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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설 그리고 우리 / 수필
지 석 동
우리에게 설은 고단한 삶 중에도 조상을 섬기고 이웃과 나누는 우리민족 미풍양속의 최선의 가치였다. 그 날만은 먼 곳에 나가있던 식구들이 돌아오고 없는 중에도 먹을 것 입을 것을 준비해 같이 나누고 즐기던 모두의 축제고 기쁨이었다.
설을 쇠자면 준비하는 일이 참으로 많았다. 남정네는 보름 내 놀 생각에 산이고 들에서 나무를 해다 마당한쪽에 집채만하게 나뭇더미를 높이 쌓아올렸다. 보통하루에 두 짐씩을 했으니 그도 힘든 일이었다. 427정이나 되는 너른 선산에 해다 땔나무가 없어 국망봉을 넘어 남의 산에서 해다 때던 시절이니 골 빠지는 하루 두 번의 나뭇짐에 식구들이 등 따습게 겨울을 났다. 나무하는 틈틈이 아이가 가지고 놀 팽이를 깎고 연을 만들고 집 안팎으로 손볼 대 손을 봐야 오실 손님에게 게으름을 감추었다.
설 때 일은 거의 여인네들이 하는 일이라 한달 전부터 준비를 하는 집도 있었지만 대개 이십일 전부터 시작했다.
먼저 빨래부터 했다. 오랜만에 명절이라고 왔다 자고 갈 손님이 덮을 이불과 식구들이 덮었던 이불 홑청을 뜯어내 빨았고 식구들이 입고 명절을 쇨 옷을 빨았다. 국민의 절반이상이 흰 무명옷을 입던 때라 남 앞에 끼끗하게 입자면 여인네 손이 냇물 속에서 빨갛게 얼어야 했다. 식구조차 대식구라 징글징글하게 많은 빨래를 개울에 나가 손을 호호 불며 방망이질을 해 빨래 빛을 냈다. 빨래를 문종이 같이 하얗게 빨아 말리면 풀해서 말려 밤 깊도록 다듬이질한 이불홑청부터 끼끗이 갈아놓고. 어른이 계신 집은 눈같이 하얗게 빤 두루마기를 풀해서 말려 다듬이질해 빳빳하게 다려서 동정을 달아 횃대에 걸어놓고, 바지저고리 조끼 마고자 다려서 동정 다는 일만도 몇 밤을 지새워야 했다. 어른 옷이 끝나면 나머지식구의 옷이나 버선 양말을 깁거나 덧대는 일도 만만치 안아 밤이면 침침한 등잔불 아래서 졸음을 쫓아내야 했었다.
다음은 유기그릇과 제기를 꺼내 얼굴이 비치도록 닦는 이일이 어디 수월하던가. 우선 기왓장을 구해다 곱게 빻은 걸 서너 번 꺾어 접은 볏짚에 묻혀 손목이 아프도록 빡빡 문질러 빛깔을 살려냈다. 명절에는 손님도 많으니 있는 데로 내놓아 그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먼저 제기를 얼굴이 비치도록 닦았다. 다음에 주발 사발과 종지종류를 닦고 주저와 젓가락을 닦았다. 사발은 뚜껑이 없지만 주발은 뚜껑까지 닦아야 했으니 그 많은 그릇을 다 유리알같이 닦자면 팔이 빠지는 듯 아프고 허리는 얼마나 아팠던가. 해는 짧아 서두르지 않으면 다음날도 그릇가지고 씨름을 해야 했기에 죽기로 끝내야 다음 일을 제때 하게 되 해를 몇 번씩 쳐다보았다.
