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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 헌신의 해양 서사시 국가적 불의를 자신의 정의로 극복한 사나이 바다에서 읽는 조선 수군 장수 이순신 |
해도 1 |
이 순 신
전쟁 전야. 임진년 4월
“쾅 꽈광 쾅”
함포 발사를 알리는 징 소리가 울리자마자 조선 수군 전라좌수영 이순신 함대는 천둥 같은 포성으로 천지를 진동시키며 조용히 잠들어 있는 여수의 봄 바다를 화들짝 깨웠다.
상갑판을 검은 철편으로 촘촘히 덮은 넓둥근 한 모습이 거북 같다 하여 거북선이라 불린 새 군함의 우뚝 솟은 용머리에서 포연이 터지고, 이백 보쯤 떨어진 표적에서 물기둥이 솟았다.
이어 뱃머리를 왼편으로 돌리며 들어낸 거북선의 우현에서 포문이 덜컥덜컥 열리며 시커먼 포신이 튀어나와 요란한 포성과 함께 뜨거운 포연을 내뿜었다.
“키 왼편으로 전타”
조방장의 고함 소리와 함께
퉁 드르륵 퉁
노 젓기를 가름하는 북소리가 빠르게 바뀌자
거북선은 키를 바짝 당기며 좌현 노를 옆으로 길게 뻗어 물을 잡고,
우현 노를 크게 저어 제자리 돌기를 한 후 좌현 포신을 쑥 내밀고 또 한바탕 요란한 화염을 내뿜었다.
표적은 박살이 났다.
“와”
군사들의 우렁찬 함성이 매캐한 화약 냄새로 가득 찬 거북선에서 터져 나왔다.
연이어 줄줄이 뒤따르던 판옥선에서 차례차례 포성이 터지고 포연이 피어오르며 우현, 좌현 교차 함포사격이 계속되었다.
기함에 우뚝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거북선과 판옥선의 함포사격을 관찰하던 이순신은 마지막 함까지 사격을 마치는 것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명령을 내렸다.
“들어가자.”
기함에서 사격 종료를 알리는 징 소리가 길게 울리고 붉은 신호기가 내려갔다.
“돛을 올려라아.”
커다란 황포 돛 두 개가 활짝 돛대를 타고 올라갔다.
둥 타다닥 둥
나지막한 북소리가 울리자 거북선의 커다란 노는 힘차게 물을 차고 함대는 까막만을 뒤로 전라좌수영을 향하여 함수를 잡았다.
전라좌수영 수군과 백성들이 온 힘을 다하여 만든 거북선의 항해 시운전과 함포사격을 처음 실시한 날, 4월 12일.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기 바로 하루 전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조선을 침공할 것이란 소문이 퍼지자 조선 조정은 마지못해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대마도를 거쳐 일본에 간 통신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은 우여곡절 끝에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돌아와 임금에게 보고했다.
서인 황윤길은 “반드시 전쟁이 일어나 나라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보고 하였고,
동인 김성일은 “그곳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낌새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라고 보고 하였다.
조선은 개국 이래 200여 년이나 평화롭게 지내와 전쟁에 대한 위기의식이 없었다.
세종대왕은 일찍이 천자, 지자, 현자총통 등 우수한 화포를 개발하고 장차 그 쓰임새를 중히 여기도록 하였으나 사대 선비의 나라 조선은 지속적으로 국방을 강화해야 할 국가적 책무를 소홀히 하였다.
결국 조선 조정은 일본의 조선 침략 움직임에 대해 확실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일본의 조선 침략 징후를 왜구의 활동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평가하였으며 태평스럽게 시문 놀이나 즐기는 무사안일에서 헤어 나올 줄을 몰랐다.
섬섬옥수 문신들이 시를 읊으며 국경을 지키는 일이 자연스레 벌어지고 있었다.
나라가 온통 이런 지경이니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나라를 제대로 지킬 수 있었겠는가?
이순신은 당시 우의정 겸 이조판서였던 유성룡의 천거와 선조의 재가에 따라 1592년 2월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로 전격 부임하였다.
일본의 조선 침략 징후를 위중하게 본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자마자 수군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이는 황야에 웅크리고 있던 영웅이 마침내 구국의 바다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요,
또한 하늘이 조선을 버리지는 않았음이었다.
7년 후 최후의 큰 싸움에서 적의 총탄을 가슴에 맞고 전사 함으로써 구국 헌신의 임무를 다하고 그 거룩한 생을 마친 조선 수군 장수 이순신.
국가적 불의를 자신의 정의로 극복한 사나이.
그 장엄한 비극의 서막이었다.
임진년 전쟁이 일어나기 겨우 1년 2개월 전이었다.
이순신의 군비 증강 과업은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나대용과 판옥선 장인들을 여수 선소에 모아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손수 그린 거북선 그림을 펴 놓고 머리를 맞대어 토론하며,
우리 산야의 소나무로 선재를 골라 자르고 켜고 찌고 말려 철갑 거북선을 건조하였다.
주조 장인들과 함께 쇠를 모아 지자, 황자, 현자포 등 각종 함포와 비격천뢰 같은 시한폭탄을 만들고 화약을 구었으며,
궁인들을 모아 죽궁을 비롯한 각궁 등 활과 장전, 편전, 불화살 등 직사 무기를 만들고,
예하 각 진을 돌며 바닷가 장정들을 선발하여 수군으로 양성하고,
전라좌수영 주둔지에 수중 개폐식 쇠사슬을 설치하는 등 해안 방어 시설을 튼튼히 하였다.
