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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티나무 ♣ 전례/미사 자료실 - NO. 2
■ 미사해설 : 대영광송은 왜 노래하는가? ■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래를 잘하는 민족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노래와 가깝게 지내고 일상에서 노래를 자주 한다는 말이다. 시내에 나가보면 노래방이 참 많은 것을 보고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노래는 인간의 감정을 음악적으로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기쁨과 슬픔, 애절함과 성취감, 또는 사랑과 안타까움이나 비난과 힐책 같은 인간의 소소한 감정을 운율과 함께 가락에 맞추어 음가를 붙여 표현한 것이 노래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노래는 인간의 감정을 잘 담아내는 그릇이다. 노래를 통해 그 감정을 잘 묘사하는 것이다.
미사 때에는 노래를 많이 한다. 노래를 통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감정과 느낌, 곧 사랑과 흠숭의 마음을 표현한다. ‘대영광송’도 흔히 노래로 부른다. 그것은 노래하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이다. 대영광송은 ‘영광을 드리는 노래’, 그것도 크게 노래하기에 ‘대(大)영광송’이라 부르는 것이다.
미사 전례서 총 지침에서 말하기를, "① 모든 교우들이 노래하거나, ② 교우들과 성가대가 교대로 노래하거나, ③ 또는 성가대만이 노래한다. 또 ④ 노래하지 못할 경우 교우들이 함께 읽든지 교대로 읽는다."(31항)고 밝히고 있다. 대영광송은 그만큼 노래로 불러야 제 맛이 나고 이 성시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되므로 노래로 부르기를 힘주어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노래로 불러야 하는 성시인가. 그것은 대영광송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 노래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사의 노래,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 영광의 노래이다.
① 천사의 노래는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이라고 예수님의 성탄을 노래하는 성서구절(루가 2,14)이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고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로 인류를 구원하셔서 그 영광이 땅에서도 빛난다는 말이다.
② 이어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대목은 ‘찬미, 찬양, 찬송, 기리다’ 등 다양한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 아울러 하느님께 대해 여러 가지 호칭을 사용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표현이 또한 그러하다는 말이다.
③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호칭은 ‘하느님의 어린양’, ‘성부의 아드님’ 등으로 예수님의 본질과 신분을 장엄하게 표현한다. 또 그리스도 ‘홀로’ 거룩하시고, 주님이시고, 높으시다고 밝힘으로써 예수님께서 절대적인 분이심을 고백한다.
④ 마지막 영광송 부분은 성삼위께 영광을 드리는 노래이다. 주요 기도나 찬미가를 항상 영광송으로 끝맺던 오랜 유다의 관습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대영광송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광을 드리는 노래’로 일관되어 있다. 그래서 대영광의 노래이다. 하느님(성부)과 그리스도(성자)께 드리는 영광의 노래이다.
또 이 노래를 미사 안에서 부르게 된 역사를 보면, 얼마나 교회 공동체가 대영광송을 ‘노래’하기를 갈망했는지 알 수 있다. 초세기에 시편이나 성서 찬가를 닮은 성가가 많이 나왔는데 대영광송도 그중의 하나였다. 동방교회에서 먼저 시작했다가 4세기경에 서방교회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먼저 교황이 집전하는 성탄미사에만 사용하다가 점차 주교가 집전하는 성탄과 부활 미사에도 사용하게 되었다. 6세기에는 주일과 순교자 축일로 확대되었으며, 7세기 이후에는 새 사제의 첫 미사에도 불렀다.
11세기 말에 와서 오늘날처럼 모든 주일과 축일까지 확대하여 부르게 되었다. 대중적인 노래로서 교회가 주님 찬양을 노래하는 데 열정을 갖고 있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주님의 영광’에 대해 마음속에서 넘치는 기쁨과 환희를 표현하려는 열망이 자주 노래하게 만든 것이다. 하느님께서 크고 훌륭한 일을 하셨기에 존경(공경)심이 생기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랑스럽고 대견하게 생각하고, 든든하고 가슴 뿌듯한 감정이 있기에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노래하는 하느님의 ‘영광’이란 무엇인가? 영광은 한마디로 ‘현존’을 뜻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훌륭한 일을 하여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면 그는 ‘영광’스럽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알아주기’ 때문에 사람들의 의식 속에 그가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영광’이 된다. 덧붙여 그가 말하기를 "이 모든 영광을 저의 어머니께 돌려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나를 ‘알아주기’보다 내 어머니를 알아주십시오."라는 뜻이다.
또 내가 존경하는 분이 나를 찾아오면 나는 "누추한 곳을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한다. 존경하는 그분의 의식 속에 ‘나에 대한 인식’이 있고, 그의 생각 안에 내가 ‘머물기’ 때문에 나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영광은 곧 현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세상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노래하는 것이며, 그것을 ‘우리가 다시 인식하고 되새기는 것’이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어떤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부를까? 칭찬을 받으면 기분이 좋다. 영예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영광을 받는다면, 하느님 때문에 받는 것이다. 우리(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칭찬받는 일을 하게 되면 우리가 잘한 것보다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셨기 때문이다. 이럴 때에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그 훌륭한 일을 이루게 해주셨고, 또 그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기에 그분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노래’를 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항상 현존하시고 함께 계신다. 이 점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도리일 것이다.
<나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목실, 경향잡지 1998년 3월호 중에서>
■ 미사해설 : 화답송, 말씀에 응답하지 않으면 ■
대화는 말하고 듣기이다. 곧 대화는 서로가 주고받는 말이다. 혼자서 말하고 듣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면 상대가 듣고 또 상대가 말하면 내가 듣는 것이 대화이다.
이렇게 정보를 서로 주고받을 뿐 아니라, 또한 한 쪽이 묻고 다른 한 쪽이 대답하기도 한다. 상대가 나에게 묻는데 거기에 맞추어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것을 말하면 ‘동문서답’한다고 한다. 동쪽을 물었는데 서쪽을 가리키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묻는 말에 잘 맞추어서 대답하거나 또는 무슨 이야기에 대해 맞장구를 치듯이 조화 있게 수긍하면 잘 ‘화답’한 것이 된다.
미사에도 ‘화답하는 부분’들이 있다. 특히 말씀 전례가 그렇다. 말씀 전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부분이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공동체가 화답하는 대화형식으로 짜여있다. 제1독서를 듣고 화답송으로 응답하고, 또 제2독서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면 복음 환호송으로 응답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러 오시는 주님을 환영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통해 말씀하시고 사제가 그 말씀에 대해 강론을 하면, 공동체는 신앙고백과 보편 지향 기도로 화답한다. 모든 기도에서나 전례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바로 이러한 대화형식이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와 나누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듣기만 하시고 우리가 말하는 독백형식은 잘못된 것이다.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은 않고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는 어른 말씀을 잘 듣지 않고 자기 고집만 부리는 철부지 아이와 같다. 반대로 하느님께서만 말씀하시고 공동체는 듣기만 하는 것도 하느님과 대화하는 기도일 수 없다. 또 전례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엉뚱한 생각(분심)을 한다면 거기에 합당한 대답을 드릴 수 없다. 당연히 올바른 기도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독서 말씀을 듣고도 ‘화답송’을 하지 않고 묵묵부답하는 경우를 본다. 하느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는데 대답하지 않는 것은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관심을 기울인다면, 화답송의 내용도 쉽게 공감하여 같은 마음으로 화답할 수 있을 것이다. 잘 대답하려면 상대가 건네는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어야 한다.
