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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8월 20일 화요일
[(백)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베르나르도 성인은 1090년 프랑스 디종 근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시토회에 입회하였다. 나중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아빠스(대수도원장)가 되어, 몸소 모범을 보이며 수도자들을 덕행의 길로 이끌었다. 또한 그는 교회의 분열을 막고자 유럽 각지를 두루 다니며 평화와 일치를 회복하고자 노력하였고, 신학과 영성 생활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1153년 선종한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1174년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이 시성하였고, 1830년 비오 8세 교황이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티로의 군주는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을 맞이하리라고 전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8,1-10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3 과연 너는 다니엘보다 더 지혜로워
어떤 비밀도 너에게는 심오하지 않다.
4 너는 지혜와 슬기로 재산을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다.
5 너는 그 큰 지혜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
6 그러므로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7 그러므로 나 이제 이방인들을, 가장 잔혹한 민족들을 너에게 끌어들이리니
그들이 칼을 빼 들어 네 지혜로 이룬 아름다운 것들을 치고
너의 영화를 더럽히며 8 너를 구덩이로 내던지리라.
그러면 너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무참한 죽음을 맞이하리라.
9 너를 학살하는 자 앞에서도 네가 감히 ′나는 신이다.′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너를 살해하는 자들의 손에 달린 사람일 뿐이지 신이 아니다.
10 너는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죽음을 맞이하리라.
정녕 내가 말하였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23-30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24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7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2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30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집회 15,1-6)와 복음(요한 17,20-26)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에제키엘서 25─32장은 여러 민족들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고, 오늘 독서는 그 가운데 티로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언서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민족들에 대한 심판은, 각 민족이 저지른 일이나 특정한 시대를 언급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권이 주제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말하는 티로 임금에 대한 심판은 매우 전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그 심판의 대상이 티로 임금이 아니라 누구라도 다르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사야서 10장에서는 아시리아에 대해서, 그리고 나중에는 바빌론에 대해서 비슷한 내용이 선포되고, 다니엘서 4장에서는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를 대상으로 하여 같은 주제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문제는 인간의 교만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계획에 따라 어느 나라 또는 어떤 임금에게 힘과 지혜를 주시는데, 인간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강하고 지혜롭다고 여길 때, 오늘 독서의 표현으로 “나는 신이다.”(에제 28,2)라고 할 때 하느님께서 그것을 잃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너무 전형적인 주제여서, “나는 신이다.”라는 말을 보면 바로 멸망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내’ 힘, ‘내’ 능력, ‘내’ 지혜, ‘내’ 재산이라는 바로 그 생각이 어리석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보는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를 알아봅니다. 알아보지 못하고 착각 속에 사는 그 자신만 불행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이들의 것이고,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지도 모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은 12세기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그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12세기를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졌다.”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베르나르도의 지혜와 경륜은 하늘을 찔렀는데 당대 교황님들을 비롯해 많은 왕들이 그에게 조언과 상담을 청했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라며 우러러 보았습니다.
동시에 베르나르도는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 수도생활 쇄신의 선구자, 교회 분열을 저지하는 든든한 보루, 탁월한 성서학자, 위대한 명 설교자, 그러면서도 겸손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동시에 살아갔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마지막 교부’ 또는 ‘꿀과 같은 혀를 가진 박사’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090년 프랑스 귀족 가문의 촉망받는 자녀로 태어난 베르나르도는 다정다감하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22살의 나이에 시토회에 입회해서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출중한 인품과 지도력, 그리고 놀라운 언변과 감수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입회하기 전 그는 여러 형제들과 친구들을 영적으로 잘 지도하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0명이나 되는 동료들을 하나로 모았고 의기투합한 그들은 당시 개혁파 수도원으로 ‘뜨고 있던’ 시토회에 동반 입회를 하게 됩니다.
