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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가 김태두 경남아동문학회 전회장이
<아동문예> 2013. 11, 12월호에 동화 <잊혀졌던 친구>를 발표했다.
동화
잊혀졌던 친구
김태두
1
도령이는 할아버지와 손을 잡고 정답게 길을 가고 있었다. 이른 새벽길이라 길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학교가 보이는 곳에 이르자 할아버지는 고요함을 깨뜨리며 입을 열었다.
“도령아! 저 학교에 네 아빠가 졸업했고, 또 나도 졸업했단다.”
그러자 도령이는 고개를 돌려 유심히 학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요 할아버지! 그때 아빠의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느닷없는 질문에 할아버지는 절로 웃음이 나온다. 올해 2학년이 되더니 여자친구에게 관심이 생겼나?
“그건 직접 네 아빠에게 물어 봐라.”
“그럼, 할아버지는요?”
할아버지는 선뜻 답을 할 수 없었다. 여자친구라? 여자친구야 많았지. 하지만 도령이가 묻는 여자친구는 아마 연애편지까지 써서 보낸 친구를 말하는 것 같은데 기억을 짜도 없다. 그러다가 불쑥 떠오르는 얼굴이 나타났다. 잊혀졌던 친구!
“여자친구는 없었고, 그 대신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말이다.”
“남자친구요?”
“그래, 남자친구인데 그 친구 생각을 하니 눈물부터 나려고 한다.”
도령은 남자친구란 말에 시들해지다가 눈물부터 난다는 말에 호기심이 바싹 생겨 할아버지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부터 60년 전으로 날아간다. 도령아, 정신 차려라. 우린 지금 타임머신을 탄 거야 .쓩!”
2
덕구(할아버지 이름)는 올해 1학년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서 그런지, 누나들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영 숫기가 없었어. 치마만 입혔으면 영락없는 계집애라 어머니는 걱정이 태산 같았거든. 하나 뿐인 아들을 씩씩하게 키우고 싶었는데 저게 뭐야? 총 놀이나 말놀이 대신 방구석에 앉아서 인형 만들기 아니면 공기받기나 하고.
당연히 반장 뽑는데도 떨어졌다. 덕구도 반장을 하고 싶기는 했지. 그런데 용감무쌍한 아이들이 반장할 거라고 손드는 바람에 밀려났어. 1학년 때 반장은 어떻게 뽑았느냐 하면 그냥 선생님이 또록또록한 아이를 골라 뽑았거든. 어느 날 아침에 선생님은
“반장 하고 싶은 사람?”
하고 반 아이들을 빙 둘러 보았지. 그러자 벌떼 같이 아이들이 서로 반장할 거라며 팔을 들었고, 어떤 아이는 아예 걸상 위에 올라서서 팔을 흔들어댔어. 그러니까 힘없이 올린 덕구의 팔이 선생님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니까.
고개 너머 대은이란 아이가 있었는데 그도 반장을 하고 싶었지만 떨어졌지. 그는 또래들 보다 한 살 많아서인지 키도 크고 힘이 세었지만, 부반장에도 뽑히지 못했어.
그런데 대은이는 덕구를 이유 없이 잘 때렸어. 그는 상대를 바라볼 때 눈을 치켜 떠 사팔뜨기처럼 옆으로 보는 버릇이 있었어. 아이들은 그 점을 놀려 ‘꺼직이’라고 불렀는데 덕구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3
덕구가 2학년이 되었어. 반장을 뽑는 날이 되자 선생님은 ‘반장 하고 싶은 사람?’ 하고 묻는 대신에
“누가 반장하면 좋겠어요?”
2학년이라고 그만큼 대접을 해 주는 모양이야. 그러자 새로 덕구 짝지가 된 영아가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서더니
“박덕구요.”
당연하다는 듯 덕구를 지명했거든. 그러자 아이들의 뜨거운 반응이 교실 전체에 퍼지며
“박덕구! 박덕구!”
하며 외쳤어. 선생님도 그 뜻을 알아채고
“박덕구가 좋은 사람?”
