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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5월 30일, 6.25 전쟁 발발 25일 전,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결과,
무소속이 의원정수의 60%에 해당하는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어,
“이승만”의“대한국민당”, “신익희”의 “민주국민당” 등 기존의
정당들은 원내 소수세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원내 세력분포의 재구성은 대통령직의 연임을 노리던 이승만(李承晩)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즈음 통한의 6.25전쟁이 터져, 정부와 수도는
부산으로 옮겼지만, 전쟁의 승패와 국가안위 보다는 전쟁 중에도
자신의 권력에만 전력을 다해 치중 했다.
이 때는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 였 음으로 60%가 넘는
”무소속“표가 누굴 뽑을지 새로운 인물을 찾고 있기 때문에 ”이승만“은 절망적이었다.
궁리 끝에 “이승만”으로 선 자신의 세력 기반을 형성하기 위해 지금까지 실시해온
”간선제“가 아니라 상·하 양원제를 골격으로 하는 대통령 직선제를 국회에 상정,
”직선제“로 개헌해야만 가능 했기에 ”직선제“개헌안을 국회에 제출 했다.
“간선제”는 우리도 "박정희 유신정권"때 “국민투표”라 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이란, "바지 저고리"를 뽑으면, 그 대의원은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았다. 그 결과는 “박정희”나 “전두환”이
부끄러웠던지? 투표결과가 100%가 아닌, 98%정도 나온 걸로 기억 된다.
이것이 “간선제”다. 그래서 “체육관 대통령”이란 “비아 냥”이 있었다.
"박근혜"를 파면시킨 촛불집회의 모태인 1987년 6월10일. "민주항쟁"은
연세대학교 "이한열" 열사의 희생으로 "대통령 직선제"의 기폭제가됐다
"전두환"의 바통을 이어 받은 "노태우"가 국민적 저항을 의식해
6.29선언을 했는데, 이것이 바로 "직선제" 선언이 었다.
이때부터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선거 제도가
실시 되었다. "군사독재"의 민주주의 학대는
"박정희"가 시작했다. "이승만은 "유린"을 했고,
"박정희"는 학대를 한 셈인데.
그의 딸은 "농단"을 했다.....
1952년 1월18일, 우려한 대로 무소속이 60%를 차지한 국회는 어김없이 이를
부결 시켰다 . 李承晩 은 대통령 재선에 “직선제”부결이라는
큰 암벽으로 국회가 단단히 가로 막았다.
그 암벽은 “간선제”를 유지해야 하는 만 하는 암울한 암벽이었다.
“이승만”으로선 새로운 획기적 돌파구로 “간선제”를 “폐기”하지 않으면 전혀
가망 없는 선거가 되는 건 뻔했음으로 국회를 장악하여 강압으로
“직선제”를 통과시키는 방법밖엔 묘수가 없던 터에
전세는 UN군의 참전으로 호전은 됐지만 ,아직도 전쟁은 계속되고
무소속 국회의원이 다수를 이룬 국회는 이승만의 권력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속에 이승만이 아닌, 새로운 지도자를 추대하려는
움직임 이 노골적으로 일어났다。
이때 더욱 힘들게 한 것은 6.25전란때 남산에다 “국민은 안심 하란, 방송을
틀어 놓고 서울시민을 볼모로 혼자만 살겠다고 "한강"이북 국민은
모두 죽어도 된다는 식으로 다리를 폭파, 끊어버리고 비열하게 도망친
사건”과 "국민 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학살" 사건까지
맞물려 "악재"로 작용하니 ,
1952년 6월23일, 에 이르러 예정된 대통령선거는
이승만의 당선가능성 이 희박 했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정치적 음모를 모색 했는데
“국회를 장악“직선제”를 강행 해야만 ,
해방 후 지금까지 관리해온 "사조직 "백의사 , 반공청년단 , 서북 청년단, 등
수많은 조직들이 상대후보에게 ,테러와 유언비어, 등을 가해 혼란을
가중시킴으로 100% 승산이 있다는 " 음모정치의
계산이 섯 던 것이다
그 증거와 결과물은 1948년 5·10선거 때 “최능진”이란 사람이
“이승만”의 정권장악을 막기 위해 “이승만”의 무투표 당선을 노리는 선거구인
동대문 갑구(甲區)에 자신이 입후보해서 이승만의 정체를 만천하에 폭로하기로
결정하고 출마를 결심 했다, 이 당시엔 굉장한 모험이며 “이슈”였다.
