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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96
창세기 36:1-19
에서의 족보
아홉 번째 톨레도트 -
28:5에서 “야곱과 에서”라고 하여 밧단아람으로 가는 야곱을 먼저 기록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야곱을 장자로 선언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35:29에서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라고 하여 에서를 먼저 언급한 것은 아버지 이삭의 죽음 안에서는 에서가 장자가 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이삭 역시 언약의 아들로 그 죽음 안에서 육의 장자가 아닌 언약의 은혜를 입은 장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에서의 ‘톨레도트’를 제시한다. 에서의 역사를 언급함으로 인간의 역사는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의 톨레도트 안에 들어와야 하는 역사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37장 이후부터 계속될 야곱의 계열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에서의 톨레도트를 정리하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의 전형적인 기록 형식으로 언약의 계보를 보여주기 전에 언약에서 제외된 계보를 짧게 처리한다.
에서는 영원히 가나안 땅을 떠나 에돔에 정착하여 그의 자손들이 번성하는 하나님의 복을 받았으나 그들은 언약 밖에 사는 자들이다. 그러나 야곱과 그의 집은 가나안 땅에서 언약의 성취를 기다렸다. 구약 전체에서 자주 나타나는 에돔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이해하는 기원이 되는 기록으로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어떻게 이스라엘과 에돔을 다루시는지를 볼 수 있다.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1절). “에서”는 ‘거친, 털 많은’이라는 뜻이고, “에돔”은 ‘붉은’이라는 뜻이다. 이미 앞에서도 나누었지만 ‘거칠다, 붉다’라는 이름과 별명 속에 거칠은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죄인의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참고 사 1:18). 에서의 족보에 대해 길게 다루는 이유는 37장에 기록된 야곱의 톨레도트와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즉 겉사람과 속사람의 대조이다. 인간의 죄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야곱과 에서가 한 형제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것은 태어난 형편 등 외적인 모든 것이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굳이 쌍둥이를 놓고 하나는 사랑으로 하나는 미움으로 구분하여 대하셨다는 것은 사랑의 조건이 인간 편에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뜻이다. 즉 사랑을 받을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택하고 베푸시는 사랑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과 뜻에 의해서 베풀어진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시도하는 모든 열심과 노력은 율법적인 자기 의로 헛된 것이다.
야곱과 에서는 복과 저주가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자로 존재했다. 따라서 에서가 존재함으로써 야곱의 복의 상태가 더욱 선명하게 증거된다. 죄가 의와 함께함으로 죄의 모습이 증거되는 것이다. 빛이 옴으로 어둠이 어떤 것인지가 드러나는 것과 같다. 결국 에서의 혈통과 번성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것은 에서가 누리는 것들이 결코 복의 상태가 아닌 죄와 저주 아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의 은혜에 이끌려 간다.
