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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산품에 들다.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솔로쿰부 트레킹 일정
2월 13일 인천-카트만두
2월 14일 카트만두-루크라(2840)-체불룽-팍딩(2610)
2월 15일 팍딩(2610)-몬조(2840)-조르살레(2805)-남체(3440)
2월 16일 남체(3440)-생보체(3700)-쿰중(3600)-에베레스트 뷰 호텔(3980)-남체(3440)
2월 17일 남체(3440)-풍키탱카(3250)-탱보체(3860)
2월 18일 탱보체(3860)-아래 팡보체(3930)-소마레(4010)
2월 19일 소마레(4010)-딩보체(4410)
2월 20일 딩보체(4410)-투크라(4620)-로부체(4930)
2월 21일 로부체(4930)-고락�(5140)-칼라파타르(5545)-고락�(5140)
2월 22일 고락�(5140)-베이스캠프-코락�(5140)-페리체(4270)
2월 23일 페리체(4270)-위 팡보체(3930)-강주마(3600)
2월 24일 강주마(3600)-팍딩(2610)
2월 25일 팍딩(2610)-체불룽-루크라(2840)
2월 26일 루크라
2월 27일 루크라-카트만두
2월 28일 카트만두-서울-부산
* 物에도 格이 있다.
등산화 바닥창을 새로 갈았다. 4개월 전 해발 3440미터 남체까지의 예비트레킹에 신었다가 바닥이 헤진 오래된 신발이다. 산을 찾는 재미가 무르익어 갈 무렵 곁을 찾아와 지금까지 산을 만나는 발걸음을 실어준 물건이다.
또 하나 각별한 산벗이 있다. 손때묻은 구형스틱이다. 여행을 좋아하셨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천진하시던 만년의 때묻은 손길이 남아있는 유품이다
언젠가 어머니의 발을 씻겨드리며 한 뼘 손바닥보다 겨우 조금 남짓한 소박한 부피의 두 발에 마음이 무너져 내린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의 생애가 압축되어 생사고락의 연륜과 무게를 고스란히 견디고 있는 자그마한 두 발을 본 것이다. 그런 두 발이 힘들 때 또 하나의 발이 되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지팡이 즉 스틱이다.
산행이나 인생이나 모두 그 지나온 자국을 발자취라 일컫는다. 삶을 꾸리고 산에 드는 발길 따라 개인사의 자취를 만들며 바닥이 헤진 등산화와 영물이 되어버린 때묻은 스틱은 단순한 공산품이라고만은 할 수가 없다. 등산화와 스틱이라는 물성(物性)에 무수한 업(業)이 얹어져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물격(物格)까지 갖추게 된 물건이 된 것이다. 따라서 늦은 겨울 2월에 보름이 걸리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솔로쿰부 트레킹을 위해 꼭 준비해야 하는 침낭 보온물통 우모복 방풍복 비니 장갑 물휴지 등 많은 중요한 물품들을 넘어서 헤진 등산화와 때묻은 스틱은 다소 품질과 성능이 떨어져도 다시 한 번 동행이 되어야 했다. 함께 5545미터 칼라파타르의 흙과 바위를 디디고 서서 8848미터 세계 최고의 에베레스트 봉우리를 직접 가까이에서 만나고 싶은 충분한 이유를 가진 것이다.
< 2011년 10월 히말라야의 코스모스 >
* 히말라야 설산은 천상에 있는 구름이다.
히말라야 산맥은 8000미터 이상이 넘는 봉우리16좌와 그에 버금가는 무수한 봉우리를 가진 세계의 지붕이라 일컫는 총길이 2400km의 산군이다. 히말라야는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눈(hima)이 사는 곳(alaya)’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은 8848미터로 세계최고봉임을 확인한 영국인측량사 조지 에베레스트경의 이름을 딴 것이고 티벳에서는 초모룽마(‘세계의 어머니 여신’이라는 뜻), 네팔에서는 산스크리트어인 사가르마타(‘하늘의 이마’라는 뜻)라고 부른다.
히말라야산맥에는 힌두계 ·티벳계 ·이슬람계 주민이 살고 있으며, 네팔 지역의 해발고도 2,000m보다 높은 곳에서는 티벳인들이 목축(고산지 적응동물 좁교 야크 등)을 주로하고 티벳불교인 라마교를 믿으며 보리 ·밀 ·메밀을 가꾸며 산다. 농경의 상한은 평균 3,600m이지만 때로는 4,000m까지 올라가며 가파른 산중턱에는 계단식의 경작지가 이루어져 있다.