설이면 뉘 집이고 엿을 고았다. 엿은 수수. 쌀. 찹쌀로 고았지만 대개 수수나 쌀로 고았다. 타지방에서는 고구마 호박으로도 고았다고 했는데 소문만 들었다. 엿을 고자면 엿기름이 있어야 했다. 여름에 겉보리를 싹틔워 햇볕에 말려서 갈아 두었다 엿을 고을 때나 식혜를 할 때 썼다. 가마솥에 물을 붓고 맷돌에 곱게 간 수수가루나 쌀가루 넣은 다음 준비해두었던 엿기름을 적당량 넣고 골고루 저은 다음 아궁이에 불을 집혔다. 이때 온도가 올라가면 서서히 젓는데 엿이다 되도록 꼭 붙어 서서 저어야 했으니 소피보기도 어려웠던 게 엿 고기였다. 이렇게 몇 시간동안 눈물콧물 짜며 공들인 다음에 되는 것이 조청이고 그것을 찬바람에 굳힌 것이 엿이다.
힘들게 만든 조청으로 여러 가지 명절음식을 만들어 썼다. 지금이야 만들어 논 것을 사다 쓰지만 그때는 제상에 올릴 적거리. 과일. 포. 어적에 쓸 것 말고는 모두 만들어 썼으니 설하면 한참을 바쁘고 왁자했었다. 명절이 끝나도 조청은 여러모로 맛내는 조미료 역할을 했다. 굳은 인절미를 화롯불에 녹여먹을 때 조청을 찍어먹고 가래떡도 찍어 먹었다. 지금도 우리네 음식에는 물엿이 들어가는 게 많듯 그때는 아주 귀한 대접을 받던 조청이다. 엿을 고는 날은 여인네들이 연기에 몇 번이나 눈물 콧물을 빼야 했다. 나무도 많이 들어 방이 쩔쩔 끓었다. 엿 고는 날은 어른들은 허리 지지는 날이고 아이들은 더워 죽는다고 베개를 들고 윗목으로 달렸다. 그런 날은 달디단 조청을 맛볼 수 있어 밤 이슥하도록 우리는 새새댔고 괸돌에서는 부엉이가 섬뜩한 소리로 울었고 앞내서는 얼음 접히는 소리가 쩡쩡 울렸다. 주엽산을 넘어온 눈이 사립에 마당에 지붕에 사륵사륵 쌓이고.
엿 고기가 끝나면 과줄 약과 산자를 하고 다식을 박아냈다. 과줄은 쌀가루에 조청을 넣고 반죽한 것을 직사각형의 같은 크기로 잘라 기름에 튀긴 것이고. 약과는 된밥을 해 밤 잣 대추를 넣고 조청에 비빈 것을 둥글게 뭉친 것이고. 산자는 쌀가루를 튀겨서 조청 바른 것에 대목장에 나가 튀겨온 튀밥을 묻힌 것이고. 다식은 검은깨 송화가루 쌀가루를 조청에 잘 개어 다식판에 넣어 꼭꼭 눌러서 뺀 것이 다식이다. 다식판을 집집이 있어 그 집 고유한 문양이 있었다. 대개는 국화무늬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중에 송화다식은 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소나무 꽃이 노랗게 핀 5월 어느 날 소나무 밑에 보자기 같은 걸 깔고 고생고생 해 털어 온 꽃가루를 오물을 제거한 뒤 뽀송뽀송하게 말렸다. 기제사나 명절 다례상은 물론 환갑이나 결혼잔칫상에 올라가던 귀한 것이다.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던 그 맛을 지금은 구경도 할 수 없어 더 먹어보고 싶다. 지금이야 제사를 지내고 나서 북어포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지만 그것 쭉 찢은 것 한쪽 얻어먹으려 손 내밀다 군밤 맞던 때도 있었다.
