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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의 현상학, 생의지의 불꽃
-나의 시, 나의 시 세계
이진엽(시인, 문학평론가)
부름과 의식의 지향성
인간이 자아 밖의 세계에 편재遍在된 외물과 대면하게 됨은 그 이름을 부르면서부터 시작된다. 외물들의 형식 기표인 이름 안에는 각 외물들의 본질이 내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외물들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외피에 대한 두드림이 아니라 그 외피 안에 원형질을 이루고 있는 근원적인 것을 불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까마득한 천지창조 때부터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로부터 이름을 불리면서부터(창세기 1, 5-1, 28) 그 존재 의의를 부여받았다. 또한 ‘첫 인간’인 아담이 원죄를 지어 에덴동산의 나무 사이에 숨어 있을 때도 하느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너 어디 있느냐”(창세기 3, 9)라고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이름 불림을 통해서 아담은 비로소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실존적 각성과 성찰을 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발화 호칭으로서의 시니피앙signifiant이나 파롤parole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본질적 개념이나 형상形相을 불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이름 부름에는 주술적 부름, 서정적 부름, 현상학적 부름이 있다. 먼저 ‘주술적 부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龜何龜何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 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 구워서 먹으리
-「구지가」 전문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전해지는 이 노래는 가락국 건국신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한역가漢譯歌이다. 일명 영신군가迎神君歌라 불리는 이 고대 가요는 언어의 주술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시의 화자들은 ‘거북’(신령한 대상)의 이름을 부르며 위협하여 “머리(왕)를 내어라”고 명령한다. 이 명령형은 반복법, 정형률과 어우러져 더욱 강렬한 에너지로 표출된다. 이 같은 현상은 부족 국가에서 벗어나 절대 군주에 의해 다스려지는 강력한 국가를 갈망하는 당대인들의 염원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거북’이라는 신령한 존재의 이름 부름을 통해 고대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세계, 또는 대상의 어떤 변화를 욕망한다.
이러한 주술적 부름은 고려 속요와 조선 시대의 시조, 가사 등을 거쳐 현대시로 이어지면서 ‘서정적 부름’으로의 변화를 본격적으로 보인다. 시의 언어에는 앞 시대에서 대두된 ‘感動天地鬼神’에서 벗어나, 개인의 희로애락을 표출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①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리노라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작자 미상, 「청산별곡」 부분
②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 온다
아희야 박주산채薄酒山菜 ㄹ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한호
③이바 니웃드라 산수山水 구경 가쟈스라
답청踏靑으란 오 고 욕기浴沂란 내일 새
아에 채산採山고, 나조 조수釣水새
괴여 닉은 술을 갈건葛巾으로 밧타 노코
곳나모 가지 것거 수 노코 먹으리라
-정극인, 「상춘곡」 부분
④누이야 /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송수권, 「산문에 기대어」 부분
인용 시들은 모두 자아 밖 대상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정서적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즉 시의 화자들은 ‘새’(①), ‘아희’(②), ‘니웃’(③), ‘누이’(④) 등의 이름 부르기를 통해 자아와 대상 간의 정서적 융화감 혹은 호소력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취한다. 이런 현상은 곧 에밀 슈타이거가 말한 서정시의 회감回感 효과의 특성을 잘 보여준 것이다.
한편, 이런 부름 이외에 ‘현상학적 부름’이 있다. 이 부름은 E. 후설이 말한 ‘의식의 지향성’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내 시 세계의 중요한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의식의 지향성은 사물이나 대상에 입혀진 통념을 일단 판단중지epoche하고 의식 속에 새로운 의미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자아ego-지향성noesis-대상noema’이라는 일련의 관계를 통해 세계에 은폐된 대상들은 시인의 의식 속에서 새롭게 그 본질적 의미를 형성한다. 이때, 시인이 내면의 빛으로 대상을 비추면 그 대상은 시인의 빛에 응답하며 끝없이 어떤 말을 걸어온다. 그 말은 상투화된 전언이 아니라 세계의 자아화를 통해 들려오는 깊고 설레는 울림이다.
