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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87년
성문에 들어서자마자 성 안에서 어떤 사람이 조영 일행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저, 나리, 헌헌한 풍채와 고귀한 얼굴, 옷차림새를 보니 매우 귀한 고관대작의 자제임이 분명해 보이는 군요. 저희 여관이 여기서 가깝고 또 명사들께서 많이 머무시는 곳이라 정갈하고 아늑하며 조용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일 없소.”
고조영이 간단히 거절했다.
“공자님, 이 분을 따라가는 것이 좋겠어요.”
여미아의 말이다. 고조영 뿐만 아니라 여주인 이루하까지도 여미아의 의견을 전폭 신뢰하는 편이다.
“그럴까요?”
여관의 호객꾼인 듯한 그가 조영의 말고삐를 잡고 그들을 인도했다. 불과 더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어느 고요한 객잔 앞에 당도했다. 일행은 어제 만난 곳이 “만락객잔”이어서 그랬는지 대문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올라가 현판을 쳐다보게 되었다.
객잔의 이름이 괴이했다.
일선삼화객잔 一仙三花客棧.
“여관의 이름이 특이한 것 같군요. 일선삼화객잔이라니 무슨 오묘한 뜻이라도 있는 건가요?”
조영이 그들을 인도해온 사람에게 물었다. 그 사람은 조영과 세 여인의 얼굴을 새삼 훑어보다가 탄식하듯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지금 놀라고 있습니다. 저는 사환이라 깊은 뜻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선인仙人 같은 귀공자 한 분과 꽃같이 어여쁜 아씨들 세 분을 모시게 되니, 아마도 오늘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누군가가 이 여관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말하며 사환이 조영 일행의 얼굴을 다시 유심히 뜯어본다.
“왜 그렇게 우리를 잡아먹을 듯 쳐다봅니까?”
조영이 웃으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가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이토록 선하고 고귀하며 아름다워 보이는 분들은 제가 귀빠지고 처음 보는 거라서요.”
사환의 안내로 아늑한 방 두 개와 조영의 하인들이 묵을 방 하나를 따로 얻은 일행은, 손발과 얼굴을 말끔히 씻은 후, 각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조식調息하며 호흡기도와 명상에 들어갔다.
조영이 자기 방에서 삼매경에 들어갈 즈음 누군가가 문 밖에서 헛기침을 했다.
“손님 계십니까?”
조영이 놀라 눈을 뜨며 물었다.
“누구십니까?”
“잠깐 뵙고 싶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그들을 성문에서부터 이 여관으로 인도한 사람이었다. 그가 들어와 조영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저,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소?”
조영이 괴이쩍게 생각하며 요청했다.
“아씨들을 함께 불러주시겠습니까?”
“그냥 내게 말해도 괜찮으니, 부를 필요야 있겠소? 그분들도 피곤해 쉬고 계실 터인데.”
“실은, 그 아름다운 아씨들에게 드릴 말씀이 있는데, 그분들을 찾아가기가 저어되어 공자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그들을 인도했던 사환이 즉시 대답하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여인들이 조영의 방으로 사환을 따라 들어왔다.
사환이 세 여인에게 엎드려 절한 후 말했다.
“제가 죽을죄를 졌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영문을 모르는 여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일제히 조영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조영이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도 알 수 없다는 표시다.
“오늘 일찍 저의 친척이 여관에 찾아와 부탁하기를, 성문에 나가 기다리다가 이러이러한 차림의 말을 탄 일남삼녀가 성문 안에 들어오면, 그들을 여관으로 유인해 음식에 몽혼약曚昏藥을 타서 먹이라고 하며, 손에 금을 주고 갔습니다.”
조영과 여인들이 아연한 표정이다.
“하지만 네 분을 보면서, 특별히 선녀처럼 성스럽고 아름다워 보이는 아씨들의 얼굴을 보자, 웬일인지 제 양심이 심히 아파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가 처음 보는 세 사람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숨김없이 토로하는 것 같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털어놓았다.
그는 ‘세상에 이처럼 선하고 아름답고 어여쁘게 생긴 사람들도 있을까?’ 의아해하며 이분들을 해치면 반드시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느껴졌다.
