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정선군의 함백 새골마을. 행정구역상으로는 신동읍 조동 6리다. 수십 년간 이곳은 국내 석탄 산업의 요충지였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신동읍의 인구는 2만5000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93년 함백광업소가 문을 닫은 뒤 인구가 줄기 시작했다. 현재 이곳의 인구는 4000여 명에 불과하다. 광산을 찾아 몰려왔던 사람들은 이곳에서 늙었고, 그들의 자식은 일자리를 찾아 도회지로 빠져나갔다. 이곳을 떠난 가구 중 적지 않은 수가 이혼했다. 자식이 남긴 손자들은 고스란히 할아버지·할머니의 몫이 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손(祖孫)가정’이 신동읍에만 20가구 정도다.
김모(73) 할머니는 50년 전인 58년 함백으로 시집왔다. 10년 전쯤 아들이 덤프 트럭을 운전하다 사고를 낸 뒤 재산을 모두 날렸다. 진폐증으로 사망한 할아버지의 보상금마저 까먹었다. 며느리는 가출했다.
99년 아들은 딸 지예(13·당시 4살·가명)와 지철(14·당시 5살·가명)이를 어머니에게 맡겼다. 아들은 “돈 벌어서 금방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연금과 밭일을 해 받은 품삯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그러나 ‘까막눈’인 할머니는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자기 일을 하다 보니 방과 후 아이들에 관심을 쏟을 수가 없었다.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손녀 지예가 취학 이후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도벽이었다. 할머니의 지갑뿐만 아니라 이웃집의 돈도 훔쳤다. 학교 담임 선생님이 “훔쳐간 돈을 돌려받으러 왔다”고 집에 찾아온 것만 세 번이 넘었다. “너 죽고 나 죽자”고 지치도록 때려 봤고, 경찰서에도 데려갔지만 그때뿐이었다. 학교도 마을도 지예를 포기했다. 지예는 철저히 고립돼 갔다.
2005년 8월 이 마을에 위 스타트(We Start) 운동본부의 정선센터가 도청·군청의 후원으로 문을 열었다. 저소득층 아동의 복지와 교육, 그리고 건강을 지원해 ‘공정한 출발’을 하도록 돕는다는 것이 이 운동의 취지였다. 이 마을이 고향인 김동규(40) 위 스타트 센터장은 사회복지사들과 함께 가정 방문에 들어갔다. 취약 아동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김 센터장은 할머니를 찾아 “도벽을 치료해 건강한 아이로 자라게 해주자”고 설득했다. 그는 “방에 걸린 지예의 시를 보고 좋아질 거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지예가 지은 ‘그리움’이란 시의 내용은 이랬다.
‘산으로 새를 날려 보냈다/ 산쪽으로 자꾸 몸이 쏠린다/ 그리움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다’.
사회복지사들은 상담센터와 병원을 수소문했다. 좋은 상담 기관을 찾기 위해 경기도 성남까지 방문했다. 방과 후에는 학원에 다닐 수 있도록 학원비를 지원했다. 사랑과 관심을 받은 지 1년, 지예의 도벽은 말끔히 사라졌다. 성적은 상위권으로 올랐다. 지예는 “작가가 꿈”이라고 말한다. 교내뿐만 아니라 정선군 글짓기 대회에서도 입상했다.
위 스타트 센터는 이곳의 모든(19가구) 조손가정을 지원한다. 열 살·여섯 살배기 두 손녀를 홀로 키우는 정모(72) 할아버지는 “두 손녀가 이렇게 클 수 있다는 게 기적”이라고 했다. 2년 전 아들이 두 손녀를 남기고 갔을 때만 해도 할아버지는 막막했다.
아이들은 극도의 대인기피증을 보였다. 그러나 센터의 사회복지사들이 매일 집을 방문해 아이들을 보살폈다. 인근 학원과 연계해 아이들에게 피아노 교육을 시켰다. 이렇게 아이들은 새롭게 출발(Start)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에는 다문화 가정도 20가구나 된다. 센터에서는 매주 외국인 며느리를 위한 한글 교실을 연다. 자녀들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원봉사자를 통한 보육까지 책임졌다. 부담 없이 교육에 참여하도록 지원한 것이다.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은 언어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센터는 이들을 무상으로 도왔다. 필리핀에서 9년 전 시집 온 조모(31)씨는 “다섯 살까지 말도 못하던 아들이 이젠 곧잘 말을 한다. 위 스타트 센터가 없는 삶은 생각하기조차 싫다”고 말했다.
신동읍에는 328명의 아동(0~12세)이 있다. 이 중 3분의 1 정도가 취약한 환경 속에서 자라고 있다. 김 센터장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아이들은 완전히 방치된 상태였다”고 전했다. 다양한 방과 후 학교를 통해, 가정 방문을 통해, 보건 프로그램을 통해 위 스타트 센터는 아이들의 삶 속에 깊이 개입했다. 그런 활동이 폐광촌 아동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 아동의 삶과 함께 지역 사회의 미래도 변하고 있었다.
정선=강인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