그러나 첨엔 “이승만”쪽에서 “콧방귀”를 뀌다가 동대문 경찰서 “윤기병”의
첩보로 첫 번째 강력한 훼방꾼으로, "동선거위원회(洞選擧委員會)"가 나서게 했다.
당시 "선거등록(選擧登錄)" 구비요건은 유권자 2백 명 이상의 추천서를 받아
동선거위원회에 제출해 적법 여부에 대한 "인준(認准)"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동선거위원회는 최능진 선거운동원들이 추천서를 받아서 제출하면
선거위원이 없으니 다음에 오라는 식으로 둘러대면서 고의로 접수를 연기시켰다.
등록마감일 전까지 계속 핑계로 연기 시켰다.
두 번째 훼방꾼으로 나선 것은 정치청부업자들이었다.
그들의 방해공작은 한마디로 야만적인 '정치테러'라고 규정 할 수밖에 없는데,
등록마감 직전 “최능진” 선거운동원들이 추천서 가방을 들고 이를 갈며 그동안
후보등록을 핑계를대고 기피했던 "동선거위원회"를 향해 가던 중
동선거위원회 입구에서 두 명의 괴한이 이들을 덮쳐 강제로 추천서 가방을
탈취해 도망 쳐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최능진 씨는 "등록 마감일"이라
후보등록을 못해, 선거에 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야비하고 악랄한 인간들이었다.
이승만은 계획대로 단일후보 가 됐고, 무투표 당선이 됐다. .
이 탈취사건의 전말은 서북청년단 리더였던 문봉제가
<중앙일보> 1973년 2월 8일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서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회고한 바 있다.
"이 박사는 당시 '라이벌' 최능진 씨(전 경무부 수사국장·숭전대 교수 출신)가
후보등록 마감 전날인 4월 15일 하오 추천서 꾸러미를 가방 째 선관위 앞에서
날치기 당함으로써 무투표 당선됐다.
이미 알 사람은 대강 짐작했겠지만 이때 최 씨의 가방을 날치기한 2명의 괴한은
바로 “서북청년단(西北靑年團)”의 성북지부장 “계호순” 외 1명이었다."
그 1명은 1947년 10월에 “이승만”에게 이화장(梨花莊)을 기증한 “백성욱” 이었다.
이화장을 기증한 백성욱은 서북청년단에게 “최능진”의 선거등록 방해를
청부한 대가로 자유당 정권에서 백성욱은 내무부장관, 문봉제는 교통부장관,
서북청년단 단원 이성수는 백성욱의 공보비서로 발탁되는 선물을 받는다.
그렇다면 이승만 일파는 왜 그렇게 집요하게 최능진의 선거등록을 방해하려 했을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동대문“갑 구”는 “이승만”과 대적하여 승산이 없다고
판단된 지역이라 “이승만”혼자 출마하여 "무투표"당선되는
“무주공산(無主空山}” 지역 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최능진”이 출마를 했으니.... 실소를 금치 못했을텐데,
"최능진"은 무슨 배짱으로 출마를 했을까?
“최능진”에 대해 좀 알아보자.
1915년 평양 숭실중학을 졸업한 최능진은 중국으로 건너가 금릉대학에
잠시 적을 두었다가 191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스프링필드대학과 듀크대학 체육학과에서 수학한 뒤 4년만에 졸업한 그는
워싱턴 YMCA 체육담당 간사를 맡는 한편 도산 안창호가 이끌던
흥사단 운동에도 참여했다.
