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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강 시절 순 담
그 시절이 눈에 선하다. 어린 시절에 살았던 장흥군 유치면의 탐진강 상류는 빨치산들의 해방구였다. 이웃 부산면, 장동면, 장평면보다 배나 큰 지역으로 강진군 옴천면, 영암군 금정면, 화순군 도암면과도 접하여 깊은 산골짜기가 많은 분지였다. 두 줄기의 큰 냇물이 면소재지 장터 앞에서 합쳐져 탐진강 본류가 되어 빈재 옆으로 장흥 읍내를 거쳐 강진만으로 흘렀다. 산 어디에나 고사리, 더덕, 도라지, 취와 냇물에는 은어, 쏘가리, 메기 등이 흔했고 다슬기가 지천이었다. 천년의 고찰 보림사가 있는 가지산에는 비자나무가 많았고 동학란이 휩쓸고 간 이후 지리산에 버금가는 빨치산들의 아지트였다. 최근에는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인증되었다.
보림사와 피재로 갈려 가는 삼거리에서 살 때다. 일본에서 갓 나온 탓에 말은 서툴지만 호기심이 많고 또래들보다 체력이 좋아 산과 들로 겁 없이 뛰어다녔다. 밤이면 늑대와 호랑이가 사람을 물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낮에만 돌아 다녔다.
1946년의 이른 봄 어느 날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개들이 요란하게 짖는 밤이었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면서 뒷길로 도망을 치고 쫓아가는 무리들의 내닫는 소리가 정막을 깨트렸다. 동네 구장이었던 박씨와 경찰관이던 그의 큰아들이 밤손님들이라는 좌익분자들에게 칼과 죽장으로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그들은 지역 유지나 인텔리 우익인사들을 납치 살해하면서 과거에 감정이 있는 사람들도 은밀하게 해치고 있었다. 이때부터 밤손님들과 경찰관들이 죽기 살기로 대치하면서 서로의 가족들까지 죽이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경찰이나 지배층, 지주들에게 억압과 멸시천대를 받으며 착취당했던 감정을 사상문제로 결부시켜 화풀이를 해대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면서기라서 지서에서 가까운 마을로 이사를 했다. 동구 밖에 오르기 좋은 팽나무가 있어 시누대로 딱총을 만들어 팽 열매를 쏘아대는 놀이를 즐겼다. 어느 여름 날 냇가로 나가 멱을 감으면서 다슬기를 주어 담고 있을 때 어른들이 윗물에서 약을 쳤다. 잠시 후 물위를 빙빙 돌며 뒤집어지는 어린애 팔뚝만큼 한 은어와 한 아름되는 쏘가리를 움켜잡느라 씨름을 했다. 겨울에는 큰 쇠망치로 물속에 잠긴 돌을 내리쳐 점박이 붕어와 피라미를 건져다 무를 넣은 조림이 일품이었다. 1922년에 개교한 유치초등학교의 가을 운동회가 대단한 했다. 양쪽으로 흐르는 냇물을 따라 청, 홍군으로 편을 짜서하는 릴레이와 기마전은 승리를 위한 절정이었다. 내 마음을 빼앗았던 1947년 가을이 끝나면서 검은 구름이 더 짙게 드리워졌다.
교감선생님인 사촌 외삼촌이 학교관사에서 밤손님들에게 강제로 끌려갔다. 더욱이 그들의 두목이 왜정 때 순천경찰서 간부였던 외삼촌의 숙부여서 충격이 더 컸다. 여기저기서 그들에게 협박을 받고 납치, 피살되고 있었다. 대개는 가족들이 끼어있고 보복이 두려워 눈치만 살피며 쉬쉬하고 지내느라 살얼음을 딛고 사는 것 같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그해 가을 여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전체적으로는 진압되었지만 그 일부가 회문산과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탐진강 상류에도 들어왔다. 그들이 밤손님들과 강력한 집단을 이루어 활동이 심해졌다. 이때부터 지서에는 외부에 방벽을 쌓고 그들을 그냥 반란군이라 했다.
