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넘어 백두대간·낙동·낙남정맥 종주 '철인'
1996년 9월 12일 열린 백두대간 종주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이동화 선생.
- 700㎞ 백두대간 단독 도전
- 33일 만에 돌파 기록 세워
- 이듬해 종주기 책으로 출간
- 언론 기고 등 활발한 활동
- 금정산 자연보호 앞장서
- 2001년 금정대상 수상도
사람이 태어나 한세상 살다 가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발자취를 남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국가와 사회를 위해 거대한 공헌을 하지 못하더라도 나름대로 소박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이름을 아름답게 남기는 이는 많다. 부산 산악계의 그 대표적 인물이 부산산악연맹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이동화(1936~) 선생이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혈기왕성한 젊은 산악인들도 주저하는 우리 산줄기 종주를 하나도 아닌 세 곳(낙남정맥, 낙동정맥, 백두대간)을 주파해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백두대간에 관한 단행본 '백두대간 종주'를 펴내 산악계의 화제를 모으면서 백두대간 마니아들의 우상이 됐다.
선생은 "나이를 먹어가니까 무언가 뜻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당시 산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영원히 마음에 간직할 수 있는 산행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산경표를 위하여'라는 책을 보고 '아! 이거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대간 종주에 나선 동기를 밝혔다.
우리 민족 고유의 산맥 개념인 백두대간이 긴 동면에서 깨어나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1980년대 후반 한 고지도 연구가의 집념에 의해 밝혀진 백두대간은 산악인의 구전으로 전해지다 급기야 1990년대에는 광고와 대학입시 논술고사 예상문제로까지 등장했다. 백두대간 종주 붐은 1988년 한국대학산악연맹의 대학생 49명이 여드레 동안 15구간으로 나눠 종주한 뒤부터다. 이어 1990년 산악매체 '사람과 산'이 '백두대간 따라 백두산까지 간다'는 캠페인을 연 것이 결정타였다.
이를 계기로 전문등반을 추구하는 사람부터 등산동호인까지 백두대간의 개념이 확산했다. 백두대간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자 언론이 앞다퉈 대간의 개념과 종주 소식을 실으면서 '백두대간'이란 말이 공식화됐다. 이후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대간의 마루금을 밟는 것이 큰 소망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고 강인한 체력과 굳은 의지, 경제적 여건이 뒤따라야 하므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백두대간 전도사를 자임한 선생은 국내 최고의 일출을 자랑하는 달음산 자락의 부산 기장군 장안읍 좌천리에서 태어났다. 1963년 한국전력에 입사해 몇 년 동안은 직장동료와 어울려 낚시를 즐겼다. 바다낚시를 하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위험이 따르지 않는 취미를 찾다 등산에 입문했다. 당시의 산행관은 '낚시를 가면 고기를 얻어오지만, 산에 가면 건강을 얻는다'는 정도였다.
산행다운 산행을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이다. 척추 디스크에 걸려 심하게 고생한 뒤 의사의 충고로 본격적인 등산을 위해 부산운봉산악회에 들어갔다. 불혹을 넘긴 중년에 나이 어린 산악회 선배들로부터 등산의 이론과 실기를 배우면서 산행에 쏠쏠한 재미를 붙였다. 1992년 30년간 몸담았던 한국전력을 정년퇴임한 뒤 산악회 회장을 맡아 젊은 축들과 함께 일본 알프스와 후지산, 말레이시아 키나발루, 대만 옥산 등을 오르며 뒤늦은 열정을 불태웠다.
백두대간이란 존재를 알고 처음 도전장을 내민 곳이 낙남정맥이다. 이미 마음은 백두대간에 가 있던 선생은 1994년 산악회 회장을 후배에게 물려주고 종주 대장을 자청, 8개월 만에 끝냈다. 자신감을 얻은 후 혼자 도상거리 420여 ㎞의 낙동정맥 종주를 석 달 만에 마쳤다. 이어 1995년 봄, 꿈에 그리던 백두대간 단독 종주에 도전했다. 총 6구간으로 나눠 많게는 일주일씩 종주하고 내려와 며칠을 쉬고 다시 걷는 방식으로 하루 평균 25㎞를 전진, 700㎞가 넘는 거리를 33일 만에 돌파하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다. 당시 보통 하루에 평균 12㎞를 걸으며 40~50일에 마치는 것과 비교하면 상상을 뛰어넘는 속도였다.
백두대간 종주를 마친 이듬해인 1996년 회갑기념으로 '백두대간 종주'를 펴냈다. 이 책에는 '후배 산악인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는 것을 남기고 싶다'는 평소 선생의 생각대로 하루 운행의 지형도, 고도표, 만보계, 시간, 도로, 행정구역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다른 사람들의 회갑연에 가니 선물을 줘서 산악계 후배들에게 남길 것이 없는지 찾다가 내가 종주한 기록을 책으로 만들어서 나눠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종주기를 썼다. 하지만 책을 만드는 것이 산 타는 것보다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언론에 글을 기고하고 방송 출연이 잦아지면서 유명 산악인이 됐다. 특히 '사람과 산'의 요청으로 2년간 백두대간을 다시 밟는 등 한민족의 얼이 담긴 백두대간을 널리 알리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또 (사)범시민금정산보존회 부회장을 맡아 금정산 자연보호에 앞장서는 등 부산 산악계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이러한 공로로 2001년 금정대상을 받았다.
팔순을 앞둔 나이지만 매일 새벽 2시간 넘게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 뒤 백양산을 오르고, 주말이면 어김없이 근교 산을 찾는다. 그래서 젊은 산악인들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걸음이 빠르기로 소문난 선생은 체력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산을 가까이하는 것이 소망이다.
부산산악연맹 회장
* 출 처: 국제신문 2014년 11월 23일자
* 옮긴이 : 김문식
첫댓글 대단한 산악인입니다.
늘 건강 하시길 기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