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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냑 선물세트
추석이 이십 일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부터 추석 선물세트를 포장할 참이다. 출근길에 아내를 조수석에 태워 출발했다, 회사에 도착하니 와인을 가득 실은 대형 트럭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 부둣가의 보세창고에 보관 중이던 프랑스산 와인 3만6천병 중에 우선 1만2천병만 통관하여 운송해 온 거였다.
나는 차에서 내려 화물차 기사로부터 수입필증 사본을 건네받았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지게차를 불렀다. 지게차가 도착할 동안 수량을 확인 차 화물차의 짐칸에 올랐다. 모두 합쳐 14팔레트이고, 팔레트마다 12병 들이 종이박스가 일정한 수량으로 재어져 있다. 13팔레트는 각각 72박스씩이고, 나머지 1팔레트는 64박스이다, 모두 1천 박스이고,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이 각각 반반씩이다. 병당 용량은 750㎖이다. 수입필증에 기록된 내용과 정확히 일치했다.
지게차가 도착하여 와인을 창고에 부리고 있을 때, 저마다 배송 승합차를 모는 네 명의 배송직원이 속속 도착했다. 오 분쯤 지나자, 경리 직원인 노처녀 미스 황의 흰색 경차가 도착했고, 뒤미처 영업 과장들의 아이보리색 지프 두 대가 도착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배송직원들이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듯 서로 앞다퉈 창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들 중 선임 직원에게 선물세트를 포장할 아르바이트(이하 알바생) 신청자 25명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용지를 건네면서 세관 앞 전철역에 나가서 그들을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자, 서로 인사들 하지. 이 분은 엊그제 잠깐 언급했던 손달자 씨야. 오늘부터 와인 선물세트 포장이 끝날 때까지 포장 작업을 지휘 감독할 거야.”
내가 직원들에게 손달자 씨를 소개하자 미스 황은 덤덤한 표정이었고, 두 과장은 사뭇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엊그제 사무실에 간편 책상을 들여놓으면서 주위에 와인 선물세트 포장 경험이 풍부한 젊은 여성이 있는데, 그 분이 열흘쯤 사용할 거라고 했었다. 아마도 두 과장은 젊은 여성이라는 표현에 제 또래인 삼십대 초반의 여성일거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나는 직원들이 부담감을 가질까봐 손달자 씨가 아내라는 걸 숨긴 채 소개했다.
나는 이태 전에 경기도 K시의 외곽 지역에서 오십 평 남짓한 조립식 창고 건물을 보증금 없이 전액 월세로 얻은 후 곧장 주류 수입면허를 냈다. 건물 한쪽 끝에 열다섯 평 남짓 2층을 올려 사무실을 만들었다. 현재 수입하고 있는 주류는 프랑스산 와인만 열 품목이고, 판매처로는 40개의 점포를 지닌 C-마트와 수도권에 있는 주류 도매점 일곱 군데이다. 거래처별 매출 비율은 C-마트가 80%쯤 되고, 도매점이 20%쯤 된다. 그러니까 C-마트의 매출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셈이다.
알바생들을 데리러 갔던 배송직원들이 돌아왔다. 출근한 알바생은 모두 스무네 명이었다. 한 명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선임 배송직원한테서 알바 신청자의 명부를 건네받아 나오지 않은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를 붉은 사인펜으로 그었다. 명부를 아내에게 건네주면서 별도로 출근부를 만들어서 관리하라고 했다.
배송직원들과 알바생들을 데리고 창고로 내려왔다. 알바생 스무네 명을 12명씩 두 개 조로 나누어 작업대를 사이에 두고 6명씩 서로 마주보고 서게 했다. 레드와 화이트 와인을 각각 한 박스씩 작업대 위에 꺼내놓은 뒤, 원산지 및 맛과 향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작업대 위에 나무로 된 선물세트 케이스를 펼쳐놓고 천천히 포장 시범을 보였다.
조별로 배송직원을 둘씩 붙였다. 이는 무거운 와인 박스를 계속해서 작업대 위로 들어 올려서 꺼내야 하거니와, 또한 포장이 끝난 선물세트를 카트에 실고 안쪽 가장자리로 옮겨가서 높이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배송 직원들은 다들 두 차례씩 경험을 한 터라, 자신들의 소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내가 출근부 파일을 손에 들고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바투 다가왔다. 그녀는 알바생들에게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손달자 입니다. 오늘부터 선물세트 포장이 끝날 때까지 여러분과 함께 포장 작업을 할 겁니다. 모쪼록 작업이 끝날 때까지 시종 웃음을 잃지 않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셨으면 해요. 그럼, 출석 체크 들어갑니다. 제가 이름을 부르면 손울 들어 주세요. 구아름, 김슬기, 김영선, 나혜경, 박미숙….”
나는 아내가 출석을 체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내는 미혼일 때, 선물세트 포장 작업 감독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당시 아내와 나는 주류 수입업체 무역 파트에서 함께 근무했다. 그때 아내는 명절 때마다 와인 선물세트를 포장하는 알바생들을 곧잘 관리했다.
C-마트와 거래를 튼 이후로 지난 설까지 두 번의 선물세트를 준비하면서 선임 배송직원에게 포장 작업 감독을 맡겼었는데, 그는 내가 생각했던 만큼 일을 원만하게 처리해 내지 못했다. 하루하루 실적이 계획에 못 미쳤을 뿐더러, 취급 부주의로 와인을 깨뜨리는 횟수도 잦았다. 배송 직원들은 두 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포장 작업 전반을 맡기기에는 미덥지가 않았다.
