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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이성복
1959년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성기(性器)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移民)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 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잔 얻어 먹거나
이차 대전 때 남양(南洋)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無氣力)과 불감증(不感症)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修飾)했을 뿐 아무것도 추억(追憶)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 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화(春畵)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 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윤리(倫理)와 사이비 학설(學說)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監獄)으로 자진해 갔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가족 풍경 이성복
가족 풍경(家族風景)
형은 장자(長子)였다 `이 책상에 걸터앉지 마시요―장자백(長子白)'
형은 서른 한 살 주일마다 성당(聖堂)에 나갔다 형은 하나님의
장자(長子)였다 성경(聖經)을 읽을 때마다 나와 누이들은 형이 기르는
약대였다 어느날 형은 아버지 보고 말했다 저 죽고 싶어요
하란에 가 묻히고 싶어요 안될 줄 뻔히 알면서도 형은
우겼다 우겼지만 형은 제일 먼저 익은 보리싹이었다 나와
누이들은 모래 바람 속에 먹이 찾아 날아다녔고 어느날 또
형은 말했다 아버지 이제 다시는 제사(祭祀)를 지내지
않겠어요 좋아요 다시는 안 돌아와요 그날 나는 울었다
어머니는 형의 와이셔츠를 잡아 당기고 단추가 뚝뚝
떨어졌다 누이들, 떨어지며 빙그르르 돌던 재미 혹시
기억하시는지 그래도 형은 장자(長子)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형의 아들 딸이었고 누이들, 그대 산파(産婆)들 슬픈 노래를
불렀더랬지 그래도 형은 장자(長子)였다 하란에서 멀고 먼
우리 집 매일 아침 식탁(食卓)에 오르던 말린 물고기들
혹시 기억하시는지 형은 찢긴 와이셔츠처럼 웃고 있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강 1 이성복
강 1
남들은 저를 보고 쓸쓸하다 합니다
해거름이 깔리는 저녁
미류나무 숲을 따라갔기 때문이지요
남들은 저를 보고 병들었다 합니다
매연에 찌들려 저의 얼굴이
검게 탔기 때문이지요
저는 쓸쓸한 적도 병든 적도 없습니다
서둘러 그들의 도시를
지나왔을 뿐입니다
제게로 오는 것들을 막지 않으며
제게서 가는 것들을 막지 않으며
그들의 눈 속에 흐르는 눈물입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강 이성복
강&
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未知)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강가에서 1 이성복
강가에서 1
그대 목소리 듣고 강가로 나왔을 때 봄풀이 우거진 먼 언덕에서 내가 선 모래톱까지 하늘이 와 닿았네 강은 한 줄기 팍팍한 흐름이었네 잔잔히 밀리는 물결은 떠나지 않았네 밀렸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래들의 중얼거림, 그대 품은 너무 깊어 나는 거기 흐를 수 없었네 강은 굽이져 언덕 뒤로 숨고 그대의 마지막 모습도 그런 것이었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강변 바닥에 돋는 풀 이성복
강변 바닥에 돋는 풀
강변 바닥에 돋는 풀, 달리는 풀
미끄러지는 풀
사나운 꿈자리가 되고
능선 비탈을 타고 오르는 이름 모를 꽃들
고개 떨구고 힘겨워 조는 날,
길가에 채이는 코흘리개 아이들
시름 없는 놀이에 겨워 먼 데를 쳐다볼 때
온다, 저기 온다
낡은 가구를 고물상에 넘기고
헐값으로 돌아온 네 엄마
빈 방티에 머리 베고 툇마루에 누우면,
부스럼처럼 피어나는 온동네 꽃들
가난의 냄새는 코를 찔렀다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구화 이성복
구화(口話)
□ 1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애를 낳았으면 좋겠어
걸어가는 시(詩)가 되었으면 물구나무 서는
오리가 되었으면 구토(嘔吐)하는 발가락이 되었으면
발톱 있는 감자가 되었으면 상냥한 공장(工場)이
되었으면 날아가는 맷돌이 되었으면 좋겠어
죽고 싶어도 짓궂은 배가 고프고
끌려다니며 잠드는 그림자, 이맘때 먼 먼 저 별에 술 한잔 따르고 싶더라 내 그리움으로
별아, 네 미끄럼틀을 만들었으면 좋겠어
□ 2
나는 아침 이슬 이씨(李氏) 노을에 걸린 참새가
내 엄마 나는 껍질 벗긴 소나무 진물
흘리며 꿈꾸고 있어 한없이 풀밭 위를
달리는 몸뚱이 체위(體位)를 바꾸고 싶어 정교회(正敎會)의
돔을 세우고 싶어 체위(體位)를 바꾸고 싶어
느낌표와 송곳이 따라와 노래의 그물에
잡히기 전에 어디 숨고 싶어 체위(體位)를 바꾸고
싶어 돋아나는 뾰루지 속에 병든 말이
울고 있어 병든 말을 끌어안고 임신할까 봐
지금은 다만 체위(體位)를 바꾸고 싶어
□ 3
모든 게 신비(神秘)였다 길에서 오줌 누는 여자아이와
곱추 남자와 전자시계(電子時計) 모든 게 신비(神秘)였다 채찍 맞은
말이 길게 울었다 모든 게 신비(神秘)였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그러나 죽지 않을 만큼 짓이겼다
모든 게 신비(神秘)였다 사랑의 힘 죽음의 힘 죽은 꽃의 힘
모든 게 신비(神秘)였다
삼백 육십 오일 낙타(駱駝)는 타박거렸다
얼마나 멀리 가야 하나 얼마나 가까이 있어야 하는가
□ 4
그날 아침 내게는 돈이 있었고 햇빛도
아버지도 있었는데 그날 아침 버드나무는
늘어진 팔로 무언가를 움켜 잡지 못하고
그 밤이 토해 낸 아침 나는 울고 있었다
그날 아침 거미줄을 타고 대형(大型) 트럭이
달려오고 큰 새들이 작은 새의 눈알을
찍어 먹었다 그날 아침 언덕은 다른 언덕을
뛰어넘고 다른 언덕은 또 다른 언덕을 뛰어넘고
병든 말이 앞발을 모아 번쩍, 들었다 그날
아침 배고픈 강(江)이 지평선을 핥고 내 울음은
동전처럼 떨어졌다
□ 5
먼 나라여
지도(地圖)가 감춘 나라여 덧없음의 없음이여
뒤집어진 차(車)바퀴가 헛되이, 구르는 힘이여
먼 나라여
오래 보면 먼지나는 길에도 물결이 일고
길 가던 사람이 풀빛으로 변하는, 먼 나라여
□ 6
여섯살도 채 안 되어 개구리 헤엄을 배웠어
자꾸만 물 속으로 가라앉았지 깨진 유리병이
웃고 있었어 그래 나는 엄마를 불렀고
물결이 나를 넘어뜨렸지 내 이름을 삼켰어
배꼽이 우렁이처럼 열리고 내 팔을 깨물었어
피리 소리가…… 밀밭에선 죽은 개가 울고
여러 번 낫질해도 안 쓰러지던 그림자 나는
우주(宇宙)보다 넓은 방(房)에 갇혀 있었지 간혹
비행기가 삐라를 뿌렸어 양귀비꽃이 식도(食道)를
거슬러 올라왔어 입과 항문(肛門) 사이 사랑은
교류(交流)로 흐르고 미치기 위해 나는 굶었지
순박한 사람들이 날으는 나를 돌로 후려치고
그래 나는 돌과 함께 떨어졌고 그래 나는
기차(汽車)에 뛰어 올랐지 그래, 나는 고향(故鄕)을 떠났어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그대 가까이 1 이성복
그대 가까이 1
바람에 시달리는 갈대 등속은
저희끼리 정갱이를 부딪칩니다
분질러진 다리로 서 있는 갈대들도 있었습니다
그대 가까이
하루 종일 햇빛 놀고
정갱이가 부러진 것들이 자꾸 일어서려 합니다
눈 녹은 진흙창 위로 꺾인 뿌리들이 꿈틀거립니다
그대 가까이 하루 종일 햇빛 놀고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금촌 가는 길 이성복
금촌 가는 길
□ 1
집에 적(敵)이 들어올 것 같았다
(집은 지하실(地下室), 집은 개구멍)
흰피톨 같은 아이들이 소리 없이 모였다
귀를 쫑긋 세우고 아버지는 문틈을 내다보았다
밥이 타고 있었다
적(敵)은 집이었다
□ 2
지주(地主)는 나이가 어렸다
다투어 사람들이 땅을 나누었다
아버지는 땅을 고르고 물을 뿌렸다
아버지는 신발을 벗어부쳤다
아버지의 발목이 흙에 묻혔다 다시 떠올랐다
깨꽃이 웃고 개가 짖었다
아버지의 발목이 깊이 묻혔다
아버지의 얼굴이 푸른 잎사귀처럼 흔들렸다
……어떤 꽃을 보여 주시겠어요, 아버지
□ 3
되새김위까지 다 비워도 남는