특히 셰르파는 히말라야산맥 에베레스트산 남쪽 기슭의 솔로쿰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3,000m 이상의 고산에 사는 티베트계 네팔인들의 총칭이다. 1920년대에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인부로 채용되었으며 지금까지 히말라야 지방을 여행하거나 등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카트만두에서 해발 2840미터의 솔로쿰부 루크라공항으로 운항하는 경비행기는 하늘의 배려가 있어야 날 수 있다. 구름이 흘러도 바람을 탓하고 날씨가 맑아도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 항로이다. 평지에서 평지로 뜨고 앉는 운항이 아니라 평지와 낭떠러지 활주로를 앉고 떠야하기 때문이다.
운이 좋아야 제 때에 탈 수 있는 히말라야 골짜기로 날아드는 경비행기 창문으로 병풍처럼 펼쳐있는 히말라야 설산을 먼 거리로 꿈같이 만난다. 산군이 아니라 길게 늘어서 사열하고 있는 유장한 구름이다. 사람이 살아서 가는 곳이 아닌 너울 옷을 입은 선녀들이 사는 천상세계로 보인다. 그런 천상의 세계를 일상으로 쳐다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그들의 흙과 돌을 밟으며 열흘을 걸어서 올라가기 위해 고도 2800미터에 첫발을 내딛으러 간다. 거기가 구름을 거느리는 천상세계인지 구름과 노는 지상세계인지 두 발로 가보는 것이다.
< 해발 2840미터 히말라야 산중에 있는 활주로가 아주 짧은 루크라공항 >
< 천상의 구름 히말라야 >
* 거리를 걷는 것이 아니라 높이를 걷다.
히말라야 솔로쿰부 트레킹 코스는 하루 하루를 걷는 거리는 의미가 없다. 오늘은 몇 킬로미터를 몇 시간 예상으로 걷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몇 미터를 몇 시간 예상으로 올라간다든지 내려간다든지 한다. 즉 고도를 어떻게 조절하며 하루를 걷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이번 히말라야 솔로콤부 트레킹 코스는 2840미터 루크라공항에서 출발하여 2610미터의 팍딩마을에서 첫밤을 보내고 고도를 높여가며 8일째 최고의 고도 5545미터의 칼라파타르를 올랐다가 5140미터의 고락�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둘러보고 다시 내려오는 약 보름간의 일정이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간단히 아침을 먹고 8시 정도에 트레킹을 시작하여 오후 5~6시 경에 목적지에 도달한다. 난방과 조명이 거의 불가능한 롯지에서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끼니를 때운다. 저녁8시가 넘어서면 물휴지로 얼굴과 손발을 적당히 닦고는 있는 옷 다 껴입고 침낭과 보온물병을 품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 매일의 일상이다. 낯설고 불편한 환경에서 잠자리 시간이 거의 10시간이다 보니 보통 세 번을 잔다. 실컷 잤나 싶어 깨어나기를 두어 번을 거쳐야 아침을 맞게 되는 것이다.
설령 목적지에 좀 일찍 도착하여도 누워서 쉰다든지 잠을 자는 것은 고소를 맞을 확률을 높이는 행위라 그리하지 못한다. 햇볕이 온기를 보태주는 양지바른 곳을 찾아 옷을 두툼히 입고 꾸역꾸역 앉아 무료한 시간을 때우는 것이 고작이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니 책읽기는커녕 명상도 제대로 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저 시시껄렁하고 단순한 대화로 지루함을 견디는 데도 몹시 힘이 든다.
그러다 어느 날 트레킹 도중 점심시간에 그만 쓰러져 눕고 오늘은 그만 가자는 간절한 호소를 하며 물휴지 세수는 물론 양치질도 못하고 쓰러져 앓는다. 3860미터의 탱보체에서 출발하여 4010미터의 소마레로 가서 4410미터의 딩보체로 가기로 일정이 잡힌 날이다. 먼 타지에서 단숨에 달려와 고도 4000미터를 넘어서는 것을 히말라야 산품은 그리 쉽게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딩보체는 다음날로 미루고 졸지에 예정에 없던 소마레에서 1박을 하게 된다. 그 바람에 방이 모자라 일행 중 한 분은 맨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잠을 자는 비박의 영광을 가진다. 그 날 그 방에서 그나마 침상에서 자게 된 컨디션 불량자는 밤 내내 잠꼬대로 연장자에게 맨바닥 잠을 주무시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하더라는 후문도 듣는다.
< 해발 5545미터의 칼라파타르 마지막 오르는 길 >
* 고소를 맞다.