초기 양성 기간을 마친 베르나르도는 장상의 지시에 따라 동료 수도자 12명과 함께 그 유명한 클레르보 계곡으로 내려갑니다. 척박한 황무지였던 클레르보에 작고 소박한 수도원을 건립한 베르나르도는 오랜 기간 동안 철저한 고행과 단식, 집필과 일에 전념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았고, 숨을 쉬었으며, 또 그 결실을 형제들과 나누었습니다. 점차 클레르보는 수도생활 개혁의 원천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메마른 골짜기였던 클레르보는 점차 빛과 생명의 계곡, 기쁨과 구원의 골짜기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르나르도의 성덕에 감화를 받고 클레르보로 몰려왔습니다.
베르나르도는 가톨릭교회 쇄신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교황청의 폐단과 고위성직자들의 세속화를 신랄하게 경고했습니다.
교회 당국으로 부터 공인받은 순회 설교자로서 수많은 지역을 다니며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했습니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베르나르도는 스스로에게 그 유명한 질문 한 가지를 던졌습니다.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그가 남겨준 수도자로서의 모범을 바라보며 같은 수도자로서 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는 교도권으로부터 부탁받은 중요한 임무를 완수하는 즉시 고향 집으로 달려가듯이 부지런히 클레르보로 돌아와 평범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계속했습니다.
그가 수도원으로 돌아올 때는 절대 혼자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누군가를 데리고 왔는데 그의 삶에 매료된 나머지 수도 생활을 선택한 젊은이들이었습니다.
100배가 주어진다고 믿는 곳이 천국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 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십니다. 즉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반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하늘 나라는 행복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하늘 나라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신학생 때 2주간 행려자들을 위한 서울에 있는 한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실 무료 급식소라고는 하지만 돈을 200원씩 받았습니다. 없는 사람은 안 내도 되지만 아예 받지 않으면 행려자들의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식사 후에 그들끼리 밖에 나가 싸웁니다. 제가 있을 때의 싸움은 신문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겐 이불 역할을 하는 그런 신문지가 전 재산입니다. 한 노숙자는 신문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한 사람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없는 사람이 많은 사람 것을 하나 슬쩍 한 것입니다.
저는 ‘과연 그들이 가난한 사람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답은 ‘아니다’였습니다. 그들은 부자였습니다. 욕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왜 욕심이 많을까요? 자신이 내어주는 것이 100배로 돌아옴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는 내가 어느 환경에 있는지에 대한 믿음으로 결정됩니다. 같은 아이라도 고아가 있고 부모가 있는 자녀가 있습니다. 고아는 이 세상에서 자기 것을 내어놓아도 100배로 돌아온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부모에게 조금만 효도해도 100배로 돌아온다고 믿습니다. 부모가 있어도 가난할 수 있지만 그 아이는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좋은 고아원에 있어도 100배의 보상을 믿지 않는 아이는 그 집착 때문에 지옥에 삽니다. 사실 그런 아이는 가진 것마저 빼앗깁니다.
우리는 이솝 우화의 ‘개와 그림자’를 잘 압니다. 한 마리의 개가 고기를 물고 가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물에 비친 고기가 더 크다고 착각합니다. 욕심을 부린 개는 물속의 고기를 차지하려다 결국 자신이 물고 있던 고기를 떨어뜨려 잃어버리고 맙니다. 만약 100배로 돌려주는 세상이라고 믿으면 ‘불쌍하면 내가 주려고 했는데 이미 먹을 것이 있으니 줄 필요가 없겠네!’라고 하며 자신의 것을 잃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하늘 나라로 사는 사람의 마음을 살펴봅시다. 워런 버핏은 2011년 포춘지 9월호에 ‘나의 기부 서약’을 실었습니다. 여기에 그가 내어놓는 무엇이든 100배로 돌려받는다는 믿음이 숨어있습니다.
“저는 재산의 99%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겠습니다. 규모로 보면 큰 액수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매일 같이 저보다 많은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교회나 기타 기관에 기부금을 내고 있습니다. 제 주식의 1% 이상을 저희를 위해 사용한다 해도 저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지도 더 편안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부한 나머지 99%는 다른 이들의 건강과 복지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제 가족이 걸어갈 길은 명확합니다. 저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사회의 필요를 위해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보상을 믿는 사람들이 나눌 줄도 압니다. 그런데 정말 저렇게 많은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워런 버핏이 가진 돈의 1%를 가진 사람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1%도 조 단위의 액수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많게 되는 이유는 이미 지옥에 살기 때문입니다. 제가 유학 가서 말도 못 할 때 그 상황이 지옥 같으니 계속 내 것만 찾고 있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부러라도 빼앗으려고 하십니다. 그리고 정말 100배가 주어지는지 보게 될 때 그 사람은 앞으로도 천국에 살 수 있습니다.