또한 이순신은 류성룡이 보내준 병서 “증손전수방략”을 비롯한 많은 병서를 탐독하고 해전과 육전, 화공법에 대해 연구하였으며, 밤새워 장수들과 병법을 토의하였다.
함대의 전술 숙달을 위한 기동 훈련, 수로 숙달 훈련, 함포와 활쏘기 훈련을 육상과 해상에서 반복하여 실시하는 등 해전의 이론 연구와 실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간은 살 같이 흘러 임진년 4월 13일 오후.
일본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왜군 병선 500여 척이 부산에 와 닿았다.”는 급보가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날아왔다.
이순신은 즉각 “전라좌수영 전군은 각 진지를 굳게 지키라. 별도 지시가 있으면 즉시 여수로 모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책임 지역 방어에 돌입하였다.
4월 16일 경상감사 김수로부터 “이달 13일 왜선 400여 척이 부산포 건너편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적의 형세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극히 우려됩니다.”는 공문이 왔다.
파발이 달리고 장계가 올라갔다.
200여 년 만에 잠자던 조선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경상감사로부터 또다시 공문이 왔다.
“적의 형세가 극성하여 부산성, 동래성이 이미 함락되었고 적들은 내지로 향합니다. 만약에 경상우도에 변고가 생기면 즉시 와서 구원해야 할 일로 조정에 보고 하였으며,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라좌수영의 군사들은 신속하게 지역 방어 태세를 갖추었으나, 경상수영의 절도사와 군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일본군의 위세에 눌려 싸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많은 전선과 무기를 자침시키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에서 바다로 들어오는 적을 바다에서 막지 않고 조국의 땅을 싸움터로 쉽게 내주어 수많은 백성을 죽게 만들고 나라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든 것이었다.
동래성은 처참하게 함락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3만 명은 거침없이 동래성을 포위하고
“무모한 전투는 피하라. 나는 조선의 도성으로 가야 한다. 그대가 굳이 싸우겠다면 할 수 없지만,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라.”는 목편을 보냈다.
이에 동래 부사 송상현은
“싸우다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비켜 주기는 어렵다.”는 목편을 성 밖으로 던졌다.
일본군은 공격을 시작했다.
동문이 먼저 격파당하고 일본군은 성안으로 진입했다.
아녀자까지 나서서 기왓장을 던지며 일본군에 맞섰지만, 성은 함락되었고, 끝까지 성을 지키던 송상현과 군사 3천, 같이 싸우던 백성들은 모두 일본군에게 참혹하게 몰살당하였다.
송상헌은 성이 무너지자 임금이 계신 북쪽으로 절을 하고, 고향의 부모님에게 보내는 시를 한 수 쓴 후 두 눈을 부릅뜨고 전사하였다.
양산과 울산도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홀로 고립된 성을
적들이 달무리처럼 에워쌌는데
다른 진들은 편안히 자고 있네
군신의 도의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도다
일본 수군은 육군이 상륙한 지 2주 후인 4월 27일 부산포에 도착했다. 그들은 일본 삼나무로 건조한 첨저 선형에 소구경 함포를 배에 매달고 조총과 일본도로 무장하였다.
요컨대 일본 수군은 해상전투에 있어서 조총을 쏘며 빠른 속력으로 적선에 접근하여 올라타고 백병전을 벌이는 것을 주 전술로 택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형선 아다케부네와 가볍고 빠른 중형선 세끼부네로 500여 척의 대함대를 편성하고 나고야를 출발하여 조선을 침공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조선의 남해안을 돌아 서해로 올라가 내지에서 북상하는 육군에게 추가 병력과 전쟁 물자를 공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 수군은 처음부터 “수륙병진(水陸並進) 공격 전략”을 수립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 수군은 반드시 남해를 거쳐 서해로 가는 해로를 확보해야 했으며, 그들에게 견내량, 한산도, 울돌목은 허리가 긴 조선에서 나고야와 부산과 한강, 임진강, 대동강을 연결하는 생명선이었다.
여기에 여수 전라좌수영에 우뚝 서서 이 해로의 초입을 꽉 틀어쥐고 막아선 이순신이 일본 수군과 사생결단 해전을 벌이게 되는 것은 그의 두 어깨에 지워진 구국의 숙명이요, 조선에는 천우신조였다.
급보를 접한 이순신은 예하 부대에 “전 함대는 모든 함선의 출전 준비를 완료하고 4월 29일까지 여수 본영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다시 내렸다.
「선전관을 보내어 급히 이른다. 너는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세하여 적을 치라. 그러나 천리 밖에 떨어져 있는지라 혹시 무슨 뜻밖의 일이 있을 경우에 반드시 이 지시에 구애받지는 말라」는 4월 27일 자 관문이 도착 하였다.
이순신과 장수들은 즉각 진해루에 모였다.
대다수 장수들은 분기탱천하여 적이 남해안 일대를 거점화하기 전에 당장 무찔러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전라남도 해안 방어에 전념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소수 의견도 있었다.
녹도 만호 정운이 분개하여 소리쳤다.
“경상도 바다는 우리 바다가 아니란 말입니까? 경상도가 무너지면 전라도는 온전하단 말입니까?”
이순신은 “지키기만 하면 불리하다. 만일 한성이 함락되면 이곳만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 더 이상 출전의 불가함을 논하지 말라. 출전 준비를 신속히 완료하고 소속 부대 군기를 더욱 엄하게 세우라.”고 지시하고
「북상 중인 적을 교란하고 서남해안 방어와 부산 근해의 왜 수군 소탕을 위해 4월 30일 이억기 함대가 오는 대로 함께 출동하겠다.」는 장계를 올려 보냈으며,
이에 대한 세부 전투계획을 수립하여 전라감사 이광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보냈다.
