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명동처럼 마산의 창동은 한 시대 마산의 상징이자 중심이었다. 명동이 서울의 패션 메카였듯이, 창동도 마산의 패션 메카였던 것이다. 시기는 대략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유명 브랜드가 출현하기 전까지로 볼 수 있다. 옛 시민극장을 기점으로 해서 남성동까지와 창동 사거리 전후좌우, 그리고 시민극장 맞은편 골목 주변 등은 가히 '패션의 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의상실이 많았단다. 좀 호들갑스럽게 말하자면, 손바닥만한 지역에 서른 곳도 넘는 의상실이 성업 중에 있었다니 창동을 '패션의 거리'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또한 당시의 마산 패션은 서울 뺨칠 정도로 그 수준도 높았다니, 마산에 돈 많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멋쟁이들이 많았기 때문일까.
1973년 연극 〈부부〉 공연의 한 장면. 왼쪽부터 김병수, 필자, 최영화.
.필자가 의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는 1972년경부터다.
경남대 캠퍼스가 완월동에 있던 시절, 필자는 '부부(夫婦)'(유치진 작)라는 연극을 경남대 완월강당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 그 작품을 하면서 필자의 매형 결혼양복을 빌려 입고 무대에 섰던 것이다. 무대장치비도 부족한데 하물며 의상비는 거론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몸에 맞지도 않는 남의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섰으니 극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1972년 무렵 당시 경남대학에는 의상학과가 있었다. 학과 이름만 들어도 짐작이 가듯이 당시의 의상학과는 여학생들만 다니는 학과였다. 그런데 그 의상학과에 특이하게도 청일점 남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는 영화배우 뺨치는 미남으로 캠퍼스 안에서도 보란듯이 언제나 예쁜 여학생을 대동하고 다녔기에 뭇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필자도 연극한답시고 제법 폼을 잡고 다녔지만 그 친구를 당할 수는 없었다.
극단 세림기획의 연극 팸플릿(1980. 10.25).
필자가 의상 이야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 1호 '노라노'(본명 노명자)에 관한 신문기사 때문이다. 올해 팔순이 넘은 그녀의 인터뷰 기사는 시사(示唆)하는 점이 많았다. 영화계에서 그녀가 만든 의상을 가장 먼저 입은 사람이 바로 마산출신의 스타 조미령이라는 사실도 그 중의 하나다. 알려진 대로 조미령은 영화배우가 되기 전에는 연극배우였다. 한국 최초이자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가 조미령이란 이름을 거론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노라노는 조미령과 동갑(84세)이라고도 했다. 노라노의 어머니도 한국 최초로 양장을 만든 사람이라고 했으니 과연 피는 못 속이는가 보다.
노라노의 회고에 의하면, 영화배우 엄앵란, 도금봉, 최은희, 김지미, 가수 펄 시스터즈, 윤복희 등이 그녀의 단골이었고, 심지어 박근혜의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의상을 만들기도 했단다. 예인(藝人)이 따로 있는가. 그녀가 바로 예인이다. 이 시대 패션계의 최고 예인인 것이다. 우리 마산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사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의외의 소득을 얻었다. 당시에 복장학원을 운영했던 정영희 원장과 의상실을 했던 공혜숙 사장을 만났기 때문이다.
40년 가까이 마산에서 'BB(Best Booming) 복장학원'을 운영해 왔다는 정영희 원장은 수필가이기도 하다. 서울 출신인 그녀는 남편을 따라 마산으로 온 후부터 죽 복장학원을 운영해 왔단다. 1971년경 마산 3·15 의거탑 부근에서 시작했는데 그녀의 문하를 거쳐 간 제자들이 3000여 명은 족히 된다는 회고는 그녀가 패션계의 고수임을 증명해 주는 단적인 예다. 당시에 마산에는 복장학원이 세 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패션계가 호황을 누렸다는 말이다.
공혜숙 사장은 1973년경 패션계에 입문한 뒤, '김지영 의상실'을 운영했단다. 그녀도 'BB 복장학원' 출신이며 서울에서 디자인을 배워 와서 직접 옷을 만들었다고 한다.
창동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의상실 면면을 살펴본다.
'귀빈'(옛 시민극장 밑), '고은'(옛 시민극장 밑), '뉴스타일'(옛 시민극장 밑), '김지영'(현 아이스크림집 '배스킨 라빈스'), '지지'(옛 시민극장 밑), '선인장'(옛 태창라사 2층), '영'(옛 태창라사 옆), '엘레강스'(옛 시민극장 앞 2층), '모드'(고려당 맞은편), '왕비'(옛 시민극장 맞은편), '피스'(옛 상업은행 옆), '소정'(부림시장 염색골목), '셀부르'(옛 오행당 밑), '필', '뉴 테라'(현 '빠리바케트'), '롱비취'(창동 새골목), 그리고 전통찻집 '다전' 골목의 '하늬', '노정', '세니오라' 등등 실로 그 이름만 들먹이는데도 숨이 찰 정도다.
당시는 의상실이나 양복점에서 옷을 맞춰 입던 시절이고, 옷을 맞춘 뒤에도 가봉이다, 최종 가봉이다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완제품 의상을 손에 쥐게 되면 얼마나 가슴이 벅차던지…. 또 그 당시는 결혼을 하면 양복 한 두 벌은 맞추던 시절이고, 예단(禮緞)으로 양복지(洋服地)와 양장지(洋裝地)를 주고받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 옷감으로 의상실이나 양복점에서 옷을 맞춰 입었음은 물론이다.
오늘날에는 의상실을 찾는 여성들이 거의 없지만, 옛날엔 의상실이 아니면 고급 옷과 멋진 옷을 맞춰 입을 수가 없었다. 가히 의상실 전성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전성시대도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으니 어찌 서운하지 않으랴. '패션의 거리' 창동에서 느낀 소회의 일단(一團)이다.
/이상용(극단 마산 대표)
'패션의 거리' 창동에 서서…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84335 - 경남도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