이렇게 기도는 대화이기 때문에, 독서 말씀에 응답하는 화답송도 말씀 전례에서 근본적인 요소이며, 전례를 거행하는 지금의 우리 공동체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잘 듣는 것이 중요한 만큼 어떻게 화답송을 잘 드릴 수 있을까? 이 노래는 대부분 시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화답 시편’이라고도 불렸다. 화답 시편은 옛날 유다인들이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 성서 봉독을 전후하여 시편을 읊었던 관습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는 4세기경에 독서 후에 시편이나 창작 성가를 흔히 불렀다. 시편 외에도 성서의 찬가나 창작 성가를 많이 불렀기 때문에 화답송은 교회의 아주 오래된 전례 성가에 속한다. 그 이후 교리적인 이유로 대부분의 창작 성가를 멀리함으로써 ‘시편’이 교회의 공식 노래로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시편이, 봉독한 독서에 대한 화답의 노래가 되었다.
그런데 한때(6세기)는 독서에 대한 화답이 아니라 복음 전 노래로 이해되어 독서와 무관한 내용의 화답 시편이 선택되기도 하였다. 동문서답이 아닐 수 없다. 또 7세기에는 ‘층계송’이라고도 하였다. 그것은 독서대보다 한 단계 낮은 층계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으로, 성가대가 거기서 불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은 화답송의 의미로는 적합하지 않은 이름이다.
"화답송은 독서대나 적당한 자리에서 시구(詩句)를 노래하고 교우들이 후렴을 응답한다"(미사 전례 총지침, 36항). 이것은 화답송이 시편이고, 시편도 성서로서 하느님의 말씀에 해당하기 때문에 독서대에서 노래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응송’ 부분은 성가대나 선창자가 하고 공동체는 ‘후렴’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화답송은 독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잘 짜여있으며 찬미, 감사, 고백, 결심, 청원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독서 말씀을 잘 들을 뿐 아니라 독서 말씀과 조화를 이룬 화답송의 응송 부분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가 담긴 하느님의 말씀(성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내 마음을 담아 후렴을 함께 노래하거나 읊어야 한다. 물론 함께 노래할 수 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독서를 듣고 선창자가 화답송 후렴을 선창한 뒤에 공동체가 그 후렴을 따라 반복하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인다면, 그 후렴의 구절을 쉽게 반복하여 외울 수 있다. 책 같은 것이 꼭 눈앞에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상대가 이야기할 때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 또한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물며 상대가 하느님이시라면 더욱더 그러하지 않겠는가. 열린 마음으로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세를 갖는다면, 우리는 쉽게 응답하고 잘 화답할 수 있다. 잘 들으면 거기서 신앙이 생긴다.
<나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경향잡지 1998년 4월호 중에서>
■ 미사해설 : 복음환호송, 깨어 기다리는 존경의 예 ■
한 아이에게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이 아이를 매우 사랑하였다. 아이도 아빠가 자기를 좋아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주신다는 것을 안다. 오늘은 아이의 생일이다. 그래서 아빠가 선물을 사 오신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이는 비록 시간이 늦더라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선물을 사 오실 아빠를 기다린다. 아빠가 나를 위해 선물을 사가지고 오시는데, 오늘 같은 날 제시간에 잠자리에 들 수는 없는 일이다. 늦더라도 기다린다. 또 나를 위해 특별한 것을 준비하셨는데 기다리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아이는 설레는 마음으로 깨어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기분 좋은 것, 나를 매우 기쁘게 하는 일이 있으면, 나는 그것을 기다린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잠도 설친다. 특별히 나를 위한 기쁜 소식을 전해줄 이가 온다면, 설레는 마음, 깨어 기다리는 자세로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해주러 오신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소식이다. 복음은 미사의 말씀 전례 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이다. 복음을 중심으로 그날 미사의 말씀 전례와 미사의 노래들이 구성된다. 복음의 주제에 맞추어 독서(들)이 선택되고, 또 복음의 내용에서 입당송과 영성체송의 주제를 취하게 된다. 이렇게 복음은 그날의 미사를 결정짓는 핵심 내용인 것이다. 복음은 미사의 중심일 뿐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주님께서 전하시려는 주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기쁨을 전해주시는 말씀이다. 곧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는 말씀이다. 부활이 가져다주는 생명의 말씀이다.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이다. 결코 부족함이나 모자람이 없고 바뀌지 않는 ‘절대적’인 말씀이다. 우리를 살게 하고 살리시는 소식이며, 하느님의 완전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좋으신 하느님의 말씀을 이제 곧 말하러 오시는 분을 그냥 앉아서 성의없이 맞아들이지는 않는다. 설레고 기뻐하며 흥겨운 노래라도 부르면서 맞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복음을 듣기 전에 우리 모두는 ‘일어서서’ 복음 환호송을 ‘노래’한다.
복음 환호송은 공동체가, 복음을 선포하러 오시는 주님을 환영하는 노래이다. 자신들에게 말씀하실 주님을 맞으면서 ‘어서 오십시오.’라고 인사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하는 노래이다. 과거에는 복음 환호송을 ‘알렐루야’라 불렀으며, 알렐루야를 하지 않는 사순시기에는 ‘복음 전 노래’라 하였다. 옛 로마 전례에서 몇 가지 환호들은 번역하지 않고 원문(히브리말, 아람말)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아멘’, ‘호산나’ 등과 함께 알렐루야도 그중의 하나이다. 알렐루야의 원뜻은 ‘너희는 주님을 찬양하라.’이지만, 흔히 전례나 기도 중에 공동체가 하느님 앞에서 또는 하느님을 향하여 외치는 기쁨의 환호로서 전례에서 그대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알렐루야는 본래 부활의 의미를 담고 있는 환호이다. 묵시록(19,1.3.4.6)에서 보듯이 알렐루야는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드리는 ‘감사와 승리의 환호’였다. 그래서 사순시기에는 알렐루야를 노래하지 않는 것이다(미사 전례 총지침, 37항). 알렐루야가 그 자체로 전례의 환호노래이므로 복음을 듣기 전에 부르는 노래로서 본래의 의미를 살려 ‘복음 환호송’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부활의 기쁨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순시기는 다른 복음 전 성구로 노래하며, 다른 때에는 모두 복음 환호송인 ‘알렐루야’를 앞뒤로 반복하여 부른다.
그러면 복음 환호송은 어떻게 부르는가? 복음 환호송인 알렐루야가 언제부터 전례에 들어왔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자주 사용되었던 것은 분명하며, 미사에 도입된 것은 아마도 3세기경, 늦어도 4-5세기 이전에 도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영광송이 그랬듯이 처음에는 축제 환호로서 예수 부활 대축일, 부활시기에만 불리다가 점차 주일과 축일 그리고 7세기 이후에는 평일미사에서도 사용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복음 환호송은 복음 전 성구와 함께 복음을 준비하며 주님을 환영하는 노래이므로, 그날 미사 복음의 한 구절이나 하느님 말씀에 대한 자세, 믿음 등을 나타내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한편으로는 제2독서에 대한 화답이기도 하지만, 다음 독서인 복음을 준비하고 맞아들이는 노래이다. 그래서 알렐루야인 복음 환호송은 꼭 노래로 한다. 그 방법은 모든 이가 함께 노래하거나, 성가대나 선창자가 시작하며, 경우에 따라 반복할 수도 있다. 또 복음 환호송을 부르는 양식으로는 알렐루야와 복음 전 성구를 함께 부르거나, 알렐루야 시편이나 알렐루야를 생략한 화답 시편만 부르거나, 화답 시편을 생략하고 알렐루야만 부를 수도 있고, 노래로 하지 못하면 그냥 낭독하거나 생략할 수도 있다(미사 전례 총지침, 38-39항). 그것은 어떤 형식으로 하든지 복음 환호송은 성가대나 독송자의 노래가 아니고 ‘공동체 전체가 함께 부르는 노래’임을 분명히 말해주는 것이다.