또한 일남삼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떤 기이한 친근감이 가슴에 뭉게구름처럼 뭉실뭉실 솟아올라, 마치 수년 만에 지기를 만난 듯 마음이 포근해졌다. 이들과 사귀고 싶었고 한 편이 되고 싶었고 친구가 되고 싶었고, 이들의 보호자가 되고 싶다는 어떤 강렬한 욕망이 속에서 솟구쳤다.
조영은 그의 고백을 듣고 난 후 말했다.
“그럼 우리가 이렇게 하리다. 이곳에서 저녁식사를 하지 않고 다른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하고 들어오리다.”
“아뇨. 밤에 들어오시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무슨 수를 꾸밀지 모릅니다. 차라리 말들만 여기 맡겨두고 저녁에 들어오지 마시고 다른 객잔에 가셔서 주무신 다음, 내일 아침에 오셔서 말을 찾아가십시오.”
“아, 그게 좋겠소. 그러면 귀하도 몽혼약을 타 먹이라 했다는 그 친척 분에게 할 말이 있을 터이니.”
“저녁에 식사 하지 않고 밖에 나가더니 밤새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사환이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뇨!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여기서 자도 괜찮을 거예요.”
여미아가 입을 열어 말했다. 사환이 얼굴에 근심의 빛을 띠며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손님들에게 불행이 닥친다면, 저는 천고의 죄인이 되고, 우리 여관은 망할 것입니다.”
“괜찮아요. 염려하지 마시고 어서 돌아가 일을 보세요.”
여미아가 강권해 사환을 내보냈다. 사환이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고 시간이 지난 후, 사람들이 염려하는 얼굴로 여미아를 쳐다보자 여미아가 조용히 말했다.
“사환의 말은 반이 진실이고 반이 거짓입니다.”
“네?”
조영이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여미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를 해치라고 부탁을 받았다는 것은 거짓이고, 밖에 나가서 자라고 한 것은 진심으로 권한 것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사환은 전직 말 도적 같습니다. 우리의 말들이 탐나 이들을 훔쳐 달아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 가슴에 계신 저의 임금께서 현풍玄風(성령)으로 저를 깨우치셨습니다.”
“그럼 여기서 저녁을 먹어도 상관없을까요?”
“그럼요.”
“하지만 짐독鴆毒이 무섭다고 하던데요. 그건 은 젓가락으로도 잡아낼 수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호호호! 죽을까 두려우세요?”
갑자기 여미아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렇게 질문하자 조영은 일순 머쓱해졌다. 여인들 앞에서 체면이 구겨진 것 같았다. 미시아가 낮은 목소리로 여미아를 나무랐다.
“여미아, 태자전하께 무슨 말버릇이 그러냐?”
“전하,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저를 벌해주소서.”
여미아가 웃음을 그치고 정중히 사과했다. 조영이 다소 엄숙히 말했다.
“좋소. 그에 대한 형벌로, 오늘 밤 내 방문 앞에서 철야로 보초를 서시오.”
여인들은 모두 그의 말을 듣고 아연한 기색이다.
“공자님, 설마 그건 진담이 아니시겠죠?”
이루하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하하! 그건 농담입니다. 제가 속이 좀 거북해서 실언을 한 것입니다. 여미아 아가씨, 부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흥! 피장파장이네요.”
여미아의 입장을 고려해 고조영도 일부러 실언 아닌 실언을 했다고 판단되자, 미시아는 뱃속에서 뭔가 꿈틀거려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 날 밤, 그들은 각자의 방에서 곤한 잠에 떨어진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낙양궁 자신전에서 조회를 파한 무 태후는, 잠깐 나갔다가 다시 자신전으로 향했다. 좌우의 시종들을 물리친 후 조금 있으니, 태평공주와 그녀의 남편 설소가 들어온다. 설소가 정중한 인사를 올린다.
“거기 앉게.”
무 태후는 설소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물었다.
“장례식은 잘 끝났는가?”
“네, 폐하.”
“특별히 보고할 사항은 없는가?”
“그 동안 소신의 머리를 휘감고 있던 한 가지 의문이 시원하게 해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거 좋은 일이군. 무슨 의문인가?”