3440미터 남체의 밤에 고소를 맞았다. 히말라야 트레킹 오기 전 산악인들이 고산증 고소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꼭 ‘맞는다’는 표현을 써 의아하게 생각했다. 고소증 고산증이 오거나 걸린다고 표현하지 않고 맞는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들만의 좀 과장된 언어유희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소증은 오는 것도 걸리는 것도 아니었다. 중풍 즉 풍을 맞듯이 고소를 맞는 것이 맞았다. 히말라야 솔로쿰부 트레킹 코스 초입에 해당하는 2840미터 루크라 공항에 도착하여 2610미터 팍딩 마을에서 1박을 하고 하루 만에 무려 800미터를 넘게 올라온 남체의 밤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일행 중 몇은 벌써 팍딩 마을에서 사단이 났지만 그 때는 멀쩡하였고 4개월 전 남체까지의 무난한 트레킹 경험도 있어 안심하고 잠자리에 든 밤이었다. 한 밤 중 갑자기 오른쪽 손가락 세 개가 마비감이 들어 잠이 깨었다. 왼손으로 주무르고 체위를 바꾸고 하니 마비감은 없어졌으나 이어 아랫배에 주기적인 경련통이 왔다.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용 물병을 통증자리에 대고 마사지를 하며 가라앉기를 기다렸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시간차를 두고 진경진통제와 소화제를 두 차례나 먹고 겨우 진정이 되었다. 거의 날밤을 새다시피 한 히말라야 산품에 들어온 두 번째 밤이었다.
이 후로 고도를 높이며 걷는 것은 거의 고행이었다. 소화기가 탈이 나니 식욕이 완전히 가셔버려 누룽지를 끓인 물과 삶은 감자 한 두 개로 연명을 하다시피 하였다. 바닥이 난 체력으로 힘들게 오르고 오르며 밤이면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손가락 마비감과 잦은 가래기침은 잠까지 설치게 하였다.
고도 4000미터에 근접할 때부터는 소화불량 증상에다가 저기압 저산소로 인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뗄 때마다 벅찬 심장 고통이 따라 왔다. 부종과 심장 부담을 줄이기 위한 이뇨제와 시알리스류의 적절한 예비투약은 그나마 낙오를 면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 주었다.
고산증 즉 AMS(Acute Mountain Sickness)의 치료법은 고도를 낮추는 것만이 해답이다. 사전에는 ‘높이 솟은 산에 올라갈 때 나타나는 병적 증세. 고산에서는 기압이 내려가는 동시에 공기 속의 산소 분압이 감소하므로 불쾌해지거나 피로해질 뿐 아니라 두통 동계 청색증 식욕부진 구토 이명 등이 일어나며, 더 올라가면 졸음 현기증 정신혼미 또는 정신흥분이나 감각 이상이 나타나게 된다.’라 나와 있다. 증세가 심한 뇌부종과 폐수종이 오면 즉시 고도를 낮추고 산소를 흡입하는 응급처치가 필요하며 그 이상의 고도 올리기는 적응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다.
실제 고산증으로 몹시 힘들어 하던 동료가 30분 정도의 산소흡입으로 깜쪽같이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고도를 낮추는 적응기를 거쳐 다시 오르기를 이틀이나 연거푸 시도하여도 어느 정도 올라간 이상은 도저히 한 발자국이 떨어지지 않더라는 경험담을 나중에 듣기도 하였다. 또 한밤중에 4000미터 가까운 산골오지에서 쿵쾅쿵쾅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본인의 심장이 뛰는 소리더라는 다른 동행의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었다.
< 고소증에 시달리며 >
* ‘체’에서 길(道)을 묻다.
연암 박지원의 여행기 <열하일기> 중 도강록에 나오는 글이다. 큰비로 강물이 불어 강을 건너기 힘들 때 연암이 ‘자네, 길(道)을 아는가?’ 하며 아랫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한다. ‘길이란 바로 저편 언덕에 있다.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의 경계를 만드는 곳이다.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다.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다.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한 법. 빛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경계. 닿지도 떨어져 있지도 않는다는 경지. 이것저것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만 볼 수 있는 법’이라는 요지의 철학적인 말을 글로 남긴다.
티벳인과 관련된 곳의 지명에는 ‘체’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간다. 지난 번 티벳여행에서도 장체 시가체 등 이름의 마을을 거쳤고 히말라야 솔로쿰부 트레킹코스에도 남체 생보체 탱보체 팡보체 딩보체 페리체 로부체 등을 지난다. ‘체’는 부처님이 설법하신 곳 또는 부처님이 지나가신 언덕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즉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라 할 수 있는 인심(人心)을 도심(道心)으로 만드는 곳이 된다. 경계와 사이를 이해하고 뛰어넘어서는 경지에 이르러야 겨우 알 수 있는 은미(隱微)한 길(道)을 묻고 찾는다면 제대로 온 것이다.
트레킹은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달구지를 타고 정처 없이 집단 이주한 데서 유래한 목적지가 없는 도보여행 또는 산·들과 바람 따라 떠나는 사색여행이라고 한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디기에 집중하고 한계를 예감하면서 고도를 높여가는 히말라야 트레킹은 무념으로 길걷기 거기에 고행에 가까운 절식과 몸 부리기가 보태진다. 그래서일까 사념과 아집이 제일 먼저 떨어져나간다. 근심하고 염려하는 따위의 소용없는 여러 가지 생각과 사물을 주재하는 상주불멸의 실체가 자신의 심신 가운데 있다고 믿는 집착은 참으로 어리석고 부질없어진다.
