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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運河)란 사람이나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든 인공수로(人工水路)로, 선박 항행(航行) 이외에 관개(灌漑) · 급수(給水) · 배수(排水) 등의 목적으로 축조된 수로를 총칭하지만, 통상적으로 수운(輸運)을 목적으로 한 것을 말한다. 규모가 크고 유명한 것으로 수에즈(Suez), 파나마(Panama), 킬(Kiel) 운하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많은 운하들이 세계 통상, 물류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수에즈운하. 이 운하가 없으면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거쳐야 하며, 대서양과 태평양을 잊는 파나마운하가 없다면 남아메리카 꼬리의 마젤란해협을 통과해야만 하는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한다. 이 점을 악용하려는 최근의 무장세력들이 홍해(紅海) 입구를 막고 협박 함으로 세계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스에즈 운하의 경제성(이미지는 빌려온 것임)
우리나라에도 경인운하라고 부르다가 ‘경인 아라뱃길’ 이라 명칭을 바꾼 운하가 있다. 한강 하류의 행주대교에서 서해(황해)로 연결되는 운하이다. 운수로의 길이는 18㎞, 너비 80m, 수심 6.3m이며, 2009년 3월 착공되어, 2012년 5월 25일 개통하였다. 지정학적으로 어려움이 있지만 현대의 기술이라면 유럽의 여거 유명 도시처럼 서해를 통해 한강을 거처 서울까지 대형선박이 출입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말로만 들어왔던 수에즈운하를 1978년 7월 5일, Hiroshima Maru(宏島丸)의 선장으로 난생 처음으로 직접 통과하게 되었다. 지중해에서 홍해로 빠지는 남하(南下) 코스였다.
처음인데다 40시간 동안의 과정이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었기에 자세히 적어 남기고자 한다.
『1978년 6월 22일(목) 밤 11시40분 Mooring Line(계선색)을 감아 올림으로 Laspalmas 항을 떴다. 육중한 선체가 그래도 우직한 소처럼 움직인다. 만선(滿船)이다. 총 3,237톤. 예비부력이 220여톤 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정확한 Data에 의한 계산에 따른 결과지만 다소의 염려를 떨어버릴 수는 없다. 선령(船齡) 17년이면 사람으로 치자면 노년기다. 자정(子正). 정적과 또 하나의 새로운 움직임이 함께 시작하는 시간에 Las의 내항을 조용히 벗어났다. 줄지어 선 노랑색 가로등 불빛 밑을 질주하는 차들의 행렬, 높은 아파트와 산비탈에 붙은 수많은 가정(家政)의 밀어(密語)들이 어디를 향해 속살거리고들 있을까? 맹물에 뜬 기름방울처럼 이방인으로서 떠돌다가 역시 떠밀려 나옴으로써 비로소 해방과 안도의 숨을 쉰다.
내게도 길은 뻗고 닿아 있다. 이 물길이 곧장 일본을 거쳐 대한해협을 거치면 내 집이, 가족이 도사리고 있는 부산과 닿고 이어져 있다. 남은 40여일의 항정(航程)이 다소 긴듯하지만 어쩌면 잠깐이면 될 것이다. 곧 눈앞에 나타날 것도 같다. 지중해, 홍해, 인도양 그리고 동・남지나해를 거쳐야 하는 가운데는 낯선 혹은 숱하게 다녔던 항로도 있다.
