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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한 사람에게도 몸을 낮추어 민심을 크게 얻는다
# 낙동강 인근 7인의 이름난 선비 ‘낙강칠현’
임진년 (1592년:선조 25년) 4월(음력) 경상우도 고령 양전동.
마을 동북쪽으로 비단 같은 금산(錦山:289m)이 소 등처럼 늘어서 있고 앞쪽은 낙동강과 회천강을 따라 형성된 비옥한 농토가 융단처럼 펼쳐져 있다.
사시사철 마을에서 흘러나온 쌀뜨물은 회천강을 따라 낙동강 어귀인 우곡면 연동 앞까지 이어졌다. 향민들의 삶은 그다지 풍족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너그러워 누구 하나 이웃을 헐뜯거나 송사(訟事)도 없었다.
이른 아침 희끄무레한 안개 속에 참새들이 우르르 몰려갔다가 몰려오기를 반복했다.
해가 솟아오르려면 아직 이각(30분) 쯤 더 있어야 할 시간이다.
“대감마님, 기침(起枕)하셨습니까? 탕약 드실 시간입니다.”
“그래, 들어오너라.”
“연화 네가 아침마다 고생이 많구나.”
“아니옵니다. 대감마님. 저보다 마님께서……. 하루빨리 쾌차하셔야죠.”
“그래, 마님과 네 정성을 봐서라도 어서 좋아져야 할 텐데”
탕약은 씀바귀 끓인 물처럼 쌉쌀했다.
하지만 김면은 건강이 좋지 않음에 대한 미안함을 에둘러 말했다.
“오늘은 탕약이 조청처럼 달짝지근하구나. 허허!“
연화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약이 달다고요? 쓰지 않고요?”
“아니다. 농(弄)으로 해본 소리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 하지 않더냐.”
김면이 연화가 건네준 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연화야, 내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장기리 알터(卵峴:선사시대 암각화 소재 마을)에 사는 칠복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심성이 착하고 이 근동에선 그런 효자가 없다고 하는데 너도 이제 혼인할 나이가 되었으니…….”
칠복이를 남몰래 만나고 있는 것을 대감마님께서 벌써 다 알고 계신 것인가?
얼굴이 복사나무 꽃처럼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연화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띄엄띄엄 답했다.
“예에, 가끔 보기는 하지만……. 대감마님과 마님의 뜻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허면 마님과 상의하여 조만간 매듭짓도록 하마.”
“예, 대감마님.”
연화가 종종걸음으로 소반을 들고 나갔다.
그러니까 연화가 6살 때인 여름 마을에 큰물이 났다.
올해 연화가 열일곱이니 벌써 11년 전의 일이다.
연화 아버지는 이른 아침 들녘 논물을 살피러 갔다가 그만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이 물길을 따라 며칠을 찾았으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해 연화 어머니도 ‘마음의 병’을 얻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졸지에 고아가 된 연화는 친인척 하나 없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저 어린 것을 어쩌나!”
마을 사람들 저마다 걱정을 했지만, 선뜻 나서 품기를 부담스러워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김면이 연화를 거둬 딸처럼 귀히 여기며 틈틈이 글도 가르쳤다.
연화의 착한 심성과 총명함에 마을 사람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봄빛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나왔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은 시나브로 녹아내렸고 흙은 살을 부풀렸다.
“대감마님, 들 논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더.”
“그래라. 곧 농사철이고 일손이 바쁠 테니 빈틈없이 준비해야지.”
“예, 대감마님.”
만석이가 농기구를 들고 집을 나섰다.
만석이는 말이 머슴이지 선대 때부터 김면의 만여 석이나 되는 농사를 관리하며 집안 대소사를 직접 챙겨 집사(執事)나 다름없었다.
밥숟가락을 놓자마자 들로 달려 나온 사람들의 손놀림이 바빴다.
그저께 갈아놓은 못자리의 물을 살피던 머슴 만석이가 논둑 옆 버드나무 밑에서 다리쉼을 하고 있던 알터 마름(지주를 대리하여 소작권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어르신, 어디 갔다 오시는 길입니꺼?”
“어! 만석이 아닌가? 수고가 많으이.”
“예에, 곧 볍씨를 뿌려야 하기에 못자리할 곳을 보러 나왔심더.”
“이르신, 작년 가을 곡수(穀數:논밭에서 나는 곡식의 양)는 어땠습니꺼? 그리고 올 소작은 다 끝났습니꺼?”