간혹 복음 환호송을 복음 봉독 전뿐 아니라 봉독 후에 다시 반복하여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동방전례에서 흔히 행하는 방식이다. 서방교회도 더러 그와 같이 하는 것을 본다. 복음에 대한 기쁨을 노래하는 것이기에 복음을 들은 후에 반복하여 노래하는 것은 그 기쁨을 더욱 북돋우는 것으로 더 좋아 보인다. 주님께서 기쁜 소식을 갖고 오신다. 여기에 우리는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 설레는 마음으로 의식을 갖고, 곧 깨어서 기다리는 노래를 부른다. 이때 부르는 노래가 복음 환호송이다. 주님께서 오시는데 기쁜 마음으로 노래할 뿐만 아니라 노래를 잘 준비하여 불러야 한다. 그것이 주님을 맞아들이는 존경의 예를 갖추는 것이 될 것이다.
<나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목실, 경향잡지 1998년 6월호 중에서>
■ 미사해설 : 신앙고백, 짧은 것이 좋다? ■
교우들이 모임을 할 때면 언제나 기도로 시작한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드린다.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이 대화이며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 기도이다. 그래서 기도는 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꼴을 갖춘 기도문들을 많이 사용한다. "가톨릭 기도서"에 나오는 일상 기도를 비롯한 여러 기도들이 그렇다. 이 기도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다듬어진 것으로, 기도문으로서 적절한 표현들이기 때문에 공통으로 지정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일부는 반복하여 외우는 기도들도 있다. 같은 구절들을 되풀이함으로써 묵상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이 기도들에 대해서도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이런 염경기도(소리기도)는 기도문의 내용이나 구원신비에 관한 의식(생각)을 갖지 않고 기도할 때 공허한 기도가 되기 쉽다. 우리가 자주 드리고 또 반복하는 기도들은 모두 외워서 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래서 꼴을 갖춘 기도문을 욀 때에 의식하지 않으면, 기도가 가져다주는 내적 풍요로움을 느낄 수 없다. 정신을 기울여야 마음을 온전하게 갖추게 되는 것이다.
미사를 봉헌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늘 똑같은 미사 통상문 같은 경우에는 습관적으로 외우게 되는데, 의식을 갖추고 기도해야 한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신앙고백문’이다. 평일미사에서는 외우지 않지만, 주일과 대축일 그리고 지역교회의 성대한 축제일에 이 신앙고백문을 기도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이 모두 암기하고 있으므로, 별 의식 없이 욀 가능성이 많은 기도이다. 신앙고백문은 신앙을 고백하는 기도문이다.
신앙고백문(신경)은 언제부터 시작된 기도인가? 처음 신앙고백을 하는 자리는 세례를 받을 때이다. 지금도 세례 받을 때에 다른 형식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며, 부활 성야 예절 때에 세례를 갱신하면서 신앙을 되묻고 고백하는 똑같은 예식을 거행한다. 이렇게 세례 때에 하던 신앙고백이 미사에 도입된 것은 5세기 때이다.
가장 먼저 비잔틴 교회(동방교회)에서 시작하였고, 6세기에는 스페인 교회와 유럽의 여러 교회에도 도입되었다. 이때에는 주님의 기도 앞에 신경을 바쳤으므로 영성체 준비를 위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또 그 배경은, 아리아니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였으므로, 그 이단을 막고 신앙의 기본 교리를 더욱 분명하게 심어주려고 신경을 바쳤던 것이다. 8세기에 와서 오늘날처럼 복음 다음에 외우게 되었다.
가장 늦게, 11세기에 와서 로마 교회의 미사에 신앙고백문이 도입되었다. 주일과 몇몇 축일, 또 신경과 관련된 예수 성탄과 성령 강림 사이의 주님의 축일, 성모님과 사도들의 축일 등에 신경을 외었으며, 이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신앙을 잘 고백할 수 있을까? 먼저 우리가 미사 때에 고백하는 신앙고백문은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며, 또 하나는 ‘사도신경’이다. 앞의 것은 예루살렘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세례식 때 하던 신앙고백문을 발전시킨 것이다.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는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참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한 것이며,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교회의 공식 신앙고백문으로 결정하여 이름이 그렇게 붙은 것이다.
이 고백문은 일찍부터 동방교회에서 사용되어 왔으며, 로마 교회가 11세기에 미사에 도입하게 된 것이다. 사도신경은 서방의 세례식 때 사용하던 신앙고백문을 발전시킨 것으로 3세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신경은 13세기에 이르러 서방교회(로마 교회)의 공식 신앙고백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신경은 간결하고 신심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미사 때의 신앙고백으로는 보충과 예비의 역할에 한정된다. 또 신경의 주요 내용들을 살펴보면, 창조주 하느님 성부, 외아들 그리스도의 강생 구속, 성령의 천주성, 사도 전승의 보편 교회, 후세의 삶과 죄의 용서 등 핵심 교리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비록 믿음을 습관적으로 실행하더라도 나의 믿음에 관한 의식을 갖고 되새기는 고백의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신앙고백은 지금까지 들었던 하느님의 말씀과 공동체의 화답, 그리고 사제의 강론을 통한 하느님 말씀의 해석 다음에 하는 것으로 공동체의 총체적인 응답이요 ‘아멘’이다. 신앙고백은 독서와 강론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공동체가 여기에 동의하고 응답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되새김질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사도신경’만 줄곧 외워온 경향이 많다. 하지만 오늘날 미사 통상문이 개정된 다음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고백문으로 사용하려는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이 신경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일목요연하면서도 매우 상세하게 담고 있는 편이다. 쉽게 암기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이 신경은 교회에서 우선하는 공식 신앙고백문이다. 이 신경을 ‘눈으로 보면서’ 차근차근 한 구절씩 되새김질 한다면, 아무런 의식 없이 외우지는 않게 될 것이다. 앵무새처럼 나의 믿음을 외우기만 하는 것은 마음을 공허하게 할 수 있다. 비록 더 길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하여 한 구절씩 되새김질하듯 고백하는 것이 믿음을 더 확고히 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나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목실, 경향잡지 1998년 7월호 중에서>
■ 미사해설 : 예물 봉헌 ■
빨래를 해보았는가? 요즈음은 대부분 세탁기로 빨래를 한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신기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세탁할 옷가지와 물과 세제를 넣고 돌리면 옷가지들이 한가운데로 모인다. 신형 세탁기는 가운데로 모이지 않게 만든 것도 있다고 한다. 옷가지들이 ‘가운데로 모이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구심력 때문이다. 또 탈수를 시킬 때 옷가지들이 가장자리로 흩어지면서 물기는 모두 원통 밖으로 튀어나간다. 세탁물의 수분이 바깥으로 튀어나가듯이 ‘밖으로 확산되는 현상’은 원심력 때문이다.
세탁기를 돌리는 데에도 이렇게 과학적인 원리가 적용된다. 변화는 운동을 필요로 한다. 움직이지 않고는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구심력과 원심력이라는 물리적인 원리가 적용된 ‘움직임’이 ‘세탁’이라는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발전 또는 성장이라는 변화를 위해서도 어떤 ‘움직임’이 필요하다. 우리 신앙이 성장하고 교회가 발전하는 데도 이처럼 구심력과 원심력의 두 방향에 의한 운동이 있다.