제주를 빗는 일도 만만치 안았다. 조상께 올리는 술이니 정성이 지극했고 세배꾼들 오면 내놓는 술이니 빛이고 맛이 오는 분들 입에 맞게 빗으려 여간 공을 들인 게 아니다. 우선 좋은 날을 잡아 제일 좋은 쌀로 빗는데 뉘 하나 없이 잡것을 골라 아무도 일어나기 전에 우물물을 여다 그물로 고두밥을 지어 술을 빗었다. 술독도 약쑥 말린걸 태워 독안에 잡 냄새를 제거한 다음에 김빠져 꾸덕꾸덕한 고두밥에 누룩을 골고루 섞어 붓고 따듯한 방 아랫목에 모셔 이불을 덮고 숙성되기를 기다렸다. 동네서 술맛이 좋은 손이 있어 그 집에는 사람이 많이 꼬였었다. 술괴는 냄새가 나면 그 시큰한 냄새에 아이들은 괴로웠고 어른들은 그 냄새가 더 깊어갈수록 입이 귀에 달렸었다. 그 시절에는 냄새나는 것도 많았다. 겨울이면 메주 뜨는 내를 줄창 맡아야 했고 명절 밑에는 술괴는 냄새, 부엌에서 나무 때는 연기가 방에 들어와 그 매캐한 내를 달고 살았다. 그뿐인가 명절에 두부하고 남은 비지로 고작비지 뜨는 냄새 청국장 뜨는 내 등 지금은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만이 맞는 냄새 속에서 어른은 늙고 아이는 커갔다.
설밑 대목장에는 앉은뱅이도 간다고 했었다. 연중 제일 큰장이 추석과 설 장이었다. 대목장에 갈 때는 뼈빠지게 지은 곡식을 이고 지고 갔다. 닭이 있는 집은 계란을 모았다 볏짚으로 열 개 씩 넣은 꾸러미를 꾸려 들고 명절에 필요한 것을 바꾸어다 썼다. 한 푼이라도 돈 되는 것이면 들고 나가야 하는 모두 옹색한 형편 이였으니 부끄러울 것도 남우세스러울 것도 없었다. 힘들여 이고 나간 것을 돈으로 바꾸면 먼저 제수부터 장만했다. 포 조기 옥졸 초 한지 사과 배 곶감 등 집에서 나지 않는 것들을 구했다. 다음은 어른이나 아이들 옷에 달 동정을 사고 아이들 설빔인데 설빔은 언제나 한 치쯤 넉넉한 것으로 샀다. 못 먹여도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기에 다음해까지 입으라고. 아이들 많은 집은 고무신 값만 해도 만만치 않아 아비어미 속이 탔다. 다 자란 여식이 있는 집은 예쁜 댕기도 사야했으니 이고 지고 나간 곡식 값으로는 깜냥하기 어려워 가슴 절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수와 좋지 않아도 자식들 설빔을 사고나면 추위 녹여줄 국밥 한 그릇 입에 넣기가 바빴다. 빈속을 대포한잔으로 때우고 걸어오는 손 시린 이십 리 창창한 길 서름 같았지만 그렇게 묵은해가 가고 새해를 맞으며 살았다.
명절에는 참으로 할 것이 많았다. 제상에 올릴 삼색나물도 준비해야하고 전도 붙여야하는데 불 머리에 앉아 종일 기름내를 맡으며 하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 가짓수도 많아 골머리 아픈 게 전 붙이기였다. 우선 소댕뚜껑을 불이 활활 타는 화덕 위에 엎어놓고 돼지기름을 바르며 밀전 녹두전 동태전 두부전을 붙였다. 아이들은 그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기름 다 빠진걸 주어먹는 맛이 어찌나 좋던지. 지금이야 식용유로 지져내니 소댕질하던 돼지기름의 그 고소한 맛을 모른다.