12년 동안의 체미(滯美)는 최능진 으로 하여금 이승만의 정체를 간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대외교를 통한 독립운동, 독립운동세력 내에서의 파벌주의와
분열주의 조장 등 이승만의 정치행태를 지켜보며
그의 '반이승만' 의식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30세가 되던 1929년 귀국해 평양 숭실전문학교 체육과 교수로 부임한 최능진은
1937년 흥사단 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나중에 친일경찰
청산논쟁을 벌일 때 반대편에 섰던 조병옥이 당시 그의 감옥 동기였다.
최능진은 1945년 해방이 오자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
(위원장 조만식, 부위원장 현준혁) 치안부장을 맡았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러나 그해 9월 13일 발생한 현준혁 암살사건으로
우익세력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자 이틀 후 10여 명의 추종자와 함께
38선을 넘기로 한다.
1945년 9월 15일 월남 도중 해주에 도착한 최능진은 동지들과
남조선 신문을 처음으로 구해서 읽다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조선에서는 아직도 친일 부역 경찰 출신이
그대로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모양 입 네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 이 가.“
"다른 건 몰라도 북조선에선 친일파 청산 하나는 확실히 하고 있지 않습네까?“
"그러게 말이야.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구만 기래.“
"남조선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갔습네다."
"내 이 놈들을 그냥 두지 안캈어!"
그래서였을까. 그가 남한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뛰어든 곳이 바로 경찰계 였다.
최능진은 그곳에서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가 친일파 출신을 경찰계 요직에
등용시키는 것을 목격하고 다시한번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덕술”이
수도경찰청 수사국장에 취임한 것을 비롯해 이익흥, 최운하, 최연 등
일제시대에 악명이 높았던 친일경찰 간부들이 요직에 속속
중용된 것이다. 최능진은 곧바로
친일경찰 퇴진을 주장했다.
친일경찰 청산문제를 둘러싸고 사사건건 논쟁을 벌이던
최능진과 조병옥·장택상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46년 10월 1일부터 대구 일원에서 발생한 10월 항쟁이었다.
이 사건의 진압 책임자였던 조병옥은 10월 7일 '대구지방 소요사태에 대한
경위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좌익세력의 불순한 파괴적 정치활동에
선동되어 일반시민이 가담한 폭동사건"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직접 현지로 내려가서 면밀하게 조사를 실시한
최능진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결국 그의 강력한 요구와 이를 수용한 김규식 박사의
제안으로 '대구사건의 원인규명과 대책수립을 위한 한미공동회담'이 열렸다.
이때 특이할 사항은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김종필의 장인)가
"남로당원"으로 이 혁명에 가담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박정희"도 골수 "남로당원" 이 었다.
골수 "보수파"란 사람들이 말하는 "빨갱이"였다.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의 14연대 소속의 주모자로 체포 , 구속 됐으나 더 이상
기록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를 살린건
"일본 만주 육사 선배 "백선엽"이 었다.
최능진은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이 직접 조사한 내용을 거침없이 증언했다.
다음은 당시 회담에 참석했던 송남헌 씨(김규식 박사 비서실장)의 증언이다.
한편 한미공동회담의 조선측 대표였던 김규식 박사 등은 조병옥 경무부장의 책임을
물어 그를 즉각 파면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도 자신들의
충직한 하수인의 목을 치라는 이 요구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조병옥은 , 최능진은 "경찰사기를 떨어뜨리고 위계질서를
무너뜨린 유해한 인물"로 몰아서 사직을 강요했다.
최능진은 이를 거부하고 한동안 정상근무를 했지만 결국 12월 5일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최능진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경찰복을 벗으며 그 유명한 '대(對) 조병옥 성명서'를
발표한 것인데, 요지는 다음과 같다.
"귀하는 당연히 현직을 사퇴하여 3천만 민중 앞에 고두(叩頭) 사과하는 동시에,
속죄의 의미로서 8·15 이후 불의(不義) 취득한 재산을 전재(戰災) 동포를 위하여
제공한 후 해방 전의 애국자 조병옥으로 돌아가기를 충고한다."