한편, 경상도 포구의 관리, 군사, 백성들은 일찍이 도망가고 경상수영의 전선과 무기, 물자는 남은 것이 없었다.
조정은 장군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급히 군사를 모집하여 상주로 내려가게 하고, 신립을 삼도순변사로 삼아 충주로 내려보내 한양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일은 상주 인근에서 신병 훈련을 하다가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기습을 받고 궤멸하고 말았다. 신립은 천혜의 요새 조령을 버리고 기병과 보병 8천으로 남한강 변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쳤으나 조령을 무혈 통과하고 비워 논 충주성을 걸어서 점령한 1만 8천 고니시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들어 순식간에 궤멸하고 신립은 탄금대 푸른 강물에 뛰어들고 말았다.
조선이 전통적으로 믿고 자랑하던 막강 기마대의 몰락이었으며, 일본군 조총부대의 3교대 밀집 사격 전술이 창,칼을 앞세우고 무모하게 달려드는 기마 보병을 상대로 쟁취한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리하여 조령, 남한강 등 한성 이남 천혜의 방어선은 맥없이 무너지고 한성의 위기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원컨대 한 번 죽음으로써 기약하고 즉시 범의 소굴을 바로 두들겨 요망한 기운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부끄러움을 만 분의 일이나마 씻으려 하옵거니와, 성공과 실패, 잘되고 못 되는 것은 신이 미리 헤아릴 바가 아닙니다.」
이순신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함대를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선조에게 전라좌수영 수군의 출전과 임전 결의를 이같이 밝히고 피투성이의 전장 경상도로 출전한다.
임진년 5월 1차 출정. 적선을 분멸하다.
“나가자!”
기함에 오른 이순신은 엄숙히 명령하였다.
‘두둥 둥둥 둥’
1592년 5월 4일 새벽 여수 전라좌수영.
어둠을 뚫고 임진년 첫 출정의 북이 울렸다.
나라를 침략한 적을 찾아 나가는 첫 출정이다.
바다로 쳐들어온 적을 바다에서 쳐부수러 나가는 조선 수군 함대의 첫 출정이다.
씩씩한 군악이 울리고 여수항을 가득 메운 전선들은 일제히 돛을 올려 때마침 불어오는 북서풍을 타고 해안을 떠나 차례차례 캄캄한 새벽 바다로 나아갔다.
병력 5천,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5척이었다.
아직 훈련이 부족한 거북선은 이번 출정에 포함하지 않았다.
횃불을 들고 포구에 모여든 수군 가족과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 부둥켜안고 그들이 용감히 싸우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목이 터지라 응원의 함성을 보냈다.
함대는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오동도와 남해도의 남단을 돌아 미조항을 지났다.
이순신은 함대의 전후방에 협선으로 편성된 탐색선을 배치하여 적선을 수색하였으며 적의 기습에도 대비하였다.
함대는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남해도 소비포에 이르자 날이 어두워졌다.
이순신 함대는 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지새웠다.
판옥선이 닻을 놓고 협선과 포작선은 판옥선에 줄줄이 계류하였다.
순찰 협선이 작은 등불을 달고 전선 사이를 돌아다니며 함대 야간지시를 하달하였다.
“5월4일 본영 야간 지시
일. 묘박 중 각 전선은 항해할 때와 동일한 근무 태세를 유지한다. 경계를 철저히 하고 빈틈이 없게 하라. 모든 격군은 반드시 쉬게 하라.
일. 오늘 밤 날씨가 좋다. 월령은 초순. 적 기습에 대비하여 협선을 본대 전, 후, 좌, 우 이중으로 전진 배치하여 경계토록 하고 소비포 뒷산 정상에 원거리 감시조를 배치하라.
일. 모든 전선은 야간에 불빛이 새지 않도록 하라
일. 오늘 주간 항해할 때 각 전선 간 깃발과 수기 신호 교환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정박 중 시정하라.
일. 조류가 바뀔 때 주묘 되지 않도록 특히 잘 살피고 노를 유실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일. 긴급사항 발생 신호는 꽹가리 3타.
내일 새벽 박명에 출항한다. 술 마시지 말라. 졸면 죽는다.
새벽이 되었다. 동녘이 채 밝기도 전에 수면에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전선들이 즉시 출항할 수 있도록 닻줄을 미리 감아 놓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닻줄 물레를 돌리는 군사들의 이마에는 벌써 땀방울이 흘렀다.
‘두둥 둥둥 둥’
출항이다. 군사들은 재빠르게 닻을 모두 감아올리고, 노를 내리고, 돛을 올렸다.
“앞 돛은 아래 당김줄을 바짝 당기고 위 당김줄은 두발 정도 내 주어라. 뒷 돛은 모든 당김줄을 바짝 당겨라. 키는 정동을 잡아라. 해 뜨는 쪽이다.”
남서풍, 우현 함미로 받는 순풍이었다.
“바람을 우현 함미로 비스듬히 안고 항해한다. 바람이 좋다. 격군들은 소비포를 벗어나면 노를 올리고 우현으로 이동하여 쉬도록 하라. 전투를 앞두고 힘을 아껴야 한다.”
조류가 강하게 흐르는 소비포 입구 저수심을 지나자 작은 북 소리가 그쳤다.
“노를 올려라. 돛을 바짝 당겨라. 남동으로 함수를 잡아라”
돛이 바람을 한껏 품자 전선들은 기함을 따라 함수를 맞추고 범주를 시작하였다.
바람이 제법 있어서 파도가 일었다.
