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박사
일제 강점기에 한 젊은이가 의대 입학시험을 보면서 하나님께 이런 서원을 했다.
"이 학교에 입학시켜 주시면 평생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몸을 바치겠습니다."
서울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 후에
그는 당시 가장 뛰어난 수술 실력을 소유한 백인제 박사 밑에서 수련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서원한대로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위해
무료진료소인 '복음병원'을 개설해 영세민 의료구호 사업에 전 생애를 바쳤다.
29세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고 수재이기도 했던 그는
정작 집 한 채 없이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살았다.
이 분이 바로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다가
성탄절 새벽(1995년12월, 86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장기려 박사(장로)이다.
"모세는...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장기려 박사 소개합니다
2024.06.17.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의 일화다.
그는 6·25전쟁 중이던 1951년 6월 21일 부산의 한 교회 창고를 빌려 문을 연 복음병원(현 고신대복음병원)에서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25년간 이곳의 초대 원장으로 환자들을 돌봤다.
장기려 박사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아버지 장운섭과 어머니 최윤경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1928년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193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29세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고 수재이기도 했던 그는 정작 집 한 채 없이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살았다.
이 분이 바로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다가
성탄절 새벽(1995년12월, 86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장기려 박사(장로)이다.
"모세는...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