이에 맞서 조병옥과 장택상도 최능진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에도 몇 차례 공개적인 성명전이 불을 뿜으며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당시 신문이 이 희대의 성명전을 대서특필한 것이다.
물론 민중은 최능진에게 절대적인 지지의 박수를 보냈다.
특히 최능진이 마지막 성명서에서 밝힌 "조병옥·장택상 씨가 경찰 행쟁을
한민당의 책동에 의하여 자행해 온 것은 사실이다…
일제 주구가 일조일석에 애국자가 되어 민중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서민 대중 사이에서 최능진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기 시작했다.
당시 동대문경찰서 윤기병 서장은 사찰주임 최병용이 제출한 정보보고를 보고
깜짝 놀랐다. 유권자 지지 성향을 조사해 보니 민심이 이승만보다 “최능진”에게
완전 기울어 져 있었던 것이다. 이변이 아닌, 날 벼락이었다.
“이승만”혼자 출마하여 당선되는 알토란같은 “무주공산”지역에
“최능진”땜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유권자들은 2년 전 친일경찰 청산을 과감히 주장한 정치지도자
최능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윤기병 서장은 허겁지겁 장택상 수도청장 에게 보고, 결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박사를 당선시켜야한다" 는 극비지령을 받고
이들의 계획은 은밀히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진행되고 있었음으로,
“민관(民官)”연합작전의 성공이라 하겠다.
만약, 민관(民官)연합작전이 없었고 , 정상적 선거가 치뤄 졌다면, 아마도
우리나라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승만"은 국회의원도 못되고
"언감생심"어떻게 대통령 자릴 넘 볼수가 있었을 까요?
한낱 늙은이로 한 평생을 보냈을 것이며 "친일파 척결"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반목의 정치는 사라지고
남과북이 통일이 됐거나 , 아니면, 좀더
친근한 관계가 되지 않았을까 ?
생각해 봅니다.
이미 3년 전 막강한 “사조직”을 이용해 “최능진”을 무력하게 만든 전력을 갖고 있는
“이승만”으로 선 이번 사건도 “식은 죽 먹기만큼 쉬운 일이었지만, 문제는
국회장악이 큰 문제였다. “민주국가”에서 “삼권분립”이 엄연한데
어찌 국회를 정부가 장악 하겠는가?
미국과 “세계여론” 이 큰 문제꺼리였다.
1951년 12월23일 11시30분, 그 시절 임시국회의사당 인 경남도청
회의실에서 3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 자유당창당" 대회가 열렸다 .
당 대표는 비워두고 "부의장에 李甲成 , 김동성 이 선출됐으며,
의회중심의 정치 확립, 책임정치구현, 을 내세우며
"내각책임제" 를 강령으로 채택했다.
오후2시에는 부산 " 동아극장 " 에서 400여명이 모여 ,
또 하나의 " 자유당" 을 창당 했다 . 당수에는 李承晩 ,부당수엔, 이범석 ,
이렇다 할 政剛이나 정책을 다루지 않고 “이승만”을 지지한다는 정도였다 .
두 자유당은 모두 " 이승만을 지지했다. 하지만, 이갑성의 창당 "자유당"은
거리를 두고 "이범석'이 있는 자유당은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 을 했다.
그것은 이범석이 만든 "민족청년단"이 있기 때문이고,
(민족청년단은 1946년 10월9일 이범석이 조직하여) < 사조직>중 120만 명이라는
국내 최대의 관변 단체 중, 최대였다. 이승만은 1953년 9월 17일 이 단체를 숙청,
해산 시킨다. 이 단체를 <족청계> 라 부른다.
이유는 자신의 사조직 보다 크고 조직이 강성했기 때문에 없애므로 서
“이범석”에 대한 “트라우마”를 제거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 된다.
이승만은 같은 날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같은 이름으로 "창당" 하는
"이중플레이“를 통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경쟁 시켰다 .
