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장단은 확대간부회를 소집하고 학교 운동장 남쪽 울을 넘어서 마른 내로 삼문동 남부를 둘러싸고 있는 제방의 둔턱에 모여 회의를 했다. 교장이 내건 벽보를 보고 분격해서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당당히 자치회의 이름을 내걸고 참가하자고 하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회장이 교두에게 말한 각 학생의 자율적 의사에 맡기는 것이 나중에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명분으로 유리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래서 대회를 마치고 나면 모두 학교로 들어가서 그 이후부터 수업을 받기로 했다. 원래 자치회 대표로 박상업 형이 축하문을 읽기로 한 것도 자치회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그냥 학생대표로 하기로 정했다. 그리고 내일 학생들이 모두 학교에 가지 않고 축제 행사장에 가서 학교가 텅 비어 수업이 되지 않을 터이니 교장은 선생들을 대회장으로 보내어 학생들을 학교로 데려오라고 할 것이다. 거기에 대한 대책도 의논을 했다. 선생들이 야단을 치고 달려들면 마음 약한 아이들은 겁이 나서 학교로 가고 말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대책을 정했다. 우리들 거기에 모인 확대간부들과 기률부 학생들이 아침 일찍 공설운동장 입구에 나가 큰길에서 입구까지 서 있다가 선생들이 오거든 친절하게 맞이하고 선생들이 학생들을 못 들어오게 할 때 두 조로 갈라서 한 조는 선생들을 둘러싸고 다른 조는 학생들을 집결장소로 인도하기로 했다. 선생들을 대할 때는 첫째로 어디까지나 말과 태도에서 공손함을 잃지 않아야 하고 선생이 설사 때리더라도 반항하지 않고 공손한 태도로 한발 물러서서 기다릴 것, 둘째로 어디까지나 학생들의 개별적 행동임을 주장하고 학생들의 정당한 행동을 막는 것은 해방된 나라에 있을 수 없는 일임을 군중들에게 호소할 것, 셋째로 선생들이 학생 입장을 막는 일이 대회를 방해하는 일이 됨을 설득할 것 등, 몇 가지 대책을 정했다. 그런 다음 우리들은 학생들에게 이런 결정을 이해시켜 많이 참가를 하도록 선전하기로 하고 학교로 도로 들어갔다. 학생들에게 확대간부회의 결정을 알리자 모두 찬성을 했고 내일 메이데이 축제에 모두 나가자고 했다. 5월 1일 화창한 봄 날씨에 걸으면 초여름처럼 땀이 배었다. 나는 아침 일찌감치 대회장인 삼문동 공설운동장으로 갔다. 이미 자치회 간부들과 기률부 학생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8시쯤 되자 거의 다 모였다. 우리들은 곧 조 편성을 했다. 간부들은 주로 선생과 대치하는 조로, 기률부 학생들은 학생집결장소로 인도하는 조로 편성했다. 대회는 10시부터 시작되고 단체집결을 9시 반이다. 과연 9시쯤 되자 선생들이 때지어 모여왔다. 선생들은 학교에 출근을 했지만 등교하는 학생들이 없는지라 이곳으로 모두 나선 것이다. 선생들 중에는 축제참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선생도 많았다. 아니 대부분의 선생들도 학생들의 자발적 의사를 막을 생각은 없었다. 교두는 자기 입장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다만 훈육주임이 때로는 처벌한다고 공갈을 하지만 적극적으로 막을 용기는 없었다. 아무튼 축제참가를 지지하던 안하던 학생들이 수업을 받지 않고 대회장인 공설운동장으로 가는 이상 선생으로서는 당연히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가까워 오자 운동장으로 학생들이 등교할 때처럼 때지어 왔다. 