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ensational Truth
I
The Prophect Word
1. 예언의 말씀
성경은 신학, 도덕, 역사, 과학 또는 어떤 다른 주제에 관한 체계적인 논문이 아니라 하나님, 인간의 타락, 구원의 방법, 그리고 “각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보여주는 “계시의 책”이다. 성경이 다루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네 가지 인격 :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 그리고 사탄
2. 세 가지 장소 : 하늘, 땅 그리고 지옥
3. 세 부류의 백성 : 유대인, 이방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
성경은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조금씩, 점차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약 B.C.1492년경부터 A.D.100년에 걸쳐서 약 1600년간 말씀이 선포됐다. 성경은 66권으로 이루어진 한 권의 책으로,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약 42명으로 다윗, 솔로몬과 같은 왕이나 정치가인 다니엘, 느헤미야, 제사장 에스라, 이집트의 지혜를 갖추었던 모세, 유대 율법에 정통한 바울, 목자인 아모스, 세리 마태, 어부인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 등은 ‘배우지 못한 무지한 자들’이었으며, 누가는 의사였고, 이사야, 에스겔, 스카랴 같은 능력 있는 선지자들도 있었다.
성경이 비록 아시아에서 기록되었다 하여도 결코 아시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시내 광야, 아라비아 절벽, 팔레스타인 언덕과 도성, 성전들, 벧엘과 여리코의 선지자 학교, 페르시아의 수산궁, 바빌론의 세바 강변, 로마의 토굴, 외딴 팟모섬, 그리고 에게 바다 등지에서 기록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편집된 어떤 책이 있다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예를 들어 대중요법, 동종요법(同種療法), 수치료법, 안마요법등과 같은 당양한 치료 방법에 대해 40명의 내외과 의사들이 1600년간 걸쳐 내려오면서 66권의 비법을 저술하여 그것을 한데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든 후 그 책의 처방에 따라 환자를 치료한다고 가정해 보라 그것이 얼마 만한 효과가 있겠으며 그 치료 방법이 얼마나 일관성이 있겠는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경은 고대 역사, 신화, 전설, 교리와 미신등을 “여러 가지 뒤범벅”해 놓은 책이 아니다. 성경은 계시와 교리에 있어서 진전이 있다. 족장들보다 재판관들이, 재판관들보다는 선지자들이, 선지자들보다는 사도들이 더 많은 것을 알았다. 구약과 신약은 분리된 별개의 책이 아니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 속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레위기는 히브리서를, 다니엘서는 요한계시록을, 그리고 유월절이나 이사야서 53장은 사복음서가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이지만 그것은 초인간적이거나 천상의 언어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만일 그런식으로 기록되었다면 우리는 그 계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나랏말로 번역되든지 그 언어의 순수성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말씀의 활력이나 능력을 주는 영적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 성경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부인할 수 없다.
성경의 언어는 세 종류가 있다. 즉 비유적(Figurative)이고 상징적(Symbolical)이며, 문자적
(Literal)이다.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라.”는 말씀은 비유적이므로 전후 문맥을 통해 그 뜻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느부캇네살의 ‘신상’, 다니엘의 ‘네 짐승’ 혹은 ‘일곱 촛대’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에 관해 묘사한 상징적인 표현은 성경의 동일한 장이나 그 외의 곳에 추가로 설명되어 있다.
성경의 문자적 표현은 일반 문법과 수사법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즉 성경 말씀을 은유적으로나 영적으로 풀이하는 대신, 다른 책들을 볼 때와 같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을 은유적으로 영적으로 그릇되게 해석한 결과 수많은 교파들이 지금까지 난립하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룰 때 반드시 피해야 할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을 잘못 해석함 (Misinterpretation)
2. 성경을 잘못 적용함 (Misapplication)
3. 성경의 위치를 바꿈 (Dislocation)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 말씀이 계시하시고자 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주된 이유는 사람들의 전통, 환경, 편견, 혹은 성경을 구미에 맞는 교리에 갖다 붙여서 가르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우리는 진리를 전하는 “비유적인 방법”을 알아두자. 예수님께서 주로 이 방법을 사용하시기는 했지만, 그 분이 고안한 것이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주로 이 방법을 사용했다. 신약 성경에 이것은 진리를 전하는 “신비적인 형태”이다(마13:10-17). 신비란 한 동안 숨겨져 있어도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내가 당신에게 봉한 편지를 보낸다고 할 때 바로 봉투 안에 든 내용이 신비가 된다. 봉투를 열어 내용을 읽으면 신비란 밝혀진다. 그러나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전문용어가 쓰여진 편지일 경우에는 그 용어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신비도 이와 같다. 성경을 기록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경을 읽게 되면 모든 신비들은 자연히 풀릴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심각한 질문이 생길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인가? 아니면 인간의 책인가?