투명한 괴로움
병든 개
그리운 나라
색깔을 흘리며 잠자리가 지나가고
얼룩지는 명절(名節)옷
어머니, 제가 너무 크게 부르면
안 나타나는 짐승
어머니, 저의 몸은 잘 흐르다 고인 물
저의 잠은 허허벌판 추운 잠
어머니
□ 4
고향(故鄕)을 벗어나면서도 더럽힌 바람과 구름을 만나며
추수 끝난 논밭을 길게 찢으며
울타리 없는 마을에 또 하나의 별을 허락하며
그대 올 때는 내 뒤로 오라
두려워라 그대 그림자, 비루먹은 날들
그대 올 때는 목소리로 오라
두려워라 그대 그림자, 태울 수 없는
□ 5
어떻게 깨어나야 푸른 잎사귀가 될 수 있을까
기어이 흔들리려고 나는 전신(全身)이 아팠다
어디서 깨어나야 그대 내 잎사귀를 흔들어 줄까
그대 손 잡으면 그대 얼굴이 지워지고
가슴으로 걷는 길
얼음짱 밑 환한 집들
□ 6
그대 뿔 없는 괴로움으로 연거푸
내 가슴을 박으며
보여 주었지, 꺼져가는 불빛과 마른
진흙의 입맞춤
그대 뿔 없는 괴로움으로 연거푸
무엇을 박는지 모르고
깨고 나면 나는 늘 비켜 있었지
그대 눈 가리고 이제 날 찾아오면
부딪게 할 테야 내 눈빛으로 그대 실어
저 투명한 벽(壁)에, 여러 번 저 벽(壁)에
부딪고 부딪고도 무너지지 못해
한없이 내 귀청을 두드리다
어두운 나라 등에 업고 먼 길 갈 때
내 또 한번 그대의 길을 발길질할 테야
□ 7
아주 낮은 음악(音樂)으로 대추나무가 흔들리고
갈라진 흙벽에서
아이 울음 소리
길게 부는 바람 한 가닥 끌어 안고
내 지금 가면
땡삐가 나를 쏘리라
아프지 않을 때까지
잎 없는 나를 열어 놓고
땡삐 집이 되리라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길 1 이성복
길 1
그대 내 앞에 가고
나는 그대 뒤에 서고
그대와 나의 길은
통곡이었네
통곡이 너무 크면 입을 막고
그래도 너무 크면 귀를 막고
눈물이 우리 길을 지워 버렸네
눈물이 우리 길을 삼켜 버렸네
못 다 간 우리 길은
멎어버린 통곡이었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꽃 피는 시절 1 이성복
꽃 피는 시절 1
그 사흘 꽃들은 괴로움과 잠자고 제 그림자에 얼굴을 묻었다 꽃이 필 동안의 잔잔한 그리움을 지우고, 조바심을 지우고 꽃들이 흔들리는 경계 안으로 더 짙은 산그늘이 필요했다
줄기를 버리고 잎새를 버리고 떠도는 괴로움이 날벌레보다 가벼울 때
마주 보는 이여,
고이 멎는 그대 입김에도 얼마나 아픈 것이 있는가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꽃 피는 아버지 이성복
꽃 피는 아버지
□ 1
아버지
만나러 금촌 가는 길에
쓰러진 나무 하나를 보았다 흙을
파고 세우고 묻어 주었는데 뒤돌아 보니
또 쓰러져 있다
저놈은 작부처럼 잠만 자나?
아랫도리 하나로 빌어먹다 보니
자꾸 눕고 싶어지는가 보다
나도 자꾸 눕고 싶어졌다
나는 내 잠 속에 나무 하나
눕히고 금촌으로 갔다
아버지는
벌써 파주로 떠났다 한다
조금만 일찍 와도 만났을 텐데
나무가 웃으며 말했다 고향 따앙이 여어기이서
몇리이나 되나 몇리나 되나 몇리나되나……
학교 갔다 오는 아이들이 노래 불렀다
내 고향은 파주가 아니야 경북 상주야
나무는 웃고만 있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쓰러진 나무처럼
집에 돌아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야
□ 2
언덕배기 손바닥만한 땅에 아버지는
고추나무를 심었다
밤 깊으면 공사장 인부들이
고추를 따갔다
아버지의 고함 소리는 고추나무 키 위에
머뭇거렸다
모기와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엉켜 붙었다
내버려 두세요 아버지
얼마나 따가겠어요
보름 후 땅 주인이 찾아와, 집을 지어야겠으니
고추를 따가라고 했다
공사장 인부들이 낄낄 웃었다
□ 3
아무 일도 아닌 걸 가지고 아버지는 저리
화가 나실까 아버지는 목이 말랐다 물을
따라드렸다 아버지, 뭐 그런 걸 가지고
자꾸 그러세요 엄마가 말했다 얘, 내버려
둬라 본디 그런 양반인데 뭐 아버지는
돌아누워 눈썹까지 이불을 끌어 당겼다
1932년 단밀 보통학교 졸업식
며칠 전 장날 아버지 떡 좀 사먹어요
그냥 가자 가서 저녁 먹자
아버지이…… 또! 이젠 너 안 데리고 다닌다
네 월사금도 내야 하고 교복도 사야 하고……
아버지, 아버지는 굶었다 그해 모심기하던
날 저녁 아버지는 어지러워 밥도 못 잡숫고
그 다음날 새벽 돌아가셨읍니다
아버지, 약(藥) 한 첩 못 써보고
아무도 일찍 잠들지 못했다 아버지는 꽃 모종
하고 싶었지만 꽃밭이 없었다 엄마, 어디에
아버지를 옮겨 심어야 할까요 살아 온 날들
물결 심하게 이는 오늘, 오늘
□ 4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기 며칠 전부터 벌레가 나왕 책장을 갉아 먹고
있었다 처음엔 두 군데, 다음엔 다섯 군데 쬐그만 홈을 파고
고운 톱밥 같은 것을 쏟아냈다 저도 먹어야 살지, 청소할 때마다
마른 걸레로 훔쳐냈다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만 계셨다
텔레비 앞에서 프로가 끝날 때까지 담배만 피우셨다 벌레들은
더 많은 구멍을 파고 고운 나무 가루를 쏟아냈다 보자 누가 이기나,
구멍마다 접착제로 틀어 막았다 아버지는 낮잠을 주무시다 지겨우면
하릴없이, 자전거를 타고 수색(水色)에 다녀오시고 어머니가 한숨 쉬었다
그만하세요 어머니, 이젠 연세도 많으시고…… 어머니는 먼 산을 바라보며
또 한 주일이 지나고 나는 보았다 전에 구멍 뚫린 나무 뒷편으로
새 구멍이 여러 개 뚫리고 노오란 나무 가루가 무더기, 무더기
쌓여 있었다 닦아내도, 닦아내도 노오랗게 묻어났다 숟가락을 지우며
어머니가 말했다 창틀에 문턱에 식탁에까지 구멍이…… 약이 없다는데,
아버지는 밥을, 소처럼, 오래오래 씹고 계셨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나무 1 이성복
나무 1
단풍나무 밑둥은 어찌나 고운지 나는 연거푸 입맞췄습니다 찝찔한 껍질의 감각이 혀에 묻어났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급한 골짜기로 쏟아지는 물을 한쪽 어깨로 받으며, 연한 뿌리로 바위 틈에 길을 만들며
언젠가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푸른 하늘 한쪽에 나의 작은 하늘을 만들며, 겁 많은 잎새들을 다른 잎새 위에 드리우며
찝찔한 나의 입맞춤을 단풍나무 껍질은 알았을까요?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남해 금산 이성복
남해 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이성복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그러나 머물러 흔들려 본 적 없고
돌이켜 보면 피가 되는 말
상처와 낙인을 찾아 고이는 말
지은 죄(罪)에서 지을 죄(罪)로 너는 끌려가고
또 구름을 생각하면 비로 떨어져
썩은 웅덩이에 고이고 베어 먹어도
베어 먹어도 자라나는 너의 죽음
너의 후광(後光), 너는 썩어 시(詩)가 될 테지만
또 네 몸은 울리고 네가 밟은 땅은 갈라진다
날으는 물고기와 용암(熔岩)처럼 가슴 속을
떠돌아 다니는 새들, 한바다에서 서로
몸을 뜯어 먹는 친척들(슬픔은
기쁨을 잘도 낚아채더라)
또 한 모금의 공기와 한 모금의 물을 들이켜고
너는 네가 되고 네 무덤이 되고
이제 가라, 가서 오래 물을 보고
네 입에서 물이 흘러나오거나
오래 물을 보고 네 가슴이 헤엄치도록
이제 가라, 불온(不穩)한 도랑을 따라
예감(豫感)을 만들며 흔적을 지우며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을 세우고 1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1
노오란 꽃들이 종아리 끝까지 흔들리고 나는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간다 발정난 개처럼 알록달록한 식욕을 찾아, 지름길을 버리고 여러 개의 정원 같은 세월의 골목을 돌아 나는 추억의 식당으로 간다 내가 몸 흔들면 송진 같은 진액이 스며나오고, 발길에 닿는 것마다 조금씩 슬픈 울음을 울기 시작한다 언제 와도 좋은 길을 나는 처음인 듯 이렇게 걸어 보는 것이다 으 으 으 벙어리의 입 모양을 지으며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1993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을 세우고 2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2
