 짤 수가 없을 것이다.
즉 무의식은 기본프로그램이다. 불교에서 무의식(아뢰야식)은 저장식이라고 한다.
또는 함장식이라고도 하며 경향성이 저장되어있다고도 한다.
이러한 무의식은 곧이곧대로 저장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제 딱딱 맞아 떨어지게끔 기본프로그램을 만들었다면 그 위에다가 온라인게임을 만든다.
응용을 하여서 무엇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온라인게임에서는 선택을 자유의지로 마음대로 한다.
물론 아무리 선택이 마음대로지만은, 선택하는 이의 경향성(傾向性 또는 패턴 Pattern)은 대체적으로 선호(選好)하는 쪽으로만 선택을 하게 된다. 허나 어느 날 경향성을 바꾸어서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있다면 게임의 양상은 확 바뀌게 될 것이다.
무의식은 인과 프로그램이다.
원인과 결과가 딱 맞는다는 이야기다.
악한 일을 하였는데 선하게 보상 받는다면 일단 불공평하다고 여길 것이다.
허나 불공평을 넘어서서, 만약 이러하게 된다면 세상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가 없다.
위에서 기본프로그램이 존재 하려면 인과가 딱 맞아야만 가능해지는 기본조건을 이야기 한 것과 같다.
헌데 의식은 비인과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무슨 말인가?
중론에서 용수보살은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
“흙이라는 원인이 어떤 결과가 될 것인지를 알 수 있는가?”
물론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결과를 보고는 원인을 알 수 있는 경우이다.
즉 집을 보았을 때 “아! 이집은 흙으로 지어졌구나.”
즉 집의 원인이 흙이었음을 결과를 먼저 알고는 알게 된다.
도자기라는 결과물을 먼저 보고나서야 그것이 흙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즉 흙이 도공이라는 인연을 만나면 도자기라는 결과가 되는 것이요.
흙이 건축가라는 인연을 만나면 집이라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들은 이야기인데,
예전의 과학은 원인을 알면 필경 결과를 알 수 있다고 이야기 했다면
요사이는 원인을 알아도 결과를 알 수가 없다고도 이야기 한다고 한다.
즉 원인으로 결과를 알 수가 없으며 오히려 결과를 보서나서야 원인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또한 원인에 인연이 작용하여서 그 결과물이 다르게 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성립된다.
요약하면은 무의식은 인과적이요
의식은 자유의지의 선택에 따라서, 즉 인연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무의식은 운명론(運命論)적이다.
사주팔자는 대체로 맞는 것이다. 이유는 선악 업이 무의식이라는 칩(컴퓨터로 비유하여 본다면)에 저장되어있으며 그러한 경향성은 쉬이 바뀌지가 아니하기 때문에 그대로 인과응보를 받고 또한 보상을 받으며 살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운명론이 틀리는 것이라면
애초부터 이 현상이 존재할 수도 없거니와 또한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마음공부는 할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윤회를 믿는 이라면 마음공부 하여서 공부되었다고 하더라도 다음 생에는 악마로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윤회쪽 종교인이라면 이미 신의 나라에 갈수 있는 사람은 선행과 상관없이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가 성립이 된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닦지 아니 하여도 다음 생에는 훌륭한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성립이 되기 때문이다.
의식은 비운명론(非運命論) 적이다.
의식이 자유의지로 경향성을 바꾸거나 소멸시키면 운명도 바뀌는 것이다.
운명이 바뀌지 아니한다면 우리가 지금 마음공부를 할 의미도 없는 것이다.
애초에 마음공부가 될 분은 그러하게 왔을 것이요.
애초부터 삿되게 될 이는 그러하게 와서, 더 이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아니할 터인데 무슨 공부를 하겠는가?
참고로 붓다는 외도(外道)가 물어올 때에 운명도 아니요 비운명도 아니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운명과 비운명은 무의식과 의식으로서 현상(이세상과 저세상의 통칭)에만 존재할 뿐이다. 즉 색(色)에 한정된 이야기이며 이 세상의 바탕인 본성으로 이야기 한다면 그 둘을 다 떠나있는 것이다.
허나 붓다는 운명 비운명 뿐만이 아니고 운명과 비운명이 둘 다 맞느냐는 질문에도 아니라고 하셨고 나아가 운명과 비운명이 둘 다가 틀리냐는 질문에도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랬을까?
운명이나 비운명 하나가 맞느냐는 질문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현상은 둘 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허면 운명 비운명 둘 다 맞느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한 이유는 그 둘이 현상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래마음엔 원인도 결과도 없다. 그러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허면 운명 비운명 둘 다가 틀리냐는 질문도 아니라고 한 이유는 그 둘을 떠난 상태가 본래마음이긴 하지만 그것 역시 반쪽짜리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나중에 색즉시공 한 후에 공즉시색이 되면, 이 현상 즉 색(色)자체가 본래마음이기 때문이다(中道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책 말미의 반야심경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 될 것이다.
여하간 일단 요약하여 본다면 위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모든 생각이 끊어졌을 때에 본성(本性)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앞의 운명론이 맞는다고 한다면 이제 아무도 본성으로 향하지 아니할 것이요.
마찬가지로 비운명론이 맞는다고 하여도 위와 같기 때문이다.
들은 이야기로 예를 들어본다.
서산대사 제자 중엔 우리가 잘 아는 사명대사가 있었으며
또한 조금은 생소한데 영규(들은 이야기라 영규라는 이름이 맞는지는 확실치가 않다)대사라는 분도 있었다고 한다.
남쪽 지방 어느 곳인가를 서산대사가 지날 때 한 거지소년을 보았다고 한다.
“쯧쯧 안됐도다. 천상천하에 짝이 없는 거지신세구나”
아마도 그 거지소년의 관상이 죽을 때까지 거지신세였나 보다.
그러다 세월 지나 어느 날 황해도인가 서산대가가 지날 때 다시 그 거지 소년을 보았는데
천상천하에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서산대가 생각하길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어 소년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 보았다 한다.
