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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동과 현대서예
김양동은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안동 김씨 가문으로서 사대부의 전통이 이어져오는 양반의 집안에서 자랐지만 어릴 때부터 한문과 서예를 익힌 것은 아니었다. 김양동도 이미 앞선 세대들과는 다른 성장 배경을 가졌다. 그의 서예관에 한국미의 추구가 나타나는 것도 그의 성장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대구로 나와서 어렵게 대학 공부를 마친다. 대학에서 국어를 전공하면서 시인 김춘수를 만나서 예술에는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웠다고 하였다. 시골 고등학교에서 국어 선생으로 재직하다가 서울로 올라온다. 순탄하지 않는 청년기를 보내었지만 서울에 와서 서예에 처음으로 입문하였다.
김양동이 서예에 입문한 것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27세 때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서울 신문회관에서 철농 이기우 문하생전을 관람하면서 강한 충격을 느꼈다고 하였다. 이기우의 서실을 찾아 간 것이 처음으로 서예를 접한 계기가 되었다. 이때가 1970년 이었다. 1970년 대는 서예는 교양 생활 중의 하나에 불과하였으므로 반드시 서예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이기우는 오세창의 제자로서 한국 전각의 맥을 잇는 인물이었다. 서예를 배우면서 자연스레 전각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의 작품에 ‘각’이 무거운 비중을 차지하면서 나타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그는 한국 전각이 예술의 분야로 편입되는 시기를 김정희로 보고 있다. 김정희가 전통 전각에 예술성을 부과하여 변화를 주었으므로 존경한다고 하였다. 그의 서예관을 변화에 두는 이유를 읽을 수 있다. 김정희의 맥을 잇는 오세창을 통하여, 이기우에게 이어진다고 하였다.
전각과 서예를 공부하면서 한문 공부를 하였고, 문자학에도 깊이 파고 들었다. 한문은 임창순과 신호열의 고전 강독을 들으면서 공부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솔직히 말해서 어릴 때부터 한문을 익힌 세대들에게는 아무래도 따라 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오늘의 서예가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한계를 보여주는 말이다.
문자학은 전각을 공부하면서 몸에 스며든 필요성으로 가지게 된 관심의 발로이었다. 박물관을 찾아다니면서 유물을 직접 관찰하고, 개인 소장품이나 전적을 접하면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문화에 흥미를 가졌다. 특히 예용태의 집에서 최순우와 주고 받는 대담을 들으면서 한국미에 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이로서 한국미의 원형 탐구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빛살 무뉘 연구’라는 논문을 통하여 우리 미의 뿌리를 고대 토기의 빛살 무뉘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후로 그의 작품에는 한국미를 재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빛살 무뉘를 바탕에 깔고 작업을 하였다.
그뿐 아니고, 한국의 전통미를 살려내기 위해서 지필묵 만이 아닌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였다. 종이도 현대의 화선지 대신에 고지(古紙)를 사용함으로 좀 더 전통미에 다가 갈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그의 작품관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김양동의 교우 관계는 서예가에 국한하지 않고 많은 한국화가들과도 이루어 졌다. 특히 황창배는 이기우의 서실에서 같이 공부하면서 아주 절친하였다. 이러한 교우 관계는 그의 작품에 회화성이 도입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80년 대에는 대학에 서예과를 창설하는데 앞장을 선다. 그의 글을 보면 원로 서예가 중에는 비웃음도 있었다고 하였으나, 서예의 발전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뛰어다녔다고 하였다. 1989년에 원광대학교에서 최초로 서예과가 설치되고, 1992년에는 대구의 계명대학교에 서예과를 설치하여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서예과 설치에 깊숙하게 관계를 하게 되는 배경에는 당시의 서예계에 깊은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예계가 설치된 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서예계는 그때와 여전한 점도 많이 남아 있다.
교수 생활을 하면서 그의 서예관을 젊은 후학들에게 전수하였고,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전통 서예에서 벗어나서 새로움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서예관이었다. 대구 지방에서 현대서예가로 이름을 얻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대구에 머무는 동안에 ‘대구 민학회’를 조직하여 전통적인 한국미를 찾아다닌 것도 그의 업적이다. 경북과 대구의 전역을 찾아다니면서 문화답사를 한 것도 그의 서예관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전통 서예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전통미를 살려내야 한다는 것이 작품관이었다. 전통미란 고답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거듭 강조한 것이 전통 서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새로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김양동을 현대 서예와 연관지우는 것은 그의 이러한 서예관 때문이다.