딩보체 마을을 출발하여 페리체 마을을 왼쪽 옆구리로 끼고 로부체 마을을 향하여 걷는 고도 4000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눈물이 흐른다. 그 동안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보며 누적된 감동충격에 보태지는 짙고 옅은 흙색이 만들어내는 광활함 장엄함 거룩함에 압도되어 버린 것이다. 고요하고 숙연한 눈물로 생명에 대한 무한긍정의 울음을 울고야 만다.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저어되는 3000미터 이상 높이의 오지에도 아기자기하게 농사지으며 사람냄새 나는 초록마을을 만나는 행복감도, 짐꾼과 주방일꾼 짐승몰이꾼으로 흙먼지 뒤집어쓰고 한뎃잠을 자면서 손발 부르트며 일하면서도 그들이 삶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일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충만감도 이미 마음에 들어와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 때쯤은 울어야 마땅할 것이다. 나중에 마지막 목적지 5545미터의 칼라파타르에 고생고생 하여 기어이 도착하였을 때는 안으로만 삼키는 속울음이 터진다.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스스로가 장하고 대견하여 미어지는 감격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 딩보체에서 페리체를 경유하여 로부체로 가는 길 >
* 별은 뜬눈으로 밤을 지키다.
손을 앞으로 뻗어 주먹같은 별을 잡을 수 있는 것 같은 밤하늘을 만났다. 고도는 높고 롯지가 산비탈에 자리잡은 고도 4010미터의 소마레 마을의 밤하늘은 머리 위로 펼쳐있는 것보다 눈 앞으로 펼쳐있다. 즉 밤하늘의 별높이나 사람이 선 눈높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나는 곳이다.
딩보체 마을의 별은 또 어떻던가. 한참이나 높이 오른 고도 4410미터의 산마을이지만 반듯하고 너른 평지를 깔고 그 만큼 반듯한 하늘을 이고 있는 마을이었으니 그 하늘을 지키는 별들도 크고 당당하게 빛나며 이방인의 잠속을 드나들고 있다.
또 페리체 마을같이 골짜기가 길고 광활한 곳의 밤하늘은 별무리를 개울처럼 흘리고 있다. 산세가 가파른 히말라야 계곡은 대부분 마을아래 멀리 떨어져 있는데 고도 4270미터의 페리체 마을은 계곡이 마을을 끼고 까까이에서 낮게 흐르고 있다. 크고 작은 물줄기에서 나는 졸졸 콸콸 물소리는 노래처럼 들려 저물어서야 마을로 들어가는 힘든 발걸음의 피로를 덜어주었다. 그리고 밤이 되자 그 물소리만큼의 별무리들이 하늘로 흘러가고 있다.
사람이 집을 짓고 머물고 있는 곳으로는 가히 제일 높다고 할 수 있는 고락� 마을의 별은 보았던가. 트레킹의 최종목적지 칼라파타르에 올라 에베레스트봉을 직접 보며 세계 최고봉을 만나는 경이로움과 마침내 어렵고 힘든 역경을 이겨냈다는 성취감이 범벅이 되어 격정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던 그 밤의 별을 기어이 보았던가. 아마도 보긴 보았으되 스스로를 대견하다고 부추기는 마음에 새긴 훈장같은 별의 위용에 그 밤의 별은 빛을 발하지 못했으리라.
트레킹의 고도를 높이며 올라가는 길목에서 찾았던 별은 밤잠을 설치고 숨을 죽이며 산품의 신성을 기대하는 마음이 컸다면 내려오면서 만난 별들은 어깨를 겯고 싶은 산품의 다정을 느꼈다고 하겠다.
해발 6812미터의 아름다운 봉우리 ‘어머니의 진주목걸이’라는 뜻의 아마다블람을 수호천사처럼 앞세운 강주마 마을의 별들은 해거름이 되어도 느긋하게 더디 더디 내려오는 트레커들을 마을로 재촉하는 소곤거리는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이젠 정말 트레킹의 대미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히말라야의 첫밤을 보냈던 고도 2610미터의 팍딩 마을로 돌아와서 다시 만난 별은 차마 서서 쳐다볼 수 없었다. 롯지 마당 낮은 돌담에 그만 누워버렸다. 그리 차지 않은 등바닥에 실리는 체온 덕인가 누워서 온몸으로 맞아들이는 별들은 고도가 낮아진만큼 좀 멀어졌지만 별모양의 온기가 먼저 몸 속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그리 오래 누워 있었을까 누군가 부르지 않았다면 밤이라도 지샐 수 있었을 것이다.
히말라야 골짜기 어느 높이 어느 하늘에서도 북두칠성은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유난히 빛났다. 그리고 많은 별들은 물론 가끔씩 떨어지는 별똥별들도 저마다의 밝기와 크기로 자기만의 궤도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키고 있었다.