나는 와인 선물세트 포장 작업을 아내에게 내맡긴 채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러나 부족한 통관 자금 때문에 심사가 편치 않았다. 내일 통관할 자금은 그럭저럭 준비가 되었지만, 다음 주에 통관할 자금이 부족했다. 현재 대부업체와 상담중이지만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몇 해 전부터 명절에 와인 선물세트 판매량이 부쩍 늘었다. 소비자 가격과 선물세트 케이스의 재질과 모양을 잘 선택하면 명절 한철의 매출이 6개월 매출액을 앞서는 와인 수입업체들이 수두룩했다. 나도 금번 추석 명절에는 매출을 올려보려는 심산으로 전에 없이 무리를 했다.
나는 지난 5월에 프랑스에서 주류 유통업을 하는 딜러에게 와인 3만6천병을 주문했다. 지금까지 물대를 T/T(telegraphic transfer, 전신환)로만 송금해오다가 그때 처음으로 L/C(letter of credit, 신용장)를 개설했다. 물대를 T/T로 송금할 수도 있었지만, 딜러와는 첫 거래인 터라 서로를 신용할 수 없어 양측의 합의하에 L/C를 개설했다. 그때 L/C 개설 자금이 부족해 아내가 처가에서 집을 담보로 어렵사리 돈을 꿔 왔다. 우리 부부에게는 마땅한 담보물이 없었기에 마지못해 수입 물대만큼 돈을 꾸어 와 L/C 개설은행에 달러화로 현금을 예치하고 개설한 거였다. 그 때, L/C 개설 자금과 이것저것 더해 모두 2억5천3백여만 원이 들었다.
L/C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자면, 수입업자가 자신의 신용을 증명하기 위하여 거래처 은행으로부터 발급받는 일종의 지급 보증서이다. 수입업자가 수입상품 대금에 대하여 자신의 외환거래 은행으로부터 대금지급을 보증 받아 수출업자에게 상품의 선적 전에 제시하는 서류이다. 무역거래의 대금 지불 및 상품수입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 수입상의 거래은행이 수입업자의 요청으로 수출업자로 하여금 일정 기간 및 조건 하에서 B/L(Bill of Lading, 선하증권)을 담보로 하여 수입업자 또는 신용장 개설은행을 지급인으로 하는 화환어음을 발행하도록 하고, 이 어음이 제시될 때에 지급 또는 인수할 것을 어음발행인(수출업자) 및 어음수취인(어음매입은행)에 대하여 확약하는 증서이다.
지난 5월에 L/C를 개설한 후, 석 달이 지난 최근에 통관자금을 마련하느라고 손을 벌릴만한 곳은 모두 찾아다녔다. 1억 원 가량이 부족했지만 8천여만 원밖에 구하지 못했다. 이 문제로 한동안 골치를 앓다가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지난주에 생활정보지를 샅샅이 훑은 뒤 구 실장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자기를 대부업체 실장이라고 소개했지만, 아무래도 낌새가 무등록 고리대금업자 같았다. 그는 대출 이자가 연 69%이고, 선이자로 한 달 치를 미리 뗀다고 했다. 그럼에도 부동산 담보물이 없다고 썩 마뜩찮아 했다, 내가 갖은 아양을 떨며 통사정을 하자 그제야 아량을 베푸는 척하며 법인과 개인 등기부 등본, 인감증명서, 주민등록등본, 그리고 법인 소유 차량 다섯 대의 등록증을 준비해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고율의 이자 때문에 그토록 피해 가고 싶어 했으나 달리 길을 찾지 못해 결국 고리대금업자에게 손을 내밀고 말았다. 그렇지만 한 달 후 와인선물세트 판매 대금이 입금되면 최우선으로 갚을 요량이었다.
오늘이 그를 다시 만나기로 한 날이다. 나는 지갑에서 구 실장의 명함을 꺼내어 그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그는 신호음이 떨어지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실장님? 지난주에 만났던 와인나라의 조찬입니다. 준비하라고 했던 서류를 다 준비했는데, 어디서 만나죠?”
“아, 그래요? 그럼 오후 1시에 지난주에 만났던 커피숍으로 나와요.”
“예, 그럼 이따가 뵙겠습니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약속 시각보다 20분 일찍 커피숍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는 곰 같은 덩치만큼이나 굼뜨게 20분 늦게 도착했다. 그렇지만 나는 언짢은 기색 없이 그가 요구했던 서류가 담긴 노란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그는 덩치와는 달리 빠른 손놀림으로 서류뭉치를 장장이 넘겨가며 꼼꼼히 살폈다. 잠시 후 그는 건성으로 서류를 뒤적거리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지난주에 만났을 때, 준비해오라고 했던 서류는 빠짐없이 챙겨 왔습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해보세요.”
서류뭉치를 뒤적거리는 구 실장의 행동거지가 어딘가 못마땅해 하는 듯해 보여 그렇게 말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 일전에 내가 미처 알려주지 못한 게 있어서…. 참, 어제 부분 통관한다고 했던 와인은 통관했나요?”
“예.”