길에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웠다
주인을 찾아 줄 수도 없어
호주머니에 넣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누굴까, 익명의 얼굴들이 실루엣처럼 흔들리다가
흑백 필름으로 스쳐갈 때
불현듯 호주머니에서 날개 치는 소리
대지의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던 것이
내 눈빛을 받은 후부터 푸른 기지개로 일어섰다
이제 호주머니는
잠 깬 사물이 숨 쉬는 존재의 작은 방
아늑한 그 방에서
종이돈이 저렇게 온몸을 비트는 것은
그를 비추는 내 의식의 불빛 때문이라 생각할 때
불현듯 이 세계가
나의 열쇠로만 달까닥,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는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그가 잠깨는 순간」 전문
‘종이돈’은 시인의 의식의 빛을 받게 되자 일상적 교환가치라는 의미가 판단 중지되고 시인의 내면에서 새로운 의미체로 구성된다. 시인은 이 종이돈을 통해 상투화된 의미에서 일탈하여 “불현듯 호주머니에서 날개 치는 소리”와 “푸른 기지개로 일어”서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래서 “이제 호주머니는/잠 깬 사물이 숨 쉬는 존재의 작은 방”으로 느껴진다. 그러므로 자아 밖 세계의 모든 외물은 시인의 “의식의 불빛”을 받아 끊임없이 내면에 현성화現成化되고 있으며, 오직 시인의 ‘열쇠’로만 ‘달까닥,’ 소리를 내며 열리게 된다.
그것은 “모든 타성을 접시처럼 뒤엎을 듯/숟가락은 지금 거친 힘점의 완력으로/새로운 세계 하나를 열어버린다”(「숟가락이 열다」), “흙투성이 고구마에 겹겹이 숨어 있는/이 놀랍고 신비한 비밀들”(「고구마, 몸을 열다」), “그래, 시의 나비야/누가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거든/어둠의 막을 힘껏 찢어 버리고/저 빛을 향해 한 세계를 열어 보아라”(「존재의 집」), “투명한 유리알은 빛의 통로//세계는 그곳을 통해 매 순간 포착되고/다시 새롭게,/내 마음의 암실에서 인화印畵되고 있었다”(「안경 1」)에서처럼 현상학적 부름을 통해 의미의 새 지평을 열어 준다.
생의 불꽃과 실존 의식
인간의 역사가 ‘정·반·합’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전개된다는 헤겔의 역사적 낙관주의는 19세기 이후 큰 도전을 받게 된다. 기아와 질병, 국가 간의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인한 인류의 고통은 역사적 비관주의를 배태胚胎하기에 이른다. 세계의 기류 혹은 생의 과정은 이성과 합리주의에 견인되는 것이 아닌, 인간이 지닌 매 순간의 감정과 비합리적 정념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생은 잘 정돈된 코스모스가 아니라 끊임없이 파동치는 불꽃이자 카오스다. 따라서 ‘세계 이성’(헤겔)이나 ‘물자체物自體 Das Ding an sich’(칸트)와 같이 충족이유율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 숨 쉬는 생生 혹은 실존 자체가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생철학과 실존주의 철학은 이런 배경에서 그 싹을 틔우며 개화하게 되었다.한국현대시사에서 청마靑馬의 시는 이런 생의지를 가장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하지 못하고/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저 머나먼 아라비아 사막으로 나는 가자…(중략)…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옷자락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유치환, 「생명의 서」 부분
시인은 “병든 나무”처럼 자신의 생명이 부대낌을 느낄 때 “아라비아 사막(고독)”으로 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황량한 사막과 태양이 작열하는 그 불모지에서 시인은 원시적 생명력 즉 “원시의 본연한 자태”에 충전된 본연의 ‘나’를 만나고자 한다. 이런 소망은 바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생生, 뜨겁게 충만된 자기동일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염원과 다르지 않다. 내 시 세계의 또 다른 밑바탕에는 이 같은 생의지와 실존 의식이 깔려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네 몸은 헝클어진다
