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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명(한자): 최진근(崔晉根)
2. 주소: 서산시 동서1로 182. 102동 601호 (예천동 한성필하우스)
3. 연락처: 핸드폰/010-4501-0707, 집/010-4501-0707
4. 장르: 수필
5. 작품
머리카락 / 최진근
구정을 맞아 그리운 고향에 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나를 보고 “야! 너 많이 변했다.” 고 한다. 나는 “뭐가 그렇게 변했니?” 하고 묻자 그 친구들은 “넌!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고, 센 머리가 많아 노년 티가 난다.” 고 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멍하니 나를 쳐다보시더니 “야 아야! 난 네가 머리카락이 빠지고 반백이 된 줄 몰랐다. 너를 보니 난 늙지 않았구나.” 하시면서 “괜히 마음이 서글퍼진다.” 고 하셨다.
이 대화를 통해 난 새삼 머리카락의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머리카락이 빠졌는지 센 머리카락이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정해진 인생행로를 향해 쉼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남들이 내 모습이 변한 것을 머리카락을 보고 단정한다는 것은 이 머리카락이 지금의 나를 알리는 전령사인 것 같다.
사실 무심코 빠지고 센 머리카락에는 우리의 삶과 함께 해 온 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머리카락을 귀하게 다루었다. 처녀가 결혼을 하면 머리를 땋아 틀어 올리고 비녀를 꽂는 “쪽” 과 남자가 성인이 되면 머리카락을 끌어 올려서 틀어 감아 묶는 “상투” 가 있었다. 그 당시 노비(奴婢)에게는 “상투” 와 “쪽” 을 하는 것이 큰 소원이었다. 또한 신분의 차이를 위해 가체(加髢)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는 여자의 머리에 큰머리나 어여머리를 얹는 것으로서 영조와 정조 시대에 이 가체가 사치스럽게 성행하자 국법으로 금하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구습이 유행하자 정조 12년(1788) 10월에 사대부(士大夫)의 처첩(妻妾)과 여염의 부녀자가 하는 결발(結髮)의 양식을 제정하는 동시에 이를 일반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한글번역을 붙여 발표한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이 나오기까지 했다.
머리카락의 수난으로는 조선조 26대 고종 32년(1895) 11월에 종래의 상투의 풍속을 폐지하고 머리를 깎도록 영을 내린 단발령(斷髮令)이 있었는가 하면, 머리카락에 얽힌 전설의 지역도 있다. 신라 왕자인지 고려 태조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금강산 서쪽 천마산에 있는 재[嶺]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는 단발령(斷髮嶺)이 바로 그곳이다.
속담에 얽힌 머리카락 얘기는 얕은꾀로 남을 속이려 하는 뜻인 “머리카락 뒤에서 숨바꼭질한다.” 와 성격이 옹졸함을 이르거나, 솜씨가 매우 정교함을 비유한 “머리카락에 홈 파겠다.” 가 있고, 불교에서는 삭발(削髮)날, 삭발염의(削髮染衣), 삭발위승(削髮爲僧), 천주교에서는 삭발례(削髮禮)라는 말도 있다.
예로부터 한국에서는 부녀자들의 머리카락을 치장하기 위해 비녀, 뒤꽂이, 떨잠, 댕기, 첩지, 다리(月子) 등이 있었다. 비녀는 재료에 따라 금비녀, 은비녀, 백동비녀, 놋비녀, 비취비녀, 목(木)비녀, 죽(竹)비녀 등이 있었고, 댕기도 쪽댕기, 매개댕기, 큰 댕기, 제비부리댕기, 도투락댕기, 말뚝댕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요즘도 다양한 머리핀이 있는가 하면, 머리카락을 깨끗이 잘 보호하기 위해서 각종 남녀 샴푸와 린스, 머리카락 영양제, 염색약 등이 있고, 이발과 파머를 하기 위한 각종 도구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러고 보면 머리카락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난 머리카락을 어떻게 다루어 왔던가? 20대에는 머리숱이 많은데다 빳빳했기 때문에 빗질을 할 때마다 거울 앞에서 투덜거렸고, 30대에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의 멋을 보고 나도 빨리 저렇게 되어 봤으면 하고 은근히 감상적인 기대도 해보았다. 그러니까 40대에 접어들면서 30대 때 기다렸던 센 머리카락이 앞머리를 중심으로 소식 없이 서서히 찾아오자 멋보다 서글픔이 앞섰다.