오직 물길 곱고 순항이 되길 빌며 또 최선을 다하리라. 울렁이던 파도가 그대로 갑판 위에 머리를 디밀고 올라온다. 지중해 입구인 지부랄탈까지 3일의 항정이나 첫 항로인 거기까지가 고비가 된다. 좀 더 여분의 예비부력이 생길 때까지는 치솟는 물덩이가 께름직하기도 하다. 한 가지 일을 깊이 알수록 어렵다더니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자. 이 길은 내 길이고 숙명의 길이다. 현재로서는⎯. 그리고 내가 곧장 가야만 하는 가장 시급한 현실의 도정(道程)이기도 하다.』
위의 글은 1977년 3월 10일. 부산을 출발. 일본 오사카 – 나리타 – 알라스카 – 암스텔담 공항을 경유 아프리카 나이제리아의 라고스 공항에 도착, Hiroshima Maru(宏島丸)에 승선했었다. 그로부터 계약기간 1년을 넘기고도 넉달이 지난 시점이다. 선주(船主)의 사정으로 승선한 채로 일본까지 왔으면 좋겠다는 뜻을 맨닝회사와 모든 승무원들이 조건에 찬성하고 귀국을 연기, 그제서야 출항하게 된 그날 밤의 일기이다.
이렇게 시작된 귀국길의 첫 관문인 Suez 운하를 지나기 위해 7월 4일 11시40분 Egypt의 지중해측 Port Side 외항에 도착했다. 여나문척의 배가 대기중이었다. 항외(港外)를 Control 하는 Pilot Boat와 VHF(초단파무선기)로 연락이 닿는다. 내항 깊숙이까지 접근하여 Habour Pilot(항내 도선사) 승선, No.5 Buoy[浮漂]에 계류했다. 생각보다 번창한 항구다.
항내의 수많은 보트들이 아직도 노를 쓰고 있고 접안하자마자 수속관들과 Agent를 따라 개미떼처럼 올라오는 잡상인들이 아직도 질서가 없음을 짐작케 한다. Agent, Pilot 심지어 물건 파는자들까지 Whisky, Cigarette 달라고 손을 내민다. 체면도 염치도 아무 것도 없다. 어거지 뿐이다. 소위 Agent의 상무라는 자도 수속을 하고 쥐어준 3볼의 Dunhill 담배에는 못마땅한 표정이다. 지독한 곳이다.
스에즈 운하의 양쪽 항구
“밤 12시 Port Control Office와 연락 Convoy No.와 출항시간 등 통항정보 받으시오” 하고 갔다. 시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싶었으나 일절 상육을 금지시켰다. 새벽 1시경 출항가능성도 있고 또 몰지각한 놈들의 엉뚱한 짓거리가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출항하면 Suez까지 약 90마일의 운하통과중에는 잠시도 Bridge(선교(船橋)를 떠날 수 없는 일. 한숨 자두는 것이 좋을 듯.
따라 올라온 잡상인들은 일찍부터 세계적으로 알려진 소위 ‘박쉬쉬족’이다. 토산품들이라고는 보잘 것 없들을 가지고 와서는 끈질지게 사람을 시달리게 한다. 숫제 장사가 아니다. 거절하다 못해 성을 내고 고함을 쳐도 소용없다. 지겹고 지쳐 자빠지도록 만든다. 아무것도 귀찮고 그냥 돈만 가져가래도 안 된다. 오히려 지저분한, 물건 같지 않은 것을 더 가져와서 덤으로 준다. 주객이 완전히 바뀐다. 물건 사줄 놈이 손발 빌며 사정해야 할 판이다. 거기까진 좋았다. 이 정도면 버리는 셈치고 사두는 것도 괜찮고 견디다 못해 사기는 했다만 돈을 받아 쥐기가 바쁘게 ‘담배 한 갑, 맥주 하나 위스키 한잔’ 달라고 거머리처럼 따라붙는 데서 심한 굴욕과 패배감을 삼킨다. 속도 자존심도 없는 자들인가? 혹시라도 이집트 여행을 가시는 분들에겐 참고가 될 것이라 믿는다.
