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시현된 무서운 화력
처음에는 개인이나 식민지 정부 등에서 시험 삼아 구입하였고 1888년 11월,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에라리온에서 원주민 탄압에 처음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정작 군 당국에서는 이 혁신적인 화기에 대해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아 맥심은 판매를 위해 직접 유럽 각국을 돌며 시범을 보여야 했다. 시범을 본 많은 이들은 빠른 발사 속도에 경악하며 관심을 표명하였고 속속 구매의사를 보였지만 정작 주문량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1889년 최초로 도입하였지만 대량 채용을 거부하였던 영국군의 생각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기관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맥심 기관총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적어도 5~6명의 인원이 필요했고 수랭식 시스템을 채용하였음에도 종종 과열로 문제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강력한 화력을 인정하지만 일선에서 보병들이 사용하기에는 곤란한 무기로 판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맥심 기관총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1893년 짐바브웨에서 원주민의 항거가 벌어졌는데 4정의 맥심 기관총을 보유한 불과 50여 명의 경비대가 무려 4천여 명의 원주민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한마디로 학살이었고 이것은 제1차 대전의 비극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특히 정규전이었던 1905년 러일전쟁 당시에 1정의 러시아군 맥심 기관총에 일본군 1개 대대가 도륙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