6․25가 일어나기 전해의 여름 경찰관이 또 피살당했다. 지서장과 면장이 경찰관들과 스리코터를 타고 장례식을 치르러 나섰다. 금정면에 있는 상가를 향해 덤재를 넘다가 반란군에게 기습을 당해 전원이 죽고 차량과 함께 불태워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방경비대의 광주20연대 2개 중대가 달려와 초등학교주변에 주둔했다. 운동장에서 멋있게 제식훈련을 하는 것을 보면서 용감한 군인이 되고 싶었는데 후일 장교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 철모에 무장을 단단히 한 군인들이 백주 신작로에서 반란군에게 당해 그 시신을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태우는 것을 숨어서 구경했다. 그 후 군인들에 대한 연민으로 반란군들에게 어떻게 든 복수를 하고 싶었다.
밤과 낮을 주도하는 세력이 바뀔 때마다 피바람이 불었다. 군인들이 떠나고 지서에 방벽을 더 쌓기 위한 주민 동원령이 내렸다. 우리 마을에서는 지서에 나가 일했다가는 반란군들에 당할게 빤하다 싶어 모두가 산속 깊은 곳으로 피해버렸다. 우리 집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며 지서에서 시키는 대로 형이 부역을 나갔다. 위험을 무릅쓰고 매일 부역을 하는 형을 위해 어머니가 쌓아준 점심을 들고 지서로 심부름을 다녔다. 한날은 형이 다 먹은 빈 그릇을 보자기에 싸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장한 군인들을 만났다. 길 양쪽으로 늘어서서 내려오던 군인들이 나를 붙잡아 세우고 너의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우리 형이 지서에서 일하는데 점심밥을 내다준 빈 그릇이라고 했더니 보자기를 만져본 군인이 너희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마을을 바라보니 연기가 피어올라 저기가 우리 집이라고 했더니 군인은 내 손을 잡고 중대장에게로 가 사실을 보고했다. 중대장은 즉시 불을 끄라며 내손을 잡고 뛰어가 불을 붙이고 있는 병사들에게 중지 명령을 내리고 타고 있는 집에는 철모로 소변까지 떠다 다 껐다. 진화작업을 마친 군인들이 모이고 중대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는 지서에 협력하지 않는 마을은 다 소각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오늘 이 소년을 만나지 못했으면 동네가 몽땅 불탈 뻔했는데 다행입니다. 앞으로 지서의 일에 협력을 잘 하기바랍니다.”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떠났다. 후일 중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있을 때 미군과 한국군이 베트콩과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 정글의 민가들이 불탈 때면 그때가 떠올려져 안타까웠다.
그해 겨울 군인들이 보이지 않자 지서를 습격하려고 반란군들이 설쳐댔다. 경찰들의 지시로 우리 집은 지서에서 아주 가까운 갈모리로 옮겨 살았다. 지서의 경찰들은 돌로 두껍게 쌓아올린 내부에서 총구만 내밀고 있었다. 방벽 밖으로는 대나무를 예리하게 깎아 박아둔 해자가 있고 그 건너엔 겹으로 엮은 긴대나무 울타리가 있었다. 경찰관들은 새막 같은 초소를 밖에 두고 비무장 민간인 보초를 세워 1차적인 방패로 삼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반란군들이 산골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냇물이 흐르는 양쪽 골짜기에서 쏟아져 나왔다. 주민들은 시키는 대로 횃불을 빙빙 돌리면서 꽹과리를 치고 징을 울려대며 도끼, 톱, 낫을 들고 지서 쪽으로 밀려갔다. 마치 서부영화에서 인디언들이 기병대의 진지를 향해 돌진해 가는 장면이었다.
반란군들은 지서로 통하는 전화선을 끊고 도로의 중요한 지점을 파괴했다. 지서를 가운데 둔 양쪽 고지의 경계 초소를 빼앗긴 경찰관들은 독안 든 쥐와 같은 운명에 처했다. 실탄을 아끼느라 사방에서 화약을 터트리며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경찰들을 약 올리려고 욕설을 섞어 ‘검둥아 워리∼워리’하며 조롱을 해댔다. 경찰들이 최후의 항전으로 마구 쏘아대는 총탄을 피하느라 두꺼운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창구멍으로 전쟁영화를 구경하듯이 했다. 당시 빨치산들은 군인들을 두려워하여 노랑개라고 했고, 경찰들은 한수 아래로 얕잡아보면서 검둥개라고 했다.
