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출처 : 최회봉 / KTSM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신24:1)
모세는 이혼에 관한 규정을 얘기한다. 남자가 아내를 맞았는데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집에서 내보내라고 한다. 그러면 ‘이혼 증서’를 손에 쥔 여자는 다른 남자와 혼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모세의 율법은 당시 우월한 위치에 있던 남성의 완악함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자 혼자서는 살아가기 힘든 사회 구조에서 일방적으로 이혼당한 여성들에게 재혼의 길을 터주기 위해 ‘이혼 증서’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이 제도를 악용했다. 그래서 자기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혼 증서’ 한 장 손에 쥐어 내보내고, 다른 여자를 집에 들이는 빌미가 됐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생각이다. 이혼에 대한 주님의 생각은 어떠하실까?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의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이랬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마19:4-6)
예수님은 모세가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고 한 데 대해, “모세가 너희 너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오직 한가지 ‘음행’을 한 게 아니면,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이혼을 너무 쉽게 여기는 풍조다. TV에서는 이혼 한 사람들이 나와서 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다. 과거에는 이혼한 게 흠이 되기에 쉬쉬했는데, 격세지감이다. 개인주의가 강화되고, 자기중심성이 갈수록 짙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인다.
나이 든 사람들 사이에서는 황혼이혼이나 졸혼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몇십 년 마음에 들지 않는 배우자와 참고 사느라 고생했는데, 이제 남은 인생은 자유롭게 살자며 늦은 나이에 이혼을 결심하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사실, 혼인 생활이란 쉬운 게 아니다. 성경은 혼인 생활을 위한 조건으로 ‘피차 복종’을 요구한다. 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한다.
타인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철저하게 나를 낮추고, 내 자아를 죽여야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이 남편에게 요구하신 ‘사랑하라’는 것은 복종보다도 더 어렵다. 사랑은 오직 내가 십자가에 죽을 때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혼인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니, 결혼 생활이 지옥 같고 사는 게 지옥처럼 여겨진다.
혼인 관계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보완관계다. 성경은 아내를 ‘돕는 배필’이라고 칭한다. 보완관계라는 의미다. 그런데 싸우지 않으며 사는 부부는 거의 없다. 이것은 서로가 상대방을 보완관계가 아닌 경쟁 관계로 인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누구 말이 옳고, 누가 더 힘이 센지는 평생 동안 겨루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의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준비한 교회 프로그램들도 많다. 들어보면 공감이 간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가 머리로 깨달았다 해도, 아는 대로 살아낼 능력이 있느냐이다. 만약 정답을 배웠는데 그대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절망감은 한층 더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부부 문제는 인간의 죄 성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부부 문제를 해결하는 특별한 비법이 따로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복음으로 돌아가는 게 최선이고 비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때, 부부가 하나 될 수 있다. 하나님이 모든 부부에게 바라기는 ‘연합’이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부부가 하나 되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런데 내가 죽는 게 문제다. 내가 마음으로 원하는 대로 내 자아가 죽을 수 있었다면, 내게는 부부 문제뿐 아니라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늘 원치 않은 죄를 짓고, 회개하고, 결단하고, 또 실패하고, 절망하고, 회개하고, 다시 결단하고…. 개미 쳇바퀴 도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왔다.
그러던 내가 최근 길을 찾은 것 같다. 내 마음에 밝은 빛이 비춰지는 느낌이다. 이 길은 멀리 있거나 감추어져 있지 않았다. 아주 간단하고,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진리였다. 그것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었다. 내 모든 일과 환경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람들에게 감사키로 한 것이다.
특히 매일 부대끼며 살아가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범사에 감사하기로 했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아 살짝 스치기만 해도 나를 움찔대게 했던 쓴 뿌리인 아내에 대한 불평 원망 서운함을 뽑아내고, 그 자리를 감사로 채워 넣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에게 감사할 게 너무 많았다. 내가 이만큼이라도 살아왔고, 또 이만큼이라도 살아가는 것은 아내 덕이었다. 내 삶과 가정의 모든 것 중 어느 것 하나 아내의 정성과 노력 없이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 감정의 뿌리를 이루는 정서를 원망 불평에서 감사로 교체하니, 매 산간 표출되는 감정이 바뀌었다. 순간적으로 욱하고 올라오는 감정 때문에 늘 실패하고 넘어졌는데, 이제 그런 일이 기적처럼 사라졌다. 내 인생에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그것도 아주 별나거나 특별한 얘기도 아닌 ‘감사’ 하나만으로 해결되다니…. 무엇보다도 그 일이 별로 어렵지 않았다는 게 신기하다.
내 심중(heart)에 감사가 들어서면서 내 마음(mind)이 바뀌는 것을 경험한다. 내 믿음 체계가 강화되면서 사고체계도 변화하고 있다.
감사가 기적을 창출하고 있었다. 그동안 감사와 관련해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듣고 책을 읽고 공감했지만, 이제야 그것을 진짜 내 것으로 만들어 가는 느낌이다.
그 효능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로 하면서부터, 내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회복되는 것을 본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신 것 같다. 내가 원망 불평에서 벗어나 범사에 감사하는 순간, 실질적인 나이 주인이 바뀌기 때문이다. 내 안에 원망 불평하는 마음이 있을 때, 나는 마귀의 통치 아래 있게 된다. 내가 하나님에게서 끊어지는 순간이다. 하나님이 내게 역사하실 수가 없다.
그런데 감사하는 순간 나는 하나님 안으로 쑥 들어간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 구석구석에 흐르고, 나는 하나님 자녀의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감사하라고 하신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 일을 생각하다가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저절로 생긴 게 아니라는 마음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묵은 숙제의 실마리를 찾고 기뻐하는 나를 보고 가만히 웃으시는 성령님 모습이 떠오른다. 그분의 작품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수렁에서 건져 주신 좋으신 성령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다시 소망을 갖습니다. 내 안에 감사와 기쁨과 평화가 가득하게 하시니, 내 마음이 춤추는 듯합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