‘약속’이란 영화에서 박신양이 술에 취하여 노숙자의 가방을 빼앗으려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노숙자는 자신의 전 재산인 가방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지만 결국 빼앗기고 맙니다. 가방을 털어보니 신문지와 더러운 옷 몇 벌만 들어있습니다. 주인공은 웃으며 가방과 나머지 것들을 그의 앞에서 엎어버리고 대신 행려자에게 수표를 한 장 줍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 보따리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아? 먹다 남은 사과, 가자 부스러기, 곰팡이 쓴 떡, 순 못 먹는 것들만 잔뜩 싸가지고 맨날 얻어먹으면서 지 것 빼길까봐 보따리 꼭 끌어안고 사는…. 내가 거지야. 희주는 어떤지 알아? 나한테 주기만 해. 나만 쳐다봐. 절벽 꼭대기에서 눈 꼭 감고 그냥 자기를 내던지는 거야! 이런 사랑 받아봤어?”
주님을 이렇게 억지로라도 빼앗으려고 하십니다. 그래야 당신께서 더 큰 것을 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학생이 되거나 수녀원에 들어가면 바로 100배로 받는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많은 부모님이 생기고 많은 자녀가 생기며 많은 집이 생기고 죽기까지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단지 내가 별거 아닌 것을 바쳤다는 이유 하나로. 그리고 그분은 대신 “모든 것”을 내어주십니다. 이것을 느끼며 사는 동안은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을 살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입니다. 한 어르신이 면담을 원했습니다. 86세인 어르신은 신앙 체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성체’ 체험입니다. 어르신은 미국 성당에서 미사에 참례하였다고 합니다. 마음도 불편하고, 다툼이 있었기에 그날은 성체를 모시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영성체 시간에 마지막으로 성체를 영하는 할아버지가 그만 성체를 땅에 떨어트렸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도 성체를 찾고, 신부님도 성체를 찾았는데 도저히 찾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어르신의 눈에는 성체가 땅에서 조금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 모두가 포기하고, 미사를 마치려고 할 때입니다. 어르신은 성체가 있는 곳에 엎드려 혀로 성체를 모셨다고 합니다. 교우들이 박수 치면서 기뻐하였고, 신부님도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그렇게 성체를 모신 후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용서하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어르신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몸과 마음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불경이 왜곡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와 스님들에 의해서 왜곡됩니다. 부처님은 자비와 보시를 이야기하는데 불자들과 스님들은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코란이 왜곡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코란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슬람의 신자들과 이맘들에 의해서 왜곡됩니다. 마호메트는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이슬람의 신자들과 이맘들이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왜곡되는 것도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우들과 성직자들에 의해서 왜곡됩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으로 올라갔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론은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금을 모아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은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서 왜곡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희생을 말씀하셨습니다. 겸손과 가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교우들과 성직자들은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드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다면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모두 부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같은 물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부유함이 주는 편리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부유하면 좋은 집을 가질 수 있고, 부유하면 좋은 차를 가질 수 있고, 부유하면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했을까요? 재물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아서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남을 속이기도 하고,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하느님과 멀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였던 세리 자캐오를 만났습니다. 부자였지만 세리였던 자캐오는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 자캐오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동네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4갑절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부자라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부자일지라도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자신의 재물을 기쁜 마음으로 이웃에게 나눌 수 있다면 하늘나라의 문은 언제든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오늘의 성인
성 베르나르도(Bernard)