소년 이르길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이 없을까 하는 차에 상여가 지나갔습니다. 쫓아 가보니 산소에다가 떡 등을 차리고는 절들을 하고는 다 물러 갔지요. 그래서 얼른 산소로 가서 돌아가신 분이야 이미 다 음복 했으니 괜찮으려니 하고는 떡을 들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그냥 먹으면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제사상을 보니 물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얼른 시냇가로 가서 나뭇잎에다가 물을 떠와서는 돌아가신 분 보고 드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떡을 먹었습니다.”
그 이야길 들은 서산대사께서
“너 가 그러하기에 이리 변하였구나. 수상(手相)보다는 관상이요. 관상보다는 몸상이요. 몸상보다는 심상(心相)이로다” 하였다 한다.
그런데 물 떠다 준 것 하나로 천상천하 거지에서 천상천하 존귀로 바뀔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보여 진다.
공자님 말씀에 “홀로 있을 때 부끄럽지 아니하게 하라”는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다.
“조건 있는 선”은 악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선업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즉 영구소년은 언 듯 보기에는 떡을 먹는 조건으로 물을 떠온 듯이 보이지만
그곳에는 영구소년과 죽은 이 밖에 없었다. 홀로 있을 때 얼마든지 그냥 떡을 먹을 수도 있었건만, 부끄럽지 아니하게 행하였으며 또한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하였을 듯 하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한번 한 것은, 오른손이 알게 왼손이 행한 만 번의 선행(善行)보다도 더 귀한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운명적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닦아나간다면 비운명적으로 된다.
즉 운명이 바뀐다는 것이다.
아래그림을 한번 보자
(그림)
위의 그림은 세상은 이러하게 이루어져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논리적(論理的)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논리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운명이 맞으면 비운명은 틀린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인과가 맞는 것이라면 비인과는 틀린 것이며
비인과가 맞는 것이라면 인과는 틀린 것이다.
허나 우리가 위에서 보았듯이
이세상은 어느 하나로는 이루어 질수 없으며 늘 둘 다가 있는 것이다.
상주(常住)란 불멸(不滅)로서 늘 있는 것이다.
단멸(斷滅)이란 한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이야기다
상주가 맞는다면 단멸은 틀린 것이다.
단멸이 맞는다면 상주는 틀린 것이다.
허나 본래의 마음은 상주불멸이며
몸은 한번 죽으면 다시 다른 몸으로 태어나더라도 이 몸의 모양은 다를 것이기에 단멸이다.
열역학 제1법칙은 다음과 같다.
“우주 내에서의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며 결코 새로 만들 수도(생겨날 수도) 없고 소멸될 수도 없다. 다만 형태만이 변할 뿐이다.”
위의 말을 논리적으로 살펴본다면 모순이 아닐까?
“생겨날 수도 소멸할 수도 없다”는 것은 불교로 말한다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헌데 뒤에 연이어 이야기 되는 “형태만 변할 뿐”이라는 이야기는 우리입장에서 볼 때에는 에너지는 형태가 변한 것인지 몰라도 육체는 멸(滅)하고 다른 형태로 생(生)한다는 것이다. 이 둘이 모순 같지 아니한가?
불생불멸과 생멸을 거듭하는 것은 분명 다른 것이다.
헌데 하나의 에너지가 저러한 두 가지 모습을 띄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불변이기 때문에 또는 불생불멸이기에 생멸을 거듭하지는 아니 한다. 다만 겉모습의 형태가 변하는 것이, 에너지 입장이 아니라 색(色)의 입장에서는 분명 생멸을 거듭하는 듯이 보일뿐이다.
즉 얼음 물 구름은 한번도 본질이 바뀐 적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옆에서 본 우리의 입장이지 얼음의 입장에서는 녹는 순간 죽는다고 여길 것이다. 물론 얼음이 마음이 있다는 가정아래서의 그저 비유일 뿐이다.
또한 에너지는 본성은 아니며 본성의 작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저 예로서 들어본 것이다.
이와 같이 본성은 불생불멸이면서도 겉의 모습은 즉 색의 모습은 형태를 바뀌어가면서 생주이멸(生住移滅) 또는 제법무상(諸法無常 현상의 모든 것은 항상 하지 아니하고 변한다)하는 모습을 띄우게 된다. 이 둘은 모순인 듯하지만 모순이 아니다.
과학이 밝힌 에너지의 모습도 그와 같지 아니한가?
즉 본성이 공(空)이며 겉모습이 색(色)인 것이다. 그 둘은 다른 것이 아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작게는 현상이 둘 다로 이루어져있으며 크게는 공과색이 둘 다로 이루어져있으나 실은 이 둘이라고 하는 것은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같지도 다르지도 아니하다는 말이 나온다.
요약한다면 우리는 불생불멸이라는 것을 떠올릴 때에 그것은 무엇인가 “고정불변(固定不變)”일 것이라고 여긴다. 허나 위에서 말하는 것은 “불생불멸”자체가 “변 한다”는 것이다.
즉 끝없이 변하는 것 자체가 불생불멸이라는 것이다.
본성과 겉모습은 다른 듯이 보인다. 하나 그것은 본디 둘이 아닌 하나이다.
그러하다면 무엇이 하나가 맞으면 다른 하나는 틀리다고 여기는 것일까?
바로 의식이다. 의식이란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개로 분리되어있다.
의식 자체가 반쪽짜리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쪽짜리의 짧은 견해를 짓게 되는 것이다.
기실 객관이라고 이야기 하긴 하였으나 참된 객관이 있긴 한 것일까?
만약 참된 객관이라면 전체여야 한다. 부분이면 아니 된다.
즉 상대적이면 아니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림)
그림2는 1과 둘이 있을 때만 객관이다.
그림 2가 3과 함께하면 이제 주관이 된다.
즉 객관이란 덜 주관적일뿐인 주관인 것이다.