“내가 한발 양보해 소작은 대충 매듭지었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고것이 참! …….소작인들이 곡식을 요리조리 빼돌리고 앓는 소리를 내며 소작료를 낮춰달라고 떼를 쓰는데 믿을 수가 있겠나?”
“고것이 정말 참말인가요?”
“참말이고말고. 내가 왜 비싼 밥 묵고 허튼소리를 하겠나.”
만석이가 마름의 말에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르신, 그건 남의 동네 이야기 아닙니꺼? 이 근동(近洞)에선 그런 말 들어본 적이 없는데…….”
사실 양전 인근의 동네에선 그렇게 악한 지주나 마름이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작인들은 해마다 소작이 떼일까 봐 마름에게 있는 것 없는 것 다 갖다 바치며 지주와 마름의 눈에 들어야 했고, 쌓인 장리(長利)에 추수가 끝나면 오히려 굶주림에 시달렸다.
봄에 한 섬 먹고 가을에 석 섬을 토해내야 했다.
마름은 한마디로 지주의 손발 노릇을 하며 소작인의 등골을 빼먹는 존재였다.
“어르신, 그건 그렇고 올 농사는 어떻겠습니꺼?
“지난겨울에 눈이 많이 왔으니 작년보다는 낫겠지. 대풍을 바라고는 싶지만, 농사란 다 사람과 하늘에 달린 거라…….”
만석이가 말했다.
“예에 그건 그렇지요. 그리고 우리 대감마님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농부는 임금의 마음을 가지고, 임금은 농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이네. 그 말인즉슨 농부가 성군의 마음으로 농작물을 돌본다면 그 결실이 가득하다는 것일게고 임금이 부지런한 농부의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태평성대가 온다는 뜻이 아니겠나? 비가 많이 와도 걱정 적게 와도 걱정이듯이 세상일이란 게 마음처럼 쉬운 게 없지. 허나 천기를 따르면 매듭도 풀릴 것이네.”
논바닥에 고인 연두 물빛에 구름이 지나고 햇빛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만석이와 마름의 낯빛이 가을 대추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까악 깍깍 까아악!
바람을 탄 한 무리의 까마귀가 회천강 갈 숲에 내려앉고 치솟기를 수차례 거듭하더니 갑자기 솔숲으로 사라졌다.
가끔 있는 일이지만 오늘은 날갯짓이 어딘가 모르게 그 무엇에 쫓기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늘 높이 솔개 한 마리가 헤엄을 치듯이 빙빙 돌고 있었다.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기려나?”
만석이가 하늘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지나가는 듯한 말을 하자 마름이 기다렸다는 듯이 “저 눔의 시꺼먼 까마구는 송장을 파묵는 흉조여, 흉조!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백 마리가 저리 미친 듯이 나는 걸 보니 분명히 좋은 징조는 아니여. 옛말 그른 것 어디 있던감?”
“까마귀는 우는 소리가 음흉하고 죽었거나 썩은 고기를 즐겨 먹지만 흉조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일부러 지어낸 말이 아니겠습니꺼? 까마귀는 새끼가 자라 늙고 힘없는 어미를 먹여 살린다고 안합디꺼. 따져보면 이 세상에 까마귀보다도 못한 인간이 천지입니더.”
만석이의 뼈있는 말을 들은 마름이 심기가 불편한 듯 연거푸 헛기침을 했다.
“허허! 만석이 자네 유식하네. 그런 소리는 어디서 들었는감?……. 그럼 나 먼저 들어가네.”
“예에, 지도 금방 들어갈낍니더. 살펴들어가이소.”
“그러게나. 또 보세.”
마름이 두 팔을 휘적휘적 저으며 잰걸음을 내딛었다.
“저런 마름 때문에 소작인은 일 년 내내 뼈가 빠지게 일을 해도 배를 곪지.”
만석이가 가시 돋친 말을 들릴 듯 말 듯 내뱉었다.
어느새 햇빛이 옅어지며 강바람을 타고 넘어온 물안개가 산과 들에 하얀 천을 풀어놓은 것처럼 내려앉았다.
* * *
김면(金沔:1541~1593)은 고령김씨 시조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 남득(南得)의 7세손으로 자는 지해(志海)이고 호는 송암(松菴)이다.
조부 때인 1535년 170여 년 세거지(世居地)인 고령 안림동(安林洞)이 역참(驛站)으로 바뀌면서 양전동(量田洞:송곡・송천동=현재 良田洞)으로 옮겨와 살았다.
아버지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 세문(世文)과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사이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영특함이 남달랐다.