생활이란 또 무엇인가 아침부터 햇빛은 들창을 때리고 나뭇잎들은 자꾸 구멍이 뚫리고 무엇인가 끊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듯 햇빛은 무게 없는 타격을 던지고 있다 무더기로 떨어지는 햇빛의 시체를 보며 이럴 때일수록 나는 안 지려고 조바심을 한다 무엇이 나를 이기려 드는지 모르지만 내 지고 나면 저 햇빛도, 햇빛의 무게 없는 타격도 없을 것이기에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1993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을 세우고 12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12
큰, 아주 큰 마로니에 잎새들은 수천 송이 흰 꽃들을 세우고, 그 큰 나무는 소담스런 성채 같고 성당 같고 거기서 때로 검은 새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저마다 무슨 문을 밀고 나오는 것만 같다 문을 열고 나와도 넉넉하고 문을 밀고 들어가도 넉넉한 키 큰 마로니에나무여, 나 언젠가 너의 잎새를 열고 들어가 낌새도, 자취도 없이 수천 송이 너의 흰 꽃 속에 섞일 수 있을까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1993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을 세우고 24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24
밤 11시 혼자 화장실 창문을 열고 하늘로 치솟은 검은 나무를 바라본다 오래 고향에선 편지가 오지 않고 나는 늘 혼자다 혼자 잠자고, 혼자 밥 먹고……이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내 바라보는 검은 나무에는 달빛 한 점 묻지 않고, 그 속에서 검은 잠을 자는 새들이라도 있는가 오래 고향에선 편지가 오지 않고, 바람 불면 푸른 나무 그늘 아래 흰 떡시루를 이고 오는 젊으실 적 어머니 어쩌면 그런 일이라도 있었던가 검은 새, 검은 새야 우리 어머니 이고 오는 흰 떡시루라도 보이는가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1993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을 세우고 32 이성복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32
창문 두 쪽을 가득 채운 나무, 저렇게 많은 잎과 가지들이 흔들리자면 아름드리 둥치는 얼마나 비틀리겠는가 큰 것들은 다름아닌 수많은 작은 것들의 비애의 합침 더 세게 흔들리다 보면 몸통이 찢어지고 빠개질 것 같아도 질긴 비애의 세월에 겹겹이 둘러싸인 큰 나무는 밤새도록 정정하다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1993
높이 치솟은 소나무 숲이 이성복
높이 치솟은 소나무 숲이
높이 치솟은 소나무 숲이 불안하였다 밤, 하늘의 구름은 층층이 띠를 이루고 그 사이 하늘은 무늬 넣은 떡처럼 쌓였다 층층이, 하늘에 가면 말이 필요할까 이곳은 말이 통하지 않는 곳
이곳은 말이 통하지 않아! 집에 가면 오늘도 아버지 집에 낯선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모두 피를 본 사람들이다 의로운 자들,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자들의 입에 피가 묻어 있다 의로운 자들의 입에서 피가 웃는다 아버지는 그들을 몹시 사랑하신다
아, 하고 내 입에서 낮은 한숨이 나온다 오늘 밤 그들은 시끄러운 예언자를 묶어 나무에 매달 것이다 예언자도 그리 믿을 만한 사람은 못 된다 그의 배는 부르고 걱정이 없다 아무도 걱정하는 사람은 없고……
소나무 숲은 더욱 불안해진다 달이 소나무 숲으로 밀려 가고 물은 움직이지 않는다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느낌 이성복
느낌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다시, 정든 유곽에서 이성복
다시, 정든 유곽에서
□ 1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 우리는 누구냐
우리의 하품하는 입은 세상보다 넓고
우리의 저주는 십자가보다 날카롭게 하늘을 찌른다
우리의 행복은 일류 학교 뱃지를 달고 일류 양장점에서
재단되지만 우리의 절망은 지하도 입구에 앉아 동전
떨어질 때마다 굽실거리는 것이니 밤마다
손은 죄(罪)를 더듬고 가랑이는 병약한 아이들을 부르며
소리 없이 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나 우리는 누구냐
우리의 후회는 난잡한 술집, 손님들처럼 붐비고
밤마다 우리의 꿈은 얼어붙은 벌판에서 높은 송전탑처럼
떨고 있으니 날들이여, 정처 없는 날들이여 쏟아 부어라
농담과 환멸의 꺼지지 않는 불덩이를 폐차(廢車)의 유리창 같은
우리의 입에 말하게 하라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를
□ 2
철든 그날부터 변은 변소에서 보지만 마음은 늘 변 본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명절날 고운
옷 입은 채 뒹굴고 웃고 연애하고……
우리는 정든 마굿간을 떠나지 못하며
무덤 속에 파랑새를 키우고 잡아 먹고
무덤 위에 애들을 태우고 소풍 나간다 빨리 달린다
참 구경 좋다 때때로
스캔들이 터진다 색(色)이 등등한 늙은이가
의붓딸을 범(犯)하고 습기 찬 어느날 밤 신혼부부(新婚夫婦)는
연탄 가스로 죽는다 알몸으로, 그 참 구경 좋다
철든 그날부터 변은 변소에서 보지만 마음은 늘 변 본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악에 받친 소년들은
소주 병을 깨고 제 팔뚝을 그어도……
여전히 꿈에 부푼 식모애들은 때로, 사생아(私生兒)를 낳지만
언젠가, 언젠가도 정든 마굿간에서 한 발자국, 떼어 놓기를 우리는 겁내며
□ 3
우리는 살아 있다 살아 손가락을 발바닥으로 짓이긴다
우리는 살아 있다 살아 애써 모은 돈을 인기인과 모리배들에게 헌납한다
우리의 욕망은 백화점에서 전시되고 고층 빌딩 아래 파묻히기도 하며
우리가 죽어도 변함 없는 좌우명 인내! 도대체 어떤 사내가
새와 짐승과 나비를 만들고 남자와 여자를 만들고 제7일에
휴식하는가 새는 왜 울고 짐승은 무얼 믿고 뛰놀며 나비는
어찌 그리 고운 무늬를 자랑하는가 무슨 낙으로 남자는 여자를 끌어안고
엉거주춤 죽음을 만드는가 우리는 살아 있다 정다운 무덤에서 종소리,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후회, 후회, 후회의 종소리가 그칠 때까지
□ 4
때로 우리는 듣는다 텃밭에서 올라오는
노아란 파의 목소리 때로 우리는 본다
앞서 가는 사내의 삐져 나온 머리칼 하나가
가리키는 방향(方向)을 무슨 소린지 어떻게,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안다 우리가
잘못 살고 있음을 때로 눈은 내린다
참회의 전날 밤 무릎까지 쌓이는 표백된 기억(記憶)들
이내 질퍼덕거리며 낡은 구두를 적시지만
때로 우리는 그리워한다 힘 없는 눈송이의
모질고 앙칼진 이빨을 때로 하염없이 밀리는
차(車)들은 보여 준다 개죽음을 노래하는 지겹고
숨막히는 행진을 밤마다 공장 굴뚝들은
거세고 몽롱한 사랑으로 별길을 가로막지만
안다 우리들 시(詩)의 이미지는 우리만큼 허약함을
안다 알고 있다 아버지 허리를 잡고 새끼들의
손을 쥐고 이 줄이 언제 끝나는지 뭣하러 줄
서는지 모르고 있음을
□ 5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낡은 구두에 묻은 눈 몇 송이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것은 마음 속에 항시 머무는 먹장구름
우리가 예감할 수 있는 것은 더럽힌 핏줄 더럽힌 자식
병거(兵車)는 항시 밥상을 에워싸고 떠나지 않고 꿈틀거리는 것은, 물결치는 것은
무거운 솜이불 아, 이 겨울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안개 낀 길을 따라 무더기로 지워지는 나무들
우리의 후회는 눈 쌓인 벌판처럼 끝없고 우리의 피로는
죽음에 닿는 강(江) 한 끼도 거름 없이 고통은 우리의 배를
채우고 담배불로 지져도, 얼음판에 비벼도 안 꺼지는 욕정
보석(寶石)과 향료(香料)로 항문을 채우고서 아, 이 겨울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잠 깬 뒤의 하품, 물 마신 뒤의 목마름
갈 수 있을까
언제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로
귓속에
복숭아꽃 피고
노래가
마을이 되는
나라로
갈 수 있을까
어지러움이
맑은 물
흐르고
흐르는 물따라
불구(不具)의 팔다리가
흐르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
죽은 사람도 일어나
따뜻한 마음 한잔
권하는 나라로
아, 갈 수 있을까