위의 줄들은 전체가 아닌 모두 “부분”들이다. 모든 부분은 아무리 길다 하여도 절대일 수 없으며 상대적일뿐이다. 그러므로 주관과 객관은 현상에서의 쓰임일 뿐이다.
헌데 이러한 쓰임을 우리는 종종 신념화를 거쳐서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러할 때 단견(斷見)이 되며 시시비비가 벌어진다.
신념이나 주의가 사람보다 우선한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참 행복을 위한 쓰임이며 도구일 뿐이다.
즉 반쪽짜리 짧은 견해에 마음이 머무르지 아니 하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이다.
모든 견해를 버리면 아무것도 아니한다가 아니다.
양쪽 모두를 알고 버리면 시시비비(是是非非)가 없으며 아무생각 없이, 그 배경과 상황에 맞게끔 절로 어느 쪽이건 견해 없이 쓰여 지게 된다.
식당엘 간적이 있었다.
어항에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다.
“저 물고기들 여기서 평생을 갇혀 사니 참 불쌍하구나.” 하고 이야기 하자
어떤 이는 그러한 단견을 짓지 마시라고 이야기 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 물고기들이 지금 강에 살고 있다면 큰물고기들에게 아니 잡아먹히려고 도망 다니느라 더 힘이 들것이다”고 이야기 하였다.
삶에 어떠한 사건에 부딪힐 때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견해와 반대되는 견해에도 합당한 이치가 있는지 늘 살펴본다.
그러하다 보면 그 이면에 있는 이치가 와 닿을 때가 있다.
그것이 다 지혜가 된다. 그러하다 보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아니하여서
이 현상의 모든 것이 둘 다에 뜻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하게 이야기를 끌어온 참 이유는 주관과 객관을 버리자는 이야기다.
기실은 그 주관과 객관이라는 신념에 중간에 버티고 서있는 “나”를 버리자는 이야기다.
“개아”만 사라지면은 주관과 객관은 훌륭한 쓰임이 된다.
허나 개아가 있는 주관과 객관은 시시비비의 도구가 된다.
헌데 너무 오랜 세월을 “개아가 나다”라고 살아온 우리는 개아를 먼저 없애기가 용이하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주관과 객관을 먼저 끊는 것을 방편으로 삼는다.
그 주객이 다 사라지면은 삼매에 든다. 삼매란 본성이 드러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삼매에 오래 들다보면 그 길이 상락아정(常樂我淨)임을 스스로 알고는 개아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번뇌가 마음에 저장되는 이치와 그것을 삭제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특히 과거번뇌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이야기 해보자.
1. 나 ----------> 너
2. 너 ----------> 나
3. 나 ----------> 나
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겠다.
나 ------> 너 에게 잘못한 것은 “죄의식”과 “죄책감”으로 무의식에 저장된다.
죄의식이란 행동이나 말 등으로 잘못을 한 것이다.
죄책감이란 행동이나 말로는 아니 하였고 다만 마음속으로만 잘못을 한 것이다.
이러한 것이 무의식에 저장되는 구조는 다음과 같다.
“무의식은 잘못했다고 여기는데 의식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우길 때에 무의식에 즉시로 저장”이 된다. 즉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로 계합하지 아니하였을 때 저장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의식이 무의식에 저항 할 때에 무의식에 저장되는 것이다.
예로서 + 와 +를 곱하면 + 이다.
- 와 -를 곱해도 + 이다. 허나 -와 +를 곱하면 -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아가를 정당한 이유에 의하여 낙태를 한 경우에
대부분 정당한 이유들이 있으므로 잘못이 없다고 여기기도 한다.
헌데 무의식은, 의식이 정당하다고 우기는 이유와 상관없이 바로 죄의식으로 저장을 한다.
왜 그러할까?
정당한 이유라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식차원(에고의 차원 또는 개아의 차원)에서 보는 순전히 “주관적”인 이유일 뿐이다.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쉽게 알게 된다.
즉 “누군가 나를 낙태시켰다면?” 또는 “누군가 나를 죽인다면?”
누군가 나를 죽인다면 싫다는 사람일 때에, 그 사람이 누군가를 죽인다면 그것은 죄의식으로 남을 것이 자명하다.
즉 의식이 어떠한 잘못을 행할 때에 무의식이 그것이 잘못인지 아닌지를 저장하는 기준은 왕왕 의식의 기준과 같지 아니하다.
즉 죄의식이 저장되는 기준 또는 죄를 지었는가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나는 남으로부터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였을 때, 무의식은 즉각적으로 잘못하였다고 저장 한다” 이다.
즉 의식이 백과사전을 뒤져보고서 “아! 잘못 이구나”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의식차원에서 잘못인지 아닌지를 분별하여서 그 기준에 따라서 저장되는 것도 아니다.
계율이나 계명 등은 보편적인 것이다.
즉 누구나 당하고 싶지 아니한 일들을 하지 말라고 정해놓은 것이다.
허나 그 외의 죄의식과 죄책감이란 무의식의 경향성에 따라서 조금씩 모습을 달리한다.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낙태한 어머니들 경우 정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스스로 여기기에는),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왜 자꾸 꿈 등에서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는가? 하고 종종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빙의”다 라고 규정을 한다. 그리고는 천도제를 하기도 한다.
무의식에 죄의식이 심어져 있는데 천도제를 한다고 조금은 위안이 될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마음의 번뇌가 해결이 될 것인가? 대부분 다시 아기들이 나타나곤 한다.
허나 진정으로 아가에게 참회(회개)한 분들 대부분의 경우에는 아가들이 생시에 나타나거나 또는 꿈에 나타나서 “이제 섭섭함이 사라졌어요. 엄마(아빠) 사랑해요”하고는 웃는 얼굴로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해원(解怨)이다.
진정한 천도는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마음을 다하여 하는 것이 진정한 천도인 것이다.
또는 아기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아기 입장에서 낙태를 한 부모가 용서를 빌 때 서운한 마음이 풀릴 것인가?