“소신의 내자로부터, 폐하께서 궁을 비우고 민정을 시찰하러 나섰을 때, 만락객잔이라는 곳에서 큰 곤욕을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건 말해서 뭐하나?”
“숙박한 여관들 가운데, 우연히도 만락객잔이라는 이름을 지닌 객점이 두 곳이었다는 얘기도 들은 바 있습니다.”
무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신은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그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우연이 아니라면?”
“만락객잔은 고조영, 미시아 등 고려인 무리들이 역모를 꾸미는 본거지들임에 틀림없사옵니다.”
“무슨 근거로?”
“이번에 아라본의 문상을 다녀오는 길에 그들이 위남성謂南城에서 묵은 여관 이름이 다름 아닌, 만락객잔입니다.”
“만락객잔이 다수인 게 다소 의외군.”
“지금 즉시 그 세 군데 만락객잔에 군사를 보내, 주인들을 잡아다 족치면 고승과 고조영, 임장청과 미시아 등이 꾸미고 있는 모든 역모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설소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듯 상기된 얼굴로 덧붙였다.
“더구나 이번에 그들은 경사 동쪽, 파수灞水 변 고씨 왕가 종친들의 마을에 들러, 고장高藏(보장태왕의 성명, 고보장)의 무덤을 찾아서 한참이나 울고 갔다고 합니다.”
무 태후가 설소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대단히 명민해서 내가 믿을 만하군. 하지만 나는 진즉부터 그들의 역모 사실을 알고 있었네.”
“네, 정말입니까?”
무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왜 그들을 아직까지 살려두고 계십니까?”
“내게도 혜안이 있으니 염려하지 말게. 다만 자네는 이씨 친왕들의 동태를 잘 파악해서 내게 보고해주게나.”
“폐하, 명심하겠사옵니다.”
설소가 태평공주와 함께 자신전에서 물러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설소는 급히 심복을 불러 명했다.
“지금 즉시 청해진인과 연락을 취해, 고조영은 건드리지 말고 이루하, 여미아, 미시아를 마음대로 다루어도 괜찮다고 귀띔하게나. 단지 몸에 상해만 주지 말라고 이르게.”
“네, 나리.”
“하지만, 이 비밀이 밖으로 알려지는 날에는 우리 목숨은 끝장이네. 그들에게 각별히 조심하라 이르게.”
그 때 갑자기 태평공주가 방안에서 나오더니, 얼굴에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흥! 곤륜검객이라는 시골뜨기의 어설픈 계책으로 그 여자들이 당할 것 같아요?”
“다 들으셨구먼. 당신은 항상 꾀가 나보다 한 수 위였지. 좋은 방안이 있으면 알려주시오.”
“그네들이 그 요녀들을 적당히 상대해주면 나도 속히 시원하겠지만 그건 내 입장이고, 그들더러 나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달아나지 않으려면 허튼 수작 부리지 말고 그냥 곱게 제 길로 가라고 전해주세요.”
“아예 단념하라는 얘기군. 하지만 곤륜검객은 무공과 지모가 뛰어난 사람이오.”
태평공주는 설소를 똑바로 쳐다보며 덧붙였다.
“당신은 하는 일이 어찌 그리 한심해요? 좀 대장부답게, 고조영 같은 사람답게 의젓하고 지조있게 행동할 수 없어요?”
“흥! 고조영이 누군데, 당신은 말끝마다 고조영, 고조영 하는가? 고조영이 당신의 뭐라도 된단 말인가요?”
“고조영은 후고려국의 태자이지만, 어마마마의 총애를 받고 있어요. 당신은 부마도위가 되어서 번지르르한 관직 하나 얻지 못하고, 이씨 친왕들의 동정이나 파악하며 상갓집 개 마냥 이집 저집으로, 또 강호의 떠돌이처럼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한심해요?”
“어쭈! 말 한 번 잘 하시는구먼. 당신이야말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요?”
태평공주가 언성을 높이며 대꾸한다.
“내가 어딜 돌아다니며 무슨 짓을 한다고 그래요?”
“마누라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걸, 동네 사람 다 알고 제 남편만 모른다더니, 나도 그런 허수아빈 줄 아는가?”