언제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로
□ 6
그리고 어느날 첫사랑이 불어닥친다
그리고 어느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온다
무너진 담벽, 늘어진 꿈과 삐죽 솟은 법(法)을
가뿐히 타넘고 온다 아직 눈 덮인 텃밭에는
싱싱한 파가 자라나고 동네 아이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 연을 날린다 땅에 깔린다
노래는 땅에 스민다 그리고 어느날 집들이
하늘로 떠오르고 고운 바람에 실려 우리는
멀리 간다 창가에 서서 빨리 바뀌는
풍경(風景)을 바라보며 도란도란 이야기한다
상상도 못할 졸렬한 인간들을 그곳에서
만났다고…… 그리고 어느날 다시 흙구덩이 속에
추락할 것이다 뱃가죽으로 기어갈 것이다
사랑해, 라고 중얼거리며 서로 모가지를 물어
뜯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날 아무것도 다시는
불어닥치지 않고 기다림만 남아 흐를 것이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당신은 짐승, 별, 이성복
당신은 짐승, 별,
당신은 짐승, 별, 내 손가락 끝
뜨겁게 타오르는 정적
외로운 사람들이 따 모으는 꽃씨
외로운 사람들의 죽음
순간과 머나먼 곳,
이방(異邦)의 말이 고요하게 시작됩니다
당신의 살갗 밑으로 대지(大地)는 흐릅니다
당신이 나타나면 한 개의 물고기 비늘처럼
무지개 그으며 내가 떨어질 테지만,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또 비가 오면 이성복
또 비가 오면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微動)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微動)도 않으신다
발 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 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라라를 위하여 이성복
라라를 위하여
□ 1
지금, 나뭇잎 하나 반쯤 뒤집어지다 바로 눕는 지금에서
언젠가로 돌아누우며
지금, 물이었던 피가 물로 돌아가길 기다리는 지금 내게로
들어와 나를 벗으며
지금, 나 몰래 내 손톱을 밀고 있는 그대
손톱 끝에서 밀리는 공기의 저쪽 끝에서도 밀리는
그대, 내 목마름이거나 서글픔
가늘게 오르다가 얇게 깔리며 무섭게 타오르는그대
나는 듣는다, 그대 벗은 어깨를 타고 흘러 떨어지는 빛다발의 환호(歡呼)
잔뜩 물 오른 그대 속삭임
□ 2
어디서 그대는 아름다운 깃털을 얻어 오는가
초록을 생각하면 초록이 몸에 감기는가
분홍을 생각하면 분홍이 몸에 감기는가
무엇이 그대 모가지를 감싸안으며 멋진 마후라가 되는가
날 때부터 이쁜 마음을 몸에 두른 그대는 행복하여라
행복한 부리로 아스팔트를 쪼며 행복한 발바닥으로 제 똥을 뭉개는 그대는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만남 이성복
만남&
내 마음은 골짜기 깊어 그늘져 어두운 골짜기마다 새들과 짐승들이 몸을 숨겼습니다 그 동안 나는 밝은 곳만 찾아왔지요 더 이상 밝은 곳을 찾지 않았을 때 내 마음은 갑자기 밝아졌습니다 온갖 새소리, 짐승 우짖는 소리 들려 나는 잠을 깼습니다 당신은 언제 이곳에 들어오셨습니까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모래내․ 1978년 이성복
모래내․ 1978년
□ 1
하늘 한 곳에서 어머니는 늘 아팠다
밤 이슥하도록 전화하고 깨자마자
누이는 또 전화했다 혼인(婚姻)날이 멀지 않은 거다
눈 감으면 노란 꽃들이 머리 끝까지 흔들리고
시간(時間)은 모래 언덕처럼 흘러내렸다
아, 잤다 잠 속에서 다시 잤다
보았다, 달려드는, 눈 속으로, 트럭, 거대한
무서워요 어머니
―얘야, 나는 아프단다
□ 2
이제는 먼지 앉은 기왓장에
하늘색을 칠하고
오늘 저녁 누이의 결혼 얘기를 듣는다
꿈 속인 듯 멀리 화곡동 불빛이
흔들린다 꿈 속인 듯 아득히 기적(汽笛)이 울고
웃음 소리에 놀란 그림자 벽에 춤춘다
노새야, 노새야 빨리 오렴
어린 날의 내가 스물 여덟 살의 나를 끌고 간다
산 넘고 물 건너 간다 노새야, 멀리 가야 해
□ 3
거기서 너는 살았다 선량한 아버지와
볏짚단 같은 어머니, 티밥같이 웃는 누이와 함께
거기서 너는 살았다 기차 소리 목에 걸고
흔들리는 무우꽃 꺾어 깡통에 꽂고 오래 너는 살았다
더 살 수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우연히 스치는 질문―새는 어떻게 집을 짓는가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풀잎도 잠을 자는가,
대답하지 못했지만 너는 거기서 살았다 붉게 물들어
담벽을 타고 오르며 동네 아이들 노래 속에 가라앉으며
그리고 어느날 너는 집을 비워 줘야 했다 트럭이
오고 세간을 싣고 여러번 너는 뒤돌아 보아야 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문신 이성복
문신
당신을 따라서 나도 모르게 천착하였습니다 당신이 슬퍼할 줄 알면서도 내게 남은 것은 다 외로움이었습니다 내 손에 묻은 당신의 피를 보았습니다 당신에게서 당신에게로 가는 것들을 가로막고서 내게 남은 것은 다 외로움이었습니다 당신 가슴에 내가 새긴 끔찍한 문신이었습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밥에 대하여 이성복
밥에 대하여
□ 1
어느날 밥이 내게 말하길
ꡒ참, 아저씨나 나나……
말꼬리를 흐리며 밥이 말하길
ꡒ중요한 것은 사과 껍질
찢어 버린 편지
욕설과 하품,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빙벽(氷壁)을 오르기 전에
밥 먹어 두는 일.
밥아, 언제 너도 배고픈 적 있었니?
□ 2
밥으로 떡을 만든다
밥으로 술을 만든다
밥으로 과자를 만든다
밥으로 사랑을 만든다 애인(愛人)은 못 만든다
밥으로 힘을 쓴다 힘 쓰고 나면 피로하다
밥으로 피로를 만들고 비관주의(悲觀主義)와 아카데미즘을 만든다
밥으로 빈대와 파렴치와 방범대원과 창녀(娼女)를 만든다
밥으로 천국(天國)과 유곽과 꿈과 화장실을 만든다 피로하다 피로하다 심히 피로하다
밥으로 고통(苦痛)을 만든다 밥으로 시(詩)를 만든다 밥으로 철새의 날개를 만든다 밥으로 오르가즘에 오른다 밥으로 양심가책에 젖는다 밥으로 푸념과 하품을 만든다 세상은 나쁜 꿈 나쁜 꿈 나쁜
밥은 나를 먹고 몹쓸 시대(時代)를 만들었다 밥은 나를 먹고 동정과 눈물과 능변(能辯)을 만들었다, 그러나
밥은 희망(希望)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밥이 법(法)이기 때문이다 밥은 국법(國法)이다 오 밥이여, 어머님 젊으실 적 얼굴이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벽제 이성복
벽제
벽제. 목욕탕과 공장(工場) 굴뚝. 시외 버스 정류장 앞, 중학생과 아이 업은 여자.
벽제. 가보진 않았지만 훤히 아는 곳. 우리 아버지 하루 종일 사무를 보는 곳.
벽제, 외무부에 다니던 내 친구 일찍 죽어 그곳에 갔을 때 다른 친구 하나는
화장장 사무장(事務長). 모두 깜짝 놀랐더라는 뒷얘기. 내가 첫 휴가 나왔을 때 학교에서
만난 그 녀석. 몰라보게 키가 크고 살이 붙어 물어 봤더니 ꡒ글쎄, 몸이 자꾸
좋아지는구나ꡓ하던 그 녀석. 무던히 꼿꼿해 시험 보면 면접(面接)에서 떨어지곤 하던
녀석. 큰누님은 시집 가고 어린 동생들, 흔들리던 살림에도 공부 잘 하다가,
신장염(腎腸炎). 그날, 비 오던 날 친구들 모여 한줌한줌 뼈를 뿌릴 때 ꡒ진달래꽃 옆에
뿌려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ꡓ 친구들, 흙이 되기 전에 또 비맞는 그 녀석 생각하고,
울음 소리…… 벽제. 오늘 아침 우리집 집수리 하는 사내, 우리 아버지 벽제 피혁공장(皮革工場)에
다니신다니까 ꡒ벽제가 우리 고향이예요. 아저씨한테 잘 말씀드려 우리 아이 취직 좀
시켜 주세요. 가죽 공장은 힘든다던데……ꡓ 그리운 고향 벽제. 너무 가까우면 생각도
안 나는 고향. 음식점과 잡화점, 자전거포 간판이 낡은 나라. 무우꽃이 노랗게
텃밭에 자라나고 비닐 봉지 날으는 길로 개울음 소리 들려오는.
벽제. 이별하기 어려우면 가보지 말아야 할, 벽제. 끊어진 다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봄 밤 이성복
봄 밤
잎이 나기 전에 꽃을 내뱉는 살구나무,
중얼거리며 좁은 뜰을 빠져 나가고
노곤한 담벼락을 슬픔이 윽박지르면
꿈도, 방향도 없이 서까래가 넘어지고
보이지 않는 칼에 네 종아리가 잘려 나가고
가까이 입을 다문 채 컹컹 짖는 중년(中年) 남자들
네 발목, 손목에 가래가 고인다, 벌써 어두워!
봄밤엔 어릴 때 던져 올린 사금파리가
네 얼굴에 박힌다
봄밤엔 별을 보지 않아도 돼,
네 얼굴이 더욱 빛나 아프잖아?