싸움을 앞둔 적전 항해였으나 전선들은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판옥선이 앞서 달리고 협선은 작은 선체로 파도를 싹싹 가르며 부지런히 달렸다.
사방으로 펼쳐진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 사이사이로 윤슬이 빛났다. 이순신은 많은 섬의 위치와 지형을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그 모습을 기록하여 두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우리 산하를 저 왜적이 감히 침범하다니. 우리 바다를!
이순신의 가슴은 미어졌다. 격한 분노가 밀려왔다.
이순신은 장도의 칼자루를 힘껏 움켜잡았다.
바다 멀리 또는 가까이, 해안의 구석구석을 수색해 가며 5월 6일 함대는 당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서 경상우수사 원균은 무장도 없는 판옥선 1척을 타고 나타났다.
70여 척이나 되는 경상우수사 전선과 많은 수군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바다로 오는 적과 바다에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군사와 함정을 버리고 도주한 수군 장수의 모습은 한탄스럽고 비겁하기 짝이 없었다.
함대는 거제도 송미포까지 항해하여 또다시 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5월 7일 새벽.
함대는 송미포를 출항하여 거제도 남단의 거센 파도를 헤치고 거제 동안의 조라포, 지세포, 장승포 바다를 샅샅이 수색하며 옥포만 쪽으로 올라갔다.
왼편으로 쑥 들어가 시야가 가려진 옥포만 쪽으로 먼저 나간 협선의 척후장 사도 첨사 김완과 여도 권관 김인영이 신기전을 쏘아 올렸다.
적을 발견했다는 신호였다. 기함에 전투배치 깃발 신호가 힘차게 올라가고, 함대의 군사와 격군들은 좁은 함내를 이리저리 날뛰며 순식간에 전투 준비를 완료하였다.
이순신은 엄중히 명령하였다.
“경솔히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겁게 침착하라.”
명령을 알리는 깃발이 올라갔다.
“돛을 내려라. 모든 격군은 정위치 하라.”
“하무를 물어라.”
격군들은 하무를 힘껏 물고 이를 악물었다.
‘둥 두루룩 탁. 둥 두루룩 탁.’
북소리가 빨라졌다.
함대는 양지암취를 돌아 좌 선회하여 옥포만 입구로 빠르게 진입하였다.
옥포만 해안은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검붉은 연기가 뒤 덮혀 있었으며 수십 척의 왜선이 정박해 있었다.
왜군의 큰 층루선들은 선체에 오색 휘장을 두르고 수많은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모든 함포는 즉시 발포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대기하라.”
“함대 전속으로 돌격하라.”
돌격 신호 깃발이 올라갔다.
두둥 둥 둥
함대는 힘차게 북을 울리며 적진으로 돌격하였다.
조선 수군은 아예 없는 것으로 알고 민가 약탈에 여념이 없던 왜군들은 갑자기 나타난 조선 함대의 모습에 놀라 급히 나팔을 불어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불러들이며 이리저리 날뛰었다.
왜 수군 장수 도도 다까도라는 “총원 전투 준비”를 외치며 흩어져 있던 군사를 모아 급히 싸움 준비를 갖추었다.
왜군 장수들은 육지에 올라갔던 병력이 돌아오자 가까스로 전투 대형을 갖추고 조선 함대가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둥글게 진을 펼친 조선 함대는 무섭게 다가오다가 왜군 함대 전방에서 소리 없이 딱 멈추고 그 자리에서 회전하여 옆구리를 들어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일본도를 꼬나든 왜군 돌격대는 목을 빼어 조선 수군을 노려보았다.
순간
‘지잉 잉’
늘어선 조선 함대에서 징그러운 징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천지를 진동하는 포성이 울렸다.
세계 처음으로 본격적인 함대함 함포 전의 첫 포성이 옥포만의 이순신함대 지자포에서 터진 것이었다.
수백 발의 포탄과 살탄이 폭풍처럼 날아갔다.
왜군의 불랑기포와 조총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발사되었다. 그러나 조총 탄은 조선 수군이 멈춘 곳 바로 앞 수면에 우박처럼 떨어지고 불랑기 포탄은 판옥선의 두꺼운 참나무 방패를 힘없이 칠 뿐이었다. 왜 수군 총포의 사정거리가 미처 못 미친 것이다. 왜적들은 혼비백산하였다.
살탄으로 배가 깨지고 포탄에 수군들이 날아갔다. 층루에 버티고 서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소리소리 지르던 왜장은 고슴도치가 되어 층각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호화롭게 나부끼던 깃발과 휘장은 불화살을 맞고 불쏘시개가 되었다.
조선 함대는 옥포만 어귀를 막고 바람처럼 천둥처럼 함포와 불화살을 쏘았다. 돌격해 나오던 왜군들은 순식간에 배가 깨지고 불타는 큰 피해를 입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왜군 공격대는 모두 무너지고 흩어져 해안의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갔다.
왜군들은 혼란 속에서도 그들의 전투 경험을 살려 병력을 규합하여 재차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조선 수군은 둥글게 늘어서서 좌, 우현 포를 마음대로 쏘아대고 있었다. 천둥 번개 비바람이 따로 없었다.
바다 먼 거리에서 왜군의 조총은 한갓 막대기였으며 뽑아 든 일본도 역시 저 혼자 반짝일 뿐이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왜군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적에게 빠른 속력으로 접근하여 조총으로 제압하고 재빨리 적의 배에 갈고리를 걸고 올라타 일본도로 승부를 내는 백병전 전술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조선 수군은 강력했고 신속했다.
일사불란하였으며 정확했다.
왜군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배가 깨진 왜군들이 거제도로 올라가 육로로 부산까지 도망간다는 것은 너무 멀고 위험한 일이었다.