“그럼, 내일 이번에 수입한 와인 3만6천병에 대한 인보이스(invoice, 송장) 사본과 어제 부분 통관한 수입필증 사본을 가져와요. 내일 다시 봅시다.”
대머리에 배불뚝이인 구 실장은 제 할 말을 끝내곤 어슬렁어슬렁 사라졌다. 만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서였다. 아무리 내 사정이 급해서 만났다지만, 이렇게나 막 대하다니…. 나는 담배연기로 쓰라린 속을 달래며 지금껏 비워두었던 단축번호 18번 자리에 그의 휴대폰 번호 11자리 숫자를 채워 넣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로 돌아온 후 먼저 창고에 들렀다. 대형 선풍기 네 대의 날개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은 양철 지붕으로 쏟아져 내리는 열기 탓에 되레 후텁지근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알바생들은 다들 제 딴에는 손을 바삐 움직이며 속도를 내는 듯했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대부분이 초짜들이라 손에 익을 때까지 사날간은 속도를 내지 못할 것이리라. 나는 아내에게 슬쩍 엄지를 치켜세워 보이고는 곧장 사무실로 올라왔다.
자리에 앉아 사무실을 휘 둘러보니 미스 황밖에 없었다. 두 과장은 거래처에 간 듯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아까 구 실장을 만나러 가기 전에 두 과장을 따로 불러 도매점에 깔린 외상매출금 수금을 독촉했던 터였다.
자리에 앉아 지난 설에 와인 선물세트를 준비하는 과정에 든 비용을 참고삼아 금번 추석에 소요될 비용을 뽑던 차에, 문득 지난 설에 C-마트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던 행위들이 떠올랐다. 그 때 그들의 가증스러운 수작질이 분에 겨워 화를 삭일 수가 없었다. 지난해 추석 때와는 달리 판매촉진비 청구액을 두 배로 늘렸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추석 때까지 한 가지 항목이었던 전단지 제작비와 POP(point of purchase)제작비를 따로 분리시켜 이중으로 청구했다.
C-마트에서는 명절 때마다 선물세트 전단지를 별도로 제작했다. 매번 일방적으로 제작하고서는 납품업체에게 판매촉진비를 청구했다. 또한 보일락 말락 한 크기로 POP를 제작하여 매장마다 상품진열대에 부착했다. 물론 상품의 이미지를 부각시켰기 때문에 광고 효과가 통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제작 과정이 너무 일방적이었고, 판촉비 청구액도 지나치리만큼 과다했다. 점포 별로 40만 원짜리 세금계산서가 두 장씩이나 발행되었으니 말이다. 지난 설에는 점포수가 38개였으니 판매촉진비 만도 3천4십만 원이었다. 광고래야 전단지에 실린 자그마한 사진 한 컷과 매장별로 상품진열대에 부착된 쇼 카드(show card)가 전부였다. 제작비로 38개 점포를 다 더해봐야 채 오십만 원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는 매장에 진열된 선물세트를 판매하는 판매도우미 건이었다. 주류 납품업체들은 작년 추석 대목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제 형편에 맞는 판매도우미를 채용하여 전 매장에 배치한 후 자사 선물세트 위주로 판매했다. 그런데 지난 설에는 C-마트의 본사 식품매입부에서 일방적으로 내레이터 모델을 판매도우미로 채용하여 전 매장에 배치했다. 작년 추석 대목에는 대형 주류업체 두세 군데 말고는 대부분의 주류 납품업체들이 여대생을 판매도우미로 채용하여 각 매장에 배치했다. 이는 저렴한 인건비 때문이었다. 여대생을 판매도우미로 쓸 경우, 일급이 5,6만 원이면 충분하지만 내레이터 모델을 쓰면 일급이 갑절 이상 늘어난다. C-마트를 담당하고 있는 오 과장의 말에 의하면, 지난 설에는 C-마트 식품매입부 구매 과장이 임원의 지시에 따라 모델을 쓰기로 이벤트사 대표와 계약을 했다는 것이다. 주류 납품업체들은 설 연휴가 지난 후 한결같이 44 사이즈 급의 모델을 쓰고도 예년에 비해 판매량이 늘지 않았다고 험한 표정으로 볼멘소리를 해댔다.
이와 같은 일로 C-마트에 주류 선물세트를 납품한 업체들 중 나를 위시한 절반 이상이 판매촉진비와 판매도우미 건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C-마트 측에서는 즉시 답변을 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며 늑장을 부리다가 마지못해 금년 추석부터는 원상회복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마트를 찾는 고객은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이다. 하나는 브랜드를 찾되 그러나 백화점보다는 싼 값으로 구매를 원하는 고객이고, 나머지 하나는 브랜드와는 상관없이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싸게 구입하고자 하는 고객이다. 전자는 으레 마트에 오기 전에 구매할 브랜드를 머릿속에 그리고 온다. 그런 고객에게는 제아무리 늘씬하고 언변이 뛰어난 내레이터 모델일지라도 노브랜드상품은 씨알도 안 먹힌다. 후자는 주머니가 얕은 고객을 대상으로 홍보를 해야 하기 때문에 굳이 외모가 받쳐 주고 언변이 뛰어난 판매도우미보다는 진정성을 가슴 가득 괴고 있는 판매도우미가 제격이다. 요컨대 마트를 찾는 고객 중 십중팔구는 후자이다.