아니면 누구를 시켜서 천도를 대신 할 때 서운한 마음이 풀릴 것인가?
2. 너--------->나
너 가 나에게 잘못한 것은 “분노”로 저장된다. 그리고는 “억압”으로 변하며 이러한 억압은 사회적장애로 나타난다.
이것의 정의는
“나는 남으로부터 당하기 싫은 일을 남으로부터 당하였을 경우”에 해당한다.
이것 역시 개인차에 따라서 다르다.
들은 이야기를 하나 예로 들어본다면.......
영국 부모와 자녀둘이 있었다. 부모는 멕시칸 남자 아이를 입양하였다.
어느 날 패스트푸드점에 다 같이 갔는데 마침 그곳에는 자녀의 같은 학교 친구들도 있었다.
그 친구 중 한명이 자녀에게 “얘 왜 니 동생은 얼굴도 시커멓고 코도 뭉뚝하고 그렇게 이상하게 생겼니?” 라고 하였다.
자녀 중 언니는 화를 내며 그 친구와 싸웠다고 한다.
동생은 미소 지으며 화도 아니 내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는 두 자녀에게 물었다.
“큰아이야 너는 왜 싸웠니?”
“걔네들이 내 동생을 인종차별 하잖아요.” 하였다
작은아이에게 물었다
“얘야 너는 왜 가만히 있었니?”
“걔네들이 왜 그러는지를 모르겠어요.”
작은 아이는 인종차별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 친구들이 왜 놀리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로 순수한마음이었던 것이다.
첫 번째 아이에게는 분노로 저장 되었을 것이나 둘째 아이에게는 아무것도 저장되지 아니 하였을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알고서도 그러하게 화가 나지 아니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저 예로 들어 보았을 뿐이다.
누군가 물어 온 적이 있었다. 시골에서 행복하게 사는 분들과 마음공부가 된 사람들과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시골에 사는 분들은 환경과 조건이 단순하다.
그러므로 평화롭다. 허나 그러한 환경과 조건이 바뀌게 되었을 때 종종 그러한 평화는 번뇌로 바뀌기도 한다. 허나 후자는 환경과 조건에 의하여 마음이 평화로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대상을 마음에서 모두 거두었기 때문에 어떠하게 대상들이 바뀌던지 즉 환경과 조건이 바뀌는 것에 아무 관련 없이 마음이 평화롭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과 같이 천진 하여져야 마음이 평화로워 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아이들은 환경과 조건이 단순하여서 그러할 뿐이다.
이제 아이들은 복잡한 환경과 조건하에서 서서히 번뇌가 쌓여질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아이였던 상태로 일단은 돌아가야 한다. 물론 이제는 알 것 다 알고 모든 번뇌를 짊어지고는 아이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천안(天眼) 또는 일심(一心)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는 본성의 무심(無心)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여정이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온다.
누군가 마음이 넓어졌다는 것은 바로 화살이 꽃 칠 과녁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다시 되새겨 볼일이다.
원수마저 사랑하게 된다면 분노란 저장될 장소가 없는 것이다.
아니 분노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3. 나---------> 나
이것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
하나는 교만에서 오는 것이요
하나는 자기비하에서 오는 것이다.
전자는 자기의 아만 자만 교만한 모습을 보고는 그러한 모습에 번뇌가 쌓이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역시 참회를 하여서 아만을 소멸시켜야 할 것이다.
하나는 자기비하의 경우인데
크게는 되어야할 이상형과 되지못한 자기와의 사이에 벌어지는 괴리감이다.
작게는 늘 해야 할 일과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벌어지는 괴리감이다.
또 다른 것은 늘 남의 눈으로 사는 경우이다.
포장하여서 보여주려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에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을 하여야 한다.
사람으로서 알고 있는 지인 모두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있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성자라도 그러 할 것이다.
붓다가 말년에 설법하신 묘법연화경에서
500명의 공부된 제자들이 일불승 설 하실 제에 일어나서 떠나가 버린다.
붓다가 “완전자”가 아니신 무슨 인간으로서 하자가 있어서 그들이 떠나갔을까?
아닐 것이다. 그들 500명에게 문제가 있어서 떠났을 것이다.
또한 예수를 적대시하던 로마인들과 반대편에 섰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의 마음은 다양하다. 그 다양한 마음에게서 모두 인정받으려고 하며 남의눈으로 사는 것은 또 하나의 괴리감을 낳는다.
“되어야 할 무엇과 되지 못한 나”사이에서의 괴리감, 자괴감의 경우에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여야 한다.
누구나 그릇의 쓰임이 다르다. 다 다른 모양의 그릇은 또한 나름의 쓰임이 있다.
종교적으로 본다고 하여도, 나름의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윤회로 본다면 인과가 그러하니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이러하게 인정하고나면 이제 그 무엇을 차근차근 되어 나갈 수 있다.
상대적인 비교는 늘 고통을 낳을 뿐이다.
만약 “나와 나”사이의 번뇌가 교만, 아만 등등에 의하여 생긴 것이라면, 그것은 참회의 대상이 된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든지 하면, 번뇌는 끝날 길이 없어진다.
참회(회개)라고 하면은 흔히 나의 잘못만을 뉘우치는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허나 그러하게 시작하다 보면
너------->나 의 경우와
나------->나 의 경우도 같이 해결이 된다.
허나 순서는 늘
나---------->너 로부터 시작하여야 효용성이 있다.
예로서 유능한 심리치료사라면
아마도 먼저 상대의 이야기를 주~욱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는 “희생으로 살아 오셨군요.”라고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피상담자는 “아! 이제야 내가 희생으로 살아온 것을 알아주는 이가 있구나”하고 마음에 위안을 상당히 받을 것이다. 어쩌면 눈물도 흘리면서 많은 것이 녹아내릴 것이다. 우리 누구나 희생으로 살아온 것이 맞기 때문이다.
