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남기신 소중한 말씀과 교훈
1.정의로운 마음없이 충의를 말하지 말라.
충의를 가르치기에 앞서서 정의로움을 가르쳐라.
정의로운 사람 중에 충성스럽지 아니한 사람이 없고,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사람 중에 충의를 가진 사람이 없다.
나라가 위급할때 내 한몸을 바쳐서라도 나라를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오직 의리를 사모하는 사람뿐이다. 이익을 구하기에 급급한 부자와
권력자는 한사람도 의병을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이종규 종의록
2.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랐다.
의병을 반대하는 유생들은 개화파이건 수구파이건 막론하고 모두가 벼슬을
세습하는 명문 가문이거나 권세나 벼슬자리에 줄이 통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가 예외없이 의병을 배척하였다. 의병을 지지하고 의병에 참여하는
선비들은 모두 초야에 묻혀양심과 의리를 숭상하는 궁벽한 선비들이거나 몰락한 가문의
권력에서 소외된 선비들이었다.-이종규 종의록
3.머리가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첫 시험에 낙방하고
서른 두살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하였다.
머리가 좋아 일찍 출세하여 권세와 부를 얻은들 무엇하랴.
이를 지키기 급급하여 의를 저버리고 마는 것을 .........
4.좋은 지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았다.
지금 고달프다 하여도 중대한 무언가를 맡기기 위한 단련이니
필요한 것은 불평아니라 지혜로운 준비인 것이다.
5.윗사람의 지시라 어쩔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과의 불화로 여러 차례 파면되었고
숱한 불이익을 받았다.
김백선의 소문은 순식간에 지평일대에 퍼졌다. 김백선은 수하의 포군들과 상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1895년 11월 21일 (양력 1896년 1월5일) 오전 지평현감
맹영재를 찾아가 나라가 위급하니 의병을 일으키자고 요구하였다.
맹영재가 화복을 들어 공갈하며 의병을 반대하자 김백선은 "동학을 치고 벼슬을 얻은 것이
무슨 영화가 되느냐. 영화로 알거든 그것을 지켜보라. 그러나 지금의 지평의 훈련된 포군은
다 내가 힘써 모은 것이니 너의 군사는 아니다. 당당한 충의의 군사들이다. 어찌 네게
맡겨 도적을 돕게 하겠는가 하고 꾸짖으며 동헌 뜰에 총을 부수고 돌아왔다. 김백선은 수하의
포수들에게 맹영재의 반대에 상관없이 거사할 뜻을 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퇴앙 안종응은 마침 찾아온 이춘영에게 맹영재를 찾아가도록 권하였다.
1895년 11월 21일 밤 김백선과 이춘영은 함께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맹영재의 방해를 피하기 위하여 안창에 포군들을집결시키기로 하였다.. 1895년 11월 29일 (양력 1896년 1월 13일) 김백선 장군의 수하 포수 400명이 안창에 모여 거병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5ㅇ여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온 대일 무력 독립항쟁의 시작이다.
지평의병은 최초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의병부대였으며
일본군도 의병의 발단은 지평이라고 기록하고 있을 만큼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지평의병의 거병에는 김백선(1873-1896)장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아무리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고자 해도 무기와 군대가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다. 더구나 김백선과 그의 수하 400명은 민중적 각성을 통하여 현감 맹영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거병을 결심하였다. 평민이 주축이 되고 평민출신의 의병장이 등장하는 것은 군대해산 이후의 후기 의병에서 보이는 일이다. 그러나 전기 지평의병의 중요한 의의는 평민 출신의 김백선과 그 수하의 포군이 의병의 주체적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평의병은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평의병의 지휘부를 맡았던 유생들은 김백선 장군에 대하여 신분적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면서 못마땅하게 여기었다. 결국 2차례의 커다란 승리에도 불구하고 김백선은 안승우와의 불화를 이유로 유인석의 명령에 의해 처형되고 말았다. 결국 김백선을 따르던 400여명의 포군은 뿔뿔이 흩어지고 지휘부였던 안승우는 전사하였으며 유인석은 만주로 가게 된다.
지평의병의 지휘부의 시대착오적 양반의식이 민족향쟁에 있어서 하나의 걸림돌이 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훈을 토대로 후기 의병에서는 대부분 평민 의병대장이 활약하ㅏ게 된다. 지평의병을 지휘부의 이춘영 안승우등의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바라본다면 반 민중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동학 토벌군으로 고용될 수 밖에 없었던 신분적 한계에 대한 울분과 민중적 각성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김백선장군과 그의 수하의 포군400명을 지평의병의 주체로 바라본다면 지평의병은 지금까지의 평가와는 다른 민족항쟁의 진정한 출발점으로써의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드러난다고 할 수있다.
6.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마라.
나는 평생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받았다.
일본군은 총상의 흔적이 있는 모든 남자들을 발견하는 대로 의병으로 규정하고 처형하였다.
구둔치 전투에 창여하여 총상을 입고 왼손을 잃은 김포수는 할 수 없이 일본군에 자수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은 그를 변절자 외팔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김포수는 일본군에게 마음까지 내준 것은 아니었다.그는 오히려 방이면 의병의 식량을 조달하는 등 그가 할 수 있는 의병활동을 지속하였다.
7.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불평하지 마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세상에서 진짜만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살아 남고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입으로 떠드는 양체들은 항상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 본색이 드러나게 된다.
8.도와주는 사람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팔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23번 싸워 23번 이겼다.
세상사람들이 참으로 이상하다. 의와 충의는 사라지고 자신의 이익과 영달만을 구하고 있다.
나라가 위급한데 아랑곳 하지 않고 내것을 잃을 것만 걱정을한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아라.
세상을 원망하지 말고 네가 먼저 나서라. 너라도 나서 충의를 다한다면 세상도 반드시 변할 것이다.
9.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하지 말라.
나는 끈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빼앗긴채 옥살이를 해야했다.
고포수는 지평에서 유일한 호랑이 잡는 포수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구둔치 전투에서 용맹하게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그는 구둔치 북쪽의 구구산 능선에 묻혔으나 그의 아들 손자들은 일제하에서는 그 무덤에 한번도 가보지를 못했다. 50여년이 지나고 해방이 되서야 손자들이 고포수의 무덤에 떼를 입힐 수 있었다.
10.조건이 나쁘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두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예나 지금이나 옳은 일을 하고자 하면 칭찬하는 사람이나 도와주는 사람보다 미워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왜 그럴까? 왜 사람들은 얌체와 같이 이익을 구하기에 급한 것일까?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도와 주는 사람도 없고 조건이 나쁘더라도 결국 진실이 항상 승리하는 것이다
11.옳지 못한 마음으로 가족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스무살의 아들을 적의 칼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장터로 나갔다.
일진회에 가입하여 아들과 딸이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바라지 마라. 너의 업에 대한 댓가는 대대손손 치를 것이니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되리라. 지평의 일진회를 습격한 구만서는 그렇게 꾸짓으며 일진회의 멤버들 중 2명을 의병에 편입시켰다.
12.죽음을 두렵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홍사구는 죽어가는 스승 안승우 옆에서 일본군에게 최후까지 저항을 하였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여 장렬한 최후를 선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