서예 전문지와 대담에서 ‘좋은 글씨란 어떤 글씨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답하기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잘 쓴 글씨란 전형적인 세련미가 있는 글씨입니다. 가장 고전에 접근했거나, 근접시켜 놓은 글씨이죠. 한편으로 이런 글씨들은 서예사에 기록되지 않고 흘러가는 글씨들이 많습니다. 서예사에 남는 글씨는 개성이 돋보이는 독특한 글씨로서, 그 시대에는 잘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남이 무어라고 하든 자기식으로 평생 동안 붙들고 늘어져서 자기 글씨로 관철시킨 것입니다.”
이 말은 그의 서예관을 보여주는 동시에 오늘의 서예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사숙의 교육에 의하고, 법첩이라는 규범의 틀에 매달려 있는 오늘의 서예에 대한 일침이기도 하다. 법첩 위주의 서예로 공모전의 통과에 목을 매는 현실에 대한 따끔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김양동은 단순히 작품 제작을 하여 발표하는 서예가가 아니다.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서예 교육가이므로 젊은이에 대한 영향력은 아주 크다. 그의 서예관을 한 번 더 들어보자.
“문자에는 크게 서사적 기능과 예술적 기능이 있다. 서사적 기능은 우리가 흔히 법첩에서 보는 것 같이 서사라는 조건 아래에서 미감을 최대한으로 표현하겠다고 노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강한 개성미라든지, 예술적인 전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문자를 예술의 대상으로 삼는 서예의 경우 과거와 현재의 문화적 배경이 다른 것에, 즉 변화된 문화적 배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즉 한자 문화 시대가 아닌데 해석하지 못하는 한자로 가득 채우는 작품이 과연 관람자에 어떤 의미로 다가 올 지 고민해야 한다. 관람자의 입장에서는 그 내용도 모르고, 미감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것이 오늘에 서예가 외면 받는 가장 큰 이유이다.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서 새로운 조형 미감으로 대중에게 다가갈 책무가 서예가들에게 있다.”
오늘의 서예가 위기에 봉착한 이유를 한문 문화가 퇴조한 문화적 배경에서 찾고 있다. 사회문화적인 변화라고 할 때 사회와 문화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문화가 안고 있는 모든 내용들도 변화를 한다. 한문 문화의 변화가 서예의 변화를 이끌었다는 것은 아주 적절한 지적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조형 미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에는 서예가 각자에게 그 책임을 맡겨 버린다. 김양동은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방법을 선보일 뿐이다.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민예적인 전통이다. 그는 ‘한국미’라는 것으로 답을 제시하였다. 전통적인 한국미는 문양, 색감, 그리고 민간에서 사용하였던 서간체의 한글(작품, ‘신의 기원’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1996년 공평아트센터에서 처음으로 전시회를 가졌다.(제 1회 개인전) 그의 서예론을 통해서 1990년 대의 한국 서예계를 되돌아 보자.
서단이 여러 단체로 분열하면서 국전의 주도권은 미협의 서예분과가 쥐고 있었다. 미협을 장악한 세력은 보수적인 법파이었다. 이들은 재야 서예가이었으므로 대학은 미협의 바깥에서 바라보고 있는 처지이었다. 대학의 교육 방법도 도제식 사숙 교육과 다를 바 없었다. 교수진이 아직 대학의 교육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상태이었다. 짧은 시간(4년으로는 전통적인 서예를 공부하기에는 부족하다.)에 법첩을 익혀서 능숙하게 글을 쓰기에는 무리이었다. 거기에다 고법을 익힌 후에 자신의 개성을 살려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서예과를 졸업한 후의 생활 방편은 서실 운영이 대부분이었다. 서예과 학생들도 졸업후의 생계를 위하여 공모전을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 그만큼 대학의 위상이 아직까지 자리를 잡지 못 하였다. 공모전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법첩을 익히고, 대가의 작품을 베끼는 방법이 유일하였다.
대학에서 서예과를 창설한 지 1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해서 ‘도울아트센터’에서 서예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국 신인 작가 초대전’을 열었다. 이때의 전시평을 보자.