퇴계 이황((李滉:(1501~1570)과 남명 조식(曺植:(1501~1572) 문하에서 실천적 성리학을 수학(修學)하고 막역지우인 옥산 이기춘(李起春:1541~1597)・청휘당 이승(李承;1552~1596)・모재이홍우(李弘宇:1535~1594)・한강정구(鄭逑:1543~1620)・대암박성(朴惺:1549~1606)・육일헌이홍량(李弘量:1531~1592) 등 당대 영남의 이름난 선비 7명과 도의지교를 맺으며 낙강칠현(洛江七賢)이라 불리었다.
김면은 명종 때 효렴(孝廉)으로 천거돼 참봉(參奉:종9품))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다가 선조 즉위 초년 다시 유일(遺逸)로 발탁되어 공조좌랑(정6품)에 임명되자 조정에 나아가 성은(聖恩)에 예(禮)를 표하고 얼마 뒤 ‘건강이 좋지 못한 모친이 홀로 계심’을 이유로 물러나기를 청해 귀향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김면은 임금의 은혜를 잊을 수가 없어 그날의 감은(感恩)을 이렇게 적었다.
“벼슬길에 나아감과 물러남이 즐거움과 근심을 준다고 말하지 말라.
莫謂行藏付樂憂
임금의 은혜를 갚지 못함이 신하의 부끄러움일 뿐
君恩未報是臣羞
재주 없이 공조에 있음이 쓸데없음에
無才工部空懷志
병치레 잦은 몸으로 여러 번 말미 청했네.
多病中郞屢告由
엄격하고 명백하게 성적을 조사해 내쫓아야 마땅한데
考績巖明宣罷黜
내 작은 하소연을 너그럽게 받아주어 돌아올 수 있었으니
原情寬恕得歸休
하늘과 땅이 낳고 기른 무궁한 덕에
天生地養無窮德
멀리 영외에서 다만 요년순일(태평)을 빕니다.”
徒祝堯年嶺外州
김면이 이후에도 관직을 거듭 사양하자 조정에서 그의 학문과 효행을 높이 사 6품직에 올렸다.
김면이 여러 차례 벼슬을 고사한 가장 큰 이유는 ‘칼을 찬 선비’ 스승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2)의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이 경(敬)이요,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義)다‘라는 출사관을 쫓은 영향이 컸다.
평생 관직에 나가기보다 향촌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자신을 위한 학문)에 뜻을 두고 수많은 후학을 가르치니 선비들의 우러름과 신망이 높았다.
김면은 높고 넓은 학문을 바탕으로 삼강략(三姜略)・심유지(心遺志)・역리지(易理誌)・율례지(律禮志) 등 20여 권의 저술을 남겼으나 안타깝게도 임란 후 사라져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 * *
4월 16일, 입하가 멀지 않은 늦봄이다.
해가 중천을 지나갈 무렵 알터 기암절벽 회선대.
상념에 젖은 김면이 먼 곳을 응시하며 한참 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는 사이 옅은 산바람이 아름드리 소나무에서 흘러나온 송진 냄새를 실어오고 노란 연기 같은 송홧(松花:소나무 꽃가루)가루를 실어갔다.
김면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양전동에서 1km 정도 떨어진 회선대를 찾아 선산(先山) 고령 쌍림 칠등(七嶝)에 안장돼있는 선친을 못 잊어 멀리서나마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랬다.
23년 전 함경도에서 재직 중 돌아가신 부친의 영구(靈柩: 시신을 담은 관)를 이곳 고령까지 2000리 길을 도보로 운구했던 염천(炎天)의 아픈 기억과 병중(病中)의 부친을 한 번도 곁에서 보살펴 드리지 못한 한(恨)이 무수한 봄꽃처럼 피어났다.
꾸루루 꾹꾹 꾸르륵!
덤불 숲에서 장끼가 목청을 길게 뽑으며 날아갔다.
“그놈 참 목소리 한번 시원하네.”
김면이 혼잣말을 던지며 산길을 따라 마을 어귀로 내려오니 칠복이와 의원이 무슨 일인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의원님, 이렇게 그냥 가시면 우리 엄니는 우짭니꺼?”
“칠복이 자네 마음은 알고도 남지만, 지난번 약값도 밀려 있으니…….” 의원이 혀를 차면서 말을 쏟아냈다.
“올 가을걷이가 끝나먼 모두 갚을 테니 이번 한 번만이라도 처방해주이소.”