봄밤엔 잠자면서 오줌을 누어야 해
겨우내 밀린 오줌을, 꼭, 그러나
이마는 물처럼 흐르고
미끄러운 유리 입술,
벽은 뚫고 나가기엔 너무 두껍고
누군가 새어들 만큼 얇아
아무래도 네 영혼은 누, 눈 감고 아, 아, 아옹하기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분지 일기 이성복
분지 일기
슬픔은 가슴보다 크고
흘러가는 것은
연필심보다 가는 납빛 십자가(十字架)
나는 내 마음을 돌릴 수 없고
아침부터 해가 지는 분지,
나는 내 마음을 돌릴 수 없고
촘촘히, 촘촘히 내리는 비,
그 사이로 나타나는 한 분 어머니
어머니, 어려운 시절이 닥쳐올 거예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울고 있어요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비 1 이성복
비 1&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꺼이 꺼이 울며 가더니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포석을 치고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넘어
온몸을 적십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비단길 1 이성복
비단길 1
깊은 내륙에 먼 바다가 밀려오듯이
그렇게 당신은 내게 오셨습니다
깊은 밤 찾아온 낯선 꿈이 가듯이
그렇게 당신은 떠나가셨습니다
어느 날 몹시 파랑치던 물결이 멎고
그 아래 돋아난
고요한 나무 그림자처럼
당신을 닮은 그리움이 생겨났습니다
다시 바람 불고 물결 몹시 파랑쳐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비단길 2 이성복
비단길 2
저물녘의 못물같이 내 당신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끝없는 동굴 같은 것이 마음 속에 깊어갔습니다
내 몸 비틀면 당신의 이마 위 맑은 물방울 굴러내리고
처음엔 형벌인 줄 몰랐습니다
나의 괴로움, 당신의 형벌일 줄 몰랐습니다
오, 저물녘의 못물같이 내 당신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사랑일기 이성복
사랑일기(日記)
□ 1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을 때
마음이여, 몸은 늙은 풍차(風車), 휘이 돌려 보시지
몸은 녹슬은 기계, 즐거움에 괴로움 섞어
잠을 만드는 기계
몸은 벌집, 고통(苦痛)이 들쑤신 벌집
몸은 눈도 코도 없지만 몸을 쏘아보는 엽총(獵銃)과
몸을 냄새 맡는 누리의 미친개들
어디로도 갈 수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을 때
마음이여, 몸은 낡은 신발, 뒤집어 신고 날아 보시지
―당대(當代)의 몸 값은 신발 값과 같으니
당대(當代)의 몸이 헤고 닳아, 참으로 연한 뱃가죽 보이누나
□ 2
한 마리 말을 옭아매는 마차(馬車)의 끈은, 끊어지지 않는
마차(馬車)의 사랑 마차(馬車)의 꿈 사랑한다 가엾은 내……
미끼에 걸린 물고기를 끌어 올리는, 가늘은 낚싯줄은
물고기의 사랑, 사랑은 입으로 말하여지고 사랑은 입을 꿰뚫고
그래, 개를 걷어차는 구둣발은, 구두를 닮은
소가죽의 사랑 픽, 쓰러지며 소가 남긴 사랑
죽은 나무는 자라지 않지만 죽은 나무의 괴로움은 자라고
지금 밀물은 바로 그 썰물이었으며 애인(愛人)은
애인(愛人)을 닮은 수렁이었고 애인(愛人)을 닮은 무딘 칼이었고 애인(愛人)을 닮은 불안(不安)이었고
그래, 온 몸으로 번지는 매독(梅毒)의 사랑
문드러지면서 입술이, 허벅지가 표현(表現)하는 아기자기한 사랑
어머니, 저의 밥은 따뜻한 죽음이요 저의 잠은 비좁은 수의(壽衣)요
어머니 저는 낙타요 바늘이요 성자(聖者)요 성자(聖者)의 밥그릇이요 어머니, 저는
견디어라 얘야, 네 꼬리가 생길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마라, 아픈 것들의 아픔으로 네가 갈 때까지
네 혓바닥은 괴로움의 혓바닥이요 네 손바닥은 병든 나무의 나뭇잎이요
□ 3
어느날 엄마, 내가 아주 배고프고 다리 아파 목마른 논에
벼포기로 섰다면 엄마, 그 소식 멀리서 전해 듣고 맨발로
뛰어오셔 얘야 집에 가자 아버지랑 형이랑 너 기다리느라
잠 한숨 못 잔단다 집에 가자 내가 잘못했어 엄마, 그러시겠어요?
그러실 테지만 난 못 돌아가요 뿌리가 끊어지면 물을
못 먹어요 엄마, 제 이삭이나 넉넉히 훑어 가시지요
어느날 엄마, 내 살 길이 아주 가파르고 군데군데 끊어지기도 한다면
엄마, 얘야 내 등에 업혀라 밥 많이 먹고 건강해야지 너만 보면
마음 아프구나 하시며 내 살 길처럼 타박타박 걸어가시겠어요?
엄마 걸어가시겠어요? 발굽이 부러지면
등으로 기어 날 안고 가시겠지만 엄마, 난 못 가요
내 사지(四肢)는 못박혀 고름 흘려요
엄마, 어느날 저녁 구름을 밀어내며 얘야
여기 예루살렘이야 통곡(痛哭)으로 벽(壁)을 만든 나의 안방이야
요단, 잔잔하단다 요단, 지금 건너라, 빨리 하시면
내가 건너겠어요? 어느게 나룻배인가요? 아니예요
그건 쓰러진 누이예요 엄마, 누이가 아파요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산길 1 이성복
산길 1
아카시아 나무는 잎새가 짙어 이마를 치고 어깨를 툭툭 치고 길은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았습니다 그때 문득 길이 끊어지고 아슬하게 높은 낭떠러지 위에 섰습니다
몇 번이나 가본 그곳을 훤히 알면서도 낭떠러지 앞에 설 때마다 다시 놀라고 못내 서운해 돌아옵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산길 2 이성복
산길 2
한 사람 지나가기 빠듯한 산길에 아카시아 우거져 드문드문 햇빛이 비쳤습니다 길은 완전히 막힌 듯했습니다 이러다간 길을 잃고 말 거라는 생각에, 멈칫멈칫 막힌 숲 속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떨면서, 가슴 조이며 우리는 산길을 내려왔습니다 언제나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었지요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새벽 세시의 나무 이성복
새벽 세시의 나무
빛이 닿지 않는 깊은 품 속에서 새벽 세시의 나무는 죽음을 만든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보이는 공간으로 그의 죽음이 푸른 가지를 뻗고 나무는 가장자리의 잎들을 흔든다 의지와 자세를 잊고 새벽 세시의 나무는 서 있다
언제나 초록의 싱싱함을 만드는 죽음은
빛이 닿지 않는 깊은 품 속에서
부리 긴 새의 잠을 흔든다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서시 이성복
서시(序詩)&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읍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읍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읍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류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세월에 대하여 이성복
세월에 대하여
□ 1
석수(石手)의 삶은 돌을 깨뜨리고 채소 장수의 삶은
하루 종일 서 있다 몬티를 닮은 내 친구는
동시상영관(同時上映館)에서 죽치더니 또 어디로 갔는지
세월은 갔고 세월은 갈 것이고 이천 년 되는 해
아침 나는 손자(孫子)를 볼 것이다 그래 가야지
천국(天國)으로 통하는 차(車)들은 바삐 지나가고
가로수는 줄을 잘 맞춘다 저기, 웬 아이가
쥐꼬리를 잡고 빙빙 돌리며 씽긋 웃는다
세월이여, 얼어붙은 날들이여
야근하고 돌아와 환한 날들을 잠자던 누이들이여
□ 2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이마에
뱀딸기꽃이 피어 오르고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고 때로는 정말 형님이 아들을 낳기도
했다 아버지가 으흐허 웃었다 발가벗은
나무에서 또 몇 개의 열매가 떨어졌다 때로는
얼음 깔린 하늘 위로 붉은 말이 연탄을
끌고 갔다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고 정말
허리 꺾인 아이들이 철 지난 고추나무처럼
언덕에 박혀 있기도 했다 정말 거세(去勢)된
친구들이 유행가를 부르며 사라져 갔지만
세월은 흩날리지 않았다 세월은 신다 버린 구두
속에서 곤한 잠을 자다 들키기도 하고
때로는 총알 맞은 새처럼 거꾸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으흐허 웃고만 있었다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나는 높은 새집 위에서
잠시 쉬기도 하였고 그건 대부분 환영(幻影)이었다
□ 3
세월은 갔고 아무도 그 어둡고 깊은 노린내 나는
구멍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했다 몇 번인가 되돌아온
편지(便紙) 해답은 언제나 질문의 잔해(殘骸)였고 친구들은
태엽 풀린 비행기처럼 고꾸라지곤 했다 너무
피곤해 수음(手淫)을 할 수 없을 때 어른거리던
하얀 풀뿌리 얼어붙은 웅덩이 세월은 갔고
매일매일 작부들은 노래 불렀다 스물 세 살,
스물 네 살 나이가 담뱃진에 노랗게 물들 때까지
또 나는 열 한 시만 되면 버스를 집어 탔고
세월은 갔다 봉제 공장 누이들이 밥 먹는 30분 동안
다리미는 세워졌고 어느 예식장에서나 30분마다
신랑 신부는 바뀌어 갔다 세월은 갔다 변색한
백일 사진 화교(華僑)들의 공동묘지 싸구려 밥집 빗물
고인 길바닥, 나뭇잎에도 세월은 갔다 한 아이가
세발 자전거를 타고 번잡한 찻길을 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불쌍했고 어떤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보고 울었다 아무것도 그 비리고 어지러운
숨 막히는 구멍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했다
□ 4
나는 세월이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곱게 곱게 자라왔고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事件)들을 제외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그 어려운 수업시대(修業時代), 욕정과 영웅심과
부끄러움도 쉽게 풍화(風化)했다 잊어버릴 것도 없는데
세월은 안개처럼, 취기(醉氣)처럼 올라온다
웬 들 판 이 이 렇 게 넓 어 지 고
얼마나빨간작은꽃들이지평선끝까지아물거리는가
그해
자주 눈이 내리고
빨리 흙탕물로 변해 갔다
나는 밤이었다 나는 너와 함께
기차를 타고 민둥산을 지나가고 있
었다 이따금 기차가 멎으면 하얀 물체(物體)가
어른거렸고 또 기차는 떠났다……세월은 갔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돌아서
출렁거리는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너는 발을 동동 구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네가 잠자는 두 평 방(房)이었다
인형(人形) 몇 개가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고
액자 속의 교회(敎會)에서는 종소리가 들리는……
나는 너의 방(房)이었다
네가 바라보는 풀밭이었다
풀밭 옆으로 숨죽여 흐르는 냇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득 고개를 떨군 네
마음 같은,
한줌
공기(空氣)였다)
세월이라는 말이 어딘가에서 나를 발견할 때마다
하늘이 눈더미처럼 내려앉고 전깃줄 같은 것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본다 남들처럼
나도 두어 번 연애(戀愛)에 실패했고 그저 실패했을
뿐, 그때마다 유행가가 얼마만큼 절실한지
알았고 노는 사람이나 놀리는 사람이나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세월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 갔고 나는 또 몇 번씩
그 비좁고 습기찬 문간(門間)을 지나가야 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세월의 집 앞에서 이성복
세월의 집 앞에서
하늘엔 미류나무들이 숲을 이루었다.
