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자리, 그 길을 걷다
“지금 햇빛이 이렇게 쨍쨍한데, 이거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 아닌가? 내일 비가 온다고 일기예보에 뜨네?”
비가 온다는, 친구의 카톡을 보고 잠시 망설였다. 어렵게 잡은 서울숲 나들이 약속인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지난번 개나리가 만개한 응봉산에 갔을 때, 친구들과 산 아래 서울숲을 내려다보며 “다음은 저기다!”라고 결정했었는데. 이대로 기회를 날리긴 아쉬워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야외가 안 된다면 실내로 가자! 마침 얼마 전 TV에서 봤던 ‘데이미언 허스트 전시회’가 머릿속을 스쳤다. 우천 소식에 발길을 돌린 친구들을 제외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GO’를 외치는 열렬파 ‘이씨 삼총사’가 뭉쳤다.
첫 목적지는 ‘송현공원’ 옆 ‘서울공예박물관’. 그 앞을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안으로 발을 들인 건 처음이었다. 넓은 잔디 광장을 지나 건물로 들어서니, 훈훈한 온기가 몸을 감싼다. 창밖 빗줄기를 바라보며 쉬는 사람들을 지나 동선을 따라 올라갔다. 예쁜 노리개, 고풍스러운 한복, 고종황제가 쓰던 서늘한 칼 등을 마주하며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덕성여자중고등학교’ 사잇길을 따라 걷는 ‘감고당길’은 평일이라 무척 한적했다. ‘정독도서관’ 사거리를 지나 세련된 카페들이 줄지어 선 골목으로 들어서니 좌측에 ‘국립현대미술관’이 보인다.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아티스트 ‘데이미언 허스트’의 전시가 열리는 곳이다.
‘데이미언 허스트’(1965∼)는 현대 미술계에서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1990년대 영국 현대미술의 부활을 이끈 ‘YBA(Young British Artists)’의 핵심으로, 삶과 죽음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파격적으로 다룬다. 그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죽음의 필연성’과 ‘생명에 대한 경외’였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제시하면서도, 박제나 보석을 통해 이를 영구히 보존하려는 역설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포름알데히드 용액이 담긴 수조에 거대한 상어를 통째로 넣은 작품! 이 작품을 실물로 보니 압도적이었다. 실제 해골을 백금으로 캐스팅하고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은 〈신의 사랑을 위하여〉는 인간의 필멸성과 자본주의적 가치를 동시에 웅변하는 듯했다. 특히 시선을 끈 것은 수많은 나비를 납작하게 붙여 만든 수려한 작품이었다. 그 정교함 속에 숨은 생명의 허무함! 묘한 느낌에 전율했다. 아들의 조언대로 관람객이 적은 평일 오전에 이곳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관을 나와 길 건너 경복궁 민속박물관 옆 ‘7080 추억의 거리’로 향했다. 교실, 다방, 목욕탕, 이발관… 그 풍경 속에 발을 들이는 순간 우리 삼총사는 순식간에 학창 시절로 돌아갔다. DJ가 틀어주는 노래를 들으며 계란 노른자를 띄운 쌍화차 한 잔에 행복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삼청동 ‘항아리 수제비집’에서 맛있게 식사를 마친 후, 바로 옆 포스톤즈 카페에 갔다. 하지만 젊은이들 틈에서 시니어들이 민폐를 끼칠까 싶어 인근 스타벅스로 발길을 돌렸다. 통유리 창밖의 활짝 핀 목련을 바라보며 수다를 떠는 맛도 쏠쏠했다.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목표는 달성했지만, 시계를 보니 겨우 오후 2시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버스를 타고 덕수궁으로 향했다. 쌀쌀한 날씨에 우산을 쓰고 뜨끈한 붕어빵을 베어 무는 기분은 최고였다.
캐나다 교포 호현이는 서울시청 별관 13층 ‘정동전망대’가 처음이다. 덕수궁을 내려다보며 얼룩진 근현대사 지식을 한껏 뽐내봤다. “호현아! 다 이해했지? 조금 있다가 시험 볼 거야!”
배재학당을 지나 서소문 사거리로 내려갔다. 어릴 적 청계초교에 다닐 때 있었던 그 서소문 고가도로가 철거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1966년에 개통되었으니 무려 60년 전의 일이다. 기찻길을 지나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으로 갔다. 그곳은 조선 시대 공식 처형장이었다. 정조 사후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 ‘천주교도’들을 처형한 비극의 땅이었다.
순교자 ‘현양탑’을 지나 ‘하늘광장’으로 들어서니 엄숙한 세계가 펼쳐졌다. 다양한 조각품과 ‘스테인드글라스’, ‘피에타상’, 그리고 조명이 아름다운 ‘좁은 문’까지. 거대한 붉은 벽면 옆에 서 있는 조각상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깊게 움직였다. ‘명동성당’, ‘약현성당’, ‘절두산’, ‘삼성산 성지’까지 두루 가봤지만, 이곳이야말로 자신을 재발견하고 회개의 힘을 되찾는 참된 안식처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는 투썸플레이스에서 차를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비가 와서 서울숲을 걷지는 못했지만, 오랜만에 박물관과 전시장, 기념관을 누비며 견학하고 정서 함양도 듬뿍했다.
호현아! ‘덕수궁 정관헌’에서 고종이 마셨던 ‘양탕국’이 대체 뭐냐?
글쓴이, 나그네 인생 이규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