명절이고 기제사고 떡이 꼭 올라갔다. 지금이야 사거나 떡집에 매끼면 시간 맞추어 배달을 해주지만 그때는 떡 몇 가지 하느라 허리 빠진다고 했다. 시루를 조금 앉혀서 편을 올렸고 떡국은 제상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가래떡을 하느라 방앗간에가 언 발을 동동 구르며 뽑아다 썼고 절편을 해 올렸다. 절편은 집집이 떡살이 있어 찰진 떡 가슴에 무늬를 찍어 썼다. 무늬는 몇 가지 됐는데 대부분 수복을 비는 글자를 넣어, 차례에 쓰고 난 다음 먹는 사람의 명과 복을 비는 간절함이 있어 더 의미가 있었다. 빗살무늬 물고기 학 네모 세모 등 여러 문양이 있어 다복 다산을 빌었다. 인절미도 했다. 인절미나 절편감도 떡판에 놓고 떡메로 쳐야 제대로 된 인절미 맛이 나고 절편 맛이 나는데 기계 나오고 힘들여 하는 사람 없어 우리 곁에서 사라진지 오래되 민속촌에서나 보는 세시풍속 됐다.
설음식에 두부도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였다. 대개는 자기들 먹을 만큼의 콩 농사를 지었을 뿐더러 수입원이기도 했던 작물이 콩이다. 콩타작을 하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메주 쑤어 매다는 일이고 다음이 설에 두부 만드는 일이지 싶다. 콩 타작하는 걸 보면 그 집 소도 빙그레 웃는다고 했다. 소가 제일 좋아하는 겨울 먹이가 콩깍지이기 때문에. 콩을 상이나 함지박에 부어놓고 벌레 먹거나 덜 여문 것은 물론 잡티를 골라낸 탱글탱글한 콩을 말갛도록 물에 불궈 맷돌에 한 숟가락씩 떠 넣으며 간 콩을 집에서 제일 큰 무쇠솥에 붓고 끓이되 눌지 않게 몇 시간을 팔 아프게 저은 다음 간수를 넣어 엉기면 베 보자기에 쏟아서 돌 같이 무거운 걸로 눌렀다 잘라낸 게 두부다. 이렇게 힘들여 만든 두부로 부침과 탕이 제사상에 오르고 으깨서 만두 속에 쓰이고 세배꾼 상에 내놓는 지짐이나 부침이 있다.
설에 빠질 수 없는 별식이 만두다. 제사상에는 올라가지 못해도 제사 뒤 제관들 음복 때 내놓아 속을 채워주고 찾아오는 세배꾼 대접을 했다, 만두는 꿩만두가 제일이라고 했는데 나는 아직 먹어보지 못해 그 맛을 모른다. 만두를 빗으려면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빗었다. 우선 만두 속을 준비하는 게 무경험자가 할 일이 아니다. 만두에는 그 집만의 맛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전통이 이어져 온다는 말이다. 만두 맛은 만두피의 두께가 얼마냐 에도 달렸고 속에 무엇이 들어가냐에 다르다. 따라서 지방바다 고유한 만두가 있어 모양이나 맛이 다르다. 추운 지방 북쪽의 만두는 남쪽보다 많이 컸다. 따라서 속에 들어가는 양도 많아 한 두 개면 배부를 정도고 남쪽 만두는 북에 비해 크기나 모양세도 여러 가지로 맛도 제 각각 다르다. 속 거리로 집에서 기른 숙주나물 묶은 김치를 곱게다지고 으깬 두부에 갖은 양념을 해 버무려 썼고 있는 집에서는 소고기나 돼지고기 다진 것을 넣었다. 이리 준비한 속을 넣기 위해 피를 만들었는데 농사지은 밀가루 반죽을 해 상에다 놓고 밀어 사발 같은 것으로 눌러 떼어 낸 것에 속을 넣었다. 이때 과년한 딸들이 세배 오는 형부를 골려주려 매운 고춧가루를 넣은 것을 표시해 두었다 형부가 오면 끓여 내놓고 형부가 먹고 절절매는 모습을 보려 모두 시침을 때고 앉아 기다렸다. 그러나 형부는 속지 않고 용케도 골라내 처제들을 안타깝게 했던 일이 이제는 전설 따라 삼천리같이 아득한 이야기가 되었다.
