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고향 하의도로 가는 여객선 안에서 비 내리는 다도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이주빈 기자.
한반도의 서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하의도(荷衣島)는 해상국립공원 안에 위치하며 목포에서 57.9Km 떨어진, 약 34만 평방킬로미터의 섬이다. 하의도란 지명은 1730년(영조 6년)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오래된 이름이다.
하의도는 유인도 9개와 무인도 47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야산으로 된 지형은 농업용수와 식수에 어려움이 많고 주민들은 천일염과 농업ㆍ수산업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옛부터 연꽃을 하의(荷衣), 수련(睡蓮)을 연(蓮)이라고 불러왔다. 물 위에 연꽃이 떠 있는 모습(蓮花浮水)이라 하여 ‘하의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의도는 작은 섬이지만 섬 전체가 논밭 경작지로 개간되어 섬처럼 느껴지지 않는 농지가 많은 섬이다. 농지 면적은 1만 6천여 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에 속하지만 옛날에는 나주목에 속하는 나주군도의 하나였다.
고대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에,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나주목에, 일제강점기에는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1969년 정부의 행정구역 개편 때에 무안군에서 분군된 신안군에 속하게 되고, 1983년 상태도와 하태도가 신의면으로 합쳐지면서 하의 3도가 하의면과 신의면으로 개편되었다. 인구는 1970년 현재 1만 7천여 명이었으나 여느 농어촌처럼 이농자가 많아 지금은 4천여 명이 살고 있다.
2009년 4월, 하의도 주민 100여 명은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선착장까지 나와 김 전 대통령을 환영하고 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이주빈 기자.
하의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지명대로 “연꽃은 흙탕물 속에서 핀다”는 말을 믿어 빈천한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오고 세상을 정화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왔다고 전한다. 연꽃은 육지의 연못에서 자라 피는 꽃인데 바다 가운데 있는 섬의 이름에 연꽃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드문 일이다.
하의도는 토지가 기름지고 소출이 많아서 옛날부터 주민들은 어업보다 농업을 주로 하여, 토지는 삶의 원천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이름 그대로 물 위에 뜬 연꽃처럼 농업을 천직으로 알고 순박하게 살아가던 이곳에 어느 날 ‘날벼락’이 떨어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임금이 딸 정명공주가 결혼할 때 하의도 땅 일부를 딸에게 “무토 사패지지(無土賜稗之地), 땅은 그대로 두고 그 땅에서 나온 세금, 즉 결세를 5대까지 받도록 하는”, 조처를 하면서 하이도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그 후 선조가 죽고 정명공주는 인조 때 세도가인 홍주원과 결혼하여 하의도 결세권은 홍씨 집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개화기에 이르러 홍주원의 8대손 홍우록은 하의도 땅 전체를 빼앗고,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하의도 땅 전체의 소유권이 일인들에게 넘어가서 1920년에는 토지 징세권이 도쿠다(德田)라는 일본인 악질 지주에게 넘겨졌다. 일제강점기에 한 신문은 그 과정을 이렇게 보도했다.
가련한 소도의 운명, 홍씨 일가에서는 뒷날을 염려하여 토지 전부를 1만 5천 원에 조병택에게 팔았고, 조는 5만 7천원에 정병조에, 정은 다시 11만 5천 원에 우근(右近)에게 팔았으니, 이것이 일본인 손으로 넘어간 처음이었으며, 그 후 (땅 찾기 위한)소송은 무리하게도 도민들이 지고 말았다. (주석 1)
하의도의 토지주인이 미 군정기에는 미 군정청 신한공사에게 넘어갔다. 미 군정청은 1946년 2월 21일, 미 군정법령 제52호로 직속 특수기관으로 신한공사를 설립하고, 과거 조선총독부의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인 소유 토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신한공사가 차지한 농지는 남한 총 경지면적의 13%에 이르렀고, 호남의 비옥한 평야지대에 집중되었다. 신한공사 지배하의 소작 농가 호수는 55만여 호로 농민가족 총계는 300만 명이 넘었다. 여기에는 하의도 농민들도 포함되었다.
정부수립 뒤에야 이 땅은 섬사람들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원칙의 토지개혁에 따른 것이었다. 350여 년 동안 땅의 소유주가 아홉 차례나 바뀐 긴 세월 동안 하의도 주민들은 일제강점기에는 포악한 일인 지주와, 미 군정기에는 신한공사 직원들과 이들을 비호하는 경찰과 생명을 건 투쟁을 전개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싸우다가 죽거나 옥고를 치르고 고문으로 불구가 되었다.
하의도 농민저항운동은 인근의 암태도 소작쟁의 운동과 더불어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첫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가열차게 전개되었다. 하의도 농민들은 이 땅의 농민들이 겪어 온 고난의 삶, 바로 그것이었으며 상징이었다. 다만 다른 지역의 소작쟁의나 농민운동이 일제의 수탈과 악질 지주들과의 싸움이었다면, 하의도의 경우는 뿌리가 깊어 조선왕조에서부터 시작되어 미 군정기까지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15세기 경, 육지에서 농토를 잃은 유랑민들이 자기 땅을 갖고자 하는 원념에서 무인도를 찾아 해매다가 하의도에 들어와 정착을 하게 되고, 이들은 수만 년 갯바람으로 척박해진 땅을 일구어 옥토로 만들고 살았다. 그러던 중 황실이 개입되고 중앙의 권문세족과 외세가 주인을 바꿔가면서 이 땅을 차지하게 되면서 하의도 주민들의 고달프고 처절한 싸움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