< 별이 찾아오는 시각의 탱보체 >
* ‘나마스떼~’ 보다 ‘타시텔레 ~’가 어울리다
우리말 ‘안녕하세요~’에 해당하는 네팔인사말은 ‘나마스떼~’이다. 하지만 솔로쿰부 골짜기에 살고 있는 셰르파들은 티벳 불교인 라마교를 믿는 티벳인들이라 ‘타시텔레~’가 어울리는 인사말이다. ‘나마스떼’는 산스크리트어로 ‘그대 안의 신에게 경배를’이라는 인사말로 인도인 네팔인들이 사용하는 인사말이다. ‘타시텔레’는 머리에 뿔이 나있고 혀가 검은 폭군을 몰아낸 티벳인들이 자신의 생김새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모자를 벗고 입을 벌려 인사를 하게 되었다는 전통설화와 관련된 '친구'라는 의미의 인사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티벳 여인들은 전통의상으로 가로줄무늬가 늘어선 앞치마를 입는다. 이는 우리나라 여인들이 결혼을 하면 댕기머리에서 비녀머리로 바꾸듯 결혼한 여인을 표시하는 옷차림이다.
히말라야 트레킹 길에는 라마교와 관계있는 많은 성물들이 길손들의 안녕을 보살피고 염원을 들어주고 있다. 곰파 룽다 타르초 스투파 경통(마니차) 경석(마니석) 등 낯선 명칭들을 듣게 된다. 사원에 해당하는 곰파, 탑이라 할 스투파, 옴마니 밧메훔 등 불경을 돌에 새긴 마니석, 한 바퀴 돌리면 경전하나를 읽는 것과 같이 치는 크고 작은 마니차, 경전이 적힌 깃발이 세로 기둥에 나부끼는 룽다, 만국기처럼 가로로 늘어서 날리는 타르초 등으로 티벳불교를 조금 엿볼 수 있다. 경통은 시계방향으로 돌려야 하고 스투파나 마니석이 쌓여있는 곳을 지날 때는 왼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고도를 높이며 올라갈 때는 일행들 모두 별 탈 없이 칼라파타르 고지까지 무난히 트레킹에 성공할 수 있기를 기원하였고 내려올 때는 모두가 큰 사고 없이 뿌듯한 마음으로 즐겁게 하산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경통을 돌리고 돌린다. 하지만 신묘한 영험은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안으로 향하는 외지인의 기복신앙보다는 아마도 밖으로 향하여 타인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는 셰르파들의 신심에 있었고 일행들은 그 덕을 보았을 것이다.
< 셰프라 여인의 전통의상과 타르초 >
< 쿰중마을의 스투파 룽다 마니차 마니석 타르초 >
* 이름이 있어 잊지 못하다.
처음에는 귀에도 설고 눈에도 설어 외우기 힘든 이름들이다. 높이 솟은 설산봉우리들과 지나는 마을들 그리고 고락을 같이한 가이드와 키친이라 불리며 끼니를 해결해준 주방 사람들과 무거운 짐을 대신 날라준 좁교 몰이꾼들의 이름이다. 지번 밍마 저미 치링 말끄만 찬드라 등 트레킹 도우미들은 얼굴 마주치는 회수가 잦은 순서대로 빨리 외워진다. 어릴 때부터 노동으로 키가 제대로 크지 못하는 포터들은 지개짐의 무게를 이마끈으로 견딘다. 규정으로는 40키로그람이나 벌이를 위해 무려 70키로그람까지 진다고 한다. 고산지대에서 힘을 잘 쓰는 좁교와 야크에게는 그 보다 더 많이 짐을 올려 이동한다. 셰르파 출신 주방장이 끼니마다 만들어 내오는 한식메뉴는 감탄할 정도로 제대로 맛을 내는 요리솜씨였으나 고소증으로 제대로 먹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우유빛 강'이라는 뜻으로 내내 골짜기를 끼고 흐르던 계곡 '� 코시'도 잊으면 섭섭하다 하겠다.
팍딩 남체 탱보체 소마레 딩보체 로부체 고락� 페리체 강주마 루크라 마을이름은 고소증과 싸우면서 만리장성을 쌓을 정도의 긴긴밤을 보낸 곳이라 잠들기 전에 그리 힘들던 것이 자고 나면 바로 외워진다. 또 체불룽 조르살레 몬조 생보체 쿰중 팡보체 칼라파타르 풍키탱카 투크라 톡톡 마을 등은 오르내리면서 이야기거리가 만들어진 곳이니 또 잊을 수 없는 곳이 된다. 남체에서 고소적응을 위해 가볍게 출발하였던 에베레스트뷰 호텔로 가는 쿰중마을길과 다시 남체로 돌아오는 눈발날리는 길은 거의 10시간 가까운 강행군이 되어 예비체력을 소진하는 위기가 된다. 하지만 멀리로 겹겹이 겹치는 산마루들을 쳐다보며 경사가 급한 비탈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고산동물들이 다니는 길을 인상적으로 내려다보며 걷는 남체로 돌아오는 길은 솔로쿰부 트레킹풍경의 최고 백미다. 그리고 삶은 감자 두 알로 끼니를 때우고 투크라에서 로부체로 오르는 끊임없는 돌무더기길은 고소증에 시달리며 한발 한발 떼기가 너무나 힘들었던 최악의 코스로 남는다.