즉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단순히 사람들이 글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인가? 만일 성경이 하나님의 인도함이 없이 단지 사람들이 써 놓은 글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면 믿을 만한 것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책을 쓰셨다면 진리임이 분명하며 우리는 이 말씀에 의지할 수 있다. 성경은 그 특징으로 미루어 보건대 사람이 쓰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쓸 수 있었다고 해도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솔로몬과 같은 위대한 인물들의 모든 죄, 즉 어리석음, 배반, 교만, 간음, 비겁, 살인, 음욕 등을 가혹할 정도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배은망덕하고, 우상 숭배와 불신과 반란으로 일관된 굴욕적인 모습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었더라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범한 죄들을 그들의 역사책에 그렇게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경이 기록되었는가? 성경 자신이 그 해답을 주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으신 것으로”(딤후3:16)
I. 성경에 “영감(Inspiration)”을 불어 넣으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 분 자신이 택한 사람들을 명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메시지, 율법, 교리, 역사적인 사실, 계시들, 혹은 그 분 자신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호흡(GOD BREATHED)
모든 성경은(기록된 문자) 영감(The-op-neu-stos)이 주어졌는데, 즉, 하나님의 호흡(GOD BREATHED)을 불어넣은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을 하시거나, 또는 성령을 통하여 옛 성별된 사람들에게 그분의 뜻을 기록하게 하셨다. 따라서 성경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많은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이시므로 친히 말씀도 하시고 또 쓰시기도 하신다. 그 분은 친히 두 개의 증거판인 돌판을 새기셨으며(출31:18; 32:16) 벨사살 궁전 벽에 친히 글자를 쓰셨다(단5:5,24-28).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성막 및 성막 내부의 양식과 레위기에 적힌 모든 율법과 의식 절차를 모세에게 친히 말씀하셨다. 또한 그 분은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마3:17)와 변화산상에서도(마17:5) 말씀하셨으며 한번은 예수님과 많은 무리들이 모여 있었을 때도 그분이 말씀하셨다(요12:27-30).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셨기 때문이다(딤전3:16, 요1:5-14).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은 총 49장에 1950절이 들어 있는데, 그 중 3/5, 즉 1140절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할 것과 이른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다(요12:49-59). 따라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글로 쓰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명하여 대신 말씀하시고 글을 쓰게 하실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II. 성경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는가?
그렇다. 무미건조한 연대기로부터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친히 모세에게 하신 말씀,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말씀 전체가 그렇다. 또한 성경 두루마리에 기록된 기록되어 있는 모든 문장, 단어, 일점, 일획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의 일점 일획도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한다고(마5:17-18) 말씀하셨을 때 일점 일획이란 히브리어의 가장 작은 점과 가장 작은 획을 가리키며, 이것까지도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사탄의 말과 악한 사람들과 영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말들, 사람들의 족보, 인류의 타락에 관한 설명, 노아홍수, 그리고 그 밖의 역사적인 부분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들도 성경의 기자들이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꼭 필요한 역사적인 사건들만을 기록한 것이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고 구약 시대의 여러 전통과 신화들까지도 기록되어 있는 세상의 역사서를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구약 성경의 기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각 시대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필요한 것들만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III. 성경의 기자들은 어떻게 영감을 받았는가?
성경 기자들은 단순히 일종의 ‘마력’이나 ‘무아지경’에 빠져서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기록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사용해야 할
정확한 단어들을 지시하셨는가?