어쨌든 해상 돌파를 감행하여 탈출하는 것이 유일한 방책이었다.
이순신은 기함의 장대에서 전황을 면밀히 살펴보며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승패는 이미 갈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적을 얕잡아 보고 마구 돌격하다가 우리 군사들을 조총에 맞게 할 이유가 없었다.
살아남은 왜적이 비교적 성한 수척의 전선을 골라 타고 남쪽 해안에 바짝 붙어 달려 나왔다. 이순신은 그들이 마지막 돌격을 하며 해상으로 탈출을 시도할 것으로 예상하고 숨을 고르며 기다리고 있던 협선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나팔을 불어 명령을 하달하고 ‘전진 돌격’기를 활짝 올렸다. 일제 사격을 지시하는 그 징그러운 징소리가 또 울렸다.
참나무 방패를 바짝 세우고 현자포에 조란탄으로 경무장한 협선은 건장한 격군과 명사수들로 편성된 군사들을 태우고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왜 전선들은 결사적으로 노를 저으며 불화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돛까지 올렸다.
그러나 남쪽 해안은 남서풍의 바람 그늘 이어서 바람이 돛에 닿지 않았다. 펄럭이는 돛은 오히려 불쏘시개가 될 뿐이었다.
왜군들은 부지런히 선체에 바닷물을 끼얹으며 노를 저었다. 조선 수군 협선들은 적선으로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왜선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협선의 현자포가 불을 뿜고 불화살이 날아갔다.
왜군이 조총을 마구 발사한 후 재 장전하는 사이 근접한 협선의 명사수들은 정확한 화살 공격을 퍼부었다. 근거리에서 편전은 적의 갑옷을 단방에 꿰뚫었으며 속사 속도는 조총보다 훨씬 빨랐다.
작은 조선 활은 강력하였으며, 흔들리는 배 위에서 조준하기는 조총의 가늠자보다 유리하였다.
왜 적선의 코 앞까지 접근한 협선은 발화탄을 매단 화살을 정확하게 쏘아 넣었으며 왜선들은 선내에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바다의 나라 왜 수군은 조선 수군의 번개 같은 공격에 몸서리치며 바다로 뛰어들어 기슭으로 헤엄쳐 갔다.
조선 수군 협선의 화살은 어김없이 날아와 갑옷을 벗어던지고 헤엄치는 왜군들을 속속 꿰뚫었다.
그들이 신주같이 들고 다니던 일본도는 아무 소용이 없었으며 도주하는데 거추장스러운 막대기일 뿐이었다. 정신이 없는 통에 화승이 물에 젖어버린 조총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왜선이 타오르는 검붉은 연기가 옥포만을 검붉게 덮었다.
혼비백산한 왜장 도도 다까도라는 혼전의 틈을 타고 가신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달아났다. 이때 도주한 다까도라는 안골포에서 또다시 이순신에게 철저하게 패하고 절치부심하다가 이순신이 없는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지만, 이순신이 돌아온 명량에서 또 완패당한다.
옥포의 왜 수군은 완전히 패했다. 조선 수군은 왜 적선 26척을 쳐부수었고 사살한 적은 셀 수도 없었다. 반면 우군 전선 피해와 전사자는 없음, 적 화살을 팔에 맞은 가벼운 부상자 1명이 전부였다.
이순신 조선 수군의 완벽한 승리, 임진왜란 해전 연전연승의 시작이었다.
세종대왕께서 만든 대포를 이순신 장군께서 새로 만든 군함에 장치하여 세계 최초로 본격적인 함대함 함포 포격전을 벌인 해전.
학익진을 형성하여 단시간에 끝낸 전투.
이순신이 새롭게 개발하고 수없이 훈련을 거듭하여 완성한 함포 집중교차사격, 속공속전 해전 전술의 완벽한 성공이었다.
일본 함대를 격파한 이순신 함대가 불타는 옥포만을 빠져나와 거제도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척후장이 “적선 5척이 지나간다.”고 보고 하였다.
누런 돛을 올린 적선들은 조선 수군을 보자 웅천 땅 합포까지 달아나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다.
끝까지 쫓아간 조선 함대는 술시 경 적선 5척을 모두 분멸하고 창원 구산면 남포리로 이동하여 진을 치고 정박하였다.
적전에서 아측의 행방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가보지 않은 협수로, 위험한 암초 밭을 야간에 통과하는 놀라운 항해술이었다.
5월 8일 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지새운 이순신 함대는 이튿날 새벽 일찍 또다시 탐색 기동을 시작했다.
협선과 포작선들이 앞서 흩어져 진동리 일대를 수색하였는데 수색선들이 적진포에 이르렀을 때 시뻘건 불길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협선 한척이 급히 본대로 달려오며 신기전을 쏘아 올렸다.
함대는 즉각 전투 태세에 돌입하였다.
“한번 이겼다고 망령되이 행동하지 말라. 산같이 신중하라.”
깃발이 올라가고 명령이 내려갔다.
함대는 바빠졌다.
포구를 쑤셔 내고, 포대를 다시 결색 하고, 화약을 장전하는 한편,
각종 포탄과 화약, 꼬질대, 폭탄, 화전, 장, 편전, 창, 칼, 장병검, 사조묘, 갈쿠리, 등을 챙겨 장비하였다.
모든 군사와 격군들은 지정된 전투 위치에 들어가고 다시 하무를 힘껏 물었다.
왜적들은 조선 함대가 그리 빨리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분탕질에 여념이 없었다.
함대가 안으로 깊숙한 적진포 입구를 막고 바라보니 모두 13척의 왜선이 만 안에 정박해 있었다.