신분 : 수도원장, 교회학자, 신학자
활동지역 : 클레르보(Clairvaux)
활동연도 : 1090-1153년
같은이름 :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테셸랭 소렐(Tescelin Sorrel)과 몽바르(Montbard) 영주의 딸인 복녀 알레타(Aletha, 4월 4일)의 아들인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ㅣs, 또는 베르나르도)는 부르고뉴(Bourgogne) 디종(Dijon) 근교의 가족 성(城)인 퐁텐(Fontaine)에서 일곱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샤티용(Chatillon)에 가서 공부하면서 청운의 꿈을 펼치고 있었으나, 1107년 어머니의 죽음으로 많은 충격을 받고서 수도생활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원래 시토회의 설립자 3명 가운데 한 명은 아니었지만 흔히들 그를 시토회의 설립자로 부른다. 그가 새로운 수도회인 시토회에 입회한 해는 1112년 4월인데, 그 때 그는 자기 형제 4명을 비롯하여 모두 30명의 친척, 친구들과 함께 베네딕토회 규칙의 엄격한 해석을 따르기 위하여 1098년에 설립된 시토회에 들어갔다. 그들은 원장이던 성 스테파누스 하딩(Stephanus Harding, 4월 17일)으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1115년에 성 베르나르두스는 성 스테파누스 하딩의 지시에 따라 12명의 수도자와 함께 부르고뉴와 샹파뉴(Champagne)의 경계지역에 있는 클레르보라는 고립된 계곡에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파견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엄격한 규율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에 봉착하였으나, 그의 높은 성덕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때 그 수도원의 이름을 발레 답신트에서 클레르보로 바꾸었고, 당시 68개의 시토회 수도원의 모원으로 만들었다.
그 후 성 베르나르두스는 자신의 학덕과 지덕을 활용하여 수도원의 외부 일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중의 하나가 되어 통치자와 교황의 자문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대립교황인 아나클레투스 2세의 요구에 대항하여 1130년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Innocentius II) 선출의 합법성을 지지하였다. 또한 그는 로테르 2세를 황제로 인정하도록 롬바르디아(Lombardia)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140년부터 그는 공적으로 설교하는 일을 시작하여 놀라운 명성을 얻었다.
1145년에는 전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수도자였던 에우게니우스 3세(Eugenius III)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는 교황직의 의무에 대한 글을 교황 앞으로 보내어 로마(Roma) 교황청의 남용을 자제하고, 교황이 항상 목전에 두어야 할 종교적 신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교황 에우게니우스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랑그도크(Languedoc)에 파견하여 알비파(Albigenses) 이단을 대항하여 설교토록 하였고, 프랑스와 독일에 제2차 십자군 원정의 열기를 북돋우는 특사로 임명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활동과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성한 저술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서한과 "아마(Armagh)의 성 말라키아의 생애" 그리고 "신애론"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자신의 수도자들에게 행한 강론은 "아가"로 묶었다. 그는 자신의 저술과 설교에서 성서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는 이유를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아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저서와 신심은 오늘의 신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그는 다양한 기질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lifluus)란 칭호를 얻었다. 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에서 선종한 그는 1170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황 비오 8세(Pius VIII)는 1830년에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그는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이며, 때로는 '마지막 교부'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문장은 꿀벌통이고 양봉업(자)의 수호성인이다.
성녀 마리아 데 마티아스(Maria de Mattias)
신분 :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연도 : 1805-1866년
같은이름 : 마띠아스, 메리, 미리암
성녀 마리아 데 마티아스(Maria de Mattias)는 1805년 2월 4일 지리적으로 이탈리아의 프로시노네(Frosinone) 지방에 위치한 교황령의 최남단 마을인 발레코르사(Vallecorsa)에서 태어나 그날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신심 깊은 가정에서 아버지 조반니 데 마티아스(Giovanni de Mattias)와 어머니 오타비아 데 안젤리스(Ottavia de Angelis)의 네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매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읽어주는 성경 이야기를 듣고 인류 구원을 위해 희생양이 되신 예수님께 대한 위대한 사랑을 키워갔다. 비록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여성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녀는 스스로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신앙의 진리뿐만 아니라 성경의 일화와 인물들에 대해 배우고 내면화시킨 이 모든 일들은 발레코르사와 그 주변 지역이 무질서와 혼란에 빠져 고통 받던 시기(1810-1825년)에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마리아의 정신 안에서는 증오와 복수를 야기하는 인간의 피와 사랑과 구원을 가져다 준 그리스도의 피의 존재가 대비되었다.