지난번 1952년1월18일 정부개헌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국회에 상정됐으나
국회의 재적의원 175명중 3분의2인 117명의 찬성이 필요했다 . 그러나 결과는
143대 19라는 엄청난 차로 압도적 "부결" 이었다.
“이승만”으로 선 “개망신”인 셈이다.
이때 국회의 속내는 “이승만”의 총 사퇴“ 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은
출마의 명분을 잃었고, 이를 계기로 정부와 국회 간 충돌은 극도에 달했으며 ,
“이승만”의 “국회강제 장악”은 서서히 마각을 드러낸다.
마침내 관제민의(官製民意 )가 동원되고
官邊團體, 백골단, 땃벌레 ,민족자결단 , 등 정체불명의 단체와
地方議會 議員들은 연일 國會議事堂을 포위, 국회해산 을 요구했다
3월26일, 이승만은 자신의 생일을 맞아 6월 대통령선거에 출마포기 성명을 발표하는
" 쑈" 를 벌린 다. 이것은 관제시위에 "휘발류" 를 끼얹은 빌미를 만들었다 .
이때부터 관제시위는 절정에 이르게 되었으며 "시위대는" 이승만의 출마포기"
철회를 요구했고, 이승만은 정중히 "민의"를 거슬릴 수 없어,
수용한다며 출마의 명분과 "직선제“ 개헌에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주미대사" 무쵸"는 :
관제 시위단을 "폭력단" 이라고 했으며 한국은 갈수록 태산이라고
우려를 하며 본격적으로 정치 간섭에 시동을 건 다 .
1952년 5월25일 , 대통령선거를 1개월 남겨두고 정부는 "국회해산"을 강행했다 .
임시수도 "부산“을 중심으로 23개 市郡에 "계엄령" 을 선포하고 ,
5월26일엔 , "국제공산당"과 접선, “정부혁신 지도위원회" 를 구성했다는
"누명"을 씌워 국회의원을 체포하고, 50여명의 국회의원이 탄
국회통근 버스를 헌병대로 강제 연행하는 등,
국회의원 검거선풍이 부산을 휩쓸었다 .
6월3일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 국회를 해산 하겠다는 ,
최후통첩을 국회에 보낸 다. 議會 민주주의 에 이런 협박이 가능한 가?
오늘날 “박정희” 군사독재시절, 급조된 빨갱이 논란은 이런 것이 표본이 됐으리라 .
그러나 그토록 "이승만을 주시하던 美國과 국제여론이 들끓자 , 6월4일 이승만은
"국회해산" 을 단념했고, 대책 안을 모색했다. 그것은 장택상 (張澤相)의원이 중심 이
된 "신라회"가 주동이 돼, 대통령 직선제 와 내각책임제를 일부 발췌한 이른바
"발췌개헌안" 이었다. 이때 自由黨 내의 세력 갈등 은 내각 책임제 를 고수하는
이갑성파 , 정부案에 동조하는 이범석 파 , 가운데가 "캐스팅 -보트를
이루고 있는 "신라회" 였다 .
정부는 이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국회정족수, 확보에 7월초부터 경찰을 동원 ,
소위 案內 란 명목으로 숨어있는 국회의원을 색출해 의사당에 끌어 들였다 .
그리고 軍事裁判에 계루 중 이던 의원들도 "보석"으로 "구속을 해제 "
의사당 안에서 침식케 했다 .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일부 대학생들이 “반공 반파쇼 민주수호”의 구호와
함께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1952년 6월 20일에는
이시영(李始榮)· 김성수· 장면(張勉)· 조병옥(趙炳玉)· 김창숙(金昌淑)·
신흥우(申興雨)· 백남훈(白南薰)· 서상일(徐相日) 등 재야 인사
60여 명이 부산시 남포동에 있는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호헌구국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선언대회를
개최하려는 순간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대회가
무참하게 저지당해 무산 되었다.