포구 안의 민가를 분탕질하던 왜적들은 접근하는 조선 수군의 위세를 보고 겁을 내어 산으로 올라갔다.
함대는 급히 돌격하여 순식간에 대포를 쏘아 왜 병선을 모두 깨트리고 불화살을 쏘아 깨끗하게 분멸하였다.
왜적들은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판옥선은 포의 고각을 한껏 올려 조란탄을 쏘아 발광하는 왜적들을 잠재웠다.
그러나 3척의 전선만을 거느리고 전투에 참가하여 뒤에서 왔다 갔다 한 원균은 전라좌수영 수군이 획득한 노획물을 활까지 쏘며 빼앗으려 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상처를 입히는 참으로 어이없는 짓을 저질렀다.
함대는 적진포를 나와 아침을 먹고 돛을 올려 마침 불어오는 서풍을 받으며 다시 적을 찾아 탐색전을 계속하였다.
왜적들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직접 목격한 이순신과 장수들은 하루 빨리 가덕, 부산 등지로 가서 적들을 섬멸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전선에 적재하였던 화약과 무기, 군량이 거의 다 소진되었고, 전라우수영 이억기 함대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라도 도사 최철견이 보낸 공문이 도착하였다.
“신립이 지키는 충주 방어선이 무너졌기로 전하께서는 북쪽으로 파천 하셨다.”는 내용이었다.
왜침을 받아 임금이 2백 년을 지켜온 수도를 버리고 피난을 가게 되었다니 참으로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내지의 육전 전황을 자세히 알아보고 각지의 책임자들과 향후 대책을 시급히 논의하여야 했다.
임금이 북으로 피난을 가고 한성이 함락되었다는 사실은 전쟁의 상황이 매우 어렵다는 것, 서해로 올라가는 해로를 하루빨리 차단해야 되겠다는 것이 이순신의 판단이었다.
귀항이 결정되었다.
여수까지 170여 리. 노를 저으면 이틀이 걸리고, 바람이 잘 불어 준다면 범주로는 하루가 안 걸릴 거리였다.
북서풍이 불었다.
손수 그린 해도를 펴 놓고 바람 방향과 지형, 예상 조류를 꼼꼼히 살펴 본 이순신은 담담한 어조로 범주 항해를 지시하였다.
“한산도를 빠져나가 추도를 우현으로, 두미도를 좌현으로 보고 돌아 미조로 가자. 한산 수로는 옆바람이니 쉬운 항해 길이요, 추도를 돌아서면서부터 아슬아슬한 맞바람이다. 수시로 변하는 조석과 바람을 잘 살펴 두미도를 좌현으로 통과하면 미조까지는 같은 바람으로 변침 없이 범주로 갈 수 있겠다. 돛을 바짝 올려 당기고 미조까지 똑바로 질러가자.”
이순신은 싸움에 지친 군사와 격군들을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하고 싶은 것이다.
바람 방향은 북서, 조석은 두미도까지는 썰물, 남해도까지는 밀물이었다.
“범주로 미조까지 간다. 돛 위•아래 당김줄을 최대한 당겨라아.”
“타는 힘껏 밀어 배가 풍하로 조금도 밀리지 않게 하라,”
“모든 인원은 우현으로.”
조방장이 명령을 내리자 항해장과 갑판장은 판옥선의 갑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삭구의 조임을 확인하고 군사들을 독려했다.
두 개의 돛을 최대한 당겨 바람이 들어오는 방향에 맞추어 각을 조절하면 우현 함수에서 바람을 받은 앞 돛이 바람을 모아 뒤 돛으로 흘려보내게 되어 배는 더 잘 달리고 맞바람 범주가 가능한 각도 조금 줄어든다.
이 바람에 돛과 함 방향을 잘 잡으면 남서 방향의 남해도 남단까지 갈지자 힘든 역풍 항해를 하지 않고 항로 변경 없이 아슬아슬하나마 직선 범주가 가능하리라 이순신은 판단하였다.
전선들은 기함을 따라 돛을 바짝 당겨 올려 바람을 팽팽히 빗겨 안고 달렸다.
판옥선들은 파도와 부딪히며 무겁게 항진하였으나 가벼운 협선과 포작선들은 큰 돛을 한껏 올리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파도를 가르며 경쾌하게 달렸다.
추도를 지난 후 함대는 두미도로 접근하였다.
맞바람에 걸려 우현으로는 배를 더 돌릴 수 없어 판옥선들은 두미도에 좌현으로 바짝 붙어 진입하게 되었다. 여기서 바람을 좀 더 받기 위해 좌현으로 키를 더 주면 배는 그대로 암초에 올라탈 것이요 위험하여 우현으로 키를 더 주면 풍상에 걸려 배가 멈추므로 역시 암초로 밀릴 판이었다.
오직 가느다란 항로 하나를 정확히 타고 신속히 두미도를 통과하든지, 아니면 두미도 남쪽을 안전하게 통과 후 하루 종일 역풍을 받으며 노를 저어 여수까지 가야 했다.
잠시 바람을 살펴본 이순신은 담담히 지시하였다.
“두미도를 좌현 통과하여 그대로 가자.”“도르래를 걸어 돛대를 바짝 세우고 돛도 바짝 당겨라. 타수는 4명이 붙어 키를 단단히 잡아라. 두미도를 좌현으로 바짝 통과하여 미조까지 그대로 간다.”
조방장의 말을 즉시 이해한 병사들은 재빨리 움직여 맞바람 항해 준비를 하였다.