세월의 집. 이파리를 뒤집으며 너는 놀고 있었다.
만날 수 없음. 나의 눈도 뒤집어 줄려?
개울엔 물 먹은 풀들이 조금씩, 말라 비틀어졌다.
어린 시절(時節)을 힘겹게 보낸 사내들도.
무색(無色)의 꽃, 절름거리는 방아깨비, 모두 바람의 친척들.
그리고 산 꼭대기엔 매일 저녁
성냥개비만한 사람이 웅크리고 있었다.
날마다. 우리의 기억(記憶) 속에 밥도 안 먹고 사는
사내.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촌에서 멋적고 착한 여자와의 하룻밤. (그 여자의 애인은
해군 하사관(海軍下士官)이었다) 아침. 창을 열면 산, 푸른 어두운 보드라운
머리칼로 밀고 밀려오던 산(山), 아래 흰 병원건물을 잘라내며
가로놓인 기차. (어떤 칸은 수북이 석탄(石炭)이 실리고
어떤 칸은 그냥 물 먹은 검은 입) 우리의 기억(記憶) 속에 꼼짝않는,
앞머리 없는 기차. 그리고 너의 눈에 물방울처럼 미끄러지던 세월.
그래 그날, 술을 마시고 어떤 작자를 씹고 씹고 참을 수 없어
남의 집 꽃밭에 먹은 것을 다 쏟아냈던 날.
내가 부러뜨린 그 약한 꽃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숨길 수 없는 노래 1 이성복
숨길 수 없는 노래 1
어두운 물 속에서 밝은 불 속에서
서러움은 내 얼굴을 알아보았네
아무에게도 드릴 수 없는 꽃을 안고
그림자 밟히며 먼 길을 갈 때
어김없이 서러움은 알아보았네
감출 수 없는 얼굴 숨길 수 없는 비밀
서러움이 저를 알아보았을 때부터
나의 비밀은 빛이 되었네 빛나는 웃음이었네
하지만 나는 서러움의 얼굴을 알지 못하네
그것은 서러움의 비밀이기에
서러움은 제 얼굴을 지워버렸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숨길 수 없는 노래 2 이성복
숨길 수 없는 노래 2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봄하늘 아득히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을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숲 1 이성복
숲 1&
바람부는 숲의 상단에
몸져 눕는 숲이 있었습니다
몸 뒤집으며 떨어지던 새들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떠나지 않고
몸부림치는 숲의 상단에
다시 떠나가는 숲이 있었습니다
숲은 별다른 상처 없이 무성하였습니다
숲은 세월의 무덤처럼 푸르렀습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아들에게 이성복
아들에게
아들아 시(詩)를 쓰면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폭력이 없는 나라,
그곳에 조금씩 다가갔다 폭력이 없는 나라, 머리카락에
머리카락 눕듯 사람들 어울리는 곳, 아들아 네 마음 속이었다
아들아 시(詩)를 쓰면서 지둔(遲鈍)의 감칠맛을 알게 되었다
지겹고 지겨운 일이다 가슴이 콩콩 뛰어도 쥐새끼 한 마리
나타나지 않는다 지겹고 지겹고 무덥다 그러나 늦게 오는 사람이
안 온다는 보장은 없다 늦게 오는 사람이 드디어 오면
나는 그와 함께 네 마음 속에 입장(入場)할 것이다 발가락마다
싹이 돋을 것이다 손가락마다 이파리 돋을 것이다 다알리아 구근(球根) 같은
내 아들아 네가 내 말을 믿으면 다알리아 꽃이 필 것이다
틀림없이 된다 믿음으로 세운 천국(天國)을 믿음으로 부술 수도 있다
믿음으로 안 되는 일은 없다 아들아 시(詩)를 쓰면서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작부들과 작부들의 물수건과 속쓰림을 만끽하였다
시(詩)로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
사랑은 응시하는 것이다 빈말이라도 따뜻이 말해 주는 것이다 아들아
빈말이 따뜻한 시대(時代)가 왔으니 만끽하여라 한 시대(時代)의 어리석음과
또 한 시대(時代)의 송구스러움을 마셔라 마음껏 마시고 나서 토하지 마라
아들아 시(詩)를 쓰면서 나는 고향(故鄕)을 버렸다 꿈엔들 네 고향(故鄕)을 묻지 마라
생각지도 마라 지금은 고향(故鄕) 대신 물이 흐르고 고향(故鄕) 대신 재가 뿌려진다
우리는 누구나 성기(性器) 끝에서 왔고 칼 끝을 향해 간다
성기(性器)로 칼을 찌를 수는 없다 찌르기 전에 한 번 더 깊이 찔려라
찔리고 나서도 피를 부르지 마라 아들아 길게 찔리고 피 안 흘리는 순간,
고요한 시(詩), 고요한 사랑을 받아라 네게 준다 받아라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아주 흐린 날의 기억 이성복
아주 흐린 날의 기억
새들은 무리지어 지나가면서 이곳을 무덤으로 덮는다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애가 1 이성복
애가 1
삼월이 오는 푸른 샛강에
그대를 보내며
우리는 말을 잊었습니다
잘 가라고,
잊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잊어야 한다고, 잊어버리자고
삼월이 오는 푸른 샛강에
그대의 뼈는 하얗게 뿌려집니다
높은 산 고사목같이 우리는
하얗게 주저앉았습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어떤 싸움의 기록 이성복
어떤 싸움의 기록(記錄)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 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 테야
법(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 테야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 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꽃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번 소리 질렀다
이 동네는 법(法)도 없는 동네냐 법(法)도 없어 법(法)도 그러나
나의 팔은 죄(罪)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시장(市場)에서
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문(門) 열어 두어라 되돌아올
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어머니 1 이성복
어머니 1&
가건물 신축 공사장 한편에 쌓인 각목더미에서 자기 상체보다 긴 장도리로 각목에 붙은 못을 빼는 여인은 남성, 여성 구분으로서의 여인이다 시커멓게 탄 광대뼈와 퍼질러 앉은 엉덩이는 언제 처녀였을까 싶으쟎다 아직 바랜 핏자국이 수국(水菊)꽃 더미로 피어 오르는 오월, 나는 스무 해 전 고향 뒤산의 키 큰 소나무 너머, 구름 너머로 차올라가는 그녀를 다시 본다 내가 그네를 높이 차올려 그녀를 따라잡으려 하면 그녀는 벌써 풀밭 위에 내려앉고 아직도 점심 시간이 멀어 힘겹게 힘겹게 장도리로 못을 빼는 여인,
어머니,
촛불과 안개꽃 사이로 올라오는 온갖 하소연을 한쪽 귀로 흘리시면서, 오늘도 화장지 행상에 지친 아들의 손발의, 가슴에 깊이 박힌 못을 뽑으시는 어머니……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성복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 1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시(詩)가 시(詩)를 구할 수 있을까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릴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천국(天國)은 말 속에 갇힘
천국(天國)의 벽과 자물쇠는 말 속에 갇힘
감옥과 죄수와 죄수의 희망은 말 속에 갇힘
말이 말 속에 갇힘, 갇힌 말이 가둔 말과 흘레 붙음, 얼싸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 2
나는 `덧없이' 지리멸렬한 행동(行動)을 수식하기 위하여
내 나름으로 꿈꾼다 `덧없이' 나는 `어느날'
돌 속에 바람 불고 사냥개가 천사(天使)가 되는
`어느날' 다시 칠해지는 관청의 회색(灰色) 담벽
나는 `집요하게' 한 번 젖은 것은 다시 적시고
한 번 껴안으면 안 떨어지는 나는 `집요하게'
내 시(詩)에는 종지부(終止符)가 없다
당대의 폐품(廢品)들을 열거하기 위하여?