한편 국제연합한국위원단은 우리나라 정부에게 사태진전을 우려하는 성명을 내고,
트루먼(Truman,H.S.) 미국대통령은 각서를 보내왔지만 이는 내정 간섭 여부의
불씨를 더하였을 뿐이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국무총리 장택상은
국회 해산을 협박 수단으로 하면서 발췌개헌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7월 7일 밤 , 의사당에 강금 당하다 시피 한 국회의원 166명은
발췌개헌안 을 "기립"하면 찬성 , 앉아있으면 반대, 로 가결했다 .
결과는 (찬성 163 반대 0 기권 3 ) " 개도 웃을 일이다 "
이게 , 의회민주주의 인가 ? 만약, 안 일어났다면 , 어찌됐을까 ?
선거결과
제1공화국의 대통령선거는 한 번의 간접 선거와 세 번의 직접선거였다.
이곳에서는 직접선거를 대상으로 한다. 선거 방법이야 어쨌든 선거 결과는
뻔 했다. 이때 출마하신분이 “죽산 조봉암”선생과 “부통령을 지내신
이시영”선생인데, 이 분들의 선거운동은 뻔했기 때문에
도저히 “이승만”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선거에서
조직이란 것은 무서운 것이다.
1952년 8월 5일 날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는
표면적으론 이승만과 조봉암 과 이시영의 대결로. 3파전 이었다.
결과는 유효표를 기준으로 하여 서울 84% 경기도 89%
강원도 94% 충북 89% 충남 85% 전북 69% 전남 76% 경북 77% 경남 58%
제주 86%의 이승만의 "압승" 이었다.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수단과 방법, 온갖 만행을 저질러 국제적 망신까지 당하며
치룬 선거인데 “압승”을 못했다면, 이상한 일 이었다.
그 배경은 바로 6.25 가 아직 끝나지 않았을 때라 좀 특별한 상황이라 해도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제주"이다. 4.3 사건이 생생한 지역의 주민들이
그 원흉이라고 지목된 이승만을 전국에서 4번째의
높은 비율로 지지했다는 점이다.
4.3. 사건의 직접 희생자들이 가장 많았을 서귀포와 중문 등을 중심으로 한 남제주군을
보기 위해 제주도 각 선거구의 결과를 보자. 북제주군이 이승만 49,000표
이시영과 조봉암 합해서 8,000표 이승만이 87% 남제주군 이승만 31,000표
조봉암 이시영 합해서 4,000표로 89%로 오히려 북제주보다 더
지지자가 많다는 점이 특이하다.
4.3 희생자 가족이 바로 이웃해서 살고 있어 그 경험이 생생한 그 당시의
결과로서는 의외라고 생각되지만 그만큼 최근에 회자되는 4.3 사건의
내용과 그 당시의 주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내용에 상당한
"괴리"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1952년은 아직도 군경이 한라산을 중심으로 토벌작전이 계속되던 시기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선거에서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전국에서
"경남"이 가장 “이승만”에 대한 지지가 낮다는 점이다.
경남의 개인별 득표는
이승만 690,000 조봉암 289,000 이시영 212,000 이었다. 왜일까? 원인은 그 당시의
민도와 피난민들의 구성에서 찾을 수 있다. 피난민 중에는 많은 지식인들이 부산에
있었으니 그들이 이승만이 서울 철수 시에 보여준 비겁한 행동에 대해
비판적이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니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어찌 됐던 “이승만”은 “부산 정치파동”의 결과로 제2대 대통령선거에 비겁하게
당선이 되었다. 이번 선거로 “이승만”은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조봉암”선생한테 선거에 지고 “개표”에 이기는
이상한 선거로 또, 당선 된다.