가우리샹카(7010) 갸오룽(6980) 꽁데(6189) 캉테가(6685) 탐세루크(6618) 아마다블람(6812) 에베레스트(8848) 눕체(7855) 푸모리(7161) 로체(8516) 등 높이와 위용으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던 설산봉우리들은 유명세를 타는 봉우리가 오래 눈길을 붙들었다. 남체에 오르고부터 거듭거듭 외우며 오르기를 격려해주던 꽁데와 탐세루크는 정겨웠고, ‘어머니의 진주목걸이’라는 뜻의 아마다블람은 이름 탓인가 우아한 자태로 감싸주며 힘든 길을 위로해주는 듯하였다. 검은바위라 일컫는 칼라파타르 고지 바로 뒤에 떡하니 버티고 섰던 하얀 설산 푸모리는 부조화가 빚어내는 생경함으로 각인되었고, 5545미터 고지에서 만나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는 눕체 로체 뒤에 부끄러워 숨은 듯 비스듬히 사각진 얼굴만 빼꼼히 보였다. 이후로 내려오는 하산길에서는 굽이굽이 돌아서서 에베레스트봉을 볼 수 있는 고개길이 사진배경으로 발걸음을 멈추게 하며 아쉬운 눈이별을 지켜보는 묵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이 외 또 이름이 있어 잊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히말라야 자락 어디에서 영혼이 쉬고 있는 고 오희준과 고 이현조 그리고 고 남원우 세 산악인이다. 고 남연우 추모탑에는 우리나라 특산물 홍삼캔디를 얹어주고 팡보체 마을로 올라가는 길에 산악인 엄홍길의 휴먼스쿨과 가까이 있는 고 오희준과 고 이현조 추모탑에는 카타와 술을 올린다. 모국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험한 곳에서 한글로 적힌 이름으로 남아있는 세 사람을 만나는 심정은 오묘하다. 슬픈 것도 안타까운 것도 아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모습을 달리하는 유형과 무형의 존재로 눈맞춤이나 악수나 포옹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 마음저리다. 팡보체의 두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하늘에서 수많은 까마귀 떼가 먼저 하늘을 배회하며 찾아오는 추모객을 환영하는 듯하였고 떠나는 길에도 한 마리가 끝까지 따라오며 배웅을 하여 마치 그들의 영혼이 까마귀로 현신한 듯하였다.
참! 하나 이름을 모르나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가파른 절벽과 절벽에 오색 타르초를 바람에 날리며 걸쳐있는 구름다리다. 처음 건널 때는 고소공포증으로 앞사람의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겁내며 건너던 다리다. 그러다 다음 다음 다리를 만날 때마다 조금씩 출렁거리며 건너기를 즐기게 되고 급기야는 마치 거룩한 성역으로 들어가 부처님의 가피가 내려 덮으며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의식을 치르는 듯한 몽환적인 기분까지 느끼게 된다. 얄팍한 인성에 심오한 신성이 스며들며 고유한 영성을 풍성하게 고양시켜 준다고 할까.
< 포터들의 등짐 / 사진 임현숙 >
< 남체에서 바라보는 꽁데 / 사진 임현숙 >
< 탐세르쿠 / 사진 임현숙 >
<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솔로콤부 트레킹코스의 백미 / 사진 임현숙 >
< 어머니의 진주목걸이 아마다블람 / 사진 임현숙 >
< 5545 미터 칼라파타르 뒤에 버티고 선 봉우리 푸모리 / 사진 임현숙 >
< 8848미터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 사진 임현숙 >
< 팡보체에 있는 오희준 이현조 추모비를 찾아가는 길 / 사진 임현숙 >
< 바람에 타르초가 날리는 구름다리 / 사진 임현숙 >
* 일탈 속에 또 일탈이 있다.
집을 떠남으로서 일탈은 시작된다. 하지만 일정이 짜여진 일탈이다. 처음에는 이만한 일탈로서도 스스로 대견하다. 그러다 예정에 없거나 예기치 않았던 돌발적인 상황을 만나 드디어 진정한 일탈 속의 일탈을 꿈꾸게 되고 꿈은 이루어진다.
일탈 속의 일탈에는 꼭 사람과의 만남으로 엮인다.