선생들이 오기 전에 학생들은 거의 다 이미 집결장소에 모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민청」의 연예반 형들이 연주하는 아코디언 반주에 맞춰 부르는 남녀 소년학생들의 노랫소리는 축제의 분위기를 한결 명랑하게 했다. ‘적기가’를 부를 때는「민청」형들이 나누어준 붉은 기를 흔들며 불렀고, ‘메이데이의 노래’를 부를 때는 학생모를 불끈 쥔 주먹을 흔들면서 용감하게 불렀다. 선생들은 곧장 그곳으로, 도리어 자치회 간부들의 안내를 받아 왔던 것이다. 훈육주임이 어이없어 하는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노래 부르는 학생들의 명랑한 분위기에 휩쓸려 다른 선생님들이 오히려 구경에 열중하자 감히 나서지는 못하고 낭패한 모습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본부석에서 대회에 참가한 노동조합, 농민위원회, 학생들은 대회장 입장을 준비해달라는 확성기 소리가 울려왔다. 그래서 노래는 그치고 분위기가 조용해지자 훈육주임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학생들을 향해 무어라고 말하려 했지만 아무도 상대를 하지 않고 피해버렸다. 학생의 팔을 붙잡고 말을 걸었지만 그 학생은 팔을 뿌리치고 저만큼 피해버렸다. 보기가 딱한지 한 선생은 훈육주임을 보고 비난했다. “보소, 당신 따라 갈 사람이라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꺼요. 사람들 보는데 이게 무슨 짓이요. 선생체면도 생각해야지. 그만 갑시다.” 하고 돌아섰다. 다른 선생들은 그렇지 않아도 체면이 말이 아닌지라 돌아섰다. 그러자 아무 소리도 없이 학생들을 바라보고만 있던 손기용 선생이 나섰다. “선생님들, 학생들을 두고 어디로 가는가요! 학생들은 메이데이 축전에 이처럼 많이 나와 있는데 허가를 받았건 안 받았건 그건 문제가 아니지 않소. 지금 우리들은 교장이 학생들을 데려 오라고 했지만 학생들이 안 가면 우리들도 갈 수 없잖소. 우리들도 학생들과 같이 있습시다.” 그러자 몇몇 선생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냥 있고 대부분은 돌아갔다. 우리들은 대열을 짓고 본부석 확성기가 부르는 단체 순으로 질서 있게 행진하면서 대회장으로 들어갔다. 대회장에 모인 일반대중들이 손을 흔들며 지르는 환성에「민청」지도원이 나누어준 깃발을 흔들면서 대회장에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갔다. 앞에는 누가 준 것이지 모르는 붉은 천에 흰색으로 쓴「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등 구호가 쓰인 장대를 들고 간다. 나는 대열의 앞에 섰다. 본부석에 마이크 앞에 선 사람을 보니 바로 살내에 사는 매원 아재였다. 매원 아재는 나의 어머니의 살내 고모의 아들 둘째 고종사촌이고 이름이 이성학(李成鶴)이다. 밀양모직회사의 노동조합 위원장을 지냈다. 지난 10월인민항쟁 때 파업을 지도했다고 회사에서 쫓겨났다. 그래도「전평」밀양지부의 중요 간부였고「남로당」의 노동운동 지도원이었다. 얼굴이 길고 검었다. 그래서 별명이 ‘말대가리’로 불려져서 평소 누구와 대화를 할 때 스스로 자기를 호칭하면서 꼭 이름 앞에 ‘말대가리’를 꼭 넣어서 모두를 웃겼다. 말소리가 걸걸하고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는 호남아였다. 평생을 노동운동으로 지냈다. 나를 아껴주고 내가 고난을 겪을 때마다 안부를 염려했다. 10시부터 시작한 대회는 1시간쯤하고 그 뒤부터는 농악대회, 노래와 춤, 만담 등으로 편성한 오락대회를 2시간 정도 하고 오후 1시경에 모두 끝났다. 축제가 끝나자 우리들은 다시 대열을 지어서 모여 학교로 들어가기로 했다. 마치 봄놀이를 갔다가 되돌아가는 기분으로 웃고 떠들면서 한껏 명랑한 기분으로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부터 문제는 벌어지고 있었다. 