① 교회는 먼저 믿는 이들이 모여야 한다. 모여서 친교를 나눈다. 친교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교회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때,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란 말은 신약성서에서 ‘Koinonia’라고 한다. 함께(koi) 모인 것(nonia)이란 뜻이다. 교회 모습의 구심적 움직임이다.
② 교회는 또한 나누어야 한다. 확산되고 흩어져야 한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필요한 이들에게 모든 것이 되어주고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곧 ‘봉사하는 공동체’이다. 성서에서 이것을 가리켜 ‘Dia-konia’라 한다. 확산하여(dia) 나눈 것(konia)이란 뜻이다. 교회 모습의 원심적 움직임이다.
이렇게 교회의 모이는 모습과 확산하는 모습, 두 가지 방향의 운동은 미사 전례 안에서도 잘 드러난다. 성찬 전례를 시작하는 예물 준비, 특히 봉헌 예식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느님의 백성이 모여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화답하였다(말씀 전례). 성찬 전례를 시작하면서 예물을 준비한다. 예물을 준비하는 것은 봉헌의 의미도 있지만, 식탁을 차리고 준비하는 것이 원래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예물 준비’에서 ‘예물 봉헌’의 의미가 더 강조되었을까? 처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최후 만찬에서 행하셨듯이 ‘빵과 잔을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것에 따라, 빵과 포도주와 물을 제대로 가져갔던 동작이었다.
그러다가 4세기경부터는 교우들이 많아지고, ① 빵과 포도주뿐 아니라 ② 가난한 이들을 돕고 ③ 성직자 생활 부양과 교회 운영에 필요한 예물을 갖고 오게 되었다. 그래서 예물 준비 행렬이 길어지고 봉헌의 의미가 점차 강조되기 시작했다.
11세기 이후부터는 화폐제도가 발달하여 예물 봉헌이 헌금으로 바뀌고 심리적인 이유와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예물 준비’를 ‘제물 봉헌 행사’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17세기에는 아예 ‘봉헌 예식’이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예물 준비의 뜻만 있고 ‘봉헌’의 의미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예물을 준비하면서 바치는 제물은 교우들이 봉헌하는 예물이 아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이다. 그것은 뒤따라오는 감사기도에서 십자가의 제물로 축성되어 ‘봉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물 준비에서 신자 각자의 위치에서는 ‘봉헌을 준비하고 참여’하는 것이다.
미사에 참석한 교우들은 ‘예물 준비’ 예식에서 예물(헌금)을 드림으로써 ‘봉헌하게 될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을 나타낸다. 봉헌은 자기 자신을 전부 바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나의 ‘온몸’을 다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예물을 드림으로써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봉헌에 동참한다. 자신을 바친다는 정성과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또한 마음을 모아 봉헌하기 위해 예물 준비 동안 ‘봉헌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모아 드리는 신자들의 (예물) 봉헌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① 빵과 포도주를 드림으로써 그리스도의 봉헌에 참여하고, 헌금을 함으로써 ② 가난한 이들을 돕고 ③ 성직자 생활 부양과 교회 운영을 위한 것이 된다.
여기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다. 교회는 모이는 일, 모여서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며 ‘친교’를 나누지만, 이 나눔의 공동체는 결국 ‘봉사’하는 교회임을 말해준다. 교회 운영이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를 돕는 일’이 먼저 해야 할 일임을 말해주고 있다.
‘가난’이란 표현은 물질에 관한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무엇을 필요로 하는 이들 모두’를 가리키기도 한다. 교회가 모여서 친교를 나누는 구심적인 움직임뿐 아니라, 이웃에 봉사하고 나누는 ‘원심적인 노력’들이 필요하다.
예물을 준비하는 동안 봉헌 노래를 부르면서 ‘봉사하는 교회’가 되기를 다짐해 보자. 이 시대가 이 점을 필요로 하는 때이다.
<나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목실, 경향잡지 1998년 8월호 중에서>
■ 미사해설 : 거룩하시도다 ■
누구든지 예쁘다, 멋있다고 말해주면 기분이 좋다. 아름다움은 좋은 것이기에 기분이 흐뭇한 것이다. 세상에는 추한 것도 적지 않다. 날마다 뉴스나 신문기사에 오르내리는 것들을 보면 대부분 자연과 인간에게 해를 끼쳐 아름다운 세상에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본래 세상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더라고 하셨다. 아름다운 세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선한 것을 추구한다. 악한 것을 멀리하고 선한 것을 찾는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본성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악한 것들이 적지는 않지만 선한 것들이 더 많다. 본래 세상은 모두 선한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더라고 하셨다.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선하고 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고 진실은 밝혀진다고 예수님이 그랬다(마르 4,21 참조). 우리도 숨김없이 진실하려고 노력한다. 세상에 거짓된 것들이 적지는 않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듯이, 진실 앞에서는 거짓도 사라진다. 본래 세상은 있는 그대로 진실한 모습이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더라고 하셨다.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은 감추임 없이 진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래 세상은 아름다우며 선하고 진실한 모습으로 태어났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이것을 우리는 ‘진, 선, 미’라고 한다. 철학자들은 이 진선미가 합쳐진 것이 ‘거룩함’이라고 하였다. 달리 말하면 거룩함[聖]은 완전한 진선미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이 만드신 세상 만물도 거룩한 것으로서, 진실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것이다. 당연히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진실하신 분, 끝없이 선하신 분, 무한히 아름다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은 거룩하시다.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전례에서도 이 거룩하심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의 거룩하심을 우리는 미사의 감사기도 시작 부분에서 노래 부른다. 감사기도는 감사송으로 시작하는데, 이 감사송 끝부분에 온 회중이 큰소리로 ‘주님의 거룩하심을 환호’한다. ‘거룩하시도다’는 미사에서 창미사곡 가운데 하나인 1급 성가에 해당된다. 그래서 집회에 모인 회중 전체가 천상의 천사들과 성인들과 함께 주님의 거룩하심을 노래한다(미사 전례서 총지침, 55항 나). 1급 성가란 다른 것은 노래로 하지 않더라도, 이것을 가장 우선하여 노래로 불러야 하는 중요한 공동체 성가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감사기도를 시작하는 감사송에서 왜 주님의 거룩하심을 우렁차게 노래하는가? 성찬 전례의 감사기도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크나큰 사랑의 업적을 기억하고 감사드린다. 감사드림은 감사송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감사기도 전체가 감사의 내용이다. 주님께 감사드림은 자연스럽게 ‘찬양의 자세’로 전환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감사송을 마치면 온 회중이 다 함께 큰소리로 ‘주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한다. 찬미하는 환호이기에 일찍이 2세기경부터 전례 안의 성가로 사용되었다. 정식으로 등장한 것은 5세기이며, 이 시대 대부분의 감사기도문들이 이 ‘거룩하시도다’를 수록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이 환호노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거룩하시도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하늘과 땅에 가득 찬 그 영광! 높은 데서 호산나!)는 대부분이 이사야서 6장의 내용으로 성부이신 야훼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노래한다. 반면 후반부(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높은 데서 호산나!)는 시편 118편과 루가 복음 19장의 내용으로 여기서 ‘주님’은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아니즘의 영향을 거슬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똑같은 ‘주님’이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송에서 부르는 ‘거룩하시도다’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간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께서 지금 이 자리에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제대에 오심을 환영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노래는 ‘전체 회중’이 주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우렁차게 ‘노래불러야’ 그 진가를 다 드러낼 수 있다. 그런데 일부 미사 전례에서는 다른 부차적인 부분들을 노래하려고 힘쓰면서도, 정작 이 ‘거룩하시도다’를 그냥 외는 경우를 본다. 더 중요한 것을 소홀하게 다룬 경우이다. 다른 것은 모두 노래로 하지 않더라도 이것만은 1급 성가이기에 노래로 불러야 할 것이다.
