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위가 보신탕 사준대!
남상선 / 수필가
나는 초임지 덕산고등학교에 있을 때 결혼을 했다. 신혼살림 차린 곳이 처가와 멀지 않은 곳이라 그랬던지 우리 부부는 장인 장모 사랑을 과분할 정도 많이 받았다.
처가는 우리가 사는 덕산에서 약 6㎞ 떨어진 거리에 있었고, 장인께서 덕산국민학교(현재 덕산초등학교)에 재직하셨기 때문에 출근하시는 아침마다 들르셨다.
장인께서는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셨는데 아침마다 자전거 짐바리에 꼭 무엇인가를 실코 오셔서 내려놓곤 가셨다.
아마도 신혼살림 풋내기들이라 걱정이 되셨던지 하루도 거르는 날 없이 출근 때마다 챙겨다 주셨다.
열무김치며 고추장・된장 단지에 철따라 맛있는 간식거리에다 내가 좋아하는 머위랑 달래랑 오이랑, 풋고추, 호박, 가지, 고구마, 감자 등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부모의 마음은 자식 걱정이 평생으로도 안 되는 것 같았다. 갖다 놓은 박스와 검정 비닐 봉투엔 장인 장모님의 정성과 사랑이 바리바리 싸인 채였으니 감히 자식들이 부모 마음을 어찌 감히 헤아릴 수나 있으랴!
우리 집은 처가의 유용한 것들이 총동원돼 와서 자리다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것이 우리 집이고 처가의 광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다가 우리는 대전 들어온 지 1년 만에 장인이 돌아가셨다. 청천벽력과 다름없었다. 그래도 장모님은 꿋꿋하게 잘 버티셨다. 연륜이 만들어 준 위력이었던지 하여튼 시름을 잘 달래시는 것 같았다. 마당가 밭뙈기에 고추며 콩 시금치 배추 상추 무를 심어 가꾸는 낙으로 외로움을 달래시는 것 같았다.
이렇게 소일하시는 장모님이 너무나 안 돼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대전으로 들어와 교직 생활하는 동안에 처가엘 자주 갔다.
그냥 자주가 아니라 한 달에 한 번 꼴로 20년 세월이었으니 240변은 족히 다녔으리라. 처가에 다니는 빈도수가 보통 사위들 평생 다니는 횟수보다 많을 정도를, 중년 나이에 나는 다 다닌 것이다.
자주 가는 처가이어서 그런지 대문 뒤에 있는 흰둥이 진돗개도 짖지 않았다.
처음엔 그렇게도 무섭게 컹컹 짖어대던 진돗개도 주인 같은 손님이어서 그런지 짖질 않았다. 하도 자주 가니까, 타고 가는 승용차 소리만 들어도 우리를 알아보고 짖지를 않았다. 개가 영물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처가에 자주 간 이유라면 장모님 혼자 외롭게 사시는 모습이 너무 안 돼 보여서 이었고, 효녀라 할 수 있는 아내의 마음엔 늘 장모님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는 가난한 7남매 중 장남인 내가, 시집온 아내를 너무 고생시킨 죄책감과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라면 아내가 가난한 7남매 중 장남한테 시집와 숱한 고생 다 하면서도 얼굴 한 번 찡그리는 일없이 마음 편케 해준 내조를 잘해준 때문이었다.
아내의 헌신적인 희생에 대한 보상은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런 아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고 싶었다. 늘 고마워하는 마음에서 아내를 즐겁고 마음 편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내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다도 절한다는 얘기가 남의 얘기가 아닌 것도 같았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장모님의 외로움을 달래드리기 위해 매달 빼놓지 않고 처가엘 갔다. 다른 때는 별로 하지 않던 부부동반 나들이가 달마다 이루어졌다. 그때마다 아내는 평상시 지었던 모나리자 미소가 보름달 갈은 후광으로 얼굴에 번지곤 했다.
