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영남 기호학파의 ‘거유(巨儒)’로 불려오다 지난달 20일 타계한 화재(華齋) 이 우섭 선생의 장례가 전국 유림들이 참여한 가운데 마지막 전국 유림 장으로 열린 곳에 다녀왔었는데, 포토샾 프로그램을 CS3로 바꾸고 여러 가지 문제점을 보완하느라 이렇게 또 지각생의 기록이 되었습니다.
이젠 말썽 부리지 않을려나?
유림 장을 치르기 위해서는 고인이 방대한 저술과 유림의 어른으로 인정받을 만한 학행과 덕행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학파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 하며, 실제로 이런 조건을 갖춘 채 생존한 유림이 거의 없다는 게 유림계의 의견이기 때문에 이번 장례가 마지막 유림 장으로 일컬어졌었습니다.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간재 전우. 석농 오 진영으로 이어지는 영남 기호학맥의 후예인 이 우섭 선생은 평생 고향에서 월봉서당을 지키면서 한학을 가르쳤고 2005년 5월에 성리학 관련 글과 한시. 금석문 등을 정리한 ‘화재문집(전27권)’을 출간하는 등 4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고 합니다.
경남 김해시 장유면 덕정리 월봉서원은 지난달 28일 오후 열린 전국유림회의에서 이선생의 장례를 학문과 덕망이 높은 유학자가 타계했을 때 행해지는 유림 장 형태의 유월 장(踰月葬.16일장 : 유림장의 한 형태로 달을 넘겨가며 전통 유림방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으로 치르기로 결정했으며, 이같은 결정에 따라 지역 유림과 문하생. 가족들은 유가 선비의 전통적 장례인 유월장을 준비하여 지난4일 월봉서원에서 치러졌으며 전국 유림 장으로는 마지막 열리는 이번 장례절차는 일반인들에게 전통과 효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월봉서원은 이 우섭 선생의 부친인 월헌(月軒) 이 보림(1902~1972)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곳.
월봉서원 측 관계자는 “일제 강점기, 일제의 압박으로 선비들의 전통적 장례를 거행하지 못했고 이후 가정의례준칙에 따라 장례 일을 강제적으로 줄여 유림장이 자취를 감추고 3일장이 장례문화로 자리 잡은 시대에 굳이 16일장인 유월 장을 고수하는 의미를 되새겨 볼 만하다”며 “생전에 양친 상을 모두 3년 상으로 지내 사라져가는 유림의 법도와 효행을 몸소 실천한 고인의 정신과 덕을 추모하는 이번 유월장의 의미는 더욱 크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특이한 것은 조선시대 가례 지침서 사례편람(四禮便覽)에 조정의 벼슬아치인 대부(大夫)는 눈이 4개인 방상씨 탈을, 선비는 눈이 2개인 방상씨 탈을 만들어 장례의 맨 앞에서 악귀를 쫓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를 탈 명인인 이 도열(61. 고성 탈박물관 명예관장)씨에게 의뢰하여 2점이 제작 되었으며, 이도열 관장은 상주 측으로부터 전국 유림 장에 쓸 방상씨 탈을 만들어달라는 의뢰를 받고 약 10일 동안 오동나무를 깍아 웃거나 입을 다물고 있는 40㎝ 크기의 방상씨 탈을 제작 하였으며, 방상씨 탈은 장례에 사용하고 무덤 곁에서 태운 후 묻어버리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이번 방상씨 탈은 태우지 않고 박물관 등에 보관해 문화자료로 보존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도열 관장은 "앞으로 이 같은 전통 유림장이 치러질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방상씨 탈을 볼 수 있는 전통장례는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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