첫 번째 만남은 토토하얀병원 사람들이다. 토토하얀병원은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솔로쿰부 트레킹코스 초입에 위치한 고도 2800미터 정도의 체불룽이라는 마을에 부산사람들 위주로 세워진 무료자선진료소이다. 30여 년 전 히말라야 원정을 떠났던 한 부산출신 산악인의 염원이 실천으로 옮겨진 현장이다. ‘세상 가장 낮은 히말라야 원정대’라는 이름을 걸고 자선병원을 꾸리고 있는 그는 우리 트레킹 일행들과도 절친한 사이로 이번에 현지 진료봉사를 하러 가는 의료진의 출국일정을 우리와 비슷하게 잡았다. 우리 일행도 진료소에 사용할 의약품과 항생제연고 밴드 붕대 등으로 응급용 키트를 100개 준비하여 일부는 의약품 접근이 어려운 현지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일부는 진료소에 기증하기로 하였다. 트레킹에 임하여 진료소를 지날 때 잠간 쉬면서 의약품을 넘겨주는 정도로 일정을 잡았었다.
그런데 히말라야로 들어가는 경비행기 출항시간이 조금 늦어지면서 체불룽에 도착할 즈음이 점심시간과 맞아 돌아가게 된다. 우리가 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던 먼저 도착한 하얀병원 식구들은 우리를 맞이하여 미역국과 밥으로 따뜻한 점심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김밥으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일행들은 졸지에 큰손님이 되어 버린다. 마침 진료소를 지은 산악인의 회갑맞이 생신이 바로 그 날이라 점심식사 자리가 회갑연을 겸하는 조촐하지만 뜻깊은 자리가 된다. 진료소 식구들과 인사하고 같이 식사하고 술도 몇 잔 오가는 오붓한 자리에 히말라야의 햇살은 또 왜 그리 집요하게 등살을 부리던지 트레킹을 왔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듯 모두 나른한 한낮의 게으름으로 빠져들어 버린다. 주체할 수 없이 축 늘어진 시간을 언제 만난 적이 있었던가. 바쁘고 짜여진 일상에 베어 있던 몸과 마음이 확 풀어지니 비로소 집을 떠나왔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잠시 눈을 붙이는 자도 있고 가까운 마을 주위를 구경하는 자도 있고 열심히 진료소 일에 관심을 보이는 자도 있다.
그렇게 느긋한 시간이 주르르 흐르고 드디어 기다리다 지친 가이드의 독촉에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고 배낭을 챙긴다. 진료봉사를 오신 의사분도 남체까지 우리들의 트레킹에 동참한다. 이것저것 트레킹에 부족한 물품(스틱대신 대나무지팡이, 보온장갑, 비니)들을 얻고 챙겨 함께 출발한다. 이후 3박 4일간의 동반 트레킹은 힘겨웠던 만큼 의사분과 우리 사이를 아주 각별하게 만들어 버린다. 나중에 하산하여 진료소 마당에서 무사귀환을 자축하며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사람들의 개인사를 두고 ‘스토리’와 ‘레전드’라는 묘사어를 써가며 기울이는 술잔마다 우리들과의 우정을 듬뿍 담았고 보름 정도의 의료봉사 생활이 안겨준 내적 충만에 흠뻑 젖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만남은 루크라 공항 마을에 있는 현지인들을 위한 식당을 운영하는 아낙이다. 히말라야 루크라 마을 낭떠러지의 짧은 활주로로 날아드는 경비행기는 날씨에 아주 예민하다. 다행히도 우리 일행은 들어올 때는 예정일에 올 수 있었으나 떠나는 날은 발목을 잡힌다. 새벽 7시부터 오전 내내 카트만두행 비행기를 기다렸으나 마침내 취항취소 결정을 듣는다. 다시 짐을 풀고 일정에 없던 루크라 마을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어슬렁거리며 여기저기 기웃거려보는 일 외엔 별로 할 일이 없다.
일단은 현지인들이 먹는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고 식당을 찾는다. 어린 아이 하나를 두고 있는 젊은 아낙이 물걸레질로 가게 바닥 청소를 하고 있는 집이다. 열흘이 넘도록 흙먼지에 시달린 몸으로 물청소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흡족하여 안으로 든다. 아니다 다를까 가게 안도 이제껏 보아온 어디보다도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어 아낙이 만드는 음식에 기대를 건다. 마침 배도 몹시 고픈 참이라 가게 메뉴 전부를 다 주문한다. 불을 직접 때는 화덕과 주방시설을 구경하며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맛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시간은 신기하고 신난다. 빨대로 빨아먹는 따뜻한 술 뚱바, 네팔 막걸리 창, 세르파 만두 모모, 네팔라면, 몹시 매운 네팔김치, 네팔 볶음국수에 이어 닭고기요리까지 시켜 배두드려가며 그 동안 충실히 먹지 못했던 뱃속을 채운다. 트레킹 내내 체력을 받쳐주던 한식은 제대로 먹지 못했던 사람들이 현지인이 다 되었나 현지음식 접시를 뚝딱뚝딱 비워낸다.