헌데 육십억 인류 누구나 피해자가 맞긴 한데, 누가 가해자란 말인가?
바로 우리자신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 아니겠는가?
문제는 여기에 있다.
누군가 피해자라는 것이 먼저 설정이 되면 이제 가해자였다는 사실은 좀체 인정하기가 쉽지 아니하다.
허나 스스로 가해자였던 것을 돌아보고 참회 한다면 스스로 피해자였던 분노들이 쉬이 녹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순서는 가해자였던 것을 먼저 참회하게 되며 그리고는 피해자였던 분노들이 녹기 시작한다. 나아가서 “나와 나”사이의 괴리감, 자괴감이 녹아내린다.
참회를 할 때에 중요한 것은 뭉뚱그려서 하지 아니 하는 것이다.
아니 하는 것 보다는 뭉뚱그려서 참회해도 좋을 일이지만은, 무의식에는 하나하나 개별사건으로 저장되어 있으므로, 개별로 하였을 때 진정으로 삭제가 되는 것이다.
저장이 되는 시스템이 있다면 삭제의 시스템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A 와 B 가 서로 싸웠다고 하여보자. 둘은 친한 친구 사이다.
A -------> B 에게 잘못한 것은 A에게 죄의식으로 저장되었고
B -------> A 에게 잘못한 것은 A에게 분노로 저장되었다.
B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것이 흔히 벌어지는 쌍방의 경우이다.
서로 상대가 잘못했다고 우기는 경우이기도 하다.
또는 의식은 나도 잘못이 조금 있지만 상대가 더 잘못했기 때문에 나는 잘못이 없다..........고 우기는 경우이기도 하다.
대부분 의식은 이러하게 교묘하게 잘못을 은폐하며 인정하지 아니하려는 경향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을 에고라고 부르기도 한다.
둘은 친한 친구이기에 몇 날 몇 일을 서로 끙끙 고민하면서 번뇌한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A 가 B를 찾아가서는 끝내
“내가 잘못했다”하고 사과하게 된다.
그때 B도 “나 역시 이러 이러한 것은 잘못 했어”라고 한다.
즉 A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저장된 죄의식은 삭제된다.
이러할 때 B의 분노 역시 눈 녹듯이 녹게 된다.
또한 B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 하는 순간 A에게 저장된 분노도 사라진다.
이러할 때 B의 죄의식도 사라진다.
즉 저장된 죄의식을 삭제 하는 방법은 잘못을 인정 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잘못을 한 경우에 그 자리에서 잘못했다고 인정 하였다면 즉 의식이 무의식에 저항하지 아니하고 계합 하였다면 죄의식은 저장되지 아니한다.
그 자리에서 잘못을 인정하지 아니한 것만 죄의식으로 저장되어서 번뇌가 된 것이다.
지금 그것을 인정하면은 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났으므로 진정으로 인정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眞)참회하여야 하는 이유이다.
선한 이는 번뇌가 삿된 이보다 덜 쌓이는 이유가, 잘못을 하면은 그 잘못을 그 자리에서 잘못했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의식은 무의식에 계합(契合)하여야 하며 종래에는 무의식은 본성에 계합하여야 한다.
즉 의식은 무의식의 개인적 양심에 계합하여야 하며 무의식은 그 개인적 양심이 선악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고 선악 어디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보편적 양심 혹은 순수의식 또는 “조건 없는 선”인 본성에 계합을 하여야 한다.
더러 어떤 분들은 선한 일을 함으로써 죄의식을 지우려고 하다.
즉 선업으로 악업을 상쇠 시켜보려 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선업으로 악업을 상쇠 시킬 수 없다고 한다.
무의식은 단순하다. 의식처럼 교묘하게 무엇과 무엇을 바꾸지 아니한다.
그러기에 악업은 단순히 악업으로 저장하며 선업은 곧이 곧 대로 선업으로 저장을 한다.
그리하여서 악업에 대해서는 인과응보를 받게 하며 선업에 대하여서는 보상을 받게 한다.
이것이 작은 이치이다. 허나 이것 또한 작게 보면 맞기는 하지만 여전히 짧은 견해 이다.
크게 볼 때에 악업은 선업으로 상쇄가 된다.
누군가 착한 일을 자꾸 하다 보면 종국에는 잘못 살아왔던 것을 전부 참회하게 되는 것이 이치일 것이다.
결국 악업은 “참회”를 해야 만이 사라진다는 이야기가 성립한다.
20대 초반에 산에서 조난을 당한 적이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고 더군다나 술이 만취되어 있었다.
텐트가 있었으나 얼마나 술이 취했는지 도저히 쳐지지 아니하였으며 그 폭우 속에서 자다가는 죽기가 십상이라고 판단이 되었다.
친구 둘과 어느덧 계곡을 찾아 나섰다. 계곡물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마을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허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이유가 걸어서는 몇일을 걸려서도 산 아래에 도착 할 수 없는 거리였기 때문인데 그때는 술이 만취된 상태라서 그런 저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길을 찾아 나선 중에 어느새 친구 한명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둘이는 어찌 어찌 하여서 계곡을 찾아냈다. 허나 내려가고 내려가도 끝이 없었으며, 술이 취하고 또한 급류에 휩쓸리고 이끼에 미끄러져서 여기 저기 다치고, 더 이상 방법이 없을 때 둘이는 바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둘이 서로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눈물 한 방울을 뚝하고 흘렸다.
말은 없어도 둘의 시선에서는 이제 죽을 수밖에 없다는 무언의 말이 흘렀다.
그 순간 살아온 모든 생이 순식간에 동영상으로 촤르르륵 흘렀다. 다 본 순간 또 눈물 한 방울 뚝 흘리고는 “참으로 잘못 살아 왔구나. 이제 죽는구나.” 했다.
허나 죽지 아니하고 어찌 어찌 하여 살았다.