대부분의 마트가 그렇듯이 C-마트 또한 명절 선물세트에 대해 일반 상품과는 달리 특정매입 형태를 취했다. 이는 정해진 기간-명절 전일까지 열흘-동안에 판매가 완료된 상품만 대금을 정산하고, 판매 잔량은 모조리 반품하는 매입 형태이다. 그리고 판매 기간 동안에 매장 내에서 발생한 분실 상품이나 도난품에 대해서는 전량 납품업자의 책임이다. 대금 정산은 오로지 단말기에 찍힌 바코드 기준이다.
“안녕하세요, 구 실장님! 무슨 일로 전화를…?”
“아, 내일 커피숍보다는 커피숍 맞은편 건물 1층에 있는 냉면집에서 만나는 게 어떻겠소? 그 집 냉면 맛이 아주 그만인데….”
그렇잖아도 지난 설에 C-마트 측의 일방적인 행위로 이래저래 5천여만 원을 날린 것이 떠올라 속이 상하던 참인데, 능구렁이 같은 구 실장이 거드름을 피웠다. 그의 말에 울컥 부아가 치솟아 단박에 미친 놈, 지랄하고 자빠졌네! 하고 싶었지만,
“아무렴, 실장님 뜻대로 해야죠 뭐. 하하.”
구 실장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끊은 듯했다. 연신 뚜-뚜- 하는 기계음만 되풀이되었다. 구 실장과 통화중에 그의 비위를 맞추느라 마지못해 흘린 억지웃음을 미스 황이 주워듣곤 뭔가 오해를 한 듯했다, 그녀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책상 앞으로 다가와 급여 지급 품의서가 첨부된 결재서류를 책상위에 척 내밀었다. 내일이 월급날이었다. 미스 황은 법인 통장에 4천8백여만 원의 잔고가 있는 들어 있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급여명세서를 보니 나를 제외한 직원 7명의 급여액이 1천8백여만 원이었다. 사실, 나는 직원들 급여는 거래처인 도매점에서 외상매출금을 수금한 후 지급하리라고 염두에 두고 있었다. 도매점 예닐곱 군데에 깔린 미수금이 3천만 원쯤 되었는데, 늦어도 내일까지는 이천만 원을 수금하라고 보름 전부터 두 과장을 계속 채근해왔다.
“통장에 있는 돈은 내일 오전에 통관 비용으로 써야 되니까 손대지 마. 급여는 내일 중으로 입금될 거야. 글구, 보세창고에 있는 딸보 와인 인보이스와 B/L을 관세사사무소에 팩스로 보내 줘. 보낸 후 그쪽 담당자한테 잘 받았냐고 꼭 확인하고.”
미스 황은 웃음이 싹 가신 얼굴로 나를 흘끔 쳐다보곤 이내 급여 지급 품의서를 들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조금 전과는 달리 풀이 죽어 있었다.
장시간 동안 판매도우미 교육자료 정리에만 골몰한 채 PC 모니터를 끌어안고 있었던 탓일까. 갑자기 눈알이 따끔거렸다. 의자를 뒤로 쭉 밀쳐내고 팔을 위로 뻗쳐 기지개를 켜는데 언뜻 벽상에 걸린 동그란 시계가 시선을 끌어당겼다. 어느새 다섯 시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창고에 갈 요량으로 사무실 밖으로 나와 철 계단을 내려섰다. 어, 저건 무슨 차? 창고 밖 한켠에 수북이 쌓여 있는 헐어진 종이박스 더미 사이로 정체 모를 트럭이 얼핏 보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종이박스 더미 뒤쪽으로 재게 걸었다. 텁수룩한 구레나룻이 얼굴을 뒤덮고 있어 도무지 나이를 가늠키가 어려운 넝마주이 하나가 창이 긴 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다. 사내는 빠른 손놀림으로 헐어진 종이박스를 하나하나 쥐어뜯으면서 분해하고 있었다. 사내가 입고 있는 카키색 민소매 티셔츠는 땀에 절어 눅눅했다. 사내는 나를 흘끔 쳐다보고는 손놀림을 더욱 재우쳤다.
나는 창고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바삐 움직이는 배송 직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은 쉴 새 없이 팔레트 위의 박스를 작업대 위로 들어 올려서 와인을 빼내고는 빈 박스를 창밖으로 힘껏 내던졌다. 또한 포장이 완료된 선물세트를 카트에 실고 저만치 가장자리로 옮겨가 제 키 높이만큼 쌓아올리기를 반복했다. 다들 힘이 든 모양이었다. 얼굴과 목덜미는 온통 땀투성이고, 입고 있는 반팔 티셔츠에도 땀이 배어들어 후줄근했다. 시선을 좌측으로 쭉 밀어내자 손을 쉴 새 없이 바삐 움직이는 아내가 보였다. 아내 역시 콧잔등에 좁쌀 낟 같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불현듯 지난 4월 장인어른 칠순 생신 때 장인어른과 한 약속이 불쑥 떠올랐다. 그때 나는 챙겨간 와인 선물세트 한 박스(열 세트)를 여봐란듯이 척 내밀었다. 장인어른은 방안 가득 빙 둘러앉은 손아래 처남 내외와 두 처제 내외, 그리고 아내를 휘 둘러보더니 난데없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조 서방? 와인도 좋지만, 포도 생산지인 프랑스 보드로 지방의 광활한 농원과 로마, 대영박물관을 말미암아 알프스 설산을 두루 관통하는 유럽 여행은 언제쯤 시켜줄 건가?”