모친의 병구완을 위해 사정사정(事情事情)하는 칠복이의 목소리에 슬픔과 안타까움이 가득 실려 있었다.
“칠복아, 무슨 일이냐?”
“예, 대감마님 오셨습니꺼.”
칠복이와 의원이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모친이 며칠째 몸져누워 풍등골 의원에게 보였는데 소인 형편이 이러니 약 처방도 못 받고…….”
“이보게, 박 의원. 약값은 내가 곧 전할 것이니 칠복이 어미에게 약을 지어주고 가게나”
“대감마님, 그게 참!”
“그게 참이라니 무슨 말인가?”
의원이 다음 말을 보태려다 말고 한발 물러서더니 “예, 대감마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라며 고개를 숙이고는 겨드랑이의 작은 보따리를 추어올려 종종걸음을 쳤다.
칠복이는 연화와 올가을에 혼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면이 홀어미와 함께 어렵게 사는 칠복이를 생각하는 것이 부족하지 않았다.
“대감마님, 이 은혜 죽어서라도 잊지 않겠습니더.”
“허 허! 은혜라니 가당치 않다. 모든 일에는 사람이 먼저이니 모친 쾌차하게 잘 보살피고 올 농사도 풍작을 이뤄야지. 그리고 연화와는 잘 지내느냐? 내 연화에게도 혼례 이야기를 꺼내놨으니 그리 알게.”
“예, 대감마님 백골난망입니더.”
칠복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멀어지는 김면의 뒷모습에 눈길을 거둘 줄 몰랐다.
회선대 앞을 흐르는 회천강의 물결은 갈치 비늘처럼 반짝였고, 기름을 바른 것같은 버들잎은 눈이 부셨다.
보배는 숨겨 놓아도 반드시 나타나 그 빛을 발한다
#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 하겠는가
김면이 집으로 돌아오자 이씨(李氏) 부인이 말했다.
“몸도 성치 않은데 또 알터에 갔다 오십니까? 영감의 효심은 하늘을 감동시키고도 남겠습니다.”
“과찬이시네, 선영을 자주 찾아뵙지 못해 나들이 겸 가는 것인데……. 이 좋은 봄날 내가 병치레가 잦아 부인을 힘들게 하는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따라 저녁 바람이 차가우니 들어가서 좀 쉬세요.”
“그리해야겠습니다. 연화는 어디에 갔는가? 보이지 않으니”
“뜬금없이 연화는 왜 찾으십니까? 지금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요.”
“아닙니다. 그냥…….”
잠시 뒤 12각 소반 위에 차려진 저녁상이 들어왔다.
보리가 섞인 밥과 된장국・나물 몇 가지에 자반고등어 구이 한 마리였다
만석꾼 살림치고는 간소한 상차림이었다.
“찬이 변변치 않습니다. 입에 맞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이 밥상이 있기까지 많은 사람의 수고로움이 있었을 텐데 그걸 생각하면 내 어찌 입맛을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참! 영감도…….”
상을 물리고 나니 달이 훤하게 떠올랐다.
김면은 여느 때처럼 집에서 800m 거리 송암정사 유일헌(幽逸軒)에 올라 달 바라기를 했다.
“낮에는 몰랐던 이 아름다운 밤 풍경을 평생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런지…….”
새삼스럽게 그 끝을 알 수 없는 근심이 밀려왔다.
송암정사는 김면의 조부 김탁이 1533년 경상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낙동강변의 요충지인 양전동에 국토방위의 보루를 위해 건설하다 중단된 병영성곽이다.
컹컹 커겅 컹컹!
담 너머의 어둠이 달빛에 밀려나고 있을 때 마을 어귀에서 동네 개들이 목이 쉬도록 짖어댔다.
“개들이 가끔 달을 보고 짖기는 하지만 무슨 일이 있나?”
김면이 잠시 생각을 멈춘 사이 지축을 흔들 것처럼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개 짖는 소리와 뒤섞여 들려왔다.
향촌에서 말발굽 소리는 흔하지 않았고, 더더욱 이런 밤에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일이다.
김면은 의아해하며 서둘러 정사를 내려왔다.
말발굽 소리는 점점 더 커지더니 김면의 집 앞까지 왔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지? 파발마인가?”
“워워!”
히이힝!
고삐를 잡힌 말이 격한 소리를 내며 앞발을 들었다가 땅을 찍으며 멈춰 서는 소리가 들렸다.
“대감마님, 누가 왔나 봅니다.”
만석이가 사랑채를 돌아 나오며 말했다.