다만 그때 잘못 살아 왔다고 과거를 보았기에 이제는 잘살아야지 하였으나 그러한 마음이 채 두 달을 가지 아니하였다. 너무도 짧은 시간에 본 동영상이기에 그리도 그 순간은 생생하였건만 두 달이 지나니 어느새 그 동영상들이 착각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잊혀졌다.
순일수련원에서 수련을 받으시던 분들 중에도 그러하게 살아온 모든 생을 순식간에 그러나 생생하게 동영상으로 본 분들이 있다.
그중 어느 분은 새까맣게 잊어 먹었던 일들도 보였다.
옛날에 강아지가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그분께서는 개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가까이 못 오게 하려고 강아지를 발로 찼다. 그 후로 그 일은 새까맣게 잊혀졌다.
이유는 개를 무서워하는 그분으로선 정당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헌데.............
동영상에서 그것을 보시고는 그분은 참회를 하고 우셨다.
문제는 파노라마에서 개의 마음이 다 전해진다는 것이다.
강아지는 그분이 좋았고 그래서 놀자고 다가왔던 것이다.
헌데 이분이 강아지를 발로차자 “자기가 좋아서 그러는데 발로 차다니....... 너무도 슬프다!”는 강아지 마음이 전달이 된 것이다. 그것도 강아지가 나와 다른 무엇으로서의 마음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같은 하나의 마음으로서 전달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강아지 마음이 내 마음이며, 마치 강아지의 슬픔이 나의 슬픔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죽기 전 파노라마에서는 대상의 마음들이 다 내 마음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의식은 어떠한 일을 하여 놓고도 자기 관점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일방적인 경우가 왕왕이며, 잘못을 하였어도 잘못 안하였다고 우기는 경우가 왕왕인 것이다.
헌데 상대의 마음이 나의 마음처럼 전부 와 닿는다면 이제 상황은 달라진다.
꿈에서 깨어있는 상태에서도 이와 같다.
꿈속에서 여러 등장인물이 있을 때 그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모두 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꿈꾸는 자가 “나”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창조한 이가 “나”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죽기 전에 보는 동영상에서 나의 전체모습이 나온다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때리고 있다고 할 때에 나의 눈으로 본 것이라면 나의 손과 발과 상대방 등이 보여야 한다. 헌데 나의 모습 전체가 다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상상할 때에도 등장인물들은 물론 배경들 전부와 “나”라는 것의 모습 전체가 나올 것이다. 바로 “나”가 상상으로 만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적으로 본 다면은 하나님이 전부 보시고는 찍어서 우리 마음에 모든 영상을 심어 주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요.
불교적으로 본 다면은 내안의 불성이란 형태 없는 순수의식으로서 전체이기에 그것이 모든 것을 보았다 하여도 될 것이요.
인도에서 이야기 하듯이 세상이란 브라흐만(인도에서는 대개로 전체자를 말한다)이 꾸는 꿈이라고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죽기 직전에 파노라마를 보게 된다.
대부분의 이들이 파노라마를 보고나서 바로 죽었으니 정확한 기록이야 남지 않았겠지만
더러 죽음직전에서 살아온 사람들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죽음직전에 무의식과 의식은 죽음에 직면한 것을 느끼고 안다.
그때에 의식은 페이드오프 되어 간다.
즉 전기스위치를 한꺼번에 끄는 것이 아니고, 돌려서 조금씩 조명을 끄는 것이 있다.
그러하게 의식이 텅 비어 들어가면서 그때 의식이 텅 비어진 만큼 무의식이 드러난다.
그 무의식에 저장된 영상들이 순식간에 돌아가는 것이다.
어찌 순식간에 돌아갈 수 있을까?
의식(분별지) 입장에서 본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허나 영상으로 찍고 영상으로 저장하는 무의식(직관지)입장에서는 쉬운 일이다.
허면 그러한 장면들이 왜 보여 지는 것일까?
1.스스로 지옥 갈 것인지 천국 갈 것인지를 정하라는 의미가 있을 듯 하다.
2.불교식 윤회로 이야기 한다면 그냥 죽으면 또 잘못을 모르고 억년을 태어나도 그대로 잘못을 답습 할 터이니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참회하라는 뜻일 것이다.
3.윤회로 이야기 한다면, 리와인드(Rewind)시켜서 그대로 경향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며 그대로 인과응보 받으라는 이야길 수도 있을 것이다.
실례로 어떤 이는 꿈속에서 죽어서 동영상을 본 경우도 있었다.
이분은 무교였다. 그래서 꿈속에서 하나님인지 염라대왕인지는 모르는데 어느 절대자라고 느낄 수 있는 분이 있었다고 한다.
절대자가 이분께 “지옥갈래 천국갈래?” 하셨다고 한다.
당연히 이분은 “천......” 하며, 천국 가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천”자가 끝나기도 전에 살아온 과거가 전부 동영상으로 순식간에 보여 졌다고 한다.
눈물을 한 방울 뚝 흘리면서 마음속으로 “아! 지옥에 갈 수밖에 없구나.” 하면서 슬퍼졌다고 한다. 그때 잠에서 깨어났으며, 한 가지 느낀 것은 스스로 심판하는구나. “잘못 살아온 것은 필히 그 결과로 나타나는구나.”를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잘못이라고 느끼지 아니 한 것도, 작은 것 까지도 동영상으로 볼 때에 “잘못 살아왔음”을 알게 되는데, 과연 우리 중 죽을 때에 절대자가 지옥갈래 천국갈래? 하고 물어 온다면
얼마나 많은 분이 자신 있게 “천국 가겠습니다.” 하고 답을 할 수 있을런가?
더러 어떤 분은 삶을 살 때에도 “에고”로 배짱이 두둑하여서, 그러한 잘못 살아온 동영상을 보더라도 무조건 “천국 가겠습니다.”하고 답하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허나 죽음에 봉착하여 동영상을 볼 때에는 그 에고인 의식이 페이드오프 되었다는 것이다.