나는 장인어른의 전혀 예상 밖의 말씀에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뜻한 바가 있었기에 별 망설임 없이, 올 추석 대목 때 한철 장사 잘해서 유럽 여행을 보내드리겠다고 약속했다. 나의 약속에 아내도 싫지 않은 듯 얼굴 가득 함박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아내는 지난 5월에 처갓집을 담보로 돈을 꾸어 오고부터는 추석 대목에 장사를 잘해서 꼭 유럽 여행을 시켜드리자고 틈만 나면 나에게 다짐을 두곤 했다. 그 때문인지 아내는 와인 선물세트 포장 작업을 자원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내일 구 실장한테 전해줄 인보인스와 어제 통관한 수입필증을 복사했다. 사본 두 장을 노란 서류봉투에 넣고 있는데 언뜻 서창에서 시원한 바람 한 자락이 건듯 불어왔다. 목덜미에 맺힌 땀을 식히는가 싶더니 어느새 동창 밖으로 줄달음쳤다.
아내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니 6시 30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아내는 내게로 바짝 다가와 작업을 무사히 마쳤노라고 보고를 했다. 배송 직원들은 저마다 알바생들을 태워 전철역으로 나갔다고도 했다. 여보, 수고했어! 하마터면 자칫 미스 황 앞에서 그렇게 말할 뻔했다. 직원들한테는 부부사이임을 밝히지 않기로 하고선 말이다.
‘자기야, 전화 받어!’별안간 내 휴대폰에서 요란한 수신음이 울렸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해보니 탁 과장이었다.
“탁 과장! 지금 어디야?”
“예,‘한양주류’입니다.”
“그래, 수금은 얼마나 했어?”
“예, 두 곳에서 내일 오전까지 천만 원을 입금키로 했습니다.”
내일 직원들 월급을 맞추려면 아직도 8백만 원이 부족했다. 오 과장은 수금을 얼마나 했을까. 나는 탁 과장과 통화를 끝낸 후 오 과장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담배를 빼물었다.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가 거진 타들어 갈 무렵, 휴대폰에서 귀에 익은 수신음이 울렸다.
‘자기야 전화 받어!’발신자 번호를 보니 오 과장이었다. 그는 지금 수금 관계로 도매점 사장과 상담중이라, 상담이 끝나는 대로 보고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서 창고를 내려다보았다. 헐어진 종이박스들로 어질러져 있던 작업장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작업을 마친 뒤 아내가 알바생들에게 정리정돈을 시켰을 게 분명했다. 곧 죽어도 지저분한 건 못 보는 성격이니까. 나는 슬쩍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임시로 마련된 책상에 앉아 노란 포스트잇을 들여다보면서 뭔가를 작성하고 있었다.
배송직원들이 알바생들을 전철역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왔다. 그들은 냉장고에서 캔 음료를 꺼내 마시면서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하얀 이를 드러낸 채 익살맞게 웃어대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와중에 선임 배송직원이 아내의 뒷모습을 흘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사장님? 손달자 님 있잖습니까. 일을 조리 있게 잘 하시던데요. 알바생을 다루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고요. 어떤 알바생이 장난을 치다가 와인을 깨뜨리자, 바로 혼찌검을 냈다가도 기분 상하지 않게끔 달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시던데요.”
“호! 그랬어?”
나는 짐짓 깜짝 놀라는 시늉과 함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그러나 시큰둥했다. 다만 내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 챈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난 뒤, 나는 아내가 무엇을 작성하나 싶어 살며시 뒤로 가서 어깨너머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작업일보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내용은 이랬다.
●와인 선물세트 포장 작업 현황
-일자 : OOOO년 O월 OO일.
-금일 선물세트 포장 작업량 : 2,853set,
-파손 와인 품명 및 수량 : 딸보 화이트 와인 1병.
-라벨 탈락 및 찍힘 발견 : 딸보 레드 와인 2병. -이상-
‘자기야 전화 받어!’아내는 갑자기 제 등 뒤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 수신음에 적이나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녀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쏘아보더니 때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허공을 향해 두어 차례 팔을 내두르는 시늉까지 했다. 그러고는 작성한 작업일보를 들고 출입구 옆에 놓인 복사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포켓에서 급히 휴대폰을 꺼내 들고 발신자 번호를 확인했다. 오 과장이었다.
“오 과장, 상담은 잘 끝났어?”
“예, 사장님. 내일 오전에 ‘수원 리쿼’와 ‘이브닝코리아’두 업체에서 9백만 원을 입금하기로 했습니다.”
“수고했네, 거기서 바로 퇴근하게.”
내일 거래처에서 1천9백만 원이 입금되면 직원들 급여는 맞춰지는 셈이었다. 사실은 나도 속이 타들어갔다. 직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생을 하는데, 월급을 제때 못 줄까봐 내심 애가 달아 조바심을 쳤다.
“여보?”
퇴근을 하려고 창문을 닫으며 문단속을 하는데, 등 뒤에서 꽤나 놀란 듯한 아내의 목소리가 퉁명스레 들려왔다. 그녀의 손에는 어제 통관한 와인의 인보이스가 들려 있었다. 순간, 아차 싶었다. 언뜻 아까 내일 대부업체 구 실장한테 건네줄 인보이스와 수입필증을 복사한 후, 원본을 복사기에 그대로 놓아둔 게 생각났다.
