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세계의 문학》2009년 신인상 당선작
정체 / 김상혁
내가 죽도록 훔쳐보고 싶은 건 바로 나예요 자기 표정은 자신에게 가장 은밀해요 원치 않는 시점부터 나는 순차적으로 홀홀히 눌어붙어 있네요 아버지가 만삭 어머니 배를 차고 떠났을 때 난 그녀 뱃속에서 나도 모를 표정을 나도 몰래 지었을 거예요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 코를 닮은 내 매부리코를 매일 들어 올려 돼지코를 만들 때도 그러다가 후레자식은 어쩔 수 없다며 왼손으로 내 머릴 후려칠 때도 나는 징그럽게 투명한 표정을 지었을 거예요 여자에게 술을 먹이고 나를 그녀 안으로 들이밀었을 때도 다음날 그 왼손잡이 여자에게 뺨을 맞았을 때도 내가 궁금해한 건 그 순간을 겪는 나의 표정이었어요 은밀하고 신비해요 모든 나를 아무리 잘게 잘라도 단면마다 다른 표정이 보일 테니 나를 훔쳐볼 수만 있다면 눈이 먼 피핑톰(peeping Tom)이 소돔 소금기둥이 돼도 좋아요 거기, 거울을 들이밀지 마세요 표정은 보려는 순간 간섭이 생겨요 맑게 훔쳐보지 않는 한
이사 / 김상혁
일상 집들이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모든 가족에겐 아이가 필요합니다
엄마는 재혼을 포기하셨지요
집을 바꾸고 학교를 아빠를 바꾸는 일
뭐 대수라구요
낯선 장소가 그립습니다만 언제나처럼
다락방 하나 긴 마당이 하나 그리고 공터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하나
다락방에는 가족들이 꺼리는 사진과 내가 있습니다
긴 마당에서는 밤마다 나무 사이로 자전거를 타야 하고요
공터는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피 묻은 아이들이 뛰어나오는 곳
이번 공터도 엄말 닮았어
나에게 짖던 강아지들은 쥐약을 먹고
놓아기른 병아리들은 식탁에 올랐습니다
곧 떠날 동네에는 작은 무덤이 남고 우리는 다른 집을 찾습니다
나무가 꺾인 자리
불모의 터에서는 왜 같은 냄새가 날까 이사 갈 때마다
내 살갗 위로 눈알이 하나씩 늘어야 합니다
가까이서 냄새를 맡는 건 천박한 짓이야
자꾸만 혀로 입술을 핥지 말래두?
버릇이 없어 나는 해변으로 자주 보내졌습니다
엄만 죽어서 인공위성이라도 될 테지요
가족들 무덤 위에 말뚝이라도 심어 두려구요
친구를 만들지 않는 일이 코 막고 연애를 하는 일이
뭐 대수랍니까 나는 안목이 재주를 초과하는걸요
낙서 같은 조감도는 묻어 두고 짐을 꾸립니다
손금이 복잡한 손은 깨지기 쉽습니다
오늘의 편지 / 김상혁
손톱이 깨지면 아침이 와요. 야구공이 무서워요. 요즘도 나는 발야구를 해요. 오른발잡이 1번 타자. 동생이 의심해요. 당신이 내 어머닐 닮았대요. 발각되면 이별을 고할래요.
청첩장을 받았어요. 슬슬 취직도 하려고요. 나는 집주인을 이모라고 불러요. 죽어 버리겠다던 당신이 멀쩡해요. 내 친구는 전처럼 자기 사촌을 사랑하고 있어요.
1루 주자가 2루 주자를 앞질러요. 몇 명쯤 남아도 괜찮아요. 나는 진지하게 오른발 축구화를 신었어요. 어젠 여자 친구가 아이를 지웠어요. 반지를 팔아 같이 광어를 먹었어요.
한겨울의 결혼식. 비슷한 사정이 있겠지요. 치매증 할머니가 당신을 기억해요. 내일은 홈런을 치려고요. 수염이 난 건 나 혼자뿐이에요. 나는 기도원으로 곧 여행을 떠나요.
겨울이 무서워요. 야구공처럼 그래요. 부업(副業)이라도 배우려고요. 안전하다면 무엇도 괜찮아요. 2번 타자도 괜찮아요. 다시 당신도 괜찮아요. 더 추워지면 미리 병원에 가려고요.