생각은 말로 표현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 말은 말하는 사람이나 기록하는 사람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는 생각도 불확실하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성경 기자는 단순히 받아쓰는 일만 옳게 하면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베드로후서 1:20,21에 이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의 어떤 예언도 사사로운 해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즉 어느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예언은 예전에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
위 말씀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 자신들도 그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기록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벧전1:10-11). 그들은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을 뿐, 해석은 하지 못했다. 기록자 중에는 거룩하지도 않은 발람(민22:38;23:26), 벧엘의 예언자(왕상13:7-10;20:22,26),사울왕(삼상10:10-12; 19:20-24), 카야파(요11:49-52)도 있음을 볼 때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도구로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약 성경의 기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어 주신 말씀을 정확히 말하고 기록했다. 모세는 주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 주셨다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이제 가라. 그리하면 내가 너의 입과 함께 할 것이요, 네가 말할 것을 가르쳐 주리라”(출4:10-12).
선지자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그리고 나서 주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내 말들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1:9).
에스겔과 다니엘 및 그 밖의 선지자도 마찬가지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등등 이와 같은 표현은 모세 오경에 560회, 역사서와 예언서에 300회, 선지서에 1200회(말라기만 해도 24회나 된다)로 구약 전체로 볼 때 2000회가 훨씬 넘는다. 이로써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는 베드로의 말이 그대로 입증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경 기자들의 문체가 서로 다른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즉 이사야의 문체는 에스겔이나 다니엘과 다르며 베드로서는 요한의 서신이나 바울의 서신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는 쉽게 알 수 있고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법률적인 문서를 원할 경우 법률가를 찾고, 시적인 글을 쓰려면 시인을 택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상징들로 말씀하실 때에는 에스겔이나 다니엘이나 요한을 택하였고 시적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에는 다윗을 택하셨다.
신약의 기자들은 가끔 구약을 인용할 경우 문장 그대로를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바꾸어 쓰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를 들면 아모스9:11절의 말씀은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그날에 내가 무너진 다윗의 성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리라. 또 내가 그의 패망을 일으켜 옛날처럼 세우리니"
하지만 사도 야고보가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 회의에서 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했다.
"이 일 후에 내가 다시 돌아와서 쓰러진 다윗의 장막을 다시 세울 것이며, 또 거기에 파괴된 것들을 다시 세워 일으키리라." (행15:16)
왜 말씀이 바꾸어 졌는가? 이유는 단지 두 성경 구절을 쓴 사람이 아모스나 야고보가 아니라,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뜻하는 바를 모순 없이 보다 명확하게 나타낼 수만 있다면 그분이 쓰신 1장에 사용한 표현법을 10장에서 다르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베드로전서1:11절 말씀이 뒷받침 해준다. 이 말씀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영”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고난과 다가올 영광을 미리 증거하셨음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영” 선지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들로 이사야53:1-12절의 말씀과 같이 그분 자신이 당할 십자가의 “고난”을 예언하도록 하셨다.
한편 “성경의 영감”과 소위 오늘날의 시인, 설교가, 웅변가 또는 작가들의 영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위해서는 “영감(Inspiration)”과 “계시(Revelation)”와 “조명(Illumination)” 사이의 의미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성경의 영감”은 시인, 작가 그리고 대중 연설가의 영감과는 완전히 다르고 독특한 차이가 있다. “영감”이란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에 의해 성경 기자나 선지자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
성경의 계시(Bible Revelation)”란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을 인간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즉 ‘각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 가운데 감춰져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포하신 것이다.
“성경의 계시”는 요한계시록에서 끝났다.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어떤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사기꾼임이 틀림없다.
“영적 조명(Spiritual Illumination)”은 성경의 영감이나 계시와는 다르다. 단지 성령의 역사는 믿는 자에게 역사함으로써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영의 눈이 뜨이는 것이다(요16:12;15). 자연인은 성령의 일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이다(고전2:11-14). 그러므로 오늘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들에게 새로운 계시를 전하거나 그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옛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처럼 말씀을 기록하거나 선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믿는 사람들의 영적 지각을 열어 주셔서 성경을 이해하며 그들이 성경을 깊이 상고할 때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또한 그분의 거룩한 말씀에 따라 각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그들에게 조명하시는 것이다.
첫댓글 영감(Inspiration)과 계시(Revelation) 그리고 조명(Illumin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