이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관리당국에서 미리 접수된 선박들을 크기, 선속 등을 고려하여 통항순서와 배척수를 정하고 대열(Convoy)을 만든다. 또 항과 중 발생하는 긴급상황을 대비해서 즉시 접안하고 계류할 수 있도록 미리 필요한 작업인부들도 승선시킨다. 모든 통항 지시는 운하당국과 승선한 Pilot(導船士)가 무선전화로 하지만 책임은 어디까지나 본선의 선장에게 있다. 통항기간 중에는 언제라도 선박기관(機關)을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선장은 계속 선교에서 감독과 지휘를 해야 하므로 여간 큰 고역이 아니다. 심지어 업무 중의 무슬림 도선사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계율에 따라 기도를 해야 하므로 그 시간만큼은 선장이 직접하란다. 누가 있거나 장소를 불문하고 시간만 되면 지참한 깡통의 물로 손과 얼굴을 씻고 방향을 정하고는 뭔가 중얼중얼 하면서 지극정성으로 이마를 바닥에 대고 절을 한다. 종교란 민도가 낮은 민족에 있어서 무서운 것임을 느낀다.
동승한 인부들의 식사도 본선에서 제공해야 했다. 점심 때 메뉴가 우리의 비빔밥이었는데 몇 사람이 밥그릇을 들고 선장을 찾는다. “고기는 한 점도 없고, 야채뿐이다.”는 항의다. 얻어 먹어도 철저하다. 설명이 불요, 데리고 사관 식당에 가서 “봐라, 선장인 나도 같은 것을 먹잖냐. 이것이 오늘의 본선 메뉴다.” 더 이상 말은 않지만 입은 쑥 나온다.
자연의 원리를 이용한 ‘技[기술]’로 만든 것이 파나마운하라면, 스에즈운하는 그야말로 힘[力]에 의존해 건설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삽으로 맨땅을 파서 만든 것이다.
운하의 개요를 보면, 1869년 11월 17일 개통을 본 이 운하는 이집트의 지중해쪽 Port Side 등대에서 홍해의 Suez만의 입구까지 162Km로서, 그중 직선부가 142km, 굴곡부가 20km. 전구간 가운데 실제 운하의 길이는 123km, 나머지 39km는 중간의 Timsah호(湖), Great bitter호 및 Little bitter호 등 호수이다. 이 운하를 직접 통항하는 것도 의미가 있고 나름대로 감회도 깊었다. 그러나 처음은 그러한 감개보다 안전한 항과(航過)를 위한 신경전에 마음이 조마조마 했지만 차츰 익숙해져감에 따라 과연 역사적인 대 역사(役事)였음을 더욱 깊이 느꼈다.
이 운하의 역사를 당시의 참고 항해서(航海書)에서 인용해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200만 년 전에는 홍해 자체가 지중해와 연결된 해협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차츰 나일(Nile)강과 바다의 퇴적물에 의해 지협이 생기고 지진이나 융기에 의한 변형을 가져왔다고 한다. 이곳에 이미 4000년 전의 이집트(Egypt)인들이 이미 운하를 만들었다. 그러나 고대의 운하는 모래에 뒤덮여 폐쇄되었던 것을 BC285-246의 트레미 왕조에 의해 복구되었다가 다시 8세기경 아랍민족의 침입이 두려워 폐쇄, 약 1000여년 동안 황폐된 체 버려졌단다. 단, 이 운하는 바다와 바다를 연결하는 것이 아니고 강과 바다를 잇는 정도의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1799년 1월 나폴레옹 1세가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온 후 수에즈(Suez)지협을 절개, 운하의 건설을 착안, 이미 발견되어 있었던 아프리카(Africa) 남단의 희망봉과 아시아(Asia)의 정복 그리고 수에즈(Suez)운하로 연결되는 함수관계를 이 희대의 영웅은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그는 곧 드페르라는 기사(技師)를 시켜 그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불행히도 측량작업을 끝낸 드페르의 보고서는 비관적이었다. 즉 지중해와 홍해의 해수면이 무려 9m의 차이가 있어 만약 이를 절개할 경우 거대(巨大) 조류(潮流)를 예상해야 하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만든다면 고대와 같이 나일(Nile)강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70년 뒤 프랑스(France)의 레셉스(Lesseps)가 운하개통에 성공을 이룩한 것이다. 그것은 전번의 기사 드페르의 조그만 착오, 즉 Vernier(눈금자)의 눈금 하나를 잘못 읽은 것이 바로 9m의 차이였던 것이었다.