주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해야 한다고 하셨다(마태 5,48). 주님의 완전하심과 거룩하심을 기억하며 큰소리로 외치고 되새기면 그분의 모습을 닮게 된다. 진실하시고 항상 선하시며 아름다우신 모습을, 주님의 거룩하심을 찬미함으로써 배워 닮을 수 있다. 우리도 주님의 거룩하심을 우렁차게 노래하여 주님을 더욱 닮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래 세상의 모습을 더욱 잘 드러내도록 해보자. 세상은 하느님의 훌륭한 작품이 아닌가.
<나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목실, 경향잡지 1998년 9월호 중에서>
■ 미사해설 : 주님의 기도 ■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 자신의 아름다운 경험을 이야기한다. 상대방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함께 아름다운 모습을 연상하며 자신도 경험했던 유사한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그러한 일에는 유사한 감정이 있다고 말한다. 서로 공통된 화제에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주고받음으로써 자신들도 같은 기쁨을 경험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 이 두 친구는 자신들의 아름다운 삶을 서로 공유하게 된다.
웃어른이나 선배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자신의 삶에서 여러 가지 경험한 바를 이야기한다. 이러이러한 것은 참 좋았고 기쁜 것이었다고, 또 저러저러한 것은 슬프고 안타까웠다고 말한다. 그러면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자신도 그러한 일에는 유사한 느낌을 가졌다고 하며,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덧붙여 설명하기도 한다. 또 그런 일에 다른 관점에서 볼 때 또 다른 느낌이 있다는 것도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대화를 나누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가진 지식이나 정보를 교환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자신의 느낌과 감정, 덧붙인 해석이 뒤따른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심거리를 이야기하고 같은 화제를 나눌 때 대화가 성립된다. 요즈음 유행하는 ‘사오정 시리즈’는 같은 관심과 화제를 벗어난 엉뚱한 대답이나 다른 화제를 불현듯 끄집어내는 유머이다. 어찌 보면 선문답 하듯 한다. 오늘날 우리 세태를 반증하는 해학이지만, 진지한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유머가 되지 못한다. 해학도 그 자체가 대화로 이루어지며, 그 근원이 원래 이미 서로가 공유하는 공감대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화는 이야기로 구성되며 그 이야기는 담론으로서 확대된다. 기본적으로 같은 관심사와 유사 또는 상이한 느낌의 교류가 대화로 이루어진다.
기도도 대화이다. 일상의 담론이 사람들 사이의 대화라면,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이다. 아주 친밀한 대화이다.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므로 동일한 관심사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과 가깝게 만든다. 기도는 하느님과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든다. 내 생각은 이러이러한데 하느님 생각은 무엇인지 묻는다. 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귀담아듣는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자리가 된다. 기도는 이렇게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하느님과 일치하게 만든다. 곧 하느님과 같은 생각, 같은 느낌, 같은 관심사를 갖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기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기도는 무엇일까? 단연 ‘주님의 기도’이다. 이것은 일찍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이다. 제자들이 예수께 여쭈었다.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었는데,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셨다(루가 11,1-4 참조). 제자들이 기도할 줄을 몰라서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유다인들은 어느 누구나 다 기도를 잘하였다. 하루에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신앙고백문(쉐마)’을 외웠고, 또 덧붙여 하루에 세 번씩 ‘18개의 축복 기도문(쉐모네 에스레)’을 외웠다.
예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날마다 기도를 부지런히 바쳤기에, 제자들이 기도할 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예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하였다. 그것은 자기들의 공동체가 이스라엘 공동체와 구별되는 어떤 기도를 요구한 것이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과 대화하는 데 특별히 구별되는 기도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초대 공동체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이 ‘주님의 기도’를 하루에 세 번 외웠다. 이스라엘 백성이 외던 기도를 대신하여 바쳤다. 이 기도로 그들과 구별되는 그리스도 공동체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셨다. 기도의 내용을 보면, 더없이 아름다운 기도임을 잘 알 수 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과 더욱 가깝고 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느낌과 같은 관심사를 갖도록 만들어준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아빠)라 부른다. 우리와 차원이 다른 분이시지만("하늘에 계신"), 감히 ‘아빠’라고 하느님을 친하게 부르고 이야기를 나눈다. 사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기보다는 우리 이야기만 늘어놓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에서, 전반부는 아버지의 의지를 먼저 기억하고, 그 뜻하심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후반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과 도움을 청한다.
이제 미사에서 영성체를 시작하기에 앞서 주님의 기도를 함께 드린다. 영성체는 성찬례(미사)에서 절정에 속한다. 곧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앞서 주님의 기도를 외는 것은 영성체를 준비하는 것이다. 주님께 감사드리고 우리를 주님과 더욱 가깝게 일치시킨다. 주님과 하나 되는 자리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면서 가장 아름다운 ‘주님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성대하게 미사를 봉헌하면 많은 경우 주님의 기도를 노래로 부른다. 그래서 이 노래는 흔히 가장 아름다운 선율과 가락으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아름다운 노래에 우리의 마음을 실어 하느님과 같은 관심사, 같은 생각, 같은 느낌을 갖도록 해보자. 그러면 영성체로 주님과 이루는 일치가 더욱 아름답고 풍요로울 것이다.
<나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목실, 경향잡지 1998년 10월 중에서>
■ 미사해설 : 행렬과 영성체송 ■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Agere seguitur esse). 라틴어 격언이다. 자신의 신분, 직업, 의식 등에 따라 거기에 걸맞은 행동이나 실천이 이루어지게 마련이라는 말이다. 마음을 두는 곳에 생각이 끌리고, 생각이 가는 곳에 몸이 끌린다. 사람은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거나 마음만 품지 않는다. 생각과 마음이 있으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사람은 정원의 화초나 나무처럼 가만히 앉아있지 않는다. 움직이고 걷는다. 길을 간다. 길을 걸을 때는 어떤 목적지를 생각하고 걷는다. 시내를 나가보면,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길을 간다. 길은 여러 갈래이고 나름대로 걷는 길의 목적지가 다르기에 저마다 서로 다른 길이다. 그런데 일련의 무리를 지어 길을 걸을 때가 있다. 같은 지향을 갖고 목적지가 같으며, 같은 시간에 무리를 지어 걷게 되면, 자신들의 생각이나 마음을 집단적으로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이 된다. 원래 ‘데모’가 그런 것이다.
데모는 ‘데몬스트레이션’을 가리키는 말로 ‘군중(데모)’이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것(몬스트레이션)’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잘못된 관행이 인식되어서 데모의 원래 의미인 이른바 ‘평화적 시위’가 왜곡되어 있다. 데모는 전투가 아니다. 일련의 같은 주장이나 의견을 집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무리를 지어 길을 걸음으로써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홍보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행렬’한다고 한다.
같은 지향, 같은 목적을 두고 함께 걷는 것이 행렬이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일련의 행렬을 다양한 행사에서 볼 수 있다. 국군의 날 기념 퍼레이드 같은 것이 행렬이다. 엑스포 개막식 퍼레이드도 같은 것이다. 무언가 자신들(행사)의 주요 부분들(주장)을 보여주는 것이 이런 행렬이다. 행렬은 이렇게 여럿이 함께 같은 생각이나 마음을 집단적으로 보여주고 나타내는 것이다.