“그래, 나가 보거라.”
대문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던 만석이가 문을 열었다,
삐그덕 덜컹!
“아니 서방님 아니십니꺼?”
“그래 날세, 잘 지냈는가?”
김면이 생각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감마님, 대감마님.”
대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청도에 사는 재종질(再從姪) 김홍한(1568~1592)이었다.
김홍한은 땀에 젖어 온몸에서 하얀 김이 피고 얼굴은 붉은빛으로 상기돼 있었다.
장대한 기골에 형형한 눈빛, 헌헌대장부가 따로 없었다.
무과를 준비하고 있는 터라 지략과 담력도 남달랐다.
“대감마님, 홍한이옵니다. 인사 올립니다.”
목소리에서 다급함과 떨림이 묻어났다.
김면이 불길한 예감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잘지냈느냐. 과시(科試) 준비는 잘하고 있고?”
홍한이 지난해 혼인을 하고 곧바로 합천 야로 숭산동에서 처가(妻家) 인근 청도로 이주한 후 처음 보는 것이다.
“예, 대감마님. 공부가 더디기는 하지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송구합니다.”
“괜찮다. 그런데 네가 이 시각에 어인 일이냐?”
“큰일이 났습니다. 사흘 전(4월 13일:양력 5월 23일) 유시(오후 5시)쯤 왜군 수만 명이 병선 수백여 척에 신식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하고 부산에 상륙해 14일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켰다고 합니다. 워낙 화급한 일이라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아니고?”
“아닙니다. 왜군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달 전에 바랑을 메고 승려 행세를 하는 사람이 마을을 기웃거리기에 이상하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조선 산천과 정세를 엿보는 정탐꾼인 것 같구나. 좀 더 자세하게 말해보거라.”
“예. 제일 먼저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이라고 하는 왜장이 이끄는 제1군 1만 8천700명이 부산진에 상륙했답니다.
부산진 첨사(僉使:종4품) 정발이 결사항전하다 적탄에 맞아 쓰러졌고, 동래부사 송상현과 다대포 첨사 윤흥신도 군민들과 성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했지만, 전투 개시 반나절 만에 성이 무너져 자결하거나 살육당했다고 합니다. 또 경상좌병사 이각은 울산 좌병영에서 동래성으로 갔다가 부산진이 함락되자 성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부산 전체가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수도 있겠구나?”
“후속 부대가 더 들어왔다면 그럴 것입니다.”
제1군 소서행장이 부산의 여러 성을 짓밟으며 양산・밀양・대구・선산・상주・충주・여주를 지나는 중로(中路)를 이용하여 동대문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가려는 사이 4월 18일에는 가등청정(加籐淸正:가토 기요마사)이 이끄는 제2군 2만 2천800명이 부산에 상륙하여 좌로(左路)인 언양・울산・경주・문경・조령・충주・용인을 거쳐 남대문을 향해 올라갔고, 또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한 흑전장정(黑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1만 1000명으로 우로(右路)인 창원・성주・금산(김천)・지례・추풍령・영동・청주를 따라 올라가다가 경기도에선 제2군이 개척한 길로 북상했다.
왜군 주력부대는 모두 경상도를 통해 북진했고 전라도와 충청도 서쪽은 진격로에서 제외돼 있었다.
당초 도요토미는 조선 정벌을 위해 제1군부터 제16군까지 편성했는데, 1차로 제1군부터 제9군까지 총 17만 명의 대군을 출병시켰다.
제4군 사령관 모리길성 (毛利吉成:모리 요시나리) 1만 4000명
제5군 사령관 복도정칙 (福島正則:후쿠시마 마사노리) 2만 4700명
제6군 사령관 소조천융경 (小早川隆景:고바야가와 다카카게) 1만 5700명
제7군 사령관 모리휘원 (毛利輝元:모리 데루모토) 3만 명
제8군 사령관겸 총사령관 우희다수가 (宇喜多秀家:우키다 히데이에) 1만 명
제9군 사령관 우시수승 (羽柴秀勝:하시바 히데카쓰) 1만 1500명
수군 대장 협판안치 (脇坂安治:와키자카 야스하루) 9540명
* * *
전대미문의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해일처럼 순식간에 밀려든 왜군에 맞서 조선 곳곳에서 병사를 모집했으나 그 수는 손가락으로 꼽는 게 훨씬 빠를 듯싶었다.
백성들은 왜군을 피해 산속으로 도망가고 상비군을 보유하지 않은 각 고을의 관군은 제대로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패퇴했다.