아내가 말은 하지 않았어도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마음을 표정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장모님 뵈러 갈 때는 그냥 갈 수가 없어 철마다 나오는 과일 조금에다가 쇠고기 2근 정도를 샀다. 거기다 장모님 좋아하시는 단팥빵 몇 개에 롤케이크 한 개, 어버이날은 카네이션 한 송이에다 신사임당 사진 지폐 몇 장이 들어 있는 흰 봉투를 들고 가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우리 부부 마음은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 그 기쁨은 값어치로 헤아릴 수 없는 무한대였다.
장모님이 보신탕을 좋아하셔서 여름철에 갈 때에는 빼놓지 않고 보신탕을 사드리고 왔다. 보신탕 사드릴 때에 장모님의 좋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떠오른다.
보신탕 잡숫는 것보다도 그 알량한 교사 사위 자랑하고 싶어서
“ 우리 사위가 보신탕 사준대! ”
“ ”
“ 이 사람이 바로 우리 큰사위 고등가 선생님인데. 우리 사위가 보신탕 사준대. 동범 엄마도, 영신이 할머니도 이따가 같이 가자구요. ! ”
이러시던 장모님이 가신 지 벌써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세월은 그렇게 됐다지만 장모님의 살아계실 때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라 날 어렵게 한다.
위암 수술하시고 퇴원해서 우리 집에 6개월 모실 때 그렇게 미안해하시고 고마워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받은 사랑 천분의 일도 안 되는 걸 가지고 왜 그러셨는지 모르겠다.
며칠 전 내가 무슨 연유였는지 입맛이 없었다. 그래 장수촌이란 보신탕집에 가서 탕 한 그릇을 사 들었다. 보신탕을 들다 보니 탕 좋아하시던 장모님 생각이 났다.
“ 우리 사위가 보신탕 사준대! ”
하시며 사위 자랑에 신바람이 나셨던 장모님 모습이 떠올랐다.
눈앞엔 보신탕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옛날 장모님 모시고 먹던 그 느낌이 아니었다. 눈앞의 탕은 옛날 장모님과 함께 들던 같은 음식이련만 느낌은 왜 이리 다른지 몰랐다. 장모님이랑 아내랑 동범 엄마랑 영신이 할머니랑 땀 흘리며 맛있게 먹던 그 음식 맛은 어디 갔는지 모르고 들었다.
사위 자랑을 안주삼아 하시던 장모님의 너스레가 곁들이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꼭 있어야 할 두 분 자리가 텅 비어 있어서일까?
유난히도 후텁지근했던 그날 처가 근처 허술한 탕 집에서 먹던 보신탕엔, 세상에서 제일가는 즐거움이, 흥이, 웃음이, 한 소쿠리였었는데,
오늘 이름 있는 탕 집에, 가짓수도 많은 반찬에 맛있는 탕인데도, 왜 이리 느낌 없이 잠잠한 기분인지 모르겠다.
보신탕 그릇엔 한이 절반, 허탈감이 절반으로, 보신용 고기는 한에 묻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것은 소중한 두 자리가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우리 사위가 보신탕 사준대 ! ”
“ 여보, 힘내요! 당신 곁에는 우리가 있잖아요? ”
다시 들을 수 없는 이 말을 하던 주인공들이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었을 게다.
거기다 주인같이 반겨 주었던 흰둥이까지 보이질 않게 되었으니
제 아무리 맛이 좋은 탕이라도 제 맛이 날 수 있겠는가?
< 우리사위가 보신탕 사준대 ! > 하시며 너털웃음으로 맥질하던 그 날엔 마냥 즐거움에 어깨 힘까지 생겼는데 오늘은 왜 이리 가슴을 후벼 파는 아픔인지 모르겠다.
< 있을 때 잘하라. >는 그 한 마디가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가슴이 둘이고 셋이라도, 천 년 만 년 가는 마음의 대못으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그 뭐라 해도 마음 아픈 이유는 내 철저한 고아가 되어서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대학 1학년 때 임종도 못한 채 보내드렸고, 아버지 가신 길 슬퍼했던 그 날도 20년을 훌쩍 뒤로했다.
그 아깝고 장한 효자 — 장인 —가신 지 강산이 4번이나 바뀌었으며, 보신탕 사준 사위 자랑하시던 장모님 가신지 벌써 해를 달리했다.