50대부터는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고 센 머리카락이 머리를 온통 뒤덮자 좋은 샴푸, 린스, 영양제를 사다가 바르며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여겼고, 60대에 들어서면서 머리카락이 빠져 이마가 넓어지고 정수리가 훤히 보일 정도가 되자 많은 지인들로부터 “나이보다 늙어 보인다.” 는 말을 들을 때면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어떤 지인들은 “센 머리카락에 염색을 하면 10년은 더 젊어 보일 것이다.” 며 염색 할 것을 권유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아내에게 “염색하는 것이 어떠냐?” 고 물으면 답은 “하지 말라.” 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물어보면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늙어 가는 것이 보기 좋고, 염색을 하게 되면 독한 약 때문에 눈이 나빠지므로 하지 말라” 고 잘라 말을 한다. 그때마다 언짢은 기분이었지만 참고 지내던 60대 초반의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한복 명장이 “가발을 쓰라.” 고 권유를 해왔다. 그때도 아내에게 “가발을 쓰면 어떠냐?” 고 묻자 가발은 여름에 땀이 나면 불결하고 관리가 쉽지 않아 불편하기 때문에 그것도 반대를 해서 가발 쓰는 것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카락으로 인해 갖가지 고민을 하던 중 지인이 희소식을 전해주었다. “발모제 약을 먹으면 머리카락이 난다.”고 했다. 나는 그 약을 바로 주문해서 3년 동안 먹고 있다. 아내는 그 약이 “간에 해로울 수 있으니 먹지 말라”고 하지만, 그 약을 먹은 후 검은 머리카락이 조금씩 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자 지인들은 “그 약을 먹은 후 앞머리 부위와 정수리에 머리카락이 제법 많이 나서 젊어 보인다.” 며 격려를 해주고 있다. 60대 중반인 이 나이에도 머리카락이 난다니 다행스럽고 머리카락이 삶의 새로운 용기를 주는 것 같다.
흔히들 머리가 빠지고 세어지는 원인은 스트레스, 선천성, 중병 등이 라고 하지만, 나의 경우는 선천성도 아니요, 그렇다고 중병을 앓은 적도 없다. 다만 복잡한 시대 속에 시간을 다투어가며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아 센머리가 생기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제야 겨우 머리카락이 주는 깊은 교훈을 깨달았다. 내 살아온 뒤안길의 숱한 굴곡이 이 머리카락에 배어 있다가 그 농도가 짙어지자 끝내는 견디지 못해 머리카락이 빠지거나 센 머리카락이 되었지만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이루어 놓은 일이 아무것도 없어 그저 부끄러움이 앞설 뿐이다.
만년필
최 진근
직장 생활을 처음 시작하던 70년대부터 나는 만년필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처음 만년필을 수집하게 된 동기는 방송 원고를 쓰다 보니 볼펜보다 만년필이 쓰기가 편했고, 호주머니에 꽂고 다니기가 편해서였다.
