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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 暄 嶺 至墟
白頭大幹 曲腰處 連古南北
布岩主屹 下縮底 開天空豁
漢水落東 滴分峙 流渠各別
天峙廣頂 登高坐 醉月梅酒
月岳馬驛 間中谷 科擧行路
彌勒大光 念佛聲 淸雅溪澗
人馬歲月 徠適態 稱走馬燈
寒暄天嶺 徒過客 醉藁本酒
鷄笠遲菻 漢陽客 往來峴越
松界寺門 世俗脫 浟水浮捨
娑婆汚念 峙蹬淨 洗撢梼頂
寒暄上阪 廊臺踞 醉虛無酒
하늘 재 (寒暄嶺[한훤령])
至墟 朴 大 星
백두대간(白頭大幹) 굽은 허리 영남 북(嶺南 北)을 이은 옛길
포함(布 巖) 과 주흘산(主屹山)이 내리 잦아 틔운 하늘
한수(漢 水)와 낙동강(洛東江)이 등을 다투어 흘러서 가노니
하늘 재 너른 턱에 올라 월 매 주(月 梅 酒)에 취(醉)했으리
월 악 마역(月 岳 馬 驛) 사 잇 골로 과거(科擧)보러 가던 옛길
미륵불(彌勒佛) 대광 사(大 光 寺)의 염불 소리 맑은 계곡
인마(人馬)와 세월 오고감이 속절없이 주마등(走馬燈)이니
하늘 재 넘나든 사람들 고본 주(藁本 酒)에 취(醉)했으리
계 립(鷄 笠)과 지릅(遲菻)재는 이속(離俗)길손 넘던 고개
송계(松 界)와 사문(寺門)에서 세속 벗어 물에 띄워
사파(娑 婆)에 찌든 마음 재를 오르며 털면서 가노니
하늘 재 마루 터에 앉아 허무 주(虛 無 酒)에 취(醉)했으리
*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하늘재의 역사 *
한훤령(寒暄嶺) . 계립령, 대원령(大原嶺)으로도 불리는 하늘재는 우리 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
신라 제8대 아달라(阿達羅)왕이 재위 3년(156년)에 북진을 위해 길을 열었다. 죽령보다 수년 먼저 개통된 하늘재는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 한강 하류까지 일사천리로 뻗어나갈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이다. 신라는 일찍이 하늘재를 교두보로 한강으로 진출하였고, 백제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했다.
이처럼 중요한 전략거점이다 보니 하늘재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구려 온달과 연개소문은 하늘재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시도했으며 . 신라 망국의 한을 품고 마의태자와 그의 누이 덕주공주가 금강산으로 향할 때 피눈물을 머금고 이 고개를 넘었다 한다 고려시대 '홍건적의 난'으로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안동으로 몽진할 때도 이 길을 이용했다. 하지만 하늘재는 조선태종 14년(1414년)에 지금의 문경새재인 조령로가 개통되면서 군사적 요충지와 사통팔달의 아성을 한꺼번에 조령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월악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측은 하늘재의 역사를 되살리기 위해 고갯길 1.5㎞ 구간을 '역사·생태관찰로' 로 조성한다. 현재 하늘재로 알려진 이 길은 지난 1970년대에 농로로 새로 개설한 것으로 도랑 너머 오솔길이 진짜 하늘재라는 것. 월악산 자연생태를 직접 보며 역사를 설명해주고 문화재 화판 등을 설치해 주변 문화유적과 함께 설명할 방침이기도 하다. 한국관광공사와 충청북도가 선정한 '걷고싶은길 자연환경명소 100선' 중 10걸로도 선정된 하늘재는 그렇게 옛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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