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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04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사무엘상 17장 45절-49절
로마 카토릭이 우리 기독교와 다른 것 중의 하나는 성(聖) 유물 숭배 사상입니다. 거룩한 물건 즉 성 유물은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십자가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로마제국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는 열렬한 기독교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AD 325년 예루살렘을 방문한 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곳을 발굴하다가 땅속에서 십자가를 발견했습니다. 그때 곁에 있던 한 여인이 한 다리를 절고 있었는데, 그 여인이 십자가에 손을 대자 다리가 깨끗하게 회복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믿게 된 헬레나는 그 곳에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의 주요 부분을 교회 안에 보관케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 중 일부분은 비잔티움에 세워진 아들 콘스탄틴 황제의 입상 속에 넣게 하였고, 또 다른 부분은 로마에 세워진 ‘성 십자가 교회’에 보관토록 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 십자가의 조각을 구입하려는 열풍이 불면서 희소성 때문에 예수님의 진짜 십자가에서 나왔다는 수많은 나무 조각들이 금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비싼 값에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 많은 나무 조각들을 다 합친다면 십자가를 수도 없이 만들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카토릭에서는 그 나무 조각들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대신 그것을 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하나의 진정한 십자가로부터 많은 십자가가 가능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무 조각 자체에 있다면 우리는 그저 난감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2000년이나 지난 그 십자가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그러한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정말 불행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참된 의미와 가치는 예수님이 달려 죽으심과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에 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시체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구원의 표징이요, 소망의 상징이요, 영원한 생명의 증표요, 우리가 지고 살아야 할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왜 이런 것에 마음을 두며, 연연해하는 것입니까?
상식적으로도 자기들이 들고 있는 것이 진품이 아닌 것을 잘 알면서도 이것에 기대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두말 할 것 없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미래에, 그리고 해쳐 가야할 상황에 자기 힘만으로는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엔가 의존하고 싶은데, 바로 대체할만한 마땅한 것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의존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 못된 기대입니다. 그냥 마른 나무 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2015년은 이렇게 밝았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북경의 날씨처럼 짙은 안개 속에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사방을 잘 분간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가장 커다란 공포가 있는데,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전혀 방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의지할만한 것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전쟁에 비유합니다. 그 만큼 예측 불허이기 때문입니다. 그 전쟁에 소년 다윗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볼이 발그레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러한 그가 전쟁에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거인 골리앗 앞에 섰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2015년이라는 365일 앞에선 우리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거대한 상대와 어떻게 싸워 이겨야 할지를 다윗에게서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골리앗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갔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5절 말씀입니다.
골리앗은 신장이 여섯 규빗 한 뼘입니다. 한 규빗이 약 44.5cm정도 되니 267cm, 한 뼘이 약 30cm이니 합치면 거의 3m에 달하는 거대한 인간입니다. 제가 공항전도를 할 때 전직 천안문의 수문장이었다는 사람을 보았는데, 237cm정도 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의 어깨에도 차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골리앗의 위용을 짐작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런 거인을 향해 군복과 갑옷과 투구를 쓰기도 힘에 겨운 어린 소년 다윗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가노라”이렇게 당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하려고 나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모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을 수 없다고 외치는 당돌한 다윗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앞에 놓인 많은 날들은 실로 골리앗보다도 더 상대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입니다. 눈을 가리고 암흑 속에서 두 주먹을 휘두르는 형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 앞에서 언제나 나를 가로막고 시마다 때마다 조롱하며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사탄을 생각해 봅시다. 어찌 골리앗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탄의 능력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사탄은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탄의 고수가 부하 사탄에게 성도와 교회를 넘어뜨리는 비법을 전수했다 합니다. “너희들은 절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음과 핍박으로 넘어뜨리려 하지 말라.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더욱 하나가 되고, 기도에 열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내가 권하는 비법은 무조건 잘한다고 칭찬해라. 그러면 자기들이 잘 난줄 알고 서로 잘난 체 하다가, 불평하며 서로 싸우고 결국은 철저하게 분열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손도 쓰지 않고 승리할 것이란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명답이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경우에 교회나 신앙인은 외부의 적 때문에 망하거나 주저앉지 않습니다. 도리어 외부에서 압력과 핍박이 닥치면 서로 기도하면서 하나가 됩니다. 절대 무너트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서로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끼리, 가까운 사람들끼리, 그리고 서로 믿는 사람들끼리,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끼리 하찮은 것을 가지고 내가 옳다고 하다가 서로 원수처럼 헤어지는 경우를 너무 많이 바라봅니다. 사탄의 간교한 장난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불확실한 미래와 상황, 그리고 사탄의 집요한 공격 앞에서 우리는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어야 합니까? 바로 이때 다윗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까? 그러면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아 물러가라!” 고 외쳐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 하였습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46절과 47절 말씀입니다.