1838년 나폴레온 3세 때의 군인출신이며 유능한 외교관이었던 27세의 기술자 레셉스(Lesseps)가 이 사실을 발견, 오류에서 빚어진 결과임을 지적하고 다시 18년 뒤인 1856년 이집트(Egypt)총독을 설득하여 운하회사를 설립, 착공한지 10년 6개월이란 세월과 4억2000만 프랑의 엄청난 돈. 12만명이 아랍인의 희생의 결과로 역사적인 공사를 완성한 것이다. 이 공사에서 파낸 흙이 7400만㎥라니 실제로 운하 서편에 산처럼 쌓아둔 흙더미가 묵묵히 말해주고 있었다.
스에즈 운하 건설자 레셉스
1869년 11월 17일에 개통을, 1887년 10월 24일에 조인된 국제조약에 의해 영세중립지로 정하여 이곳을 봉쇄할 수 없게 했다. 또한 각국의 군함, 상선 등은 평시나 전시를 막론하고 통항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한때는 이 운하의 건설을 방해했던 영국이 결국 경영권을 갖는 아이러니를 낳기도 했고, 이 땅에서 12만 명이란 인명을 바친 이집트(Egypt)의 이익은 불과 10%, 프랑스가 44.12%, 영국이 44.15%를 차지했었다. 국제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리송 하기만 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냥 있지를 않았다. 세계 제2차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통일아랍의 독립과 이집트(Egypt)의 혁명으로 집권한 낫셀이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 또한 전쟁으로 폐쇄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오늘날 역시 애당초의 뜻과 같이 동서양을 잊는 동맥의 구실과 아울러 이집트의 나일(Nile)강 다음가는 젖줄이 되고 있다. 국유화 이후 부단히 개수되어 왔으나 한때 전쟁으로 인해 갇혔던 선박 잔해들의 철거와 함께 재개통됨에 따라 지금은 완전한 복선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각 구간을 맡은 여러 나라 기업들의 굴착선들이 쉴새없이 모래를 퍼 올리고 있었다. 유난히 눈에 띄는 일본회사들! 일장기를 그 어느 깃빨 보다도 큼직하고 선명하게 올리고는, ‘밤낮도 없이 파 해친다’는 Pilot의 야유조의 말처럼-. 화롯가에 앉은 듯한 열사풍(熱砂風) 속에서 끈덕지게 파 들어가고 있다.
지금이야 발달된 위성통신과 정밀한 IT 기술의 융합으로 모두를 한 눈에 보면서 통제를 하겠지만 당시만 해도 원시적이라 할 수준이었다. 당시는 수로가 좁아 왕복항이 불가능하여 하행팀이 호수에 닻을 내리고 대기하는 사이 상행팀이 이동는 식이었기에 상황에 따라서는 2~3일 걸리는 경우도 있다. 지금은 언제나 왕복항이 상시 가능하게 되어 있다.
5일 새벽 4시경 Port Control(운하관제소)에서 ‘Convoy No.4’이며 05시 30분에 Pilot(통항도선사)가 승선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이미 1시반부터 수만톤짜리 거대한 선박들이 10여분의 간격으로 지정된 Convoy 순에 의해 계속 출발하고 있다. 남행선단의 제2진중 네 번째가 본선이다.
정각 6시에 계류를 풀고 출발했다. 도중에 Great Bitter호(湖)에서 한 선단이 정박 대기중에 다른 선단이 통과하겠금 되어 있다고 했다. 10여 군데 설치된 각 Signal station(관제소)에서는 Timsah호(湖)의 Ismaili에 있는 운하중앙통제소와 부단히 연락, 전체의 통항을 지휘하고 있다. 통항중 만약의 사고에 대비, 긴급 계류하도록 200m의 간격으로 Bit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를 위해 각 통항선은 반드시 소형보트와 Line Men을 싣고 가는 것이다.