당시 조선은 향토 단위의 소규모 방어 위주 전략인 제승방략(制勝方略)체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제승방략체제는 중종 때 삼포왜란(부산포, 염포, 제포를 개항하여 왜인들을 통제하려는 조선과 이에 불만을 품은 왜인들이 일으킨 폭동)과 명종 때 을묘왜변(삼포 중 제포만을 개항하여 왜와의 교역을 축소하자 왜인들이 서남해 장흥・영암・강진지역 점령)을 겪으며 기존 진관체제(지방 중심지역에 군사를 배치하여 각 지역의 관리나 수령이 자체적으로 지휘하는 시스템)를 전환한 것으로 전시에 중앙에서 파견한 장수나 그 지역의 가장 높은 직급을 가진 병사・수사 등이 군사를 지휘, 통솔하도록 하는 체제다.
이는 각 행정구역이 자체적으로 군사 기능을 담당하여 한 사람의 통제 아래 작전을 신속히 펼칠 수 있는 것이 장점이지만 중앙에서 장수가 도착하기 전에 적의 선봉 부대가 들이닥치면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도체찰사인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왜적이 침입하자 문경 이하 여러 고을의 군사들이 대구 천변(川邊)에서 야영하며 조정에서 파견한 지휘관이 도착하기를 수일을 기다렸으나 지휘관이 제때 오지 않아 왜군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흩어졌다.”고 지적했다.
또 후방지역엔 군사가 없어 1차 방어선이 무너지면 이후엔 뚜렷한 대책이 없는데, 이번처럼 대규모 전쟁에서 다른 부대와의 연계가 어려운 허점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각 병영의 지휘관을 무관이 아닌 문관을 등용함으로써 용병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고 군사들과의 신뢰와 친밀감이 전혀 없어 제대로 된 군사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몇 해 전 왜적의 침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지난해부터 무관을 기용하고 성을 새로 쌓고 보수하려 했으나 200여 년 동안 ‘전쟁 없는 평화’를 누려온 일부 관리들과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전국시대를 겪으며 7년간 전쟁을 준비한 왜와 고작 수개월 땜질식으로 대비한 조선, 그 처음과 끝은 굳이 맞추어보지 않아도 알만했다.
홍한의 이야기를 들고 있던 김면이 답답한 마음을 내보였다.
“조정에서는 왜적의 침입을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구나.”
“지금쯤 장계가 도착했을 수도 있겠지요.”
“혹시 봉화가 오르는 것을 못 보았느냐?”
“봉화는 보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존망이 바람 앞의 등불인데 이렇게 걱정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닌 듯하구나. 우리라도 무슨 방책을 세워야지.”
“그렇습니다. 모두 힘을 모아 일어서야지요. 저는 내일 청도로 가서 장정들을 모아 오겠습니다.”
“그곳도 왜군이 들어와 있을 텐데 위험하지 않겠나?”
“조심해서 움직이겠습니다.”
김면과 홍한은 밤이 늦도록 생각의 처음과 끝을 맞대어 보았으나 당장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마음은 가라앉았다.
무겁고 두려운 내일이 그려졌다.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을까?
김면은 이렇다 할 확실한 믿음은 없었지만 믿는 자에게 믿음이 존재함을 떠올렸다.
어느새 달빛이 비스듬히 방안으로 비쳐들었고, 밖에는 바람이 부는지 창호지에 소나무 그림자가 흔들리며 어른거렸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김면은 조카 홍원(1574~1601)을 향청에 보내고, 아우 회(1549~1597)를 연강(沿江:강변을 따라 늘어서 있는 마을)과 인근 고을에 보내 왜군과 관의 움직임을 알아보게 했다.
불안감이 파고들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바람에 떠밀린 흰 구름은 금산재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 머슴 만석이가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느냐?”
“예, 대감마님. 지금 육일헌(이홍량) 나리와 옥산(이기춘) 나리께서 와 계십니더.”
“육일헌과 옥산이? 어디에 계시냐.”
“사랑채로 모셨습니더.”
“그래 알았다. 내 금방 간다고 전해라. 그리고 만석이 너는 지금 풍등골 박 의원에게 가서 칠복이 어미 약값을 전하고 칠복이 집에는 쌀이랑 양식을 넉넉히 갖다 주거라.”
“예, 대감마님 분부대로 하겠심더.”
불길한 소문은 바람을 탄 연기처럼 인근 마을로 번져갔다.