그날 밤 지서가 점령당해 경찰들은 전멸당하고 민간인들도 많이 희생됐다. 그들은 지서, 면사무소, 학교에 불을 지르고 곡식과 필요한 물품을 탈취해 암천리 사령부 쪽으로 들어갔다. 일단 그들의 수중에 들어간 일대에 낙동강에서 밀리던 인민군 패잔병들까지 찾아들었다. 무기 보유와 조직이 더 강화된 무리를 빨치산이라고 했다. 그들은 유치산으로 통칭되는 탐진강 상류를 전남지역의 거점으로 사령부가 있는 암천리에는 전화선을 가설하고 살상용 칼과 방망이 수류탄을 만들어 냈다. 경찰의 힘이 미치지 않아 빨치산 세상이었다. 매일 소년단 훈련을 받고 밤에는 보초, 낮에는 작전명령을 전달하러 다녀야 했다. 한날은 옆집 용석이와 작전명령을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에 토벌대들 만나 간신히 살아났다. 어느 날 밤에는 장작불이 타고 있는 마당가에 한 가족으로 보이는 노부부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있는 젊은 여인이 묶여와 있었다. 군인이나 경찰관 가족이 아닌가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어 가슴이 아팠다. 형과 나는 그들이 명령하는 대로 동구 밖에서 야간 보초를 서야 했다. 늦가을이라 밤공기가 차가워 밭에 쌓아 둔 빈 수수 단으로 바람막이를 하고 은신해 있었다. 밤중쯤에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여와 주시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두 명의 빨치산이 아까 우리마당에 끌려와 있던 가족들을 앞세우고 마을 옆 골짜기로 향했다. 잠시 후 가느다란 비명소리가 들리고 잠잠해지더니 빨치산들만 내려오고 있었다.
사람의 생명이 파리 목숨 같던 이듬해 봄이었다. 마을에 있는 빨치산 간부들이 자기들 부대가 어느 지서를 습격했다며 마을 사람들에게 백여 명의 점심을 준비하라고 다그쳤다. 추수가 끝난 마을 앞 빈 밭에 큰솥 몇 개를 걸고 그들이 탈취 해온 것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얼마 있어 가마니를 울러 맨 민간인들과 총을 든 빨치산들이 꾸역꾸역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따라 동구 밖으로 나와 냇물건너 산을 바라보는데 우리 마을 앞으로 뻗어 있는 산마루에서 뭔가가 살짝 살짝 움직이는 것 같았다. 시력이 나빠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아버지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내 눈에는 분명하게 보여 마을로 달려가 알렸다. 보고를 받은 빨치산은 장흥군기동대와 용감무쌍한 노령산부대가 경계를 맡고 있다며 무시해 버렸다.
점심을 한참 먹을 때 벼락이 내리치듯이 기관총탄이 날아들었다. 전날 밤 예하 지서를 습격당한 장흥경찰서의 특공대가 은밀하게 추격을 해온 것이다. 무장을 했건 안했건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마을 뒤쪽 골짜기로 내 달았다. 한참을 뛰다가 앞을 가로 막고 있는 바위를 넘을 수 없어 잠시 망설이는데 인민군 패잔병이 막 넘으려 했다. 나는 얼른 그의 다리를 붙잡고 함께 넘으려는 찰라 총탄이 날아들었다. 내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날아간 총탄이 인민군의 다리에 꽂혀 쓰러지는 바람에 그 밑에 깔려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두워지고 있어 마을로 내려왔다.
기습을 감행했던 경찰특공대는 어둡기 전에 떠나면서 마을에 불을 질렀다. 온 동네가 대낮처럼 환하게 불타고 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웃집 임배네 어머니가 머리에 총을 맞아 죽은 것이 확인되었다. 불을 끌 생각을 하지 않고 활활타고 있는 집 앞에서 언 몸을 녹이고 있는데 아버지가 총에 맞아 동네 사람에게 업혀왔다. 손아래 누이동생을 엎고 뛰다가 발등을 관통했는데 뼈가 상하지 않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늙은 호박의 빨간 속으로 환처를 치료했다. 어머니는 호박 속을 꺼낸 다음 늘상 호박범벅이나 죽을 써 주었는데 맛이 좋았다. 아버지는 그해 겨울 완쾌되었고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부모님 생각에 호박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한 때는 수원변두리에서 전원목회를 하면서 뒷산 자락에 호박을 심어 두루 나누어 먹었고 뷔페식당에 갈 때마다 제일 먼저 호박죽을 챙겨먹는다.