황량한 사막! 정말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늘과 모래뿐이다. 보기만해도 물이 절로 생각나고 귀해 보인다. 저것을 옥토로 그리고 사람과 식물이 살 수 있는 낙원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물, 그것뿐이다.
통과중 연이은 사막 가운데 군데군데 언덕을 쌓고 군인들이 야영하며 주둔하고 있었다. 군복이 모래색갈을 본뜬 빛 바랜듯한 희끄무레한 것이었다. 모래 속에서 견디는 그 어려움도 짐작은 가지만 우선 외관상 맥도 힘도 없어 보인다. ‘저래 가지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했구나’ 덩치값도 못하고 묵사발이 되고 만 근본적인 원인은 그 나라의 크기나 부 보다는 정신적 자세가 아닐 수 없음을 재삼 느끼게 했다. 어느 때에 가선 저 모래만 팔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의 운하 모습(뒤의 모래산이 파올린 모래)
11:10분 Timsah호에서 Pilot 교대, 12:55시 Great Bitter호(湖)에서 북행선단의 통과를 2시간 가량 기다려 15:00시경 다시 속항하다. 이렇게 빨리 통항하기는 좀처럼 어려운 일, Capt.의 행운이라고 Pilot가 일러준다. 가장 수로가 좁은 Little bitter호(湖)를 지날 때는 그냥 불곁에 선 듯한 뜨거운 모랫바람이 불어닥친다.
오히려 문을 닫아 바람이 없는 곳이 시원한 느낌이다. 쇳덩이고 나무고 햇볕이 아닌 뜨거운 바람에 의해 달금질을 당했다. Egypt의 6000년전의 문화, 피라밋과 거대한 신전들, 그리고 영국의 박물관에서 본 미이라들이 생각난다. 이러한 사막 속에서 어떻게 하여 그와 같은 시기에 그러한 문화들을 일으킬 수가 있었을까? Nile강이 없으면 이집트는 그냥 사하라사막의 일부분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강 그리고 물, 그것은 죽음을 뜻하는 사막에 비하면 곧 생(生)과 활력, 창조를 가져오는 것이 아닐 수 없다.
16:30시 운하를 빠져나와 Suez측 입구에서 다시 항만도선사로 교대. 함께 온 Agent편에 편지와 월말보고서를 우송 의뢰하다. 멈춤없이 속항키로 했다. 외항에는 북행(北行)을 기다리는 많은 선박들로 붐빈다. 19:30시 완전히 통과(Clear Pass), 홍해(Red Sea)를 지나기 위해 Set Course(定針)을 했지만 좁은 수에즈만에 많은 통항선의 왕래가 심해 선교를 지켰다. 무덥고 뜨거운 바람이 계속한다. 경험삼아 해본 것은 좋으나 자주 할 것을 못 된다. 홍해를 완전히 벗어나려면 약 5일. 무더위와 사진(沙塵)이, 그리고 가끔은 돌풍이 도사리고 있다는 이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는 이 길 역시 새로운 길이다.
convoy로 통항중의 선박들(빌려온 이미지)
6일에는 물만 먹고 지낸 하루다. 너무 흘린 땀 때문인가. 얼굴이 으쓱하게 붓기까지 했다. 너나없이 헐떡이며 갈 곳을 못 찾는다. 찜통이다. 냉방장치가 없는 17년생 이 선박의 쇳덩이가 그대로 펄펄 끓는다. 불어오는 바람 자체가 뜨거운 이상 더 찾아 숨을 곳도 없다.
마신 물이 곧 바로 땀으로 스며 나오는가 보다. 마실 것만 해서 반말은 족히 되리라. 이열치열이라고, 오기(傲氣)에 햇볕에 온몸을 맡겨본다. 온 몸에서 물밖에 나오는 게 없다.