나날의 횡설수설을 기록하기 위하여?
언젠가, 언젠가 나는 `부패에 대한 연구'를 완성 못 하리라
□ 3
숟가락은 밥상 위에 잘 놓여 있고 발가락은 발 끝에
얌전히 달려 있고 담뱃재는 재떨이 속에서 미소짓고
기차는 기차답게 기적을 울리고 개는 이따금 개처럼
짖어 개임을 알리고 나는 요를 깔고 드러눕는다 완벽한
허위 완전 범죄 축축한 공포,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여러 번 흔들어도 깨지 않는 잠, 나는 잠이었다
자면서 고통과 불행의 정당성(正當性)을 밝혀냈고 반복법(反復法)과
기다림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했다 나는 놀고 먹지 않았다
끊임없이 왜 사는지 물었고 끊임없이 희망을 접어 날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째서 육교 위에
버섯이 자라고 버젓이 비둘기는 수박 껍데기를 핥는가
어째서 맨발로, 진흙 바닥에 헝클어진 머리, 몸빼이 차림의
젊은 여인은 통곡하는가 어째서 통곡과 어리석음과
부질없음의 표현(表現)은 통곡과 어리석음과 부질없음이
아닌가 어째서 시(詩)는 귀족적(貴族的)인가 어째서 귀족적(貴族的)이 아닌가
식은 밥, 식은 밥을 깨우지 못하는 호각 소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여름산 이성복
여름산
여름산은 솟아 오른다
열기(熱氣)와 금속(金屬)의 투명한 옷자락을 끌어 올리며
솟아 오른다 발등에 못 안 박힌 것들은 다 솟아 오른다 저기
비행기가 수술톱처럼 하늘을 끊어 낸다 은(銀)빛 날개가 곧두선다
그 여자는 불란서(佛蘭西)에 가겠다고 이번 여름엔 꼭
다녀와야겠다고 그 여자는 잠자는 벌레를 밟았다 모르고
밟았다 부서지면서 물 같은 피가 솟아 올랐다 내가 거듭 밟았다
그 여자는 불란서(佛蘭西)에 가겠다고
나는 속으로 욕했다
따지고 보면 욕할 이유가 없었다
당신은 남의 가난이 얼마큼 당신과 관계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여자는 내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신은 백 사람 중에 하나가 병들어 아프면 당신도 아프다고 생각합니까
그 여자는 부질없는 말이라고 대답했다
여름산은 솟아 오른다
여름산은 땀 흘리지 않는다 힘 쓰지 않는다
여름산 여름산 여름산 우리는 그늘에서 콜라를 마셨다
콜라를 마시며 불란서(佛蘭西)를 생각하고 울었다 우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시멘트 포를 등에 지고 사다리 오르는 여인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우는 흉내를 냈다 우리는, 바빌론에 묶여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우는 척했다
여름산은 솟아 오른다
한숨 쉬지 않고 솟아 오른다 반짝임과 몽롱함을 뿌리며 솟아 오른다
우리는 손을 잡았다 잡힌 손에서 물 같은 피가 흘렀다 살려줘요!
여름산은 무겁게 솟아 오른다
솟아 오르지 않는다 솟아 오르는 모습만 보여 준다
여름산 여름산 여름산 먼지, 매연, 악취로 부서지는
여름산 여름산
여름산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역전 1 이성복
역전(易傳) 1
며칠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눈물 흘리는 짐승들이 슬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기를 먹었습니다 넓적넓적 썰은 것을 구워 먹으니 맛이 좋았습니다 그날 아침 처형당한 간첩의 시체라고 했어요 한참을 토하다 고개 들어 보니 입가에 피범벅을 한 세상이 어그적어그적 고기를 씹고 있었습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요단을 건너는 저 가을빛 이성복
요단을 건너는 저 가을빛
요단을 건너는 저 가을빛
물결을 지우며 달리는 나룻배 한 척
마음도 그와 같아서……
꺼지리라, 꺼지리라
저 불꽃 꺼지고 나면
거짓말로 위로하고 위로받으리라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이동 이성복
이동(移動)
초식 민족(草食民族) 사내들의 이동(移動), 아이들은
공터에서 놀게 내버려 두고, 여자들은
양장점과 미장원과 부엌에 가둬 놓고
외몽고(外蒙古) 군사들은 우리를 번호로 불러냈다
53번, 닭의 내장 속으로 54번, 텍스
속으로 55번, 창(槍) 끝으로 당장 떠나라
이 땅은 어제 재벌급 인사가 매점(買占)했다
네가 오른발 내린 곳은 영화 배우의 땅
네가 오줌 갈긴 곳은 권투 선수의 정부(情婦)의 동생의 땅
밤새 귀뚜라미가 울던 곳은 예술원(藝術院) 회원의 땅
네 그림자는 두고 가라, 자유로운 잡초들에게
잡념도 던져 주어라, 거수 경례하라
정욕의 재를 날리며 꼬리표를 달고 출근하는
바람에게, 풀 먹인 날개를 자랑하며
식민지(植民地)의 수도(首都)를 사열하는 새들에게
잘 가꾸어진 가로수는 말발굽 울리며 앞서
간다, 초식 민족(草食民族) 사내들의 이동(移動)
주간지(週刊紙) 겉장의 딸아이들은 키스를 던지며
환송하지만, 약속된 불빛이 안 보인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이별 1 이성복
이별 1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새가 울고 꽃이 피었겠습니까 당신의 슬픔은 이별의 거울입니다 내가 당신을 들여다보면 당신은 나를 들여다봅니다 내가 당신인지 당신이 나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별의 거울 속에 우리는 서로를 바꾸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나면 떠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입니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이 남습니다 당신이 슬퍼하시기에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우리가 하나 되었겠습니까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이성복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원제 :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이제는 송곳보다 송곳에 찔린 허벅지에 대하여
말라붙은 눈꺼풀과 문드러진 입술에 대하여
정든 유곽의 맑은 아침과 식은 아랫목에 대하여
이제는, 정든 유곽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한 발자국을
위하여 질퍽이는 눈길과 하품하는 굴뚝과 구정물에 흐르는
종소리를 위하여 더럽혀진 처녀들과 비명에 간 사내들의
썩어가는 팔과 꾸들꾸들한 눈동자를 위하여 이제는
누이들과 처제들의 꿈꾸는, 물 같은 목소리에 취하여
버려진 조개 껍질의 보라색 무늬와 길바닥에 쓰러진
까치의 암록색 꼬리에 취하여 노래하리라 정든 유곽
어느 잔칫집 어느 상갓집에도 찾아다니며 피어나고
떨어지는 것들의 낮은 신음 소리에 맞추어 녹은 것
구부러진 것 얼어붙은 것 갈라 터진 것 나가떨어진 것들
옆에서 한 번, 한 번만 보고 싶음과 만지고 싶음과 살 부비고 싶음에
관하여 한 번, 한 번만 부여안고 휘이 돌고 싶음에 관하여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정든 유곽에서 이성복
정든 유곽에서
□ 1
누이가 듣는 음악(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남자(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음악(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잡초(雜草) 돋아나는데, 그 남자(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연애(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목단(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地下)의 잠, 한반도(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벌목(伐木)
당한 여자(女子)의 반복되는 임종(臨終), 병(病)을 돌보던
청춘(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조국(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자(者)는 누구인가
일본(日本)인가, 일식(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연애(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나신(裸身)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승천(昇天)하면
나는 죽음으로 월경(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 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디마다 더욱
붉어지는 신음(呻吟),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날으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 부를 때,
전쟁(戰爭)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혁명(革命)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행진(行進)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조국(祖國)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후세(後世)
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구미(口味)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한족(韓族)의 별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정물 이성복
정물
꽃들, 어두워 가는 창가로 지워지는
비명 같은 꽃들
흙이 게워 낸 한바탕 초록 잎새 위로
추억처럼 덤벼오는 한 무리 붉은 고요
잔잔한 물 위의 소금쟁이처럼
물너울을 일으키는 꽃들
하나의 물너울이 다른 물너울로 건너 갈 동안
이마를 떨구고 풍화하는 꽃들
오, 해 떨어지도록 떠나지 않는 옅은 어질머리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1993
제대병 이성복
제대병
아직도 나는 지나가는 해군(海軍) 찝차를 보면 경례! 붙이고 싶어진다
그런 날에는 페루를 향(向)해 죽으러 가는 새들의 날개의 아픔을
나는 느낀다 그렇다, 무덤 위에 할미꽃 피듯이 내 기억(記憶) 속에
송이버섯 돋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내 아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오기도 한다 순지가 죽었대, 순지가!