홍조 / 김상혁
똑같아 지려고 교회를 다닙니다 주보로 비행기를 접으면 엄만 속상해하셨지만요 거기 적은 소원은 지킬 만한 비밀 치마를 뜯어 만든 내 바지엔 주머니가 없습니다
붉은 얼굴로 손에 쥘 수 있는 것들만 생각합니다 소문은 허기를 감추지 못해서요 버짐이 정오 수돗물로부터 집요하게 전염됩니다 아이들은 돌려 말할 줄을 몰라 나를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언 손으로 책장 넘기며 그립던 빼빼한 여름, 종이마다 손때는 내가 넘어진 자리구요 저녁 어스름 악어 눈을 뜰 때까지 나는 구름 쳐다보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습니다 엄마가 술을 파는 이유도
무서우니까 오늘 밤에도 기도를 해야지 종일 정글짐이나 오르내리면 아무리 추워도 죽을 만한 겨울은 없고 운동장은 왜 얼지 않을까, 혼자 소매로 모래를 쓸며 궁금합니다 미친 여자 가랑일 봤어, 낄낄대는 소년들 나는 문득 태어난 일이 쑥스럽습니다
호랑이 엄마 / 김상혁
엄마가 젖에 바른 호랑이 연고
얼마나 매웠는지
두 살이 되도록 젖을 못 떼던 내가
그 젖통만 보면 도망을 가더란다
멋들어진 훼미닌 83호 머리
엄마는 눈이 매섭고 손이 억셌다
자세한 내막은 몰랐으나
아버지는 쫓겨난 것이었고
거짓말쟁이였다 콧등이 길어서
나는 자주 꾸중을 들었다
까맣게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나에게 글을 가르쳤고
부종(浮腫)에 효과 빠른 라식스에 대해
달마다 일러 주었다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만큼
엄마 몸이 붓는 게 무서웠다
부어오른 건 단단하고 굵었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이런 말로 뺨을 맞으면 내 주머니엔
오백 원 정도가 들어왔고
나는 길쭉한 마당 허리가 잘린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내 고추를 꼬집었다
엄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몽 / 김상혁
기울어진 벽을 넘었습니다. 주름진 구름이 묵은 발톱을 털어냅니다. 피가 고인 벌판, 귀를 대고 어떤 소문을 들었을까. 차마 둥근 발이 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바퀴 소리가 나면 마지막을 준비해. 언니의 쪽지를 주웠습니다. 비린 바람이 불고 코끝이 빨개집니다.
급히 뛰지 마세요. 손발이 더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지나간 날짜를 지우는 게 일과입니다. 맨발에 차이는 살점들 아직 따뜻합니다. 생은 제비뽑기 같은 거야. 또 다른 언니의 쪽지입니다. 발끝에 힘을 줍니다. 이쯤에 내 무릎을 묻어야겠습니다.
육식을 삼가세요. 악몽이 전염될지 모릅니다. 결심이 선다면 침대도 준비하세요. 나는 수평이 간절합니다. 밤낮도 없이 붉기만 한 세계, 견디는 게 만만치 않겠습니다. 마른 달을 볼 수만 있다면
비탈로 그리운 혀 하나쯤 굴러 오겠지요. 말라빠진 그 혓바닥을 삼키겠습니다. 귀신을 보는 유년도 좋습니다. 입술을 맞대고 기억이나 나누겠지요. 찬바람을, 고양이를 조심하세요. 가슴이 불고 목뼈가 간지럽습니다. 한 개의 입*으로 우리는 문을 나서고 싶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세 자매 그라이아이(Graiai)는 태어날 때부터 백발 노파였다. 아틀라스산맥의 동굴에 살았으며, 그들은 하나의 입을 서로 돌려 가며 사용했다.
내일도 / 김상혁
그날 누런 금목걸이 건네지 말고 내게 악수를 청했다면 어땠을까 따뜻해서 무서운 등짝 말고 차비 말고 추우니까 조심히 가라, 내 옷깃 한 번 세워 주었다면 이불 아래를 뒤지는 청소 말고 내 방문 조용히 잠가 주었다면 나는 웃고 싶지 않았는데 간지럼 말고 칭찬 말고 저는 무사합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셀프서비스입니다, 편지 부쳤을 때 답장도 전화도 말고 돌아오라, 비행기 표를 보내 주었다면 이모도 형제도 말고 죽었다던 아버지 전화번호도 말고 코가 기다란 새 구두 양 두 마리 노는 목도리 말고 하얀 종이 한 장만 펴면 세계가 참 좁았던 날 티브이도 말고 인형도 말고 칼로 뾰족이 긁은 연필 하나 내 귓등에 얹어 주었다면 여백마다 빽빽이 적은 내 이름 딱히 미워할 사람 떠오르지 않아 잠이 많았고 나는 길몽을 감추는 습관이 생겼는데 늙은 가족들은 곧 죽을 것인데 엿보는 거 냄새 맡는 거 말고 통성기도하는 거 말고 어쩌면 내일은,
묵인 / 김상혁
아직 젊었던 술집 여자의 등을 당신께 보냅니다 그 등에서 참았던 내 겨울도 보냅니다 나를 아들이라 부르던 손님들의 택시비와 이국땅에서 일요일마다 내게 주어지던 몇 푼의 돈도 함께 보내지요 나는 꼭 저금을 하는 기분입니다 당신이 남기고 간 기록들을 한 줄 한 줄 짚어 봅니다만 아마 실수로 빠진 내 이름이 오늘도 없습니다 요즘 당신은 통 편지를 보내지 않지요
어릴 적 공터에 뛰던 플라스틱 말들을 당신께 보냅니다 그 위에서 견디었던 내 예감도 보냅니다 먼 나라에서 한 번 당신을 본 적이 있지요 새벽이었고 당신은 내 가슴을 열고서 울기만 했습니다 결국 유사한 아침을 맞이하며 나는 사과나무 사이를 뛰어다녔습니다 종종 나무의 배후에서 당신을 봅니다만 그것은 비밀에 부칩니다 나는 말을 못하는 일에 익숙하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금방 비밀로 삼았습니다
당신 것을 당신께 보냅니다 당신은 아무리 짊어져도 무거울 리 없지요 봄이면 문설주에 피를 발랐다는 동화처럼 행운을 위해 가족들이 당신을 찾습니다 안부를 물으며 모두가 붉은 손으로 뛰어나오는 골목 나는 잠잠한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