참빗질식의 계속되는 군경토벌대 소탕작전으로 소년단이 와해됐다. 그들의 감시를 받으며 가족과 함께 마을을 떠나 내삼이라는 깊은 곳으로 갔다. 일본에서 가져온 증권과 사진, 현금과 귀중품이 든 트렁크를 대밭 깊숙한 곳에 감추고 더 깊은 산중으로 피난을 갔다. 다음날 밤에 돌아와 보니 토벌대가 마을과 대밭에 불을 질러 모든 것이 한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알고 이제는 그들의 사령부가 있는 암천리로 옮겨가 이웃 화순군 도암면까지 쫓겨 갔다가 밤에 돌아오곤 했다. 전라북도 빨치산 사령부가 있는 순창 회문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그 쪽에서 패주하는 빨치산들과 민간인들이 탐진강 상류로 모여들었다. 추격해 온 대규모의 군경합동토벌대가 암천리를 목표로 포위망을 좁혀왔다.
아버지는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고 하셨다. 가족의 시신을 거둘 사람이 있어야 한다며 여덟 식구를 네 패로 나누어 장소를 대강 정해주면서 숨어 있게 했다. 아버지와 나는 같은 장소에 숨어있는데 사방에서 군인들과 전투경찰들이 토끼몰이를 하듯이 기관총과 박격포를 쏘아대며 조여들었다. 타지에서 쫓겨 온 피난민들과 빨치산들은 그냥 표적이 되어 총에 맞는 통에 일대가 아비규환이었다. 아버지와 내가 숨은 바로 앞으로 군인들이 총을 쏘아대며 지나가고 있었다. 조금만한 소리가 나도 집중사격이 가해지는 통에 어느 어머니가 갓 난 자기아기의 목을 둘러 죽여야 했다. 옆 사람들이 죽지 않기 위해 살벌하게 강요를 하기 때문이었다. 1949년 7월 윤달에 태어나 여군중위로 제대한 막내 누이가 그 때 갓난 애여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토벌대는 철수했다. 밤이 되어 가족이 모이기로 한 장소를 찾아가는데 총에 맞아 죽은 빨치산들과 민간인들의 시신이 너부러져있는 것을 보고 지나가야 했다. 거기다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여자빨치산이 동무∼동무 부르며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어떻게 감당할 도리가 없어 지내 쳐야 했다. 그날 우리가족은 무사했다. 칠흑 같은 어둠속을 이용해 암천리를 벗어나려고 죽동재를 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총을 겨누며 길을 막았다. 이제는 다 죽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후 상대가 우리를 아는 척해서 보니 외가로 친척이 되는 빨치산이었다. 그는 우리 부모님더러 “여기는 틀린 것 같소. 아제가 잘 피해서 엉골로 들어가시면 살길이 있을지 모르겠소.”라며 길을 비켜주었다.
그 밤에 우리 여덟식구는 탈북자들처럼 행동을 했다. 정적이 흐르는 용문리 앞 냇물을 조심스럽게 건너 엉골로 들어가는 데 일단 성공했다. 엉골은 외갓집 선산이 있는 곳으로 호랑이가 산다는 아흔 아홉이나 되는 골짜기라서 숨을 곳이 많았다. 토벌대들은 암천리 쪽으로만 공격을 집중하고 있어 숯을 굽던 가마터에서 오히려 안전하게 지냈다. 낮에 가재를 잡아 된장찌개를 끓이고 찹쌀로 떡을 해 먹으며 지내는데 토벌대들이 엉골도 참빗질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아버지가 주동이 되어 30여 명을 인솔하여 밤중에 엉골을 살금살금 빠져나왔다. 우선 길가의 집에 들어가 불을 피워 스스로 토벌대를 불러들였다. 날이 밝자 토벌대들이 공포를 쏘면서 손을 들고 나오라는 메가폰소리에 모두들 손을 번쩍 들고 나가 무사하게 되었다.