만년필을 좋아하게 된 것은 그보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 군대 시절부터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논산훈련소에서 고된 훈련을 받고 배속된 곳이 카투사(미군에 배속된 한국군)였다. 한국의 문화밖에 몰랐던 내게 처음 미군들과의 생활은 여간 부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다. 언어는 물론 식사 때마다 우유와 고기를 먹으면서 숟가락과 젓가락 대신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며 그들의 문화를 익혀가는 것은 어색하기만 했다. 헌데 그들에 대한 일종의 동경 비슷한 감정이 일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만년필 때문이었다. 만년필을 포켓에 꽂고 있다가 그것을 꺼내어 메모를 하거나 사인을 하는 모습은 유독 세련되어 보이고 학자적 면모로까지 비춰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빌려 써보니 내 글씨체마저 달라 보였다. 나는 곧바로 파카21 만년필을 구입했고 그것으로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많은 편지를 썼다. 만년필은 군 생활 내내 나의 필수품이면서 애장품이었다.
제대 후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한 곳은 많은 원고를 써야 하는 곳이었다. 언제 어디에서나 편리하게 글을 쓸 수 있는 만년필은 필수였다. 그때부터 나는 만년필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백화점과 교동시장을 누비면서 마음에 드는 만년필이 있으면 외상으로 사고 월급날 외상값을 갚았다. 그러면 아내는 으레 성화를 댔다.
“만년필 한 개면 족하지 그것을 수집해서 뭐 하려는교?”
나는 못들은 척 시간만 나면 만년필 가게를 찾아가 비록 값비싼 것은 사지 못하더라도 수집을 계속 했고 그 때문에 때로는 부부싸움까지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여전히 만년필 가게를 기웃거렸다. 값이 비싸 엄두가 나지 않는 귀한 명품을 구경할 때, 손에 넣고 싶은 열망으로 이리저리 살펴보고 손으로 만져보다가 차마 돌아서지지 않는 걸음을 되돌릴 땐 형언할 수 없는 싸한 통증과 고독감 같은 것이 나를 휘감곤 했다. 그것은 차라리 황홀에 가까웠다. 취한 듯 며칠이고 명품 만년필을 떠올리며 혼자 열망하고 또 그 열망 때문에 절망하면서도 역설적으로 행복해지곤 했으니까.
그러다가 86년에는 난생 처음으로 K대학 야간 강좌의 교양 국어 강사로 출강하게 되었다. 한 달 동안 열심히 강의를 해보았자 강사료는 얼마 되지 않았다. 첫 강사료를 받으면 선물을 사주든지 아니면 현금을 주겠지 하는 아내의 속내를 대충 눈치로 알아차렸지만 나는 강사료를 받자마자 파카51 만년필을 샀다. 아내는 몹시 화를 냈다. 직장 동료들도 몇 사람은 내 수집병을 긍정적으로 봐줬지만 대개는 이상하다는 듯 시큰둥했다. 어떤 이는 따뜻한 미소로 “좋은 취미로군”라고 하면서 날 격려해줬지만 동료들끼리 “만년필 한 개만 있으면 됐지, 그것을 수집하는 것은 사치 아니야?”라고 수군댄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그래도 어쩌다 외국에 출장이라도 갈라치면 꼭 들르는 곳이 만년필 가게였다. 그곳에는 국내에서 보던 만년필과는 차원이 다른 것들이 전시되어 있곤 했다. 가격이 너무 비싸 그림의 떡에 불과했으나 나는 여전히 그곳을 기웃거리면서 황홀과 비애를 맛보곤 했다. 멋진 디자인에 금촉까지 한 만년필을 갖고 싶은 생각은 꿀떡 같았지만 늘 생활비에 허덕이는 박봉의 처지에 너무 과한 욕심이다 싶어 사고 싶은 강한 욕망을 접었던 것이 여러 차례였다. 더러 출장비를 절약해서 값싼 만년필이라도 하나 구입 했을 때에는 기분이 좋아 돌아오는 항공기 속에서 여러 번 꺼내 보곤 했다.