“지난 5월 L/C를 개설할 적에 프랑스 딸보 와인의 병당 물대가 6.7$이고 총액이 241,200$라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 인보이스를 보니까 병당 4$로 표기돼 있는데, 도대체 어느 게 맞는 거야? 그때 L/C를 개설해야 한다면서 물대가 2억5천3백여만 원 이랬잖아. 환율은 1,050원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내는 내 턱밑까지 바싹 다가와 의혹에 찬 눈초리로 따지듯이 캐물었다. 사실 나는 꼭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남 사장이 입조심을 당부했던 터라 아내에게조차 비밀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기치 못했던 일이 별안간에 발생한 탓에 머쓱해져 핑계를 댈 만한 구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쭙잖은 구실을 대며 계속 숨기려 들다가는 자칫 딴 주머니를 찬 게 아니냐는 오해를 살 듯싶었다. 성가셨지만 기왕 이렇게 된 것, 이참에 사실대로 말해야 할 것 같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 경위는 이랬다.
이태 전 C-마트와 거래를 튼 후 남 사장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땐 외모가 감사나워 도무지 인정이라곤 없어 보여 기피했다. 그러나 C-마트를 드나들면서 교감을 나누다보니 외모와는 달리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산 위스키를 수입하여 C-마트에 공급하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지만, 세금에 관해서만큼은 걸핏하면 휠체어에 의지한 몸으로 TV 뉴스에 등장하는 대기업 회장들 못지않게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지난 설 연휴 후, 나는 그와 단 둘이서 술자리를 가졌다. 그 날, 나는 그에게 C-마트와 거래를 틀 때 30%의 마진을 붙여서 공급했는데, C-마트에서는 40%의 마진을 붙여 판매하더라고 했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는 듯 판매장려금 조로 매월 공급가의 8%를 납품대금에서 떼더니, 올 초부터는 매월 18%씩 떼고 있고, 신규 점포를 오픈할 때마다 예외 없이 6개월간 공급가의 10%를 납품대금에서 공제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C-마트 측의 일방작인 지시로 전체 매장에 대해 두 달에 열흘 꼴로 시음 행사를 하고 있는데, 판매도우미 인건비, 사은품 구입비, 시음주 사용량만도 매달 1천5백만 원 가량의 비용이 발생한다고 했다. 그 때문에 죽어라고 납품을 해봤자 본전은커녕 밑지기 일쑤라고 탄식조로 하소연했다. 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는 것만 같고, 이대로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도 장담할 수 없을 듯싶어 이쯤에서 거래를 접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고 답답한 심사를 털어놓았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내 말을 귀담아듣고 있더니, C-마트가 다른 마트에 비해 갑질이 유별나 공정거래위에 고발도 숱하게 당했지만, 매번 벌금 몇 푼 무는 게 더 싸게 쳐 눈도 깜짝 않더라고 했다. 그렇지만 대처하는 방법이 있다면서 조심스럽게 알려주었다.
그는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주류 수입업자는 대부분 쉬쉬하면서 절세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미 관행화되어 뿌리를 내렸다고도 했다. 또한 지속적으로 절세를 한 업체는 대부분 살아남았지만, 그렇지 못한 업체는 한결같이 이슬처럼 사라졌다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라면서, 쉬쉬하면서 하는 절세가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양 자랑삼아 떠벌리고 다닌 자들은 지금 빚더미에 올라앉아 허덕거린다면서 거듭거듭 입조심을 당부했다.
남 사장은 이왕 내친김이라 그런지 절세의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하다 못해 노골적으로 알려 주었다. 자기를 비롯하여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수입업자들은 홍콩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해 두고 필요시마다 그곳에서 수출업자에게 돈을 송금한다고 했다. 일테면, 수출업자는 물대를 다운(down)해서 인보이스를 발행하고, 수입업자는 다운 인보이스를 기준으로 L/C를 개설하거나, 물대를 T/T로 수출업자에게 송금한다. 수출업자로부터 인도받은 수입 상품을 통관할 때도 다운 인보이스를 기준으로 관세청에 세금, 즉 관세, 주세, 교육세, 부가가치세를 납부한다. 다운 인보이스 발행으로 발생된 미지급 물대는 홍콩의 페이퍼 컴퍼니 계좌에서 수출업자에게 별도로 송금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절세의 방법이 참으로 기묘했고, 또한 의외였다.
그는 절세에 관해 얘기하는 동안, 연신 번뜩이는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리 둘밖에 없는 룸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주위를 살피는 그의 눈빛이 무서우리만큼 형형했다. 그날 밤, 나는 그의 입에서 탈세(脫稅)라는 표현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는 말 한마디에도 그만큼 용의주도했던 거였다. 처음에는 절세라는 표현이 생뚱맞았지만 혹시라도 자기 말을 천장에서 숨죽여 기어 다니는 쥐라도 들을세라, 끝까지 반어적 성격이 짙은 절세로 표현하는 주도면밀함에 나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나는 C-마트와 거래를 튼 이후로 거의 매일같이 강박 수준의 긴장과 초조와 돈에 쫓겨 왔다. 남 사장으로부터 절세에 관한 조언을 들었을 땐, 마치 오랫동안 꽉 막혀 있던 체증이 한순간에 뻥 뚫린 것처럼 후련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드디어 때가 왔나보다 싶었다.