김면이 사랑채 문을 열자 육일헌이 벌떡 일어서며 “이보게, 송암. 왜적이 쳐들어 왔다네. 이를 어쩌나!”
김면이 육일헌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왔는가, 옥산도. 일단 앉으시게. 나도 재종질 홍한을 통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네. 믿기지는 않지만, 화급을 다투는 일이니 우리라도 속히 대책을 세워봐야지 않겠나? 이 상황에 내 차라리 전장의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집에서 병을 핑계로 편안함을 구하겠는가? 함께 힘을 모아 보세.”
육일헌과 옥산의 눈빛도 김면과 같은 생각임을 말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만석이 게 있는냐?”
“예, 대감마님. 부르셨습니꺼. 칠복이 약값과 양식은 잘 전달했습니다.”
“그래 애썼다. 너는 지금 바로 가솔 모두를 이곳으로 모이라고 전하거라. 한시도 지체 말고…….”
온 동네가 삵을 만난 닭처럼 어수선했다.
한 시진쯤(2시간) 지났을까 김면의 가동(家僮:한 집안에 매인 종) 등 700여명과 친족인 김연・김양・김함・김급・김성・김홍원 등 15명이 한걸음에 달려왔고, 원근에서 흑립을 쓴 유생과 초립을 쓴 장정, 무명 수건을 이마에 동여맨 수많은 남녀노소도 앞을 다투듯 모여들었다.
“갑자기 난리라도 일어난 건가?”
웅성거림은 마당을 지나 담장을 넘었다.
“대감마님 나오시네, 모두 조용히 하시게”
모두의 눈길이 김면에게 쏠렸다
김면이 먼저 입을 뗐다.
“지금 왜적이 부산에 상륙하여 경상좌도를 힙쓸며 올라오고 있어 이곳 경상우도도 조만간 왜적이 들이닥치면 온전할 수 없을 것이네. 해서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왜적에 맞서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왜적을 피한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일도 아니니…….”
목소리에 힘이 더 들어갔다.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면
君有急而臣不死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고 하겠는가.”
烏在其讀聖人書也
그 비장한 울림이 얼마나 큰지 금 새 사위(四圍)가 숙연해지며 모인 사람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면의 말이 끝나자 알터 칠복이가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니겠소. 우리 모두 대감마님을 따릅시더, 왜적을 쳐부숩시더.”라며 목청을 높이니 여기저기서 “맞습니더, 대감마님 말씀이 맞습니더, 왜적이 쳐들어오면 우리 모두 죽임을 당하고 동네는 쑥대밭이 될낀데 죽기 전에 왜놈을 한 놈이라도 죽이야지.”
“죽기는 왜 죽어! 싸워 이기면 되지.”
“이보게, 고것은 말로는 할 수 있지. 농사나 짓는 우리가 무슨 힘으로 그렇게 많은 왜적을 상대할 수 있겠나? 내 말이 틀렸소? 나는 피난을 갈람미더. 그게 살길 아닙니꺼?”
칠복이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자, 힘을 모아 우리 마을은 우리가 지킵시더.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살 수 있다고 안 합디꺼. 피난을 가고 싶은 사람은 피난을 가고 대감님을 따를 사람은 여기에 남으면 됩니더. 절대 강요하지 않으니 각자 알아서들 하이소.”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삼삼오오 모여 앉아 얼굴을 맞대었으나 매듭지어지지 않는 갑론을박만 이어졌다.
“왜적에 맞서 싸우자”라는 사람과 “피난을 가자”는 사람 모두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곳을 지킬 수 있을지, 아니면 떠나야 한다는 공포와 불안감은 검은 구름처럼 동네를 뒤덮었다.
백가쟁명(百家爭鳴) 속에 이렇다 할 결론 없이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가재도구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마음만 바빴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먼지 바람이 휙 지나갔다.
마음이 착잡한 김면은 칠복이를 한 번 쳐다보고는 눈길을 서녘 하늘로 던졌다.
자신의 생각에 누구보다도 먼저 따라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저녁 무렵 왜적의 침입을 알아보러 나간 조카 홍원과 아우 회가 돌아왔다.
“형님, 홍한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낙동강 인근 사람들은 피난길을 나서고 있답니다. 우리도 피난을 가든지 아니면 왜적에 맞서 싸울 궁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령 큰길에도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 알았다. 오늘은 들어가서 쉬도록 하거라.”
희미한 등잔불이 만든 그림자가 벽에 일렁거리며 방안의 침묵을 더 무겁게 했다.