일상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뜻하는 바를 강하게 나타내려고 행렬하듯이, 우리가 거행하는 미사에서도 행렬을 한다. 미사에서 행렬은 세 번 한다. 입당 행렬, 봉헌 행렬, 영성체 행렬이 그것이다. 미사에서 하는 세 번의 행렬은 그 구성도 똑같다. 행렬을 마치면 꼭 주례자의 맺음 기도가 따른다. 입당 행렬을 한 다음에는 본기도, 봉헌 행렬에는 예물 기도, 영성체 행렬 다음에는 영성체 후 기도를 드린다.
입당도 행렬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주례자와 봉사자만 입당하고 또 제대 뒤편의 제의방에서 잠깐 등장하는데 행렬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원래 입당은 회중(백성)도 함께 하였다. 회중이 모두 성당 입구에 모이고, 준비를 마치면, 전체가 노래하면서 회중이 입당하고 주례자는 맨 나중에 입당하였다. 그러다가 차츰 회중은 성당 안에 자리를 잡고 준비하고 주례자와 봉사자만 성당 입구에서 입당 행렬을 가졌다가, 지금처럼 편의에 따라 제대 뒤편에 제의방을 마련하여 입당하게 된 것이다. 하여간 입당도 행렬을 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이렇게 미사 때 갖는 세 번의 행렬은, 행렬의 원래 의미대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모아 공동으로 몸소 표현하는 데에 있다. 입당 행렬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는 행렬이다. 하느님의 집에 함께 들어감으로써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새롭게 자각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던 세례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성당 입구에 성수대를 마련하여 들어가면서 성수를 찍어 십자성호를 긋는 것이다.
봉헌 행렬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사에 참여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한다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상징인 제대를 향해 행렬하여 나아간다. 그래서 예배당에서 잠자리채 돌리듯이 헌금을 하는 것은 봉헌과 예물 준비에 적합치 않는 것은 당연하다.
또 영성체 행렬을 통해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행위로 나아간다. 마음과 생각뿐 아니라 온몸을 움직여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행렬은 이렇게 주님을 향한 마음과 생각을 내 몸으로 표현하고 행동으로 직접 옮기는 것이며, 또한 몸을 움직여 나의 마음과 생각을 거기에 합치시키는 것이 행렬이다.
그래서 행렬하는 동안에 노래를 한다. 그것은 하나같이 행렬에 참가하는 이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입당 행렬을 하는 동안 입당 성가(입당송)를 하는 것은, 집회자들의 일치를 강화하고 전례시기와 축제의 신비를 깨닫도록 마음의 준비를 시킨다고 했다(미사 전례 총지침, 25항). 봉헌의 노래도 마찬가지이다. 예물 준비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제사에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참여를 갖도록 마음을 끌어준다. 영성체 행렬에서 부르는 노래는 그리스도와 완전한 영적 일치와 그 일치로 마음의 기쁨을 소리 맞춰 표현하고 행렬하는 형제들을 더욱 하나가 되게 만든다(총지침, 56항).
입당송과 영성체송은 그날 복음에서 따온 주제를 내용으로 담고 있다. 그래서 입당송이 미사를 시작하면서 마음을 준비시킨다면, 영성체송은 복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하느님 말씀 전례를 되씹는 자리이다.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영성체를 하는 동안 그날 미사의 말씀 전례에서 부각된 주제를 재음미하는 것이 영성체송이다. 그래서 영성체송은 사제가 영성체를 시작할 때부터 외거나 노래한다. 보통 영성체 시간이 긴 편이므로 영성체 노래를 한다. 영성체 성가를 하더라도 영성체송을 생략하지는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앞선 두 번의 행렬과 더불어 영성체 행렬을 앞두고 외는 ‘영성체송’은 이제 온전히 주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주님의 말씀을 또다시 상기하고 마음에 되새기게 만든다. 마음의 표현은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우리는 행동에 앞서 다시 되새기고 행동을 통해 마음을 다시 가다듬는 것이 된다.
<나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목실, 경향잡지 1998년 11월호 중에서>
■ 미사해설 : 파견 예식 ■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시간은 변화의 측정 단위이다. 시간은 순간순간 우리가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순간의 연속이 시간이다. 시간의 한 지점인 각 ‘시(時)’와 ‘시(時)’ 사이의 연속과 연결이 시간이다. 순간은 다른 순간으로 넘어간다. 그것이 흐르는 시간이다. 순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제나 현재이면서 금방 과거가 되고, 금방 다가올 현재는 미래이다. 그래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언제나 함께 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불완전하다. 완전을 향해 발전하고 진화한다. 그렇게 변화하는 것들은 시간의 제약을 받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신 분이시기에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시간이 없으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다는 말이 아니다.
완전하신 분이시기에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한결같이 성실하신 분이시며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이시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늘 ‘현재’로 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느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함께’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지구가 돌고 달이 지구를 회전한다. 또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주기(리듬)라고 한다. 하루, 한 달, 한 해라는 주기가 여기서 나온다. 한 주간도 한 달을 네 등분하여 나눈 주기이다. 이렇게 주기를 따라 흐르는 시간이 ‘우주의 시간’이다. 여기에도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 우리는 리듬을 갖춘 주기의 시간 흐름 속에 산다. 그래서 매번 한 해가 바뀌고 한 달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면 똑같은 날, 똑같은 시간을 맞게 된다. 시간의 리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구원 업적(사건)’이 있다. 시간을 초월하신 하느님께서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역사 안에 이루신 업적이요 사건이다. 그래서 구원 사건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 속에 들어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건’을 그 ‘시간’에 ‘기념’하여 거행한다. 그러면 그 구원 사건은 우리 가운데 다시 ‘재현’된다. 그것이 ‘전례’이다. 전례는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기념하여 거행하는 것이다. 그 사건이 구체적으로 그 시간에 ‘실현’되는 것이다. 전례를 통해 그 시간에 하느님을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만나는 것이며, 그 시간은 ‘우주의 시간’ 속에 있는 우리에게 ‘구원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미사를 포함한 전례 시간은 그래서 ‘하느님과 만나는 체험의 시간’이며, 하느님을 만나기에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시간은 이렇게 자꾸 흐른다. 한 해를 마감하고 있다. 또 얼마 지나면 새해가 시작된다. 마침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한다. 이제 한 해를 마치게 되면,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고 새해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무슨 일이든지 마칠 때가 되면 그 일을 돌이켜보고 되새기면서 일의 본래의 모습, 본래의 정신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한다.
미사를 마치면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마침은 새로운 시작이라 했다. 미사 전례를 통해 하느님과 만나고 사랑을 체험한다. 미사를 마치면서 이 점을 생각한다. 또 미사 전례를 통해 얻은 기쁨과 행복을 이제 일상에서 새롭게 시작하기를 다짐한다. 미사에서 주님을 만나고 사랑을 체험하였던 기쁨을 간직하고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이 미사의 ‘파견’이다. 그래서 파견은 지금의 만남에서 떠나 이웃에게로 다가가는 것이다. 우리만의 그리고 우리 공동체 사이의 교류와 나눔이 이제 나의 일상과 이웃과의 새로운 만남, 우리가 받았던 은혜와 기쁨을 나누는 일을 시작한다.