10대 초반까지 세상과 접촉하지 못하고 집안에 박혀 지내던 그녀는 한때 종교보다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두기도 했지만, 16-17세에 이르러 인생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고 무한한 사랑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내면의 어두움을 걷어내던 그녀는 신비로운 환시를 경험하고 하느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 사랑은 모든 이를 위해 당신의 피를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명백해졌다. 또한 이 체험은 마리아가 앞으로 만나게 될 모든 사람들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사랑과 천상 아버지의 감미로운 사랑을 깨닫도록 하는 원천이요 힘이자 동기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피를 어떻게 주셨는지를 알고,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의 가치를 이해하기 시작할 때 사람들의 마음과 사회는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체험이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그녀가 17살이 된 1822년 보혈 선교회를 설립한 성 가스파르 델 부팔로(Gaspar del Bufalo, 1월 2일)가 그녀의 마을을 방문했다. 자기희생의 모범으로써 그리스도의 보혈(보배로운 피)의 신비를 제시한 성인의 설교에 마을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마리아는 자신의 가슴 속에 간직했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하느님께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결국 가스파르 성인의 동료 중 하나인 가경자 조반니 메를리니(Giovanni Merlini) 신부의 지도 아래 그녀는 1834년 3월 4일, 그녀의 나이 29살에 프로시오네의 아쿠토(Acuto)라는 작은 마을에서 학교를 시작하며 그리스도의 성혈 흠숭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성녀 마리아 데 마티아스 원장은 30년을 넘게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하며 여러 곳에 소녀들을 위한 학교와 수녀원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당시 여자 아이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가정생활의 성화를 위해 기혼 여성을 위한 강좌를 여는 등 여성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녀는 당나귀에 짐을 싣고 먼 길을 걸어서 여행하는 힘겨운 여정이었지만 자신이 가는 곳이면 어느 마을에서든지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를 흘림으로써 구속의 사랑을 이루신 성혈의 신비를 선포하길 원했다. 그래서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서 그녀는 ‘설교하는 여성’으로 알려졌다. 그녀가 설립한 공동체는 매우 가난했고 종종 먹을 것이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항상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과 무엇이든 나누기를 원했다.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그녀가 설립한 수도 공동체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이미 70개를 넘어섰다.
그녀는 1866년 8월 20일 로마(Roma)에서 선종하여 로마의 캄포 베라노(Campo Verano)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성덕에 대한 명성은 선종 이후에 더욱 널리 퍼져 30년이 지난 1896년 그녀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가 시작되었고, 그 열기는 1950년 10월 1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그녀의 시복이 선포되었을 때 최고점에 올랐다. 그 후 그녀의 유해는 로마에 있는 수녀원 총원의 보혈 경당 내로 옮겨 모셨다. 그녀는 2003년 5월 18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의 축일은 예전부터 기념해 오던 2월 4일 또는 선종일인 8월 20일에 기념한다.
성 베르나르도 톨로메이 (Bernard Tolomei)
활동년도 : 1272-1348년
신분 : 설립자, 수도원장
지역 :
같은 이름 : 똘로메오, 똘로메우스, 똘로메이,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톨로메오,톨로메우스,벨라도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시에나(Siena)에서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난 성 베르나르두스 톨로메이(Bernardus Tolomei, 또는 베르나르도 톨로메이)는 요한(Joannes)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8월 20일)를 흠모한 그는 자신의 이름마저도 베르나르두스로 바꿀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성인이 수도생활에 입문하는 것을 방해하였고, 결국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행정관이자 황제의 기사가 되었다. 신심이 매우 깊었던 그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거의 시력을 잃은 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간구하여 시력을 회복한 후에는 모든 것을 뿌리치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은둔소로 피신하였다.