“대학에 과를 설치한다고 해서 당장 그 어떤 공부가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처음부터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비슷한 상황이어서 구분이 어려운 상황이다. 대개는 지도한 선생의 조형사상을 있는 그대로 들고 나왔다. 중국에서 공부했으면 중국 선생의 조형사상을 들고 나오고, 나라 안에서 공부한 사람은 각자가 소속되어 있던 학교의 교수 작품을 베끼듯이 화장해서 들고 나왔다. 그것이 예술인 줄 알고 있다. 잘만 베껴도 어쩌면 귀업게 볼 수 있다. 엉터리로 베껴 놓고도 어쩌면 당당하다.
한글이 그러하고, 한문이 그러하고, 전각이 그러하고, 문인화가 그러하다. -(중략)- 한국적 서예의 정체성 확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선 작가 스스로 심리적 상황을 조형화함으로 개성 확보가 더더욱 시급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정충락. 대학 서예 10년. 새로운 패러다임은 올 것인가. 서예문화3월호. p26. 1999)
정충락의 평에서 1990년 대의 대학 서예과가 어떤 위상에 머물고 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대학의 졸업생답게 개성이 있는 작품을 제작하지 못하고 베끼기만 한다는 것이다. 베끼기에는 공모전을 지향하는 대학 졸업생의 사고 방식이 느껴진다. 대학에서 하는 서예 교육도 사숙에서 하는 교육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김양동은 젊은 후학들에게 ‘한국미의 정체성’을 확보하라고 주문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이 한국미를 찾으면서도 개성이 있는 작품이 아니고 베끼기로 일관한다는 지적은 의미가 있다. 우왕좌왕하고 있는 대학의 서예과 학생에게 하나의 좌표를 제시하였지만 역부족인 것이 당시의 서예계의 현실이었다. 그렇더라도 그의 주장은 현대서예의 형성에 이정표 역할을 하였음은 분명하다.
1996년에 김양동은 서예에 입문한지 26만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 작품은 전통 서예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줌으로 서예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미의 조형어법’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서(書), 각(刻), 화(畵)를 결합한 작품을 선 보였다. 과감한 경계 허물기를 통하여 현대적 미감으로 재구성한 조형미는 한국 서예사에서 하나의 사건이라는 평을 들었다. 당시에 김양동은 이렇게 말하였다.
“평소에 서예를 공부하면서 붓으로만 화면을 경영해야 하는 서예 자체에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관심을 가졌던 전각마저도 크기가 작은 만큼 일반인들의 감상의 대상이 되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같은 한계를 극복하고, 서예와 전각을 한 공간에 융화시켜서 회화적 세계로 확대시켜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정민영. 서예의 회화성. 미술세계3월호. 1996)
서예에서 현대서예를 지향하는 작가들의 공통된 사고에는 회화성을 도입하는 것이다. 현대서예가 태동하여 실험 작업을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에 전시회를 가졌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당시의 현대서예가 선의 추상성과 발묵에 의한 용묵법, 그리고 과도한 색채를 도입하고 있을 때 그는 회화에서 한국의 전통미를 담으려고 하였다. 현대서예가 서양회화와 , 중국과 교류를 통하여 유입된 중국 서예에 눈을 돌리는 동안에 김양동은 한국의 고유한 미를 찾아 나셨다.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예가 필묵의 선이라는 데에만 집착하여, 선에 의한다는 명분으로 서양의 추상성으로 나아간 것이 오히려 대중과 거리를 멀어지게 하였음이 오늘의 현실이다. 서예계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작가들이 김양동을 주목하고 있는 이유도 한국미라는 그의 서예론 때문이다.
김양동이 작품에서 추구하고 있는 한국미는 한국적 전통을 가진 서와 각, 그리고 화(그림)을 혼합한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제작한 작품은 이미 살펴보았다. 김양동의 작품에 대하여 일본의 서도 평론가인 오노데라게이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근원 선생의 서예는 어떤 틀에 구속되어 있지 않는 자유분방함에 특징이 있다. 그 속에는 한국적인 생활의 리듬과 한국적인 감각이 적절하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국의 자개농과 골동품, 민화같은 민예물의 정서가 안바침되어 있는 것 같다.(오노데라게이지. 오노데라게이지 초청 토론회. 공영아트센트2층. 15.2.1996)
주목할 만한 지적으로는 민화를 언급한 것이다. 민화는 회화적 요소가 강하면서도 한국적 정서를 아주 짙게 포함하고 있다. 박용숙도 이 지적에 동조하였다.