그러면 나도 나직이 중얼거린다 순, 지, 는, 죽, 었, 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죽음 이성복
죽음&
□ 1
키 큰 말 한 마리
검은 눈을 껌벅거린다
몇 번 더 껌벅거리다가
종내 눈을 감는다
말의 속눈썹이
파리 다리에 난
무성한 털 같다
검은 철사로 엮은 꽃
□ 2
거친 산비탈에 엎어진 그대가
물 속에 잠기고
물 먹은 쥐처럼 배가 불러도
비는 나직이 내려
귓바퀴 속으로 흘러든다
비는 내려 귓바퀴 주위로
헛된 왕관 모양의 경이를 만든다
□ 3
비는 시멘트 바닥과 말라 비틀어진 잔디
위에 왔다 질질 끄을리는 슬리퍼처럼
비는 왔다가 또 갔다 미망인의
뜯어진 옷고름처럼 슬픔은 꿰맬 수가 없다
미완성의 삶을 완성시키려 하지 마라
비는 웃자란 장다리 흉한 꽃머리에도 왔다
녹물처럼 비는 왔다가 황토 언덕
무너진 눈두덩만 남기고 갔다
□ 4
가난한 죽음에는 화환도 음악도 없다
그저 장식되지 않은 슬픔이다
고인의 영정 위에 내리는 비는
웃고 있는 고인을 찡그리게 만든다
음악도 화환도 없는 영결식에
아버지, 아버지! 라고 되뇌이는
목쉰 미망인의 탄식 위에도
비는 링거 방울처럼 천천히 떨어진다
하마, 이 어두운 날에 남녘 땅
형제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오나
비 그치면 추녀 밑 거미줄에
사나흘 맑은 슬픔이 구르리라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1993
천국의 입구 이성복
천국의 입구
□ 1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졌다 구백 아흔 아홉 개의 눈은 덤프 트럭 바퀴에 으깨어졌다 한 개의 눈은 그 모든 참사를 확인하도록 남겨졌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졌다 일천의 사람들의 고통은 그의 고통이었다 그의 고통은 일천의 사람들의 고통이 아니었다 뒤집힌 그의 눈에선 막 끓여낸 라면 냄새가 나고, 급히 마른 김 비벼 넣는 소리도 들린다 그의 고통은 남의 고통이 닿을 때 비로소 끓는 속이 된다
□ 2
삼월인데 땅속 보리싹이 올라오지 않았다 검게 죽은 땅이 아스팔트처럼 굳어 있었다 그래도 하루하루 낚시찌 같은 날들이 떠올랐다 또 가라앉았다 우리는 무슨 거대한 통의 내부에 들어 있었다 언젠가 통 전체가 뜨겁게 녹아내릴 것 같았다 때로 술취한 사내들이 죽은 아이를 안고 찾아와 네가 뿌린 씨앗이니 거두라고 했다 지쳐 잠들면 죽은 아이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깨우기도 했다
□ 3
어젯밤 후배 하나가 다른 후배의 배를 칼로 찔렀는데 피가 안 나왔다 아마 여자 때문인 것 같았는데, 나도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여자와 나는 산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산골짜기마다 젖가슴을 늘어뜨린 여자들이 남자 배 위에서 뒷물을 하고, 또 얼마 만인가 나는 마른 개울바닥에 엎드려 조금 남은 흙탕물을 빨대로 빨고 있었다 지나가던 등산복 차림의 사내들이 천국의 입구냐고 물었다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1993
천사의 눈 이성복
천사의 눈
□ 1
민방위 교육장에서 방독면 착용 교육을 받는다
개밥 같은 나날, 식중독은 없다
쉬는 시간 십 분 동안 캠프 헨리까지 산보 간다
세워 놓은 콩코드, 에스페로 차 구경하며
개밥엔 희망이 없다, 너의 희망은 무엇이뇨
부귀와 영화에 백년을 더 살아도 북망은 희망이다
모가지에 흰 꽃 피기 전에는 오, 이차돈!
□ 2
한때 그는 벌집같이 많은 눈을 가졌네 이제 씨가 빠진 해바라기 꽃대궁처럼 그의 눈은 텅텅 비었네 그의 고통은 말라 버렸네 겨울에 그의 꽃대궁이 꺾여 눈발에 묻힐 때 그의 생애는 완성되네 그가 본 것은 환상이었네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1993
초록 가지들은 인광의 불을... 이성복
초록 가지들은 인광(燐光)의 불을...
원제 : 초록 가지들은 인광(燐光)의 불을 켜 들고
비가 온다 오늘 저녁에도 나무는 그의 불안을 둥글고 화목한 집으로 만든다 젖어 초록 가지들은 인광(燐光)의 불을 켜 들고 불과 불 사이, 어두운 데를 골라 부리 긴 새들은 불편한 잠을 준비한다
어디엔들 못 가랴,
바람에 몸 비비는 관목(灌木)들 앞세우고
사유지(私有地)의 무너지고 머리 드는
거친 숨결의 밤을 지나
어느덧 우리 둥근 나무의 품 속에서
부리 긴 새들의 불안한 꿈이 될 때까지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출애급 이성복
출애급(出埃及)
□ 1
오늘 다 외로와하면
내일 씹을 괴로움이 안 남고
내일 마실 그리움이 안 남는다
오늘은 집에 돌아가자 세 편의 영화(映畵)를 보고
두 명의 주인공이 살해되는 꼴을 보았으니
운좋게 살아남은 그 녀석을 너라 생각하고
집에 돌아가자, 살아 있으니
수줍어 말고 되돌아 취하지 말고 돌아가자
돌아가 싱싱한 떡잎으로 자라나서
훨훨 날아 올라 충격도, 마약도 없이
꿈 속에서 한 편 영화(映畵)가 되어 펼쳐지자
□ 2
내가 떠나기 전에 길은 제 길을 밟고
사라져 버리고, 길은 마른 오징어처럼
퍼져 있고 돌이켜 술을 마시면
먼저 취해 길바닥에 드러눕는 애인(愛人)
나는 퀭한 지하도(地下道)에서 뜬눈을 새우다가
헛소리하며 찾아오는 동방박사(東方博士)들을
죽일까봐 겁이 난다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천국(天國)에 셋방을 얻어야 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욕정(欲情)에 떠는 늙은 자궁(子宮)으로 돌아가야 하고
분노(忿怒)에 떠는 손에 닿으면 문둥이와 앉은뱅이까지 낫는단다, 주(主)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치욕에 대하여 이성복
치욕에 대하여
치욕은 아름답다 지느러미처럼 섬세하고 유연한 그것 애밴 처녀 눌린 돼지 머리 치욕은 달다 치욕은 따스하다 눈처럼 녹아도 이내 딴딴해지는 그것 치욕은 새어 나온다 며칠이나 잠 못 이룬 사내의 움푹 패인 두 눈에서,
아지랭이!
소리 없이, 간단 없이
그대의 시야를 유린하는
아지랭이! 아지랭이! 아지랭이!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치욕의 끝 이성복
치욕의 끝
치욕이여,
모락모락 김 나는
한 그릇 쌀밥이여,
꿈 꾸는 일이 목 조르는 일 같아
우리 떠난 후에 더욱 빛날 철길이여!
남해금산, 문학과지성사, 1986
편지 1 이성복
편지 1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 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1990
편지 이성복
편지&
□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記憶)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이성복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 1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짐 실은 트럭두 대가 큰길가에 서 있고 그 뒤로 갈아엎은 논밭과 무덤, 그 사이로 땅바닥에 늘어진 고무줄 같은 소나무들) 내가 짐승이었으므로, 내가 끈적이풀이었으므로 이 풍경은 한번 들러붙으면 도무지 떨어질 줄 모른다
□ 2
국도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노란 개나리꽃, 배가 빵그란 거미처럼 끊임없이 엉덩이를 돌리며 지나가는 레미콘 행렬, 저놈들은 배고픈 적이 없겠지 국도변 식육식당에서 갈비탕을 시켜 먹고 논둑길 따라가면 꽃다지 노란 꽃들 성좌처럼 널브러져 있고, 도랑엔 처박혀 뒤집혀져 녹스는 자전거, 올 데까지 온 것이다
□ 3
운흥사 오르는 길 옆, 산에는 진달래 물감을 들이부은 듯, 벚나무 가지엔 널브러진 징그러운 흰 꽃, 거기 퍼덕거리며 울음 울지 않는 것은 바람에 불려 올라간
검은 비닐 봉지, 안 될 줄 알면서도 한번 해보는 것이다 꽃핀 벚나무 가지 사이에 끼어 진짜 새처럼 퍼덕거려 보는 것이다
□ 4
아파트 옥상마다 신나게 돌아가는 양철 바람개비, 언젠가는 저리 신나게 살 수도 있었을까 청도 각북 용천사 가는 길, 산 능선을 타고 건장한 송전탑들 이어지고 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진달래 꽃불, 저를 한 마리 꽃소로 만드는 것도 산은 알지 못한다
□ 5
흐린 봄날에 연둣빛 싹이 돋는다 애기 손 같은 죽음이 하나둘 싹을 내민다 아파트 입구에는 산나물과 찬거리를 벌려 놓고 수건 쓴 할머니 엎드려 떨고 있다 호랑가시나무,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그런 나무 이름, 오랫동안 너는 어디 가 있었던가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문학과지성사, 1993
첫댓글 이 많은 자료를 언제 다아~~ 만드셨을까요? 언제 다아~~~ 볼 수 있을까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