“2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3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2-3절). 이미 언급된 말씀과 비교해 보면 이름이 달라졌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창 26:34)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창 28:9)
한 사람에게서 두 이름이 언급되는 이유는 역사를 통해 이전의 것에 더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꾸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분명하게 나타내시는 것처럼, 반대적 의미로 언약의 대적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이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로 바뀌었다. “아다”는 ‘장식’이라는 뜻인데 라멕의 아내였던 이름이기도 하다(창 4:19). 헷”은 ‘넘어뜨리다, 위협하다’라는 뜻의 ‘하타트’에서 유래한 말이다. 즉 헷 족속은 힘을 자랑하는 족속이다.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이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로 언급된다. “오홀리바마”는 ‘오헬’(장막)과 ‘바마’(높다)의 합성어로 ‘높음의 장막’이라는 뜻이다. “헷 족속”이 “히위 족속”으로 바뀐 것은 헷 족속에서 분리되어 히위 족속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이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으로 바뀌었다. “바스맛”은 ‘향기’라는 뜻이다. 이름이 바뀌어 기록되었지만 여전히 종교적인 흉내를 더 고차원적으로 나타내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종교 생활을 나타낼 뿐이다.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는 것을 에서는 이스마엘의 딸 중에서 취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아브라함의 아들 후손이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니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죄인들은 율법을 자기가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되면 지킬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라도 지켜 행하는 자기 의로 이루어내는 존재이다.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라는 것은(창 24:3-4, 28:1-2) 단순히 가나안 땅의 가나안 족속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여 보여주고자 하시는 언약적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존재라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과 같이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난 것과 같은 동질성을 확보한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언약적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것은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창 15:18-21)
“4 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5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더라”(4-5절). “가나안 땅”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밝힌다. 에서의 아들들은 가나안 땅에서 태어났지만 세일(‘머리털’이라는 뜻으로 머리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담고 있는) 땅으로 밀려난다. 더욱이 재물도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6절)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야곱의 아들들이 약속의 땅 밖에서 태어나서 약속의 땅으로 옮겨온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와 그의 자손들은 약속의 땅에서 옮겨갈 수밖에 없고 비록 하란에서 난 자라도 그 땅을 차지하는 자는 야곱의 후손이다. 언약의 상속자가 언약의 땅을 차지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가지고 일하시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에서 태어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품은 자로 은혜를 입은 자가 언약의 땅을 차지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비록 언약의 땅에서 혜택을 누리고 맛보기는 하였지만 언약을 알지 못하니 대적하는 율법적 행위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7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6-8절).
문자적으로는 야곱과 에서의 소유가 많아서 같이 살 수가 없어 세일 산으로 옮겨갔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이후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미 에서는 세일 땅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창 32:3). 언약적인 측면에서 아브라함 때 롯을 약속의 땅에서 제외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서로의 가축과 재물을 그 땅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함으로 에서가 야곱을 떠난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서 에서가 제외되고 야곱이 언약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제 언약에서 땅의 상속자는 야곱임이 확증되고 땅의 의미는 언약을 드러낸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는 이러하고”(9절). 에서로 시작된 에돔 족속은 왕을 세우고 강력한 나라를 이루었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육의 사람이요 겉사람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대적하는 살아가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에서의 후손들은 언약의 말씀을 명령으로, 계명으로 보고 자기 힘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못한 에서의 후손들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와 대비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은 언약의 말씀에 이끌려 가는 야곱의 후손이 차지하는 것이다.
39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창 27:39-40)
이 말씀이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이것이 바로 에서의 운명을 확정짓는 내용이다. 에서의 후손이 에돔으로 나라를 이루며 왕들이 남으로 외형적으로는 잘 살고, 형통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나 중요한 것은 지금 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육의 사람, 겉사람을 처절하게 나타내며 살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말씀한다. 그래서 아우가 주는 멍에를 떨쳐버리고자 하나 은혜가 주어져야만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의 사람, 속사람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아니 육의 사람, 겉사람은 죽이시고 영의 사람, 속사람으로 살리시는 은혜를 입히시는 것이 언약이고 그 언약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시편 73편에서 아삽은 악인은 벌 받고 의인이 형통하여야 당연한데 어떻게 악인이 형통한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성소에 들어가면서 그 결국을 알았다고 고백한다. 악인의 형통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결론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복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악인의 형통이 망하게 되어 있다고 하여도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기에 아삽은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그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토로하였다.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만이 굳게 선다는 것이다.
에돔의 왕의 족보이기에 에서의 형통으로 보일지라도 언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악인은 율법적 행위로 자기 의를 마음껏 발산하게 되는 상태에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진리를 알고 교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진리의 삶이 되지 못하고 완벽한 교회를 이룰 수 없는 상태로 살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 에서의 본모습을 통해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자기 의, 곧 십자가만 남기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으로 인해 흔들릴 수 없고 믿음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십자가 은혜로 고백하게 된다(합 2:4, 롬 1:17)(2024112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