세 번째 만남은 부른 배를 꺼지게 할 겸 무작정 걸어 내려가 본 아래동네 무세마을 주민들이다. 봄을 재촉하는 앵초꽃 군락이 군데군데 마을길 따라 무리지어 피어있는 예쁘고 앙증맞은 자태에 끌려 가다가 마을사람들을 만난다. 모두 옷단장을 하고 모여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으며 잔치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날이 우리나라로 치면 구정에 해당하는 명절기간이라고 한다. 우연히 들른 우리들을 기쁘게 맞아들여 명절 음식을 내놓으며 친절을 베풀고 그들의 명절문화를 짧은 영어로 열심히 설명해준다. 정신세계의 안식을 지켜주는 티벳불교 사원 안으로 안내하여 조그만 상자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경전까지 꺼내 풀어서 보여주고 우리도 시주를 하라면서 저들 문화행사에 참여를 권하기도 한다. 마침 우리가 하얀병원 스텝이라는 것을 알고는 주민 몇은 질병증상을 호소하기도 하여 롯지까지 가서 필요한 약을 건네준다. 약심부름하는 현지주민과 함께 나눈 대화에서 알게 된 정보 두 가지다. 무세마을 주민 수는 100명 남짓 25가구 정도이며 그들의 주 농산물은 양배추 당근 감자라고 한다. 트레킹 도중 키친들이 만들어 내놓은 음식 중 유난히 맛있었던 감자 그 감자가 고소증에 시달리던 때의 유일하다시피 한 구휼음식이었던 것이 떠오른다.
점심식사 후 마을구경에 함께 하지 않은 일행들도 나름대로 멋진 일탈로 들어갔다고 한다. 고소증세에 시달리지 않는 몸상태로 수 천 미터 고도의 히말라야 산자락 양지바른 곳에 편히 누워 따뜻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을 친구삼아 책읽는 시간을 느긋하게 보냈다는 이야기가 가장 부럽다. 트레킹 중 책읽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기까지 하며 트레킹 짐을 꾸릴 때 책을 챙겨넣었고 꼭 그런 순간이 생기기를 꿈꾸었지만 결국 손에 들릴 책은 카고백에서 이리저리 치이기만 하는 두껍고 무거운 짐만 된다.
< 토토 하얀병원 스텝들과 함께 점심식사 / 사진 임현숙 >
< 루크라 마을 음식점 / 사진 남상진 >
< 명절을 맞이한 무세마을 여인들 / 사진 임현숙 >
< 하트 모양을 따라하는 마을 어린이들 / 사진 임현숙 >
* 티벳 히말라야 다시 만나다.
2004년에 티벳 히말라야고원을 통해 네팔로 넘어간 적이 있었다. 고도 5000미터 이상을 차에서 내려 잠시 바람을 쐬어가면서 험난한 코스를 넘어가는 일정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곳 티벳 히말라야를 만났다. 생애 처음 무욕무위(無慾無爲)가 만들어낸 자연의 위용으로부터 실려오는 시원(始原)의 바람에 황홀경으로 사로잡혀 눈물을 감출 수 없는 고개 ‘라 룽라’에 선 것이다. 그 때 남긴 졸시 한 수로 티벳 히말라야를 다시 되새겨 본다. 히말라야는 이미 그 때 깊숙이 안으로 치고 들어와 막막한 그리움으로 자리잡았다. 어쩔 수 없다. 히말라야는 언젠가 또 다시 찾아들 수밖에 없음을 안다.
히말라야 속으로
- 라 룽라에서 -
풍경의 일부로 담겨 보았습니다
말없이 억 년을 서성거리는 돌바위 하나로.
바람의 일부로 나부껴 보았습니다
끝없이 눈의 집을 떠도는 구름 한 자락으로.
하늘과 땅이 모없이 오래도록 만난
높은 고원 능성이에 오롯이 혼자 섰습니다.
두 팔 한껏 벌려 가슴을 열고
벅찬 심장 쪼개 써늘한 기운을 쐬며
이마에 하늘띠 두르고 먼 산 우러러 품어봅니다.
푸르거나 혹은 황량하거나
깎아지르거나 혹은 굽이굽이 돌거나
아득하거나 혹은 지척이거나
넓은 품이거나 혹은 깊은 침묵이거나
감히 닿을 수 없는 신령스러운 위용 속으로
무작정 걸어가는 멈출 줄 모르는 발길을 어찌하오리까.
수 천 미터 고도 히말라야의 길 아닌 길 속으로 멀어져
흔적도 존재도 아닌 소멸로의 욕구를 어찌하오리까.
아 하!
그냥 무심히 휘익 쓸려가는 바람 속의 티끌입니다.
어쩌다 우연히 투욱 떨어지는 구름 속의 빗방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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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 감동입니다.
이글로 인해서 많은 분들이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떠날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