갠 달이 솟아올라 소나무 가지 끝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김면은 밤이 깊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마음이 편치 못한 탓이다.
새벽 첫닭이 울기 전 솟을대문이 꽈당 쾅! 하고 열리더니 시퍼런 칼을 든 왜군이 툇마루에 올라서 방문을 부수듯이 열어젖혔다.
김면은 잠결이었지만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네 놈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의병을 모아 우리에게 대항하겠다는 김면이렸다? 어리석은 놈!”
왜군이 하는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죽이려한다는 것을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왜군이 다짜고짜 칼을 목에 갖다 대었다.
김면은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으나 입은 얼음장처럼 얼어붙어 전혀 열리지 않았다.
심히 놀란 탓이다.
순간 칼날이 번쩍거렸다.
“아악!”
가슴에서 피가 낭자하게 흘러내렸다.
비명을 들은 이씨 부인과 연화가 속옷 차림으로 달려왔다.
“영감, 왜 그러십니까?”
놀란 부인이 김면을 흔들어 깨웠다.
이마에 땀이 흥건한 김면이 힘겹게 눈을 떴다.
“무슨 나쁜 꿈을 꾸셨는가 봅니다?”
“그런 것 같소. 괴이한 일이다. 참극의 시작인가?”
“영감, 무슨 말입니까? 참극의 시작이라뇨?”
“아닙니다.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이씨 부인도 어제 낮에 있었던 일들을 알고 있기에 내심 불안한 표정이었다.
열린 문틈으로 미지근한 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인가?
뒤뜰 담장 아래 핀 개나리꽃이 계절을 알렸지만, 가슴 한구석엔 찬바람이 불었다.
꿈속의 일은 지워지지 않고 머릿속을 생생하게 맴돌았다.
김면이 조반을 물리고 부인과 마주 앉았다.
“부인, 왜적이 몰려오면 이곳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본 듯 뻔하지 않겠소, 해서 부인은 일단 안음 (함양군 소재) 수승동으로 피난하시는 게 좋을 듯한데.”
“영감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왜적에게 붙잡히면 의병 활동을 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걱정은 마십시오.”
“고맙소, 내 마음을 알아주시니.”
물을 손으로 잡은 것처럼 허전한 하루가 또 지나갔다.
어수선한 마음을 정리하려 등잔불을 켜고 서안에 책을 펼쳤지만 좀처럼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인의 방으로 건너갔다.
이씨 부인도 마음이 불안한지 손을 놓고 있었다.
“부인, 전쟁이 났다면, 언제 끝날런지 알 수 없으니 겨울옷도 챙겨야 할 것이오.”
“겨울옷이라면 전쟁이 해를 넘겨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단 말입니까?”
“알 수 없는 일이오. 그러나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듯하오.”
김면이 옷가지를 챙기는 부인을 도왔다.
옷을 접는 손은 서툴렀지만 한없는 정이 차곡차곡 스며들었다.
방 문틈으로 간간이 새어 나오던 불빛이 사그라질 무렵 사랑채 모퉁이 어스름한 달빛 아래 두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졌다.
칠복이와 연화였다.
“연화야, 우리 지금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 만날 날이 언제쯤일 런지 모르겠구나.”
연화의 옅은 눈물이 달빛에 반짝였다.
그리고 그 두 눈엔 만석이가 들어앉았다.
“우리 엄니도 안방마님을 따라갈 것이니 연화가 옆에서 잘 보살펴 주 길 바래.”
“그런 걱정일랑 꽉 붙들어 매요,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머니는…….”
칠복이가 가슴속에서 무명으로 싼 짧은 막대기 같은 것을 꺼내 연화의 손에 쥐어 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와 닿았다.
“이게 뭔가요?”
연화가 무명 매듭을 풀어보니 검푸른 빛이 도는 단도였다.
칼자루엔 단심(丹心)이라고 쓰여 있었다.
칼날은 그리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은은함이 느껴졌다.
“이 칼을 품속에 지니고 있으면 그 어떤 마귀도 침범하지 못한다는구나.”
대장간 할아범에게 부탁하여 구한 것인데, 연화가 어디를 가나 꼭 지켜줄 것이구먼.”
연화가 칠복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동네 뒷산에서 슬픔이 켜켜이 쌓인 한스러운 솔바람 소리가 지붕을 넘어왔다.
또 소쩍새는 이 산 저 산을 옮겨 다니며 울음을 토했고, 진분홍 복숭아 꽃잎이 개울물을 거닐 듯 소리 없이 떠내려갔다.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이 스르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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