나는 그가 알려준 몇 가지 방편 중에서 내 형편에 맞는 것을 선택했다. 지난 2월부터 프랑스의 와인 제조사들과 연락을 주고받았으나 다들 다운 인보이스 발행에는 난색을 표했다. 하는 수 없이 프랑스에서 와인 유통업을 하고 있는 딜러를 수소문해 그 중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딜러와 비율을 조율해왔다. 지난 5월에야 마침내 본래 물대의 60%로 다운 인보이스를 발행하기로 최종 합의를 보았다. 딜러는 미국인이었고, 그는 유로화보다는 달러화(us$)로 대금 결제를 바랐다. 당시 환율이 1,050원일 때, 병당 6.7$짜리 와인 3만6천병을 수입하기로 계약을 했고, 물대 총액을 원화로 환산해 보니 모두 2억5천3백여만 원이었다. 지난 5월에 L/C를 개설하면서 다운 인보이스 물대인 1억5천1백여만 원을 L/C 개설 은행에 예입해 두었고, 절세를 위한 물대인 1억2백여만 원은 암달러상에게 달러로 맞바꾸어 유럽으로 운항하는 상선의 선원을 통해 딜러에게 전달했다. 굳이 암달러상에게 원화를 달러로 맞바꾼 것과 상선의 선원을 통해 딜러에게 절세용 물대를 전달한 것은, 후일 화근거리로 변질될 지도 모르는 싹은 애초에 틔우지 않기 위해서였다.
내 말을 듣고 난 아내는 잔뜩 불안감이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내두르더니 혼잣말처럼 ‘관행이란 본시 대기업한테나 통하는 것이지, 우리 같은 서민들에게는 탐욕일 뿐인데…’라고 중얼거리고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해서 절세한 금액이 모두 얼만데?”
“이번에 수입한 와인 3만6천병에 대해 대략 2천9백만 원쯤 될 거야.”
아내는 여전히 불안과 초조가 뒤섞인 표정이었지만, 매월 적자에 허덕이는 현실과 처갓집을 담보로 꿔 온 자금 때문인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나도 더 이상은 언급하지 않고 문단속을 마저 끝내고는 이내 운전석에 올랐다.
이후 와인 선물세트 포장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사흘 후에는 1만2천 세트의 포장을 마쳤다. 또한 대부업체 구 실장으로부터 2천여만 원이 통장에 입금되었다. 부족했던 통관 자금이 해결되자 와인 선물세트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보세창고에 남아 있던 와인 1만2천병도 모조리 통관하여 운송해왔다.
이윽고 열흘 후에는 1만8천 개의 선물세트를 금박지로 포장 완료했고, C-마트 40개 점포의 초도 발주량 8천 세트를 각 점포에 택배로 배송 완료했다. 남아 있는 1만 세트는 대목기간동안 판매가 잘 되는 매장에 집중적으로 공급할 참이다. 판매도우미 또한 40명 전원 여대생을 채용하여 고객을 상대로 와인 선물세트 선전 교육까지 모두 마쳤다. 와인 선물세트가 매장에 진열되면 일제히 투입시킬 참이다.
C-마트의 매장에 진열돼 있던 일반 상품들이 대부분 철수되고, 그 자리에 추석 선물세트 상품이 진열되던 날이었다. 아침부터 손에 잡힐 듯이 낮게 드리워져 있던 잿빛 구름들이 밤이 되자 폭우로 변해 사나운 기세로 쏟아졌다, 낮 동안에 수도권의 C-마트 점포에서 와인선물세트를 진열한 후 본사에 들렀던 오 과장이 밤늦게 회사로 돌아왔다. 그는 A4 용지 80쪽짜리 추석 선물세트 전단지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전단지에 인쇄된 선물세트 중 주류 코너를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니 좌측 하단 귀퉁이에 우리 회사의 선물세트가 실려 있었다. <2병 들이 나무 케이스 +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 쇼핑백>으로 구성된 와인 선물세트 사진 상단에는 검정색 글씨로‘딸보와인세트’라고 표기되었고, 하단에는‘39,900원’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우측으로는 엇비슷한 가격대의 타사 와인 선물세트가 나란히 실려 있었다. 페이지를 뒤로 넘겨 다음 장에 인쇄된 타사 와인 선물세트를 훑어보던 차였다. 명절 선물세트치고는 다소 조잡해 보이는 와인 선물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명절 선물세트라는 게 케이스도 없고, 포장도 되지 않은 채 쇼핑백이 전부였다.‘어째 저런 걸 명절 선물세트라고…’피식 실소를 흘리며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는 순간, 심장이 멎을 듯한 강렬한 문구가 눈에 걸려 아연 소스라쳤다.
나는 눈알을 <레드 와인 + 쇼핑백>으로 구성된 선물세트 사진 위아래로 궁굴리면서 표기된 문구를 눈여겨보았다. 사진 상단에는 붉은 글씨로 ‘1+1’이라고 표기되었고, 하단에는 검정 글씨로‘9,900원’이라고 진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이것은 곧 9,900원짜리 하나를 사면 덤으로 하나를 더 준다는 뜻이다. 죽을 똥을 싸서 선물세트를 포장해 놓았더니…, 산통을 깨는 것도 유분수지…. 와인 선물세트의 품질이나 외양보다는 저렴한 가격대를 선호하는 고객이 대부분인 마트에서 몇 갑절이나 더 비싼 상품이 팔릴 리 만무하다. 나는 이 뜻밖의 문구에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화를 참다못해 격한 목소리로 오 과장을 불렀다.
