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上海) 위치 재고찰
1.
필자는 이전의 글 <구한말 상해는 어디였나? 1, 2>의 글을 통해 1840년의 아편전쟁 당시 영국인들이 청(淸)나라를 침략해 거대한 중국의 경제를 거머 쥘 발판으로 삼은 상해의 위치에 대해 고찰하면서 현 사천성(四川省)의 중경 동북쪽 80km지점의 부릉(涪陵)으로 비정했었다.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상해의 최초비정위치에 대한 의문과 함께 최초 영국군이 홍콩에서 출발해 상해(上海)를 점령하고 이후 남경(南京)조약이 이루어진 배경과 춘추시대(BC770 – BC403) 오월(吳越)간 강역다툼의 역사를 비교해 보면 구한말 상해(上海)라는 당시 세계사(世界史)적 중심무대가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가 새롭게 조망된다.
몇몇 사항을 재고찰의 중요항목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⓵1919년 영국의 외무장관(外務長官)을 지냈던 조지 커즌 George Nathaniel Curzon (1859~1925)은 1895년경 조선을 여행한 후 저술한 <100년전의 여행, 100년후의 교훈> 이란 책에서 상해(上海)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상하이에 있는 훌륭한 부두, 거리, 그리고 건물을 살펴보면 이곳을 동아시아의 켈커타라고 부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상해는 해안에서 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 있는 곳이다.
②춘추시대(春秋時代)에 상해(上海)는 오(吳)에 속해 있었는데, 오(吳)와 월(越)의 싸움에서 월(越)이 승리를 거둬 상해(上海) 주변도 당연히 월(越)의 영지가 되었다. 이후 월(越)이 몰락하자 초(楚)의 영지가 되었다.
→현 베트남 위쪽에 역사의 강역을 틀었던 월(越)나라가 오(吳)나라에 위치한 상해 (上海)를 공격해 차지했다는 사실은 상해가 오월(吳越)의 경계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음을 알려준다.
③영국의 파커제독(提督)이 원정함대(遠征艦隊)를 이끌고 북상하기 위해 홍콩을 출발한 것이 1842년6월6일이었다. 같은 달 16일 이른 아침에 英國의 함대(艦隊)는 吳淞(오송-우쑹)의 청군(淸軍) 기지를 공격했다.
상해(上海)를 나온 영국 함대(艦隊)는 양자강(揚子江)을 거슬러 올라가 진강(鎭江)을 점령하며 포학의 극치에 달했다.
남경(南京)이 위기에 처하자, 청조(淸朝)는 마침내 굴복하고 영국 군함(軍艦) 콘윌리스 호에서 굴욕적인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했다
→역사의 남경(南京)은 현 사천성 남부 양자강 상류의 의빈(宜賓)으로 비정되고 있 다. 따라서 상해(上海)는 이 의빈(宜賓)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있어야 하며 홍콩과 남경(南京)의 중간지역쯤에 있어야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또한 파커제독의 홍콩출발이 6월6일이었다는 사실은 바로 영국군이 조수(潮水)를 타고 내륙의 강과 운하를 타고 북상했음을 알아낼 수 있다.
2.
명청(明淸)의 수도는 북경(北京)으로 현 감숙성(甘肅省) 주천(酒泉)이다. 현 베트남의 하이퐁(베트남어: Hải Phòng/海防)은 역사의 홍콩이자 광주(廣州)지역 즉 광동성(廣東省)이 위치했던 지역이다.
한족(漢族)의 왕조들은 이 광주(廣州)지역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와 많은 교역을 이루었으나, 청나라는 북경(北京)과 거리가 너무 멀고 또한 내륙의 풍부한 물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을 느껴 상해(上海)에 강해관(江海關)을 1685년 설치하게 되고 이를 통해 청조(淸朝)는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거대한 중국의 경제력에 욕심낸 앵글로 색슨족은 좁아터진 광주(廣州) 무역에 한계를 느끼고, 세계의 물산이 모두 모였던 내륙 깊숙이 존재한 상해(上海)를 욕심낸 것은 당연한 일이며, 남경조약(南京條約,1842.8)을 통해 그들의 게걸스런 탐욕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차지한 상해(上海)는 현 귀주성(貴州省)의 귀양(貴陽-구이양)으로 비정된다.
이를 지도를 통해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2023.11.14.松溪
첫댓글 우리들이 보고 배웠던 강단사학이 얼마나 허구에 가득 한 것이었는지를 자각합니다.
지도가 참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