12시경 수에즈만(湾)를 벗어나다. 마치 달팽이의 촉수처럼 생긴 Aquba 만과 함께 시나이 반도를 형성하고 있는 바다이다. 옛날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가 추격하는 이집트군사를 뒤에 두고 하느님의 조화로 바닷물을 갈라지게 한 바로 그 곳이다. 과연 역사적인 사실인지는 몰라도 영화 ‘십계명’에서 본 감동이 새롭다. 책에서 읽고 본 많은 신전, 피라밋 그리고 ‘20세기의 피라밋’이라 일컬는 아스완땜 등이 바로 오른쪽 모래산 넘어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한 번쯤은 다녀가고 싶기도 하다. 예수가 태어나기 2000년 전에 세워졌다는 거대한 피라밋과 신전들은 그 성쇠를 되풀이 한 뒤였으리라. 이집트 문화는 모래 속에 묻혔던 것을 재발견해낸, 역사의 단절을 다시 찾아낸 ‘단절의 문화’이며, 불과 수백년 밖에 안 되는 자기네 문명은 ‘전통문명’이라고 우기던 일본 어느 사찰의 주지승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지만, 이 역사적 유물, 유적들을 한 번이라도 본다면 그와 같은 ‘우물안 개구리식’의 논조는 감히 나오지 못할 것이다. 40시간을 꼬박 선교(Bridge)에서 뜬눈으로 서서 보냈다. Blue Nile과 White Nile이 있다는 수단. 지구상 제3위 길이를 자랑하는 이 Nile강을 언젠가는 꼭 한 번 와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첫댓글 <물길 곱고 순항이 되길 빌며 또 최선을 다하리라>가슴이 찡하면서 눈믈이 고이네요. 송하가 여걸이구나. 나 같으며 신혼 때 벌써 요절했으리라.ㅠㅠ
요즘 성경 창세기부터 필사하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사우디까지가 궁금합니다.
유럽까지는 대충 여행을 했었는데^^
이제 나이가 있어서 포기하고 있습니다만 늑점이님의 글에서 대리만족하고 있습니다.
윗 글은 모바일에서 읽다가 작은 화면에 속 천불나서 PC로 옮겨 왔슴돠.^^
<사족>
궁터에 갔다가 눈물 찔끔거리며 모바일을 보고 있는 날 보고
"왜 울어?" "늑점이 글이 너무 슬퍼서"
"짜~ 식 널 왜 울린데?" "항해 이야기를 읽는데요..... (주절 주절)"
"내가 고생하는 건 괜찮고?
ㅋ
ㅋ
ㅋ
"당신 곁엔 내가 늘 있으니까. 토닥여 주고 아자아자 하잖아요. 그러나 늑점이는 송하가 멀리 있응께"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오늘 하루도 저물어 가네요.
흑! 흑! 흑! 부산넘
친구야 자네 항해 이야기만 읽으면 그렇게 간도 크고 통큰 사내였음을 실감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네.
사범학교 재학중엔 조금도 그런것을 못 느꼈는데 .....
마도로스 사나이 기질이 있었나봐...ㅎㅎㅎ
뭐 그냥 떠밀려 지난 거지. 우짤거요. 사방이 물이니 뛰어 내릴 수도 없고 걍 버틴거지. 고맙소. 건강하소. 부산넘
@늑점이 이번엔 캭캭 웃기넹 ㅎ
사방이 물이니 뛰어 내릴 수 없지요.
ㅋㄷㅋㄷㅋㄷ
그렇네요.
물이 아니더라도 떠밀려 지나오게 되더라구요.
*글이란 진실이 담겨 있어야 훗날 다시 음미하게 되나 봅니다.*
정말 실감나고 흥미진진한 실화가 감동적입니다. 스에즈 운하를 한번 검색해 보아야겠습니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 한 일입니다.
스에즈운하 검색해서 제일 긴 글을 옮겨 올려고요?
동문들 경험야그는 신바람나게 읽게 되는데 관심 없는 건, 길면 질립니다요.ㅋ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운하를 통과하는데 상행, 하행이 있고 중간중간에 기다리는 시일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