거기다 사고친 내 반 학생 문제로 고민하고 힘들어 하고 있을 때
“ 여보, 힘내요! 당신 곁에는 우리가 있잖아요? ”
하던 내 반쪽마저 세상을 달리 했으니 난 이제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5월 8일 어버이날은 금년도 어김없이 다가오는데, 카네이션 한 송이 달아드릴 그 누구도 없으니 이 철저한 고아는 이제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쳐다봐도 벽밖에 천장밖에 없다.
나는 어떡하지!
첫댓글 남달리 애틋한 장인, 장모님의 사랑, 사모님에 대한 그리움 등. 이 모든것이 인연의 소중함과 가족애가 충만하신 남선생님에서 비롯되었음을, 감동의 글 감사합니다.
영원한 존재는 없겠기에 있을 때 잘하라는 경구를 마음에 새기고 살지 않으면
만시지탄의 후회를 감당하기가 어렵다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분에 넘치는
찬사 더 열심히 잘하라는 격려로 알고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선생님 많이 고맙습니다.
올 여름 몸보신 보신탕 대접 해드려야겠는데
좀 걱정됩니다 너무 하늘 만 처다보고 계시는건 아닌가싶어. 눈물바람 내시면 ...
사위사랑은 장모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데
바쁘신 중 에도 좋은 글 쓰시는 작가님께 경의를 표 합니다
늘 잊 않고 성원해 주시는 색종이 선생님 감사합니다. 보신탕 먹어 힘나는 것보다
더 힘이 나는 마음 주시어 감사합니다. 보은하는 글을 쓰도록 땀흘려 보겠습니다.
장인, 장모와 부인을 사랑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눈에 보입니다
참으로 눈물나는 이야기네요
언젠가는 가야할 길이지만 보신탕
한그릇 놓고 허전해 하시는 선생님의
마음 안타깝네요
남은 가족들과 선생님
좋은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네요
밝은 글로 모셔야 할 텐데 어떻게 쓰다보니 본의 아닌 글로 마음
어둡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변함없는 격려 사랑 감사합니다.
여행도 어디를 가느냐보다는 누구와 함께가느냐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밥 한그릇 먹는것도 유명한 집 보다는 누구랑 가서 맛있게 먹느냐가 중요하지요 ~ 장모님의 그 좋어하시던 모습이 생각 많이 나시겠어요 ~~ 장모님께 그리 잘하셨으니 후회는 없으시겠어요 ~~
임의 말씀대로 무엇을 하더라도 누구랑 같이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신탕으로 새삼 느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늘 후회 속에 사는 사람이라
앞으로 살아갈 날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꿋꿋한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서미라 천사님 많이 감사합니다.
"우리 사위가 보신탕 사준대! 같이들 가자고~" 하시며 동네 사람들을 차에 태우며 좋아하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저도 떠오르네요. 외할머니도 하늘에서 엄마랑 외할아버지랑 외삼촌이랑
흰둥이랑(껌둥이가 아니라 흰둥이였어요^^;) 지켜보고 계실 거예요. 너무 옛날 추억에 묻혀 힘들어하지 마세요. 아빠 곁엔 저도, 다인 아빠도, 할아버지 돈 많이 쓰셔서 거지되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다인이도 있잖아요.
우리 딸아 곁에 있어 힘이 돼 주어 고맙다. 간식거리 조금 사 주는 걸 보고
할아버지 거지 되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깜찍한 우리 외손녀 다인이
때문에 행복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사랑하는 내 딸 너의 모든 행동거지가
너의 엄마 많이 닮아서 많은 위로가 된다. 우리 딸아 고맙다. 이 아빠 더욱
귿세게 살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항상 가슴이 따뜻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는 글, 감사합니다. 조금이라도 건강하실 때 따뜻한 음식, 사랑하는 마음을 좀 더 보여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왠지 부끄럽고 부족한 제 모습에 고개가 숙여지게 됩니다.
말씀이나 댓글로 미루어 보아 효자로 사시는 선생님 같아서 마음이 흐뭇합니다.
< 있을 때 잘해 >라는 평범한 말을 경구로 삼아 더욱 효성스런 마음을 따뜻한
가슴으로 열어 드렸으면 합니다. 이형복 선생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