만년필을 수집하는 것을 아는 지인들로부터 가끔 곱게 포장한 만년필을 선물로 받을 때가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대학을 졸업했을 때 상사 사모님이 주신 ‘타이거Tiger’, 또한 직장동료인 J로부터 간부가 되면 사인을 하라며 주던 ‘몽블랑Montblanc’,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오우 회’에서 더 학 운이 성창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준 ‘크로스Cross’ 등등. 특히나 그토록 만년필 수집을 반대하던 아내가 내 60회 생일 때 사준 ‘영웅英雄’ 만년필은 소중한 선물로 고이 간직하고 있다.
선물을 준 지인에게 연하장이나 편지를 보낼 때는 몇 년 몇 월 나에게 준 그 만년필로 쓴 것이라고 끝머리에 적어 보냈다. 그러자 그 편지를 받은 지인은 무척 기뻐하며 보잘것없는 선물인 만년필을 길게는 40여 년에서 짧게는 10년 동안 잘 보관하는 데 대해 감사의 글이나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요즘 들어 필기도구도 세월 따라 많이 변했음을 실감한다. 초등학교 때는 연필을, 중고교 때에는 잉크와 펜을 사용했고, 요즘 들어서는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쓰고 있으니 만년필은 이제 하나의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직장이나 모임에서 글을 쓸 경우 만년필은 거의 볼 수 없어 마음속으로 안타깝게 느낄 때가 많았다. 그러던 중 간혹 포켓에서 만년필을 꺼내 메모를 하거나 자료를 정리하는 것을 볼 땐 만년필을 좋아하는 동지를 만났다는 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만년필을 수집하다보니 만년필에 얽힌 추억도 많다. 직장생활을 처음 하던 70년대 초, 포항의 어느 상점에서 산 ‘아피스Apis‘ 만년필을 취재하러갔다가 그만 잃어버렸다. 나는 소중한 만년필을 잃어버리고 가슴이 아파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그렇게 가슴을 끙끙 앓던 중 취재하던 곳에서 내 만년필을 주워서 우편으로 보내온 것을 받고서 느낀 그 고마움과 그 환희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또한 만년필이 고장이 나서 잉크가 잘 나오지 않을 경우 펜촉을 앞으로 굽히거나, 뒤로 젖히다가 그만 펜촉의 한쪽 부분이 부러지기라도 하면 내 살갗이 찢긴 것 같이 마음이 아파서 차라리 만년필 수리 점에 가서 고칠 걸 하면서 후회를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요즘 들어서는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만년필을 감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만년필을 사고 싶어 백화점, 만년필 가게, 교동시장을 들락거리던 일이나 외국 출장 때마다 만년필 가게를 찾곤 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특히나 만년필로 인해 인연이 된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과 사연이 아로 새겨진 이 작은 물건은 그 추억을 더듬는 도구이며 나의 40여 년 삶의 편린들이 오롯이 박혀 있는 나의 징표 같은 것이다.
오랜만에 만년필로 그간 소식이 뜸했던 지인들에게 가슴에 묻어두고 지냈던 희로애락의 사연을 편지로 보낼까 한다.
6.자기소개
경주가 고향이고, 40여년 이상 대구에서 살았습니다. 공부는 대구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어학을 전공해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첫 직장은 kbs프로듀서, 대구방송총국 편성제작국장을 한 후, 경운대학교에서 교수, 기획실장, 사회복지대학원장, 산업정보대학원장, 새마을아카데미원장 업무를 수행 했습니다.
문학활동은 2012년 에세이스트 등단, 현재 대구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달구벌수필문학회 회원입니다.
부족합니다. 훌륭하신 분의 많은 도움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첫댓글 환영합니다. 입회신청 게시판에 글 잘 올려졌구요. 이사회의를 통해서 영입에 관한 논의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사하시고, 짐정리도 아직 못하셨을텐데 서산문협을 먼저 찾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따뜻한 친절에 감사를
드립니다
환영합니다. 앞으로 좋은 인연으로 함께 활동하였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소서!
멋진분이 가입하셨네요
좋은인연 감사드립니다~~~
회장님 따뜻하게 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서산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