설에는 원근동으로 세배를 다녔다. 세배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설 전 그믐날 웃어른에게 다니며하는 묵은세배가 있고 명절날 하는 세배가 있어 멀고 가깝고 없이 문안 겸 세배를 다녔다. 특히 외지에 나갔다 들어온 사람들은 묵은세배를 꼭 하고 다녀 어른들께 무사히 돌아왔음을 알렸다. 일거리 많은 여인네들은 명절이나 제삿날 돌아오는 게 끔찍했지만 아이들은 벌써 한달 전서부터 손꼽아가며 기다렸다. 그 날이나 돼야 고기점이라도 입에 넣어보고 설빔으로 새 옷을 입어보고 새 고무신을 신을 수 있어 왜 빨리 날짜가 안 가느냐고 안달을 했다. 사내아이들은 집안 어른한테 하는 세배는 아침부터 어른 따라다니며 종일 지내는 제사 음복 때 틈틈이 세배를 올리고 동네 어른이나 먼 곳에 게신 분들께는 선보름 내내 다녔다. 또래들끼리 모여 세배를 가면 으레 덕담을 내리시고 일년사이 많이 컷 다는 말씀에 다과를 주시어 이 집 저 집 다니며 배껏 먹다보면 배탈이나 어른이고 아이고 고생을 했다. 어쩌다 세뱃값으로 돈이라도 받으면 하늘을 나는 듯 기분이 좋아 팔짝팔짝 뛰었다.
설에는 놀이도 많았다. 어른들은 척사라고 윷을 놀아 크면 송아지를 상품으로 탔고 작으면 솥이나 냄비 등의 생활용기를 걸고 동네가 들썩들썩 하게 꽹과리 북 장구 징을 울리며 걸판지게 놀았다. 어쩌다 윷이나 모가 나오면 지화지화지화자를 부르며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는 모습은 가히 볼만했었다. 남정네들이 마당에서 걸판지게 놀았다면 큰애기들은 골방에 모여 시집간 친구들을 만나 시집살이의 맵고 짠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다 낮이면 담 높은 집 울안에 모여 총각들 가슴을 태우는 널을 뛰었다. 담 너머로 언뜻 언뜻 보이는 치마와 붉은 댕기 너풀대는 모습은 한참 때 남정네들 마음을 잡을 만 했었다. 아이들은 세배가 끝나면 낫으로 깎은 팽이나 철사로 날은 만든 썰매를 들고 언 논이나 개울로 나가 놀거나, 햇살 좋은 마당에 몰려 제기를 찼다. 집집이 정성으로 만든 연도 날렸다. 하늘 높이 날려 일년을 무사히 나게 해달라 빌고 액땜막이로 끊어 멀리머리 날려보냈다.
평생 힘든 명절을 살고 가신 우리네 어머님들께 새삼 고마움과 위로를 보내며 가난해도 명절은 며칠 씩 잠 못 자며 준비하던 즐거움이었는데 살만해 배들이 나온 지금 우리 것을 많이 잊을 것 같아 애석하다. 생각 같아서는 민속자료로 보전하는 의미에서 명절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싶다. 2011.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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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석동 님의 글이 민속자료의 안내서와 같은 글이네요. 저는 우리나라 세시풍속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고 실감난 글을 본 일이 없습니다. 석동님의 글을 읽고 우리나라 세시 풍속, 특히 설 명절 전후의 세시풍속에 대해서 많은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이 정월 열나흘 오곡밥 먹는 날
많이 드셨는지요.
브럼도 꼭 깨트시고 귀밝기 술도
빼놓지 마세요.
아침부터 무슨 술이냐 하시겠지만
그 한 모금이 일년내 편하다면 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전 같으면 공터에나 들에나가 쥐불놀이를 많이 했는데
지금은 그 의미도 녹슬어 불장난 한다고 지청구나 듣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