모든 돛은 팽팽히 당겨 앞 돛과 뒷 돛의 사이 간격을 위아래 똑같이 맞추었으며, 격군들은 즉시 노를 내릴 준비를 하고, 모든 인원과 이동 가능한 중량물은 우현으로 이동하였다.
함수에는 측심수가 대기하고 긴급 투묘 준비도 마쳤다.
함대가 두미도 북쪽 해안으로 들어서자 두미도의 바위 절벽이 좌현으로 획획 지나갔다. 우현으로 조금만 틀면 배가 멈출 판이요, 좌현으로 조금만 틀면 두미도 암벽이 반길 판이었다. 판옥선이 아슬아슬하게 암벽을 지나가니 흘수가 낮은 협선과 포작선은 느긋하게 뒤 따라왔다.
함대는 어렵사리 두미도를 통과하여 미조 방향으로 함수를 잡았다. 장쾌한 항해였다.
미조를 지나 낯익은 응봉산을 바짝 끼고 돌자 멀리 함수 전방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여수였다.
함대는 노를 내렸다. 두미도를 무사히 통과한 덕에 함대는 오늘 중에 여수에 귀항 완료하게 된 것이다.
먼저 달려간 협선이 여수에 도착하여 함대의 귀환을 알렸다.
함대의 무사 귀환을 손꼽아 기다리던 가족과 백성들은 순식간에 전라좌수영 부두로 몰려들었다.
모여든 군중들은 어두운 바다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바다는 그냥 캄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등불을 켜라. 군악을 울려라.”
부두가 가까워 오자 모든 전선은 구령에 따라 일제히 등불을 달고 기함은 군악을 울렸다.
기다리던 백성들은 눈앞에 갑자기 켜진 환한 불빛과 커다란 돛을 높이 올리고 다가오는 함대를 발견하고 그 위용에 놀라 환호성을 질렀다.
백성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였다.
서로 얼싸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돛을 내려라. 노를 내려라.”
기함 갑판장의 날카로운 호각 소리와 단호한 목소리가 해안까지 들렸다.
‘두둥 두르르 둥’
새삼스러운 듯 부드럽게 북소리가 들리며 돛과 노를 내린 전선들은 착착 물을 차며 차례차례 접안을 완료하였다.
임진년 이순신 함대의 첫 출정은 포성과 죽음이 난무한 전투였다. 응징과 승리를 쟁취한 전투였다.
여수의 가족과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기고 돌아온 군사들을 부둥켜안고 놓을 줄을 몰랐다.
적을 무찔러 감격하였다.
모두 무사히 돌아와 감사하였다.
그들은 거친 손을 마주 잡으며 서로를 위로하였다.
귀항을 마친 이순신은 진을 파한 후 세병관으로 돌아와 몸을 씻고 선조에게 올릴 장계를 썼다.
「좌부장인 낙안 군수 신호는 왜군의 큰 배 1척에 돌격하여 타고 넘어가 모조리 쳐부수었고, 화려한 복장을 한 왜군 장수의 목을 베고 배 안에 있던 갑옷, 의관, 칼 등을 빼앗아 왔습니다.
우부장인 보성 군수 김득광은 왜적의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우리 포로 1명을 구출하였으며,
전부장 홍양 현감 배홍립은 왜적의 큰 배 2척을 쳐부수었습니다.
중부장인 방답 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왜의 큰 배 1척을 쳐부수었고,
우부기전통장 진의 군관보 이춘은 왜의 중간 배 1척을 쳐부수었고,
후부장인 녹도 만호 정운은 왜의 중간 배 2척을 쳐부수었고,
유군장 발포 군관 나대용은 왜의 큰 배 2척을 쳐부수었고,
좌척후장인 여도 권관 김인영은 왜의 중간 배 1척을 쳐부수었습니다.
좌부기전통장 순천대장 봉사 유섭은 왜의 큰 배 1척을 쳐부수고 우리
소녀 1명을 구출하였으며,
한후장인 군관 급제 최대성은 왜의 큰 배 1척을 쳐부수었고,
돌격장 군관 이언량은 왜의 큰 배 1척을 쳐부수었고,
훈련병사 변존서, 전 봉사 김효성 등이 힘을 합쳐 왜의 큰 배 1척을 쳐부수었고,
경상도 여러 장수들이 왜선 5척을 쳐부수고 우리 포로 3명을 구출하였습니다.
모두 합하여 왜선 26척을 총통으로 쏘아 깨트리고 불태웠으며 죽은 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옥포파왜병장 임진년 5.10.」
이순신이 올려보낸 옥포해전 승전보는 여수에서 서해안 해로를 타고 부지런히 달려갔다. 협선이 전라좌수영 깃발을 높이 휘날리며 승전보를 들고 서해를 내달리자 승전 소식은 온 백성들에게 알려졌으며, 5월 23일 평양의 선조에게 보고 되었다. 신립이 탄금대에서 대패한 직후였다.
육군의 연전연패에 절망하고 있던 임금과 대신들은 임진왜란 첫 승리를 알리는 이순신의 장계를 통독하고 한참을 통곡하였다.
내지 곳곳에서는 이순신의 승전 소식에 감동한 백성들이 의병의 불길을 일으켰다.
이순신은 구출해 온 백성들을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잘 보살피도록 조치하였다.
왜적에게 약탈당했던 물건들은 모두 찾아내어 곳간에 보관하였으며, 전쟁에 쓰일 만한 전리품은 따로 모아 기록하여 활용토록 하고, 특별한 물건은 한 가지씩 뽑아 행재소로 올려 보냈는데 철갑, 총통 등과 귀를 도려낸 적장의 수급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노획한 쌀과 의복, 무명 등은 전리품으로 배고픈 군사와 격군에게 나누어주어 그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1차 출동 결과 조선 함대는 왜선 40여 척을 격파했다.