거의 본성상태에서 동영상을 보기 때문에 잘못한 것을 알고도 에고로서 잘못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참회(회개)를 할 때에 기교적인 것 혹은 너무 방편에 치중할 일은 아니다.
순수하게 죽음에 봉착 하였을 때에 벌어지는 파노라마 그대로에 충실한 참회라면 좋을 것이다.
더러 우리는 명상적인 방편이나 고도의 번뇌를 사라지게 하는 방법들을 닦는다.
즉 처음부터 선에도 악에도 머무르지 아니하는 방법이 동원된다.
즉 모든 방법은 번뇌를 벗고 삼매에, 즉 본성이 드러나게 하자는 것이다.
헌데 명상을 하여서 고요하여 진다고 하여보자. 아마도 고요하여 질것이다.
헌데 무의식에 저장된 번뇌는 또 올라와서 괴롭힐 것이다.
명상을 하면은 또 조용하여 질것이다. 허나 일상에서 또 올라올 것이다.
이러하게 많은 세월이 걸린다면 언젠가는 드디어 고요하여 질것이다.
위의 이야기를 잘 새겨 본다면 고요하여 질 때까지 번뇌와의 싸움 이었던 것이다.
참회는 바로 큰 번뇌들을 삭제하여 고요하게 비워진다.
즉 “선에도 악에도 머무르지 아니 한다”로 바로 갈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허나 악에서 선으로 가게하고 선에서 지선으로 순차적으로 가게 한다.
선에도 악에도 머무르지 아니 할 때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할 때 지선이며 자비심이다.
바로 예수가 말씀하신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인 것이다.
참회는 이것을 순차적으로 가능하게 또한 어렵지 아니하게 드러내어 준다.
그러므로 참회를 하고나서 여타의 수승한 방법들을 한다면 더 쉬이 고요하여지지 아니할까?
의식과 가장 근접하게 닿아있는 무의식의 맨 위층에는 많은 번뇌가 있다.
이러한 번뇌는 주로 무의식의 표현인 꿈에서 괴롭힌다.
이것이 심해져서 일상에서까지 괴로워진다면 정신치료를 받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 밤에 꿈에서 괴로움을 당하니까 낯에는 다 잊어먹어서 상관없으니 괜찮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낯에 우리가 우울한 일이 벌어져서 번뇌가 생기면 그것으로 인하여 몸도 무기력 하여지고 눈꺼풀도 내려앉으며 온 하루가 무겁기 그지없다.
그러하듯이 밤에 꿈에서 한번만 그러한 번뇌가 와도, 아침에 일어나서는 이유도 알 수 없는 채로 찌뿌둥하고 무언가 상쾌하지 아니 한 것이다.
과학이 이야기 하는 바로는 하룻밤에 수없는 꿈을 꾼다고 한다.
다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아침에 바로 깨기 전에 벌어진 꿈만 기억한다고 한다.
기억을 하든 안하든 몸과 마음은 밤새 너무도 무거워 진 것이다.
몸무게가 하루 만에 두 배가 되면 아마도 우리는 살기가 싫을지도 모른다.
허나 수십 년에 걸쳐서 두 배가 되었다면 견딜 만 할 것이다.
번뇌란 오랜 세월에 걸쳐서 무거워졌기에 견딜 만 하다고 느낄 뿐, 그것이 없었던 아이 때의 가벼움을 우리는 잊어버린 것이다.
참회(회개)를 통하여서 큰 번뇌만 사라져도 꿈은 개꿈이 아니고 스토리가 있게 된다.
우리가 흔히 개꿈이라고 말하는 것은 스토리가 없이 이것도 올라왔다가 저것도 올라왔다가 하는 경우이다. 이유가 번뇌가 너무 많아서 이것저것 두서없이 꿈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참회를 통하여 큰 번뇌가 사라진 이는 이제 꿈도 스토리가 있게 된다.
더러는 참회만을 통하여 꿈에서 깨어있게 된다.
이러하게 꿈에서 깨어있게 되면 대체로 네 가지의 형태가 나타난다.
1. 의식으로 시작하여서 무의식에 닿아서 참회를 하기는 하였지만은 여전히 의식은 잘못했다고 여기지 아니 하는 잘못들, 즉 무의식은 알고 있는 작은 참회거리들이 꿈속에서 계속 나타난다. 그리고는 에고를 더 소멸하라는 그러한 꿈이 저절로 몇 년간 벌어지며 결국 저절로 에고를 소멸하는 여정이 벌어진다.
또한 큰 에고들이 소멸하여지면 아주 작은 “이럴까 저럴까”하고 망설이는 모습도 꿈에 나타난다. 큰 번뇌들 사라지면 종래엔 그러한 것들마저도 번뇌롭다. 마치 눈에 대들보가 있을 때 그것이 고통이었다가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그보다 더 작은 것이 고통이 되고 그것마저 사라지면 나중에 작은 먼지도 눈에 고통을 주는 것과 다르지 아니하다.
개아가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한은 “이럴까 저럴까”하고 늘 선택의 갈림길에서 번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종래에 이해하게 되며 결국은 “개아의 소멸” 즉 “무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길로 나아가게 된다.
2. 위의 것이 다 끝나야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 에고가 소멸하면은 바로 지혜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종교에 따라서 달리 벌어지는데, 기독교라면 하나님 또는 예수가 나타나시거나 또는 말씀만으로 현상과 실상에 대한 모든 지혜를 드러낸다.
불교라면 붓다가, 무교라면 본성이 모든 것을 드러내주며 채널러라면 채널러 식으로 모든 지혜를 드러내준다.
더러 꿈에서 깨달음에 대한 답안들을 본 분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꿈에서 깨어나서 세상에 가지고 나간다면 이제 많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며 좋아한다. 허나 꿈에서 깨어나면 도저히 생각으로 떠올릴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꿈에서 깨어있는 상태가 딱히 본성의 상태는 아니다.