그는 1313년 두 명의 다른 시에나 출신 동료들과 함께 시에나 남쪽에 있는 아코나(Accona) 광야에 들어가 은수생활을 시작했는데, 암브로지오 디 니노 피콜로미니(Ambrogio di Nino Piccolomini)와 파트리치오 디 프란체스코 파트리치(Patrizio di Francesco Patrizi)가 그들이다. 그들은 초기 수도승들처럼 침묵과 단순한 생활로 관상생활에 전념하였다. 그 후 그들의 거룩한 생활이 알려져 제자들이 모이자 성 베르나르두스 톨로메이는 몬테 올리베토(Monte Oliveto)에 수도원을 세우고 1319년 수도회로 인가를 받았다. 그는 이때 자신의 수도명으로 베르나르두스를 정하였다.
그는 페스트에 걸린 형제들을 돌보다가 1348년 8월 20일 그 자신도 페스트로 선종할 때까지 수도회 형제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원장으로 봉사했다. 그가 설립한 ‘베네딕토회 몬테 올리베토의 성모 마리아 연합회’는 관상생활을 지향하지만, 시대와 환경의 요구에 따라 활동적인 사도직에도 참여하고 있다. 1634년(또는 1644년)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그는 2009년 4월 26일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클레르보(Clairvaux)의 성 베르나르두스(8월 20일)와 함께 시에나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사무엘 (Samuel)
활동년도 : +11세기BC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지역 :
같은 이름 : 사뮈엘, 새무얼, 싸무엘
히비르인들이 판관 시대의 느슨한 동맹 체제에서 중앙집권적 왕정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가 기원전 11세기에 활약한 성 사무엘('하느님의 이름' 또는 '그의 이름은 하느님이다'라는 의미)이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당시 유대인 남자가 맡을 수 있는 지도자 역할, 즉 제사장 · 판관 · 예언자 · 군대 지휘관 등을 모두 맡은 인물이었다.
사무엘 상권 1-16장에 나타난 사무엘의 활동은 주로 사울 왕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에브라임 산악지대에 사는 라마다임 출신의 수브 사람 엘카나와 그의 아내 한나는 야훼께 빌어서 아기를 얻었는데(1,1; 1,20), 이렇게 태어난 아기를 한나는 나지르인의 서원으로 실로 성소에서 봉헌하였다(1,11. 28; 2,11; 3,1). 엘리 사제 밑에서 야훼를 섬기던 소년 사무엘은 어느 날 밤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그것은 불경한 아들들을 둔 엘리의 집안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었다(3장). 이 계시는 사무엘이 ‘야훼의 예언자’로서 활동하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4-6장은 히브리인들이 블레셋군에게 패하여 계약의 궤를 빼앗기고, 엘리의 가문이 멸망하고, 실로 성소가 파괴된 내용이다. 블레셋에게서 계약의 궤를 돌려받은 후에 사무엘은 판관이 되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경고하였고, 블레셋의 침략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였다(7장). 그는 이스라엘의 판관으로서 죽는 날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해마다 베델과 길갈과 미스바를 순회한 후 자신의 집이 있는 라마(Ramah)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두루 다스리며 야훼께 제사드릴 제단도 쌓았다(7,16-17). 사무엘은 나이가 많아지자 자신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를 판관으로 임명하고 브엘세바(Beer-Sheba)를 다스리게 하였다(8,1-2).
이어 서로 다른 왕정 설립 설화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사무엘은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 그중 하나(9,1-10. 16)이다. 한편 또 다른 성서 구절(7,3-8,22; 10,17-19; 12,1-25)에서는 백성들이 직접 투표로 사울을 왕으로 선택하였다고 나온다. 하지만 사무엘은 왕정 설립 요청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요 왕인 야훼를 변절하는 행동이라고 비난하면서 마지못해 왕정 설립에 동의하였다. 사무엘은 특히 고별사에서 백성들에게 야훼의 명령을 거역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12장).
15장에 보면 사무엘과 사울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갈라진다. 사무엘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고, 야훼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던 것을 후회한 일을 생각하며 통곡하였다(15,34-35). 이러한 내용은 앞선 성서 구절(13,13-14)에 이미 나와 있다. 다윗과 함께 나욧으로 내려가 있던 사무엘을 찾아간 사울이 그 앞에서 예언 황홀경에 빠져 버린 이야기(19,18-20)를 비롯하여, 사무엘은 죽은 후(25,1; 28장)에도 혼백으로서 계속해서 사울의 왕정사에 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