1차 출동은 조선 함대 군사들에게 큰 자신감을 불어넣었으며 군사들의 결속력 또한 크게 강화시켰다.
이순신은 1차 출동 해전에서 전투의 한 국면,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낱낱이 살펴보았으며 왜군의 전술을 면밀히분석하였다.
왜군의 병선은 비교적 가볍고 빠르며, 승선한 왜군들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칼잡이로서 백병전에 능한 무사들이었다.
그들의 접근을 허용하면 조선 수군은 불리하였다. 조선 수군은 우세한 함포를 이용하여 적이 접근하기 전에 신속히 공격 격파하고, 거북선이 먼저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진을 흐트러트리고 삼나무 적선을 그대로 들이받아 깨트리며, 적진 속에서 전방위 조란탄 근접 사격으로 적의 지휘부를 무력화 시켜야 한다.
때문에 조선 수군은 학익진을 비롯한 진형 형성과 거북선의 순간 속력 배가 기동, 판옥선의 신속한 교차 사격, 적선의 지휘부 공격 등이 반드시 필수적인 전술임을 다시 확인하였다.
이순신은 이 전술 교리를 보완하여 장수와 군사들에게 숙지시키고 해•육상에서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였다.
함포사격에서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거리 판단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주둔지의 육상과 해상에 거리별 표지를 곳곳에 설치하고 사수들이 오가며 각 포는 물론 조총의 사정거리를 척 보아 알 수 있도록 자나 깨나 훈련하였으며, 장수나 군사들이 육상에서 이동할 때에도 신호에 따라 대형을 종열진. 횡렬진, 쐐기진, 학익진으로 바꾸어 가며 행군토록 반복 훈련을 실시하였다. 또한 전선을 보수하고 각종 병기를 정비하고 화약을 구었으며 군량미를 비축하였다.
5월 중순이 되자 한성을 점령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5월 27일 조선 육군은 임진강 사수에 실패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군과 구로다 나가마사 군은 임진강을 건너 평양으로 진격했으며, 가토기요마사 군은 철령을 넘어 원산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한성의 일본군 사령부에서는 우키타 히데이에가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 부대를 총지휘하고 있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고야에 전략사령부를 두고 전쟁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이곳에서 옥포해전의 패전 보고를 받았다.
“우리 수군이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조선 수군의 기습으로 패주 하였으며, 적과 맞섰던 우리 함대는 모든 전선을 잃고 일부만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는 보고였다.
바다의 나라 일본 수군이 그까짓 조선 수군에게 참패하고 전선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다 도망가고 없다던 조선 수군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의 실체와 행방, 그간의 해전 상황을 사실대로 보고 하라.”고 지시하였다.
부산의 보고서가 도착하였다.
“적은 전라도 지역 수군이며 행동이 신속하여 그 행방과 병력, 적장에 관한 것은 알 수 없다. 옥포 등에서 도합 수천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거의 모든 전선이 파괴되었다.”였다.
격분한 히데요시는 사나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육지에서는 조선 왕을 놓치고, 바다에서는 수군이 패하고, 전라도 공략과 서해 항로 확보는 시작도 못하고 있다. 이 모두가 군 기강 해이 탓이다.
다음 사항을 철저히 이행하라.
첫째, 조선왕을 즉시 사로잡으라.
둘째, 속히 전라도를 속지로 삼아 원정군의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라.
셋째,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거점화하라.
넷째, 조선 수군을 찾아내어 철저히 섬멸하라.
다섯째. 서해안 해로 확보를 서두르라.
히데요시의 강력한 명령에 따라 일본 육군 선봉 부대들은 북상을 재촉하고, 나머지 다른 부대들은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지역에서 각기 영지 구축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왜 수군은 점점 서쪽으로 진출해 경상도 서안을 공략하였다.
이순신은 다시 경상도 출전을 결심하고 이억기와는 6월 3일 여수 앞바다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나 5월 27일 원균으로부터 “적선 10여 척이 사천, 곤양에 침입. 자신은 남해 노량으로 피신하였다.”는 급보가 날아왔다.
급보를 받은 이순신은 꿈까지 꾸었다.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이순신을 발로 차며 “일어나라, 일어나라! 적이 왔다.”하였다.
이순신은 경상도 바다를 지키기 위하여 이억기 함대를 더 이상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경상도에서 전라도 진입 길목인 진주가 코 앞인 사천포의 왜성 축성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이순신은 부득이 이억기에게 사태가 급박하여 계획을 앞당겨 떠나니 곧 뒤따라오기를 바란다는 통문을 띄우고 출전일을 4일 앞당겨 5월 29일 경상도로 2차 출정을 단행하였다.
동원된 판옥선은 23척이며 그동안 맹훈련을 거듭한 거북선도 완전한 전투 태세를 갖추고 처음 출전하게 되었다.
1차 출전 때 보다 출정 척수는 줄었지만 이순신 함대의 전력은 대폭 강해지고 병사들은 자신감으로 충만하였다.
거북선의 출전과 강도 높은 훈련, 실전경험 축적 등으로 이순신 함대는
막강 무적함대가 되어있었다.〈38호에 계속〉
해도2 |
주장성
시인, 《한강문학》(22호, 2020) 시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희곡부문 신 인상 수상(23호, 2020) 해군사관학교졸업(1972), 해군 복무(1972-1993), 세한대학교 명예교수, 대한요트협회교육이사(1995), 요트스쿨운영, 한강문학 극시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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