시작도 끝도 없는 저 허공
너는 수없이 머리를 고요에 부딪친다
오직 몸으로만 울어야 하는 너
펄럭펄럭, 이것이 네 몸의 말이다
먼 하늘로 새가 되어 날고 싶어
너는 오늘도 숨 가쁘게 날갯짓을 하고 있다
날아라, 새여
팽팽한 줄 하나가 네 온몸을 당길지라도
아득한 창공에 피멍 든 머리를 부딪치며
생의 불꽃을 터뜨려 주어라
너, 살아 있음의 그 뜨거운 순간을
시퍼런 흔들림으로 증언해 주어라
-「너의 절규」 –깃발 전문
바람이 불 때마다 “수없이 머리를 고요에 부딪”치며 자유롭게 펄럭이는 깃발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대유한다. 또한 아득한 창공으로 ‘새’처럼 날아가고 싶어 “오늘도 숨 가쁘게 날갯짓을 하고” 있는 깃발은 인간의 끝없는 생의지를 반영한다. 그래서 화석화된 이성과 이념, 죽음의 덫에서 벗어나 시인은 펄럭이는 깃발을 통해 “생의 불꽃”이 터뜨려지기를 갈망한다. 이런 생각은 “살아 있음의 그 뜨거운 순간을/시퍼런 흔들림으로 증언”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같은 생의지는 “옥수수들은 저마다/한여름의 뙤약볕을 온힘으로 물어뜯으며/저렇게 익어가지 않는가/완강한, 완강하므로 아름다운/저 시퍼런 생의 의지”(「완강한 옥수수」), “아무도 밟지 않은 숲으로/맨살을 베이며 숨가삐 걸어가면/팔뚝을 쏘아대는 작은 날벌레들/온갖 잡목들도 야성의 가지를 치켜세우며/아주 맹렬하게 나의 얼굴을 할퀸다”(「여름 숲으로 나는 간다」), “저 완강한 산의 힘줄/팽팽히 당겨진 푸른 정맥을 펄떡이며/산은 나를 걷어차 버린다”(「시퍼런 힘」), “이 세계에 가득 찬/너울너울 춤을 추는 생의 푸른 의지/그 한 자락을 상춧잎처럼 입에 물고/나도 바람을 헤치며 다시 산길을 걸었다”(「춤추는 생」)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생의지, 생의 율동은 정형화된 기계론이 아니라 비결정적 자유의 파동과 연쇄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로 생의 철학자 베르그 송이 말한 생의 약동 즉 ‘엘랑비탈élan vital’이다. 생은 그만큼 뜨겁고 소중한 한순간의 불꽃인 것이다.
그런데 이 생生은 끝없이 약동하려 하지만, 인간 존재의 밑바닥에는 운명적인 부조리와 한계 상황이 도사리고 있다. ‘나’와 ‘세계’ 사이에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뒤틀림은 실존의 부조리를 강하게 느끼게 한다.
점심 먹으러 가다가 현관 모서리에서
머리를 수차례 유리창에 부딪치고 있는
비둘기 한 마리를 보았다
먹이를 찾으려 했을까
중앙 출입구 안쪽까지 몰래 들어왔다가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탈출하려고 버둥댔다
바로 저기
아늑한 둥지가 느티나무 위에 있지만
빤히 보고서도 그는 그곳에 가지 못했다
세계와 나 사이
투명한 벽이 있음을 그는 미처 몰랐으므로
눈부신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는
지난 세월 동안 무엇을 향해 돌진하며
가슴을 부딪치면서 살아왔던가
사랑과 구원,
혹은 별빛이 늘 저쪽에 있었지만
투명하게 눈을 찌르는 이상한 벽을 몰랐으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곳에 갈 수 없었다
거대한 유리창
세상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담장으로
눈을 멀게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그냥 보인다고만 소리치다가
충돌의 몸짓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오늘, 급식소로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비둘기 한 마리
존재의 집을 찾으려는 그 절박한 날갯짓으로
내 어두운 두 눈을 맑게 비벼주었다
-「투명한 벽」 전문
점심 무렵 시인이 발견한 한 마리 비둘기, 그는 “현관 모서에서/머리를 수차례 유리창에 부딪치”면서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세계와 나 사이/투명한 벽이 있음을 그는 미처 몰랐으므로/눈부신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세계가 투명하게 잘 보이긴 하지만 그것이 벽이라는 사실은 ‘나’와 ‘세계 ’사이에 가로 놓인 숙명적인 부조리를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세인世人들 역시 “사랑과 구원, /혹은 별빛”을 찾아 늘 헤매고 있지만, “투명하게 눈을 찌르는 이상한 벽을 몰랐으므로/우리는 언제나 그곳에 갈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에 운명적으로 사로잡혀 있다.