“당신이야말로 몸 좀 조신하게 놀리세요. 여자라 하면 사족을 못 쓰면서.”
설소가 얼굴에 이상한 웃음을 비릿하게 흘리며 비아냥거렸다.
“요새 궁 안에 동이북적의 젊은 놈들이 많이 있더구먼. 하나 같이 여인들 앞에서 요상한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놈들이지.”
태평공주가 남편을 한참 쏘아보다가 쏘아붙였다.
“이해고나 사비우 같은 사람들을 보세요! 그네들은 얼마나 대장부다워요!? 무공도 높고 강할 뿐만 아니라 남자다운 씩씩한 기상은 또 어떻고요?!허장성세만 요란하고 겉으로 멋이나 잔뜩 부릴 줄 알지, 속은 텅 비어있는 중화의 젊은이들하고는 근본부터가 다르다구요!”
“흥! 아예 그놈들한테 시집 가버리지 그러나?”
설소가 냉소하며 덧붙였다.
“당신이 그놈들하고 어떻게 놀았는지 모르나, 내가 고조영 등 몇 놈을 잡아 죽이지 않으면 내 성을 갈 것이오.”
설소가 한 소리 내뱉은 후 집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태평공주는 설소의 꼬락서니를 쳐다보다가, 화가 났는지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간다.
한편, 조영과 세 여인이 앞서서 떠나버리고 난 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식으로 허탈감에 빠져있던 청해진인과 회의의 무리들은, 부지런히 달음박질을 해 고조영과 세 여인이 들어간 성읍까지 그들을 추격했다.
조영 일행이 투숙한 객잔을 확인한 청해진인과 그의 추종자들은 모조리 도사차림을 벗어버리고, 평범한 강호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청해진인의 무리와 헤어지기 전, 회의가 청해진인을 불러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쌍둥이 자매 가운데, 미시아라는 여인은 폐하께서 내게 주신, 나의 종이자 나의 속가俗家 제자이네. 그녀만큼은 절대로 건드리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나리.”
곤륜검객 청해진인은, 몇 년 전 풍소보 회의를 혼내줄 때의 기백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심지어 불과 며칠 전에 회의와 대결하던 때의 그 당당한 태도를 엿으로 바꿔 먹어버렸는지, 회의 앞에서 시종일관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무 태후의 최측근이자 대당 권력의 중심인물들인 무삼사, 무승사 등까지 회의의 말고삐를 잡을 정도였으니, 당시 회의의 위세가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일개 무명의 도사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이를 넘어 두 사람 간에 어떤 밀약이 발생한 게 틀림없었다. 회의 일행이 떠나가자 청해진인은 “일선삼화객잔”이라는 그 기이한 이름의 여관을 찾아와 조용하게 사환을 불렀다. 약간 불만스런 얼굴로 나타난 사환에게 그는 금화를 쑥 내밀었다.
사환이 금화를 받고 금새 얼굴이 벚꽃처럼 활짝 펴져서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한다.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설사 죽는 시늉을 하라고 해도 소인이 곧 시행하겠사옵니다.”
“이 사람아, 죽는 시늉은 너무 쉬운 게 아닌가?”
“···?”
“그냥 죽어주게.”
“네?”
사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죽어달라는 말일세.”
“나리, 제가 죽으면 이 돈이 무슨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벚꽃 같이 활짝 핀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든 꽃잎처럼 구겨졌다.
청해진인이 엄숙한 표정으로 뇌까렸다.
“내가 왕년에 사람을 죽인 게 족히 수십 명은 될 거네. 자네 목숨 하나 앗아가기는 말 위에 올라탔다가 내려오는 것처럼 쉬운 일이네.”
“네, 네, 아이구, 나리.”
사환은 이거 강호녹림綠林의 괴수에게 잘못 걸렸다 싶어 속으로 호천상제, 옥황상제를 찾고 있었다.
“이 집에 얼굴이 뻔지르르하게 생긴 일남삼녀가 투숙한 것을 알고 있네. 맞는가?”
“그건···.”
“죽고 난 후엔 돈이 아무 필요가 없지. 하지만 살아있으면 그보다 더 필요할 텐데?”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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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5. 3. 7. 이른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