“오, 오 과장? 이, 이리 와봐. 도대체 이게 어, 어떻게 된 거야?”
오 과장은 득달같이 달려와서 곁눈질로 내 손에 든 전단지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나는 오 과장의 얼굴에 전단지를 집어던지듯이 거칠게 들이대며 고함을 내질렀다.
“왜, 왜 여태 말 안했어? 도, 도대체 이게 어, 어떻게 된 건지 말, 말해 보란 말야. 이 새끼야!”
“……”
오 과장은 얼이 빠진 양 아무런 대답도 없이 멍청한 표정으로 줄곧 서 있기만 했다. 그러나 그는 추석 선물세트를 준비하느라 지난 5월부터 사흘이 멀다 하고 C-마트 식품매입부에 드나들었기 때문에, 바보가 아니고서야 내용을 알게 마련이었다. 사실, 금년 추석에는 매출을 신장해보려고 예년과는 달리 나름 알차게 준비를 해왔다. 선물세트 케이스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아 여러 차례 수정을 가했고, 포장지 또한 누가 봐도 고급 축에 속하는 금박지를 사용했다. 그리고 마트에서의 최종 소비자 가격도 경쟁사들보다 1,2천원 저렴한 가격으로 내놓았다.
“빗대지 말고 곧이곧대로 말해 봐.”
내가 노여움을 추스른 척하며 차분하게 말을 하자, 꿈쩍 않고 서 있던 오 과장이 벌겋게 상기된 표정으로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뗐다.
“저도 얼마 전에야 알았어요. 구매 바이어 말로는 C-마트가 프랑스의 대형 와이너리에서 직접 수입하여 이번 추석 때부터 PB(private brand) 상품으로 내놓는다고 했어요. 추석 선물세트 물량으로만 20만병을 들여왔대요. 추석이후에도 상시 판매할 거라고도 했어요. 저도 이렇듯 싼 가격으로 출시될 줄은 몰랐죠. 출시 가격은 아까 C-마트 식품부에서 전단지를 보고서야 알았어요. 참, 사장님? 구매바이어 말을 들어보니 C-마트 본사 임원이 사장님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는 듯했어요.”
비열한 놈. 지난 설에 판매촉진비 청구액이 지나치게 과다해 항의한 걸 가지고 적의를 품고 있다니…. 눈 깜박할 사이에 거금을 날리고도 가만있을 사람이 있겠는가. 정말 못 돼먹은 놈이군!
C-마트에서 PB상품으로 내놓은 와인은 덤 상품까지 포함하면 한 병에 4,950원인 셈이다. 이 가격에는 부대비용, 즉 쇼핑백 비용도 포함되어 있다. 대관절 어떤 방법으로 수입을 했길래 이렇듯 저가로 출시한단 말인가! 지금까지 막대한 자금력과 권력을 앞세워 드세게 밀어붙이는 갑질에 버텨보려고 나름 발버둥질 쳤건만….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창고가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가서 아래를 말끄러미 바라본다. 출고 대기 중인 와인 선물세트 1만 세트가 큰 더미를 지어 수은등 불빛 아래에 덩그렇게 쌓여 있다. 저것들은 출고도 못해 본 채 다시 분해해야 할 것이다. 그저께 점포별로 출고 완료된 8천 세트 또한 절반도 못다 팔고 반품되어 돌아올 게 뻔하다. 이번 추석에는 와인 선물세트를 판매한 후 장인 내외분 유럽 여행도 보내드리고, 직원들에게도 상여금을 100% 지급하겠노라고 약속했었는데…. 처가와 대부업체에서 꾼 돈은 무엇으로 갚나….
어둠과 폭우가 기세 좋게 삼켜버린 캄캄한 밤하늘에서 갑자기 쿵, 우르릉우르릉! 세상이 폭삭 주저앉는 듯한 소리가 꼬리를 물고 울려 퍼졌다. 나는 재빨리 맞은편 창가로 달려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폭우가 맹렬히 쏟아지는 밤하늘에서는 천둥소리와 함께 시퍼런 금이 섰다 사라졌다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밤하늘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 모든 것을 남김없이 할퀴고 지나가는 환영에 사로잡힌 채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와인 선물세트에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첫댓글 이 양반이 생뚱맞게 왜 갑작스레 거센 폭우를 들먹이면서 마무리를 하나 했더니,
생둥맞은 게 아니라 위에(낮 동안 낮게 가라앉아 있던 구름 떼가 밤이 되자 그예 사나운 기세로 폭우가 쏟아졌다) 이와 같이 결말을 암시하는 장치를 해 두셨군요. 역시 대단해요. 당선 자격이 있습니다. 담배연기로 결말을 내었더라면......
그런데 소설 문장에 비유법, 특히나 은유가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좀 줄이라는....
마지막 문장에서까지 은유를....
좋은 결과가 있기를.
아멘^^*꾸벅 ♡
어째서 나는 응모가 곧 상으로 이어지는 걸까. 더 이상은 상장을 꽂을 자리가 없다. 이젠 제발 다른 분(상장을 받기를 애타게 갈구하는)에게 상장과 상금을 주기 바란다. 참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