오래 전에 전설처럼 알려진 ‘시라소니’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나중에 장로님이 되셨는데, 본명은 이 성순 씨입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분의 체격이 당시에 김 두한 씨 같이, 그리고 이 정재 씨 같이 크거나 건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저 160cm가 조금 넘을 정도의 키에 그다지 우람하지 않은 체구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박치기에 걸리면 아무리 커다란 사람도 헌집 벽 헐리듯이 주저 않고 말았습니다. 오죽하면 이 정재 씨 본거지에서 당시에 내 노라 하는 주먹 60여명과 혼자서 싸울 수 있는 정말 ‘시라소니’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에게 그렇게 강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너무 간단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기가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외치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너무나 당당합니다.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에게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해답은 그의 외침에서 나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싸우는 것이니 분명코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어 주실 것이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질문하겠습니다. 단지 전쟁만 여호와께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누가 주관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을 위해 사십니까? 아니면 먹든지 마시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십니까? 여러분의 바벨탑을 쌓기 위해 땀을 흘리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삶의 터전에서 애를 쓰십니까? 만일 여러분 자신만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신다면, 결코 성공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불가능해 보이는 어떤 것도,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도 주님을 위해 하신다면 결코 두려워하거나 과소평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하나님 스스로 우리에게 증명해 보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최선을 다해 싸웠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려지니라.” 48절과 49절 말씀입니다.
다윗이 싸우는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골리앗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내 노라 하는 장수들도 자기를 보고 벌벌 떠는데, 칼도 아니고 막대기를 들고 서 있는 애숭이 다윗을 보고 “나를 개로 아느냐?”고 어이없어 합니다. 그러나 너무도 당당하게 대들므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을 내려고 놋 단창을 들고 나갑니다. 그때 이를 본 다윗도 빨리 달리며, 주머니에 있는 돌을 들어 물매로 던져서 정통으로 이마를 맞힙니다. 아니 맞힌 정도가 아니라 이마에 박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거인은 땅에 고꾸라지고 맙니다. 얼마나 통쾌한 승리입니까? 속이 다 후련합니다. 그러나 누가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이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을 통해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난제들과 상황과 그리고 간교한 사탄과 싸워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평소에 무엇을 준비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주여! 주여! 한다고 만사형통입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이 ‘알라딘의 마술램프’처럼 문지르기만 하면 무엇이든 척 척 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준비된 자를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생각에 세상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험난한 난제들을 이겨내는 가장 효과적인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평소에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을 내 삶에 철저하게 적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참으며, 끝까지 견디며, 끝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기는 다윗의 말처럼 칼과 창과 단창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사십 일 금식을 하고, 사탄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던 예수님께서 사탄을 무엇으로 물리치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 말씀이 평소에 나를 주장하지 않으면, 적을 향해 아무것도 던질 수 없습니다. 그냥 무기력하게 적의 공격을 온 몸으로 막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지없이 백전백패입니다. 그러나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과 인격 속에서 살아 역사한다면, 좌절하거나 교만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 필사를 한번 시작해 보십시오. 읽기만 하는 것보다 쓰는 것이 정독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기도합시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방법을 주십니다.
저는 걱정이 있고, 그래서 잠이 오지 않으면, 잠자리에서 뒤척이지 않고 곧 바로 일어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셔서 저를 깨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현존하고 계시기에 나의 형편과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에게 털어 놓는 기도, 그 방법은 최선의 방법이며, 최고의 방법이며 가장 강력한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희망보다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살이 더 먹었으니 건강과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제난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빛의 속도로 지나갑니다. 미쳐 준비되지도 않았는데 추스를 기회조차 주지 않습니다. 이럴 때 정신 차려야 합니다.
제주도에 가면 은어 잡이가 아주 흥미 있는 것입니다. 은어를 그물로 잡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소위 홀치기란 낚시로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은어들은 새끼 때 바다에 살다가 다음해 이른 봄이 되면 맑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 상류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먼 바다에서 강까지 왔건만 그들의 생은 너무 허무하게 무너집니다. 문제는 미끼입니다. 지렁이라도 한 토막 먹고 잡히면 그나마 다행이겠는데, 어이없게도 미끼는 쇠붙이입니다. 태양 빛을 받으면 번쩍거리는 쇠붙이에 현혹이 되어 가야할 곳도, 해야 할 일도 잊은 채 그것을 물었다가 파멸이 되고 맙니다.
올해는 절대 한 눈 팔지 맙시다. 휘황찬란한 허상을 침을 흘리며 바라보지 맙시다.
다윗처럼 어떤 어려움과 난제와 상대가 있다 하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기가 죽지 맙시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호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 분의 이름을 위하여 더욱 진실하게 삽시다.
우리의 목표를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고 전하기 위하여, 그리고 말씀과 기도로 세상을 이기기 위하여 살아가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전쟁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지난 해 12월 30일에 청송교도소(경북 북부 제 1 교도소)에 가서 전했습니다.
“형제들의 지난 전과사실은 전반전이고, 수감되어 있는 지금은 하프 타임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다시 힘을 비축하고 신앙으로 다져서 만기 출소하게 되면 그 때부터 후반전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러니 후반전은 형제들 혼자 하지 마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장애물을 만나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내가 너무 일찍 포기하는 것은 아닌가?”
성공과 실패는 이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실패한 사람들이 너무 현명하게 일찍 포기할 때,
성공한 사람들은 아직 미련하게 참습니다.
올해는 다윗처럼 삽시다. 담대하게, 당당하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갑시다.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증거하며 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