미사의 파견은 마침 예식에서 강복을 한 다음 이루어진다. 강복은 파견을 앞두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함께 머무르시기를 기원하는 축복이다. 그리고 파견은 대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사를 통해 이루었던 체험과 기쁨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 기쁨을 일상에서 똑같은 마음으로 간직하고 ‘평화’를 구현하기를 기원한다.
파견 예식은 중세(6-7세기)에 와서 도입되었다. 매우 간결하고 단순하였다. 다만 ‘끝났습니다. 가십시오(Ite, missa est)’ 정도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동방과 다른 교회의 파견 내용을 보면, ‘평화 가운데 가십시오.’ ‘평화로 나아갑시다.’ 등의 표현을 썼다. 그렇다. 미사 전례를 통해 얻은 은총과 만남의 기쁨은 우리의 일상에서 ‘평화’로 드러난다. 기쁨을 간직하고 사는 이들은 마음의 평화를 갖고 생활하며 이웃들과 평화를 도모한다. 이제 일상에서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고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우리말 파견 기원에서 그 점을 잘 말해준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외에도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가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눕시다.’ 또 더 나아가 ‘주님을 찬미합시다.’ 라는 표현들을 예로 제시하였다. 그렇게 커다란 기쁨을 주심에 감사하고 그 기쁨을 간직하고 살기를 다짐하면서 우리는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큰 소리로 화답한다. 그리고 곧바로 그 기쁨을 표현하는 ‘파견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교회는, ‘미사 전례에 참여한 교우들이 주님을 찬미, 찬송하며 선행을 하도록 파견된다.’(미사 전례 총지침, 57항 2)고 말한다.
미사 전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시간 속에 오신 분을 만나고, 우리를 구원하신 사건을 또 다시 체험하였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과 함께하였고, 주님을 뵈었기에 기쁨이 가득하다. 그 기쁨이 가득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벅차고 가슴 뿌듯하게 파견 노래를 불러보자. 다 함께 큰소리로 파견의 노래를 부르자. 그래서 미사 전례를 통해 받은 은혜를 우리의 일상에서 실천하여 드러내고 이웃들과 평화를 이루도록 다짐해 보자.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기정 다니엘 신부,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목실, 경향잡지 1998년 12월호 중에서>
■ 성찬례 안에서 평화의 인사 ■
최기산(인천 가톨릭 대학교 교수/신부)
1. 형식적 인사와 진실한 인사
오래 전 일이다. 주임 신부로 있을 때였는데 처음 보는 할머니가 주일 미사 후 층계를 힘들게 내려가시기에 손을 잡아 드리면서 다정히 인사하였다. 너무 바빠서 어디서 오셨느냐고 묻지도 못했다. 다음 주일에도 그 할머니가 나타나셨다. 나는 또 다정히 인사하며 손을 잡아드렸다. 그리고 나서 미사 후 수백 명이 몰려나오기에 성당 입구에서 그저 다정히 “할머니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만 했다.
얼마 후 어떤 부인이 나를 보자고 했다. 그녀는 내게 “신부님,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하는 것이다. 나는 어려운 부탁 말고 쉬운 부탁을 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뜻밖의 부탁을 했다. “저희 시어머니께서 여기 한 번 오시더니 매주일 여기로 성당을 다니시겠다는군요. 신부님이 좋으시다나 봐요. 신부님께서 서울 성당으로 다니시라고 말씀 좀 해주세요. 노인께서 매주일 여기로 오시기는 힘드시거든요.”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내게 말하였다. 며느리인 그녀는 신자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어머니가 매주일 성당에 데려다 달라고 하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정을 들어보니 딱하여 할머니께 말씀드리겠다고 약속하였다. 다음 주일 어김없이 그 할머니가 나타나셨다. 나는 그 분의 손을 꼭 잡아 드리면서 “할머니, 어디 사세요?” 하고 물었다. “서울 살아요.”, “그런데 왜 힘들게 여기까지 오세요?”, “신부님이 좋으니까. 인사도 잘하고 친절하게 해주니까.”
나는 그분의 손을 잡고 참으로 힘든 말을 해야 했다. “할머니, 여기까지 오시기는 너무 힘드세요. 예수님은 서울 성당에 가셔도 만나실 수 있어요. 아마 예수님은 할머니가 서울 성당에 다니시는 것을 더 좋아하실 거예요.”
할머니 안색이 변하였다. 참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야 신자들이 너무 많아서 본당 신부가 일일이 따뜻한 인사를 해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 번의 다정한 인사가 그 할머니에게 그토록 큰 감명으로 다가갔다는 것은 의미 심장하다. 만일 내가 그 할머니께 형식적인 인사만 했다면 멀리까지 찾아오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정이 그리운 존재이다. 특히 한국인에게 정이 이성보다도 앞서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인간의 정은 누구에게나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사는 사람들도 정이 그리워서 때로는 고독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서로의 고독을 달래면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랑을 그리워하는 인간 세상에서 다정한 인사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준다. 그래서 “인사하여 뺨맞는 일은 없다.”라는 말까지 있나 보다. 그러나 인사도 인사 나름이다. 형식적인 인사가 있는가 하면 진실한 인사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세미나나 파티에 참석하게 되면 형식적인 인사를 많이 나누게 된다.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둘 수도 없고, 어쩌면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북적대는 관광지 음식점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만리 타향에서 온 사람들이고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기에 푸대접을 하는지도 모른다. 다시 올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기에 입으로는 “어서 오세요.” 하면서도, 속으로는 ‘오거나 말거나’라고 말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형식적인 인사를 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장사를 계속하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인사의 특성을 살려, 교회는 영성체에 앞서서 진실한 인사를 서로 나누도록 한다.
2. 평화의 인사가 지닌 의미
영성체 전에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도록 하는 이유는, 평화를 주려고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려는 사람이 아직도 미워하는 마음이나 시기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면 안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서로 마음 상한 일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고 나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셨다.1)
예물을 바치는 사람이 화해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면,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려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기 위해서는 성찬례에 참석한 사람들간에 화해와 일치가 필요하다. 서로 미워하면서 영성체를 한다면 성체를 모독하는 것이다.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서로 형제며 자매다. 그러므로 서로 평화를 기원해 주고 격려하여 더욱 기쁜 마음으로 영성체할 수 있다.
평화 예식이 미사에 들어온 것은 2세기부터다. 155년경에 기록된 유스티노의 [호교론]에는 말씀전례를 마감하는 공동 기도를 바친 다음, 신자들은 평화와 화해의 표시로 서로 입맞춤으로 인사를 하고서 예물을 봉헌하였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동, 서방 교회의 전례에서는 일찍부터 말씀전례 끝에 평화 예식을 거행하였고 동방에서는 이 관습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다.2)
평화 예식은 ‘평화의 기도’가 있은 다음, 사제가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며 평화를 기원한다. 이에 신자들은 “또한 사제와 함께” 하며 응답한다. 그리고 나서 사제는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라고 권유한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요령은 지역의 관습에 따라 묵례, 합장, 입맞춤 등을 할 수 있다.3)
개방된 문화가 숨쉬는 지역에서는 포옹이나 입맞춤으로 할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지역에서는 악수나 묵례 정도로 대신할 것이다.
우리 나라의 전통은 악수나 묵례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나누는 평화의 인사가 얼마나 진지할까? 너무 형식적인 것은 아닐까? 세대간이나 빈부, 학력 차가 다양한 사람들이 적어도 성당에서만은 한 가족임을, 같은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식하고 서로에게 진심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인사를 나누는 것일까? 아니면 하라니까 마지못해 하는 것일까?