합동통신사 편집국장 鄭 龍 炫 옹 의 記事 를 보면 , "부산정치파동 은
無法天地 였다는 표현밖엔 없다. "땃벌레 , 백골단 ,민족자결단 ,부산의 골목에
나붙은 <국회의원 을 소환하라!> " 국회를 해산 시켜라 "
< 趙 炳 玉 을 죽여라 !> 등의 악랄하고 야비하기 짝이 없는 벽보와 데모대의 구호 ,
신문사 습격사건 , 계엄령선포, 국회의원 강제연행, 구금, 전무후무한 "기립표결 "이
모든것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난무했다. 1952년 이라면, 國運을 건 6.25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을 때 인데, 후방에서 사상유래가 없는 政治波動을 벌리고
있었으니...그 얼마나 위험한 일 이었던가 ?
국운보다 자신의 대통령자리를 우선으로 생각했던 이승만과 자유당! 가장 인상 깊게
남는 일은 "국회를 비난하고, 野黨의원들을 규탄하던 벽보와 데모대 이다 .
낮밤을 가리지 않고 釜山 번화가 에 나붙은 "붉은 글씨들" 거리는 "민주질서 의 파괴,
유린하는 이러한 "亂動이 합법적으로 이뤄지며 훼손하는 사람은 " 땃벌레 , 백골단 ,
민족 자결단 , 등에 의해 구타와 기타방법에 의하여 처벌 됐다 .
釜山거리 가 무법천지 였 다면 , 國會를 중심으로 한 政街는 불법, 공포,
압력의 난장판, 야당의원은 얻어맞고, 연행, 구금, 되는 만신창이가 됐었다.
있지도 않은 "대남 간첩단사건 (국제공산당사건)이라는 "알쏭달쏭“한 사건과
관련시켜, 야당의원, 족청계 인사들이 金昌龍 (당시 특무대장) 이 이끄는
CIC에 끌려가는가 하면, 난데없이 "계엄령“을 선포해 놓고
"국회의원“을 무더기로 끌고 가기도 했다 .
국회의원 출근버스에 탄 국회의원 40여명을 통째로 버스 째 "수상하다며"
납치하듯 끌고 가 버렸다 .
의사당 밖에선 연일 살판난 "땃벌레 ,백골단 , 민족자결단, 들이 이끄는 하부조직원들이
"국회의원 소환과 해산을 "외치며 데모를 벌 렸다. 이때는 牛마차 . 말 마차 까지
동원 됐는데 牛意, 馬 意, 란 말이 신종 어 로 탄생했다.
이때 牛意 , 馬意 까지 동원 됐다고 기사를 쓴
" 신문사는 습격을 받아 , 편집국장은 의자에 앉은 체 폭행을 당했고,
편집국내 의 전화기 등 모든 집기는 산산조각이 났다 . 발췌개헌안이 법에도 없는
기립표결은 議政史에 크나큰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 그런데 지금도 이와 비슷한
"의정 행투" 가 "박정희의 유신정권때 빈번하게 일어났고,
의도적으로 기도하고 있어 "김두한"의원의
"오물투척"사건까지 일어났다. .
“넋 빠진 보수주의 계열의 학자 란 자들, 이승만이”민주주의“수호를 안 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고 거품 물고 “침”튀며 말한다. 무식한 건지? 아니면,
그들 눈엔 “부산 정치파동”같은 것이 민주주의라고 배운 건지?
어떻게 보면, 외계에서 날아온 뚱딴지같은 돌덩이”들이라 고 일축하고 싶다.
“자유당” “골수 보수파?”우리나라에 “보수파”가 정녕 존재 할까?
“보수”라고 외치는 집단은 “종일(從日)과 종미(從美)”에
목숨 건 집단이다,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면,
무조건 “종북(從北)빨갱이”다. 온 국민을 2분법으로
나눠서 편 가르기 패싸움을 야기 시키는 집단이 바로 이들 변종된 “보수”다.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이해 못하고 “군국주의”의 획일화에 박수를 치는
후진성과 강자에 빌 붙어 기생하는 노예근성에 매달리고 있다.
강자에겐 엎드리고 약자는 무자비하게 밟아버리는
전형적인 종놈의 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득표에 이기고 개표에 진’ 선거
다음은 당시 진보당 당수 대통령후보 "죽산"조봉임 선생의
이야기를 쓸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