이런 정황이야말로 실존의 한계 상황을 나타내며 ‘세계-내-존재’로서의 시인은 이 생의 옥죔에 대한 초극의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별빛이 마당에 내리고
어둠 속에서 방문이 잠긴다
얇은 창호지가 발려 있는 툇문
문고리에 끼워둔 숟가락 하나가
드센 겨울바람에 딸가닥거린다
찢어진 문종이 밖으로 문득 보이는
어두운 하늘의 별빛
그들과 입맞춤하려고 고개를 연신 흔들지만
숟가락은 더욱 차가운 늪에 갇혀 버린다
한 입 가득 허공을 물고
문설주에 목 매달린 뜨거운 저 몸짓
그 좁은 구멍 안에서 가쁜 숨을 토해보지만
더 이상 은하 멀리 날아갈 수가 없다
문풍지 가득히
회초리로 내려치는 밤바람소리
하지만 숟가락은
낯선 생의 구렁에서 두 눈을 부릅뜬 채
혼신의 몸짓으로 바람에 맞서 부르르 떤다
밤새 별을 보며 혼자 날개를 파닥인다
-「별 보는 숟가락」 전문
‘툇문’의 문고리에 끼어있는 ‘숟가락 하나’, 시인은 이것이 “드센 겨울바람에 딸가닥거”리는 소리를 반추하면서 인간이 처한 실존적 처지성을 사유한다. 이 숟가락은 찢어진 문종이 바깥으로 보이는 “어두운 하늘의 별빛”과 입맞춤하려고 고개를 연신 흔들지만 더욱 “차가운 늪”에 갇혀 버린다. 마치 산정으로 바위를 굴리며 올라갈수록 다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시시포스의 운명처럼 문고리에 갇힌 숟가락은 인간이 처한 실존적 부조리를 암시한다. ‘나’의 염원과 ‘세계’의 벽이, 합리와 불합리가 서로 충돌하고 뒤틀리는 이 상황이야말로 부조리 그 자체다. 이 “낯선 생의 구렁”과 같은 한계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숟가락은 “두 눈을 부릅뜬 채/혼신의 몸짓으로 바람에 맞서 부르르” 떨거나, “밤새 별을 보며 혼자 날개를 파닥”이며 주어진 운명 앞에 끝없이 반항한다.
이 실존적 반항은 “추락하는 것들은 완강히 땅에 맞서/온몸 흔들며 떨어진다는 것을”(「연의 독백」), “어느 날 갑자기 낙석落石의 날이 올지라도/바람에 깎고 깎인 차가운 부리로/저 땅의 가슴, 깊게 찌르며 떨어지리”(「고드름」), “피멍들게 맞을수록/맑은 숨으로 되살아나는 나의 몸/그 푸른 심지 하나 맨땅에 꽂으며/나 지금, 혼신의 힘으로 돌고 있나니”(「팽이」) 등에서도 잘 목격된다.
피투被投-Geworfenheit의 실존적 처지에서 부단히 기투企投-Entwurf를 감행하는 이런 몸짓들은 바로 훼손된 자기동일성을 회복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나타낸다. 낯선 세계에 던져져 그냥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가는 일상인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체적 시간성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실존을 적극 구현해가려는 현존재現存在-Dasein로서의 모습을 시인은 끊임없이 지향하고 있다.
* 약력
1992년 시와시학 신인상(시)과 1998년《매일신문》신춘문예(평론)로 등단. 시집 아직은 불꽃으로, 낯선 벌판의 종소리, 겨울 카프카, 그가 잠깨는 순간, 그 강변의 발자국. 평론집 존재의 놀라움. 금복문화상, 대구문협 올해의 작품상, 대구시인협회상 수상. 현 시마루 동인, 대구가톨릭문인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