금사리 강변에 늘어선 군용천막이 난민수용소였다. 빨치산의 굴레를 벗어나 이제는 토벌대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작전을 나가는 전투경찰대에 따라 붙어 전리품을 챙기느라 바쁘게 뛰다녔다. 어느 날 암천리를 다녀온 후 머리가 아파서 누었는데 그게 열병이었다. 수용소 내에 여기저기서 발생하여 신고를 하라는 지시에 따라 착검을 한 경찰들이 찾아와 나를 들것에 담아 갔다. 트럭에 실려 먼 강변에 있는 환자 막으로 옮겨졌는데 그곳에서는 살아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환자가 죽으면 불태워버린다고 해 그 밤에 아버지가 몰래 찾아와 나를 업고 빈재를 넘어 부산면 구룡리에 있는 큰외가집으로 갔다. 그 때 외가 집은 더 안전한 읍내로 나가 살고 있어 넓은 집이 통째로 비어있어 친척 한분도 열병에 걸린 딸을 데리고 왔다.
우리 집에는 나로 인해 누나와 누이동생까지 앓아 누었다. 여름인데도 군불을 지피고 솜이불까지 덮고서 땀을 쭉 흘리게 했다. 우리 식구는 몇 차례 땀을 흘리고 살아났는데 친척 분의 다 큰 처녀는 땀을 흘리지 못해 죽고 말았다. 열병은 나았다가 한두 번 재발을 하고서 났는데 나는 두 차례 후 완쾌되었다. 아버지는 나를 목포로 데려가 작은 아버지 집에서 서부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을 시켰다. 3학년 초에 그만 두었다가 2년 만에 다시 하려니 못 배운 진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와 임시가교의 유치초등학교를 다니던 1952년 여름이었다. 흉년이 들어 집에 먹을 양식이 없는데 밤중에 이상한 사람들이 남루한 옷에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들어왔다. 깜짝 놀란 우리식구들에게 산에서 내려왔다며 식량을 있는 대로 내 놓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식량이 떨어져 굶고 있는 판이라서 사실대로 없다고 하면서 뒤져서 있으면 가져가라고 뱃장을 부렸다. 그들은 급하게 식량을 찾아다보다가 없다며 조용히 사라졌다.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빨치산이었다.
이때부터 빨치산이라 하지 않고 공비共匪라 했다. 빨치산이란 러시어로 유격대란 뜻인데 공비는 공산주의 이념에 빠진 비루한 존재다. 대대적인 공비 소탕작전이 전개 되면서 탐진강 상류에 있던 공비가 표면상으로는 소탕 되었다. 그래도 숨어있던 몇 명이 식량을 구하려 마을로 들어오다 매복에 걸려 사살되곤 됐다. 우리 마을에는 인민군출신들로 조직된 용호대라는 공비토벌대가 와 있었다. 그들 중에 북한에서 교사생활을 했었다는 유식한 사람이 있어 우리 집 식객처럼 지내다 떠났다.
극소수의 공비들은 겨울식량을 확보하려고 움직였다. 빨치산 해방구시절에 피해를 봤던 주민들의 자발적인 정보제공으로 은밀한 매복 작전이 전개 되고 있었다.
봄비가 내리던 1953년 어느 날 밤 매복을 나갔던 토벌대가 공비 한명을 사살했다. 그 시체를 하필이면 우리 마을 앞 길가에 거적대기로 대강 덮어놓고 있어 키가 큰 공비의 처참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탐진강 상류에서 내가 본 공비의 최후였다. 3일 후에 그 가족들이 나타나 시신을 수습해 갔다. 용호대는 해산되어 떠났고 이듬해 봄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떠났다. 지금은 댐이 조성되어 질곡의 역사를 간직한 면소재지와 우리가 살았던 큰 호수로 변했다. 작년가을에는 큰아들, 올 봄에는 작은 아들과 그곳에 가 보았을 때, 내 눈엔 천국에 간 가족들과 이웃들의 모습이 일렁이는 물결 위로 파노라마 쳤다.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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