성찬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평화의 인사를 나누셨는지 살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서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인사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들은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평화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사도 토마스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믿지 못하겠다고 단호하게 밝혔다. 자신의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보고 나서 믿겠다는 것이었다. 8일 뒤에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26) 하고 인사하셨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만나실 때마다 평화를 빌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떠나실 때가 오자 유언처럼 마지막 분부를 하신 때도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루가 24,36) 하고 인사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우리는 그분의 소망대로 서로에게 평화를 빌어주면서 평화를 간직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3. 바람직한 평화의 인사
“자모이신 성교회는 모든 신자들이 제반 전례 의식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능동적으로 완전히 참여하도록 지도되기를 원한다. 이와 같은 참여는 전례 그 자체의 성질이 요구되는 바이며, 또 간택된 백성, 왕다운 사제, 거룩한 국민,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인 그리스도 신자는 세례로 인하여 이에 대한 권리와 직무를 가지고 있다.”4)
공의회 문헌이 밝히는 바와 같이 사목자들은 평화의 인사가 형식적이 되지 않도록 가르치고 평신도들은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형식적인 인사가 많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라고 사제가 말하면 어떤 이는 고개만 끄덕이며 남의 인사를 성의 없이 받는가 하면 어떤 이는 심지어 화난 얼굴로 인상을 쓰면서 고개만 끄덕이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남들에게 먼저 인사하기보다는 남들이 나에게 인사해 주기를 바라면서 거만한 자세로 서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뒤를 둘러보면서 인사하는 적극파도 있다. 참으로 각양각색이다. 일부 본당에서는 평화의 인사 시간을 3분 정도 주면서 자신이 모르는 사람 10명에게 의무적으로 인사를 나누도록 권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대축일 같은 때에는 이런 방법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느 집에 방문하든 그 집에 평화를 먼저 빌어주라고 하셨다.5)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빌어주는 것은 남에게 줄 수 있는 선물 가운데 귀중한 선물이다.
4. 한국적인 평화의 인사
한국식 평화의 인사로는 무엇이 어울릴까?
내가 미국에 가서 처음 소개 받은 사람은 초등 학교 교장 수녀였다. 미국 신부가 나를 소개하자 그녀는 돌진하는 식으로 내게 달려들어 포옹하고 내 볼에 키스하였다. 그녀는 친근함의 표시로 또한 반갑다는 표시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90kg도 넘는 큰 몸집이었다.
한국인에게 포옹이나 키스는 어울리지 않는다. 만일 부부가 다정히 미사에 갔는데 평화의 인사 시간에 남편이 옆에 있는 젊은 여자와 포옹을 한다면 부인은 기절하고 말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낯모르는 남자와 키스를 했다면 남편은 기겁을 하고 부인을 데리고 나갈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성당에 얼씬도 못하게 할 것이다.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포옹이나 키스는 평화의 인사로 적합하지 않다.
악수는 웬 만큼은 보편화되었지만 서로 모르는 남녀가 악수한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인간은 신체의 접촉으로 가까워진다.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말로만 사랑한다고 외치기보다는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업어주고, 뽀뽀해 주어야 정상적으로 잘 자랄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른도 친구가 되려면 말로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서로 어깨동무도 하고, 악수도 하고, 때로는 치고받기도 해야 한다. 그러므로 평화의 인사를 할 때 입으로만이 아닌 악수를 한다는 것은 사랑의 표시로 제격이다. 그러나 이 또한 이성간에는 어색하다. 또한 처음 보는 동성끼리도 악수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어색한 악수는 오히려 기쁨보다는 불안을 낳을 수도 있다.
한국을 일컬어 동방예의지국이라 했으니 손을 합장하고 정중히 인사하며,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정성스럽고 자연스러워 보일 뿐 아니라 품위 있어 보인다. 아주 가까운 사람끼리나 가족끼리는 악수라든가 가벼운 입맞춤도 괜찮을 것이다. 더 나가서 포옹도 괜찮을 것이다. 형식이야 어떻든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 팔짱을 낀 채 성의 없는 몸짓을 하며 평화를 빈다고 말한다면, 그 인사를 받는 사람에게 참 평화가 전달될 수 없다.
영성체 전에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기뻐하고, 축하해 주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영성체로 한 몸을 이루게 될 터인데 서로 기뻐하자는 인사를 나누면서 시큰둥한 자세로 있다면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진실이 없는 전례의 형식은 자칫 신앙의 부흥이 아니라 신앙의 퇴조를 부를 위험이 있다.
하느님 나라에 가서도 함께 영원히 살아가야 할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다정한 인사를 나누고 평화를 빌어 주는 사랑의 사람들이어야 한다. 공의회 문헌에는 “미사 순서는, 각 부분의 고유한 뜻과 상호 연관성이 더 명백히 드러나고 또 신자들의 경건하고 능동적인 참여가 더 쉽게 이루어지도록 개정되어야 한다.”6)고 했다. 미사 때마다 하게 되는 평화의 인사가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좀더 의미있고 능동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사목자와 신자들은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5. 삶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평화의 인사
미사 때에 나눈 평화의 인사는 실제의 삶과 연결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미사 때에는 친절한 미소로 평화를 기원하지만 일단 성당 밖으로 나가면 안면을 바꾸고 비신자와 다를 바 없는 인생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안될 말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이마에 십자가를 그으면서 그럴 수가 있느냐?” 하고 한탄하는 사람도 보았다. 가톨릭 신앙 생활 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평신도들이 교회 생활에 대한 회의를 갖고 있는 이유들 중 신자에 대한 실망이 46.1%나 되었다.7)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평화의 인사를 성당에서 했다면 그 평화가 신자들의 삶 속에서도 가득 넘쳐야 한다. 서로 비방한다든지, 미워하거나 시기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특히 성당의 어떤 단체에 가입한 경우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고 힘겨루기를 한다든지 비방하거나 편가르기를 하여 남들에게 나쁜 표양을 주어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성당에 나오는 이유를 물으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과연 우리는 평화를 그들에게 주고 있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때때로 새로 영세한 사람들에게 소감을 물으면 “영세를 해서 좋기는 하지만 성당은 너무 메마르고 찬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차디찬 눈초리에서 평화를 느낄 수는 없다. 부드럽고 친절한 말씨와 미소에서만 평화를 느낄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유명한 평화의 기도를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 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라고 하는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참 평화를 전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결심을 한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평화가 아쉬운 세상이다. 가정마다 직장마다 평화보다는 근심과 슬픔이 가득하다. 경제적으로 온 나라가 초토화된 듯한 느낌마저 드는 것은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실직자들이 생겨나고, 이 때문에 어깨 쳐진 남자들이 가정에서, 사회에서 슬픔 속에 살아간다. 많은 가정들이 불화하여 깨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참 평화가 물질의 풍요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릴 소명이 있다. 또한 서로가 어려움을 나누는 사랑을 통해서만 이 사회에 참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실천하고 이웃들에게도 전해야 하겠다.
1) 마태 5,23-24 참조.
2) 이홍기, [미사 전례], 분도 출판사, 1997, 284면 참조.
3) Allan Bouldy, Editor, “Catholic Rites Today”, The Order of St. Benedict, Inc.
Collegevilie, Minnesota, 1992, 29면.
4) 전례헌장, 14항.
5) 마태 10,12-13 참조.
6) 전례헌장, 50항.
7) [신앙 생활 실태], 가톨릭 신앙 생활 연구소, 1995, 122면 참조.
<사목, 1998년 7월호 / CBCK 홈페이지에서>
첫댓글 오빠 항상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