평소 잘 나타나지 않은 교장이 교직원회에 나와서 학생들이 좌익집회에 나가도록 할 만큼 학생지도를 하지 않았다고 호통을 쳤다. 이에 대해 손기용 선생이 맞섰다. “교장이면 교장이었지 당신이 무엇인데 우리 선생한테 함부로 야단을 칩니까. 학생들이 노동자의 축제에 참가했다고 무슨 도둑놈 모임에나 갔다 온 것처럼 닦달을 하고 야단입니까. 학생들의 부형들은 대부분이 노동자이고 농민입니다. 그들 부형들의 축제에 나갔다고 왜 그렇게 야단입니까.” 이렇게 아무 거리낌 없이 나오는 데야 교장이라도 별 수 없었다. 교직원회에서 주동학생들을 색출해서 퇴학 등 처벌을 자문 받자고 했지만 여러 선생님들의 외면과 몇몇 선생님들의 반발을 받자 직원회에서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집어치웠다. 결국 훈육주임과 그의 수족이나 되는 교사 중 두엇 사람과 교장실에서 밀실회의를 했다. 그리고 이 기회에 학생자치회를 박살내고 마침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두고 분단을 획책하는 대탄압의 국면을 타서 이러한 학생들의 자주적 행동을 그 뿌리째 끊어놓는다면서 밀양의 민주인사들의 자녀들까지 싸잡아서 몽땅 한꺼번에 학교에서 추방하기로 했다. 한편 이 기회에 교장의 눈에 가시였던 손기용 선생도 경찰에 일러바쳐 학생들이 이에 대해 저항할 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잡아가도록 해 두었다. 이윽고 5월 10일이 되자 학교게시판에 큼직하게 처벌학생들의 이름을 써 붙였다. “이번 5월 1일 소위 ‘메이데이’라는 이름으로 좌익 정치단체들의 불법집회에 학교 당국의 불허에도 불구하고 순량한 학생들을 참가하도록 선동한 학생들을 학교 교칙에 따라 다음과 같이 처벌한다” 라는 내용을 서두에 두고 처벌학생들의 이름을 죽 써 붙였다. 자치회 간부는 몽땅 다 퇴학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학생들도 퇴학생 이름에 들어있다. 박말수 형의 누이동생 봉섬이도 이름에 들었고 나의 작은아버지도 퇴학생 이름에 들었고 나와 같은 1학년인 나의 종고모 수환이 아지매도 들어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좌익이라고 부르는 민주인사들의 자녀들까지 이참에 몽땅 싸잡아서 퇴학시켜서 그들이 향유하고 있는 권력의 맛을 톡톡히 보자는 것이었다. 이들 학생들은 자기 행위에서가 아니라 아버지나 형 그리고 올케 탓에 학교를 쫓겨나야 했던 것이다. 박말수 형의 형수는 밀양군 여성동맹의 위원장이었다. 그래서 그 시누이가 학교에서 퇴학당해야 했던 것이다. 나중에 가서 알게 되었지만 이들은 이미 경찰서장과 각급 학교장, 사법, 행정 기관장 그리고 우익반동단체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기관장회의에서 10월인민항쟁의 분풀이로 민주인사들의 자녀들을 몽땅 학교에서 몰아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메이데이’ 학생참가를 그 구실로 했던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꼴을 당하고 말았다. 아침에 이 게시를 보고 퇴학처분을 당한 사람은 물론이고 정학처분을 당한 학생들도 책가방을 그대로 들고 집으로 갔다. 퇴학당한 학생들은 일단 집으로 갔으나 가족들은 야단이 났다. 그날 오후부터 학부형들은 학생들을 다리고 학교에 나왔다. 교장은 학교에 나오지도 않고 교두 선생이 땀을 뺐다. 그날 오후부터 전교 학생들이 모여 긴급 자치회를 소집하고 수업거부를 결의하고 동맹 농성을 시작했다. 교실 칸막이를 걷어내고 강단으로 만들어놓고 집에서 식구들이 밥을 사들고 오고 이불도 가지고 왔다. 강단의 한쪽에는 본부가 설치되어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를 만들어 학교 교문에서부터 곳곳에 내다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