본성과 무의식과 의식이 혼재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지혜라는 것도 최종의 지혜는 물론 아니다. 헌데 의식(꿈에서 깨어서 생시로 돌아오면)으로 돌아오면 왜 기억이 되지 않느냐 하면은 의식은 무의식에 비하면 하찮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학생의 의식으로 대학생문제를 풀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더러는 온밤 내내 푹 자면서도 깨어있을 정도 되면 요번엔 필히 깨어날 때에 세상에 갖고 나가겠다고 하면서 열심히 똑같은 것을 돌리고 돌린다. 그러고는 이정도면은 이제 잠에서 깨어나도 안 놓칠 자신이 있다고 여기고는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의식은 다시 그것을 놓쳐버린다. 그러나 이쯤 되면 이제 그것을 놓치건 아니건 걱정을 하지 아니 하여도 된다.
스스로 알음에 의해서가 아닌 체화(体化)되고 있기 때문이다.
3. 위와 동시에 일념(一念)상태가 벌어진다.
온밤 내내 꿈이 일정한 모습으로만 있으면서 평화로움을 느낀다.
즉 온밤 내내 호흡만 있다든지, 강만 있다든지, 꽃물에 묻혀있다든지 하는 상태인데
상당히 지복스러운 상태이며 꿈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다른 것이 변화 없이 온밤 내내 하나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분명히 꿈과 같이 보여 지는 혹은 되어있는 상황이 있으니 깊은 잠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도 지나면 각성상태가 벌어진다. 허나 이것은 꿈이 아니며 깊은잠에서 깨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4.예지가 있다.
허나 예지가 큰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생략한다.
번뇌만 살짝 걷어 내면은 육안에서 천안상태가 된다.
금강경에서 설해진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 중에서의 천안이며 이것은 육체의 눈이 아니고 처음으로 벌어지는 심안(心眼) 상태인 것이다.
아마 혹자는 참회 하나로 이러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인가 하고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공부란 의식으로 하는 것은 세월이 많이 걸릴 것이나, 무의식에 바로 들어가서 정화를 한다면 짧은 시간에 효과를 볼 수 있다.
무의식까지 닿는 세월이 얼마나 많이 걸리느냐가 공부가 더디느냐 빠르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참회란, 시작은 의식으로 하되 무의식으로 바로 들어가서 정화되는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가장 위대한 두 분인, 붓다와 예수가 참회와 회개를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경전을 볼 때에 처음에는 의식으로 즉 지식으로 보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경전의 어느 글귀가 가슴 깊숙이 “아하” 또는 “오호” 하고 와 닿았을 때가 바로 무의식에 닿은 것이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고 지혜의 한 종류이다. 물론 마지막의 지혜가 아닌 한소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하게 높은 한소식이 오면 그보다 하위의 생각들은 우수수 녹아내린다.
또 그보다 높은 소식이 오면, 예전의 한소식이라는 것도 역시 우수수 녹아내린다.
바로 이러하게 무의식에 와 닿기 시작할 때에 공부가 쉬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만 경전공부란 언제 무의식에 닿을지 알 수 없는 기다리는 방법이 될 수 있으나 참회란 바로 무의식으로 닿는 방법이다.
머리를 의식 가슴을 무의식으로 이야기 해볼 수도 있다. 이것은 편의상 분류이다.
무의식이 딱히 어느 특정부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가슴이 열렸다고 이야기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바로 가슴이 열려야 한다는 이야기다.
일원상의 여정은 생각(분별) - 느낌(직관) - 삼매(본성) 이다.
잡생각은 의식이 하는 것이요 머리 부분이다.
느낌은, 활기차고 기쁨이 넘친다. 이것이 무의식이요 가슴이다. 물론 번뇌가 녹기 시작하여서 가슴이 열렸을 때의 경우다. 또한 이러한 상태가 일심상태이다.
그것마저 다 넘어서면 본성의 상태가 드러난다. 이것은 무심이다.
(그림)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엑스터시라는 마약에 대한 내용이 방송되었다.
엑스터시를 하면은 자유로운 느낌이 되며 상대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되며 포옹도 자주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행복하다고 한다.(물론 엑스터시라는 마약은 환각을 가져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환각이 없다는 가정아래에서 비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인즉슨 엑스터시가 그러한 자유와 행복을 새로이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저 “불안감과 억압”을 사라지게 한다고 하였다.
즉 “불안감과 억압”을 엑스터시라는 마약이 사라지게 하니, 그 자리에 본래 있던 마음이 드러났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본래마음은 자유와 평화인데 그것을 개아의 “불안감과 억압”이 가리우고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개아(에고)의 불안감과 억압만 사라지면은 그것이 바로 참나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참나란 어디서 찾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얻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지금 우리 누구나 참나인데 단지 그것을 가리우고 있는 “두려움과 억압”이라는 “‘번뇌”만 사라지면은 된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두려움엔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다.
1.살아오며 죄의식 죄책감들을 상대에게나 나에게 지은 것이 바로 작은 두려움이다.
이러한 것은 참회로 녹일 수가 있다.
2. 큰 두려움이란 바로 개아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다. 모든 개아는 조건적이며 한계적이며 구속적이다. 그러한 개아는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한계에 대한 억압을 가지고 있다.
억압 또한 마찬가지로 작은 것과 큰 것이 있다.
1.작은 것은 상대가 나에게 잘못한 것에 대한 분노가 억압이 되며, 또한 나가 나에게 한 억압도 있게 된다. 이러한 것 역시 참회방편을 통하여 사라질 수가 있다.
2. 큰 것은 위와 마찬가지로 개아로 있는 한은 늘 구속이며 억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은 두려움을 먼저 참회나 여타 방편으로 많이 닦고 나서는, 이제 큰 두려움의 원인인 개아를 벗어나서 본래마음에 드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요약해서 이야기 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죄의식, 죄책감
2. 분노 -------> 억압이 된 것
3. 나 ---------> 나에 대한 자괴감, 괴리감
등을 참회로서 녹여내고, 종래에 개아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무심에 들어서 전체가 됨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