1990년 대에 현대서예를 지향하는 작가들이 의미를 가진 문자를 해체하고 추상성으로 나아갔다. 김양동은 이에 반하여 문자의 해체가 아닌 민화적인 이야기를 담으려고 하였다. 이것은 문자적 의미를 오히려 확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현대서예가 외부에서 유입한 미이론을 추종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한국 고유의 미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상기하면 섣불리 문자의 추상성을 찾아나선 유파의 작품이 세계화라는 물결을 타지 못하고 시들어져 버린 것은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김양동은 대학의 젊은 작가군이라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현대서예라는 서예의 신사조가 거세게 몰아치던 시대를 몸으로 직접 체험한 작가이다. 그에게 배운 후학의 작가들은 알게 모르게 그의 영향을 받았다. 김양동이 현대서예에 깊은 연관성을 가지는 이유이다. 김양동을 서예사라는 맥락에서 자리를 매기다 보니 자연히 서예교육자로서, 서예에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작가로서 현대서예와 깊은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김양동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각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전각도 과거에는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하였다. 현대에는 전자 결재가 생활화 되면서 실용적인 용도는 사라져 가고 있다. 한문 서예와 비슷한 운명의 길을 걷고 있다. 전각은 작은 면에 글자를 새기므로 문장보다는 문자적이다. 문자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칼로 새겨야 하는 장인적인 기술을 필요로 한다. 작가 자신이 장인과 차이를 두기 위해서도 직접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각을 칼로 직접 새긴다는 이유로 붓을 상용하는 서예가들이 소홀히 하는 경향도 있다.
전각은 면의 크기가 작으므로 감상자의 시선을 끌기에는 모자라는 점이 많다는 그의 언급은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는 모색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김양동의 작품에서 각(刻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각과 황토를 이용한 토판 만들기, 그리고 민화적 요소까지 가미함으로 1990년 대에 현대서예룰 추구한 다른 작가들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양동을 따라가 봄으로 1990년 대의 현대서예를 관찰해 볼 수가 있다.
1990년 대의 한국 서예는 아주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통 서예가 미협의 공모전을 주관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서예의 흐름을 규범적인 틀 속으로 가두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전통 서예의 규범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양동은서예의 현대성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술작품에 있어 현대성이란 결국 시대 미감을 드러내면서 현대인들의 감성에 와 닿는 작품이다. 서예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을 살면서 생각이나 작품은 일-이 천년 전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다면 결코 작품에서 현대성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전승은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고, 계승은 본질은 변하지 않는 가운데 시대에 맞게 변용시켜 전통에 생명력이 있도록 창조해나가는 것이다.”(김정환. 필묵의 황홀경. p211. 다운샘. 2007)
이 말은 김양동의 서예관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서예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의 추상성을 강조하여 문자를 해체하는 현대서예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통을 생명력있게 창조시킨다’라는 것은 외부의 미학 이론을 무조건 추종하지 말고 한국의 전통미를 작품에 살리자는 것이다
김양동 작품의 특징을 들자면 강한 채색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은근한 색을 주장하면서 황토색을 주로 사용하였다. 노골적으로 짙은 채색을 부정하는 언급도 하였다. 2005년에 가진 뉴욕 전시회의 작품 경향도 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젊은 작가들이 회화적 발상을 통하여 대중친화적인 작품을 제작하는 것에서 한국 서예의 미래를 보고 있다. 문인화가들이 서예적 훈련이 부족한 점도 꼬집고 있다. 이것은 서예와 문인화가 분리되는 시대 상황에서 언급한 것이다.
후학들은 그의 서예론을 이어받더라도, 그를 뛰어넘어야 할 과제를 물려 받았다. 한국미는 한국적인 정서를 유발한다. 한국적인 정서를 화두로 천착해보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문자를 해체하여 추상성으로 나아가는 실혐은 1990년 대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시도하였지만 정착하지 못한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렇다면 서사성을 가지면서, 한국적 정서를 유발하는 것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서사성을 가지면서도 회화성을 지니는 것으로는 민화도 한번 고려해 볼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