하고 묻는 거야. 그러자 아이들은 하나같이 “저요!” 손을 들며 고함을 지르는 통에 교실 천장이 들썩거리는 것 같았어. 그러자 이번에는 선생님이
“박덕구가 좋지 않은 사람?”
하며 아이들을 둘러보는 거야.
“아무도 없을 거다.”
덕구보다 오히려 영아가 더 신이 나서 미리 점을 치며 사방을 둘러보고는
“봐라. 아무도 없지.”
하며 좋아했어. 그야말로 만장일치로 덕구가 2학년의 반장으로 뽑혔지. 덕구가 2학년 반장으로 뽑힌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야. 1학년 때 공부를 월등하게 잘 했다는 것, 그걸로 아이들은 그냥 영웅으로 만들어버렸어.
덕구는 반장이 된 후로 힘이 생겼지. 아이들이 반장이라는 이름 하나에 주눅이 들어 스스로 져 주는 것이야. 일일이 싸움을 붙지 않아도
“나는 덕구에게 못 이긴다.”
하며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하니 피도 흘리지 않고서도 한 계단씩 주먹 랭킹순위가 올라갔지. 으스대던 대은이도 덕구 앞에 고개를 꺾었어.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마침내 서열 2위 자리에 덕구는 올라섰거든. 1위도 덕구에게는 고분고분하였으니 사실상 주먹세계도 평정한 셈이야. 덕구는 자신도 모르게 거만해졌고, 반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며 청소시간에는 청소를 하는 대신 몽둥이를 들고 감독만 하여 아이들이 불평하기 시작했다.
4
3학년 때 반장 선거는 담임선생님이 투표용지를 나누어주며 반장에 적합한 사람의 이름을 써 내게 하였지. 덕구는 자기 이름을 차마 못 쓰고, 부반장이며 싸움대장인 천영이를 쓸까 고민하다가 그냥 반장감은 안 되지만 자기와 친한 꼬마 정일이를 써 넣었어.
개표가 시작되었지. 이번에도 덕구가 독주할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천영이와 덕구가 한 표 한 표 숨 막히는 접전을 벌였어. 처음에는 덕구가 앞서 나갔지만, 갈수록 천영이가 따라붙어 역전, 재역전을 거듭하였거든. 표를 펼칠 때마다 아이들은 긴장하였지. 개표위원을 맡고 있던 평석이가 투표함을 뒤집어 보이며 마지막 한 표를 들어 보였어. 만약 저 표가 천영이 표라면 반장자리는 천영이 것이 돼. 평석이가 펼치고 미묘한 웃음을 흘리더니 “박덕구!”라고 불렀다.
반 아이들도 신의 장난인 듯한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할 것인지 관심의 눈길을 선생님에게 쏠렸어.
“보자, 덕구와 천영이가 18대 18 표가 똑같이 나왔구나.”
선생님은 참 어려운 문제를 만난 듯 생각에 잠기더니 곧 웃음을 머금고 쉽게 풀기로 한 것 같아.
“자, 손을 들어 결정하겠어요. 먼저 천영이가 반장이 되었으면 하는 사람?”
결과는 17:19로 덕구가 간신히 2학년에 이어 반장에 당선되었지. 누군가 한 사람이 투표용지에는 김천영을 써 넣었다가 손을 들 때는 마음을 바꾼 것이야.
덕구는 많은 표들이 천영이에게 넘어간 원인이 대은일 거라고 의심하였어. 고개 너머 마을의 싸움대장은 대은이고 같이 다니는 아이들을 윽박지르며 선동했을 것이 틀림없거든.
며칠 후 덕구가 운동장으로 나가려고 현관에 나서는데 앞에 걸어가는 대은이가 보였지. 다짜고짜 엉덩이를 냅다 발로 걷어찼어. 돌아서며 엉덩이를 만지는 대은이 얼굴이 화가 나 있었고.
“왜 이유 없이 차는데?”
“앞에서 거치적거리니까!”
“네가 돌아가면 될 거 아냐?”
“나는 바로 먹고 바로 가는 사람이다.”
“이긴다고 사람을 함부로 차는 법이 어딨어! 너는 이유 없이 맞으면 좋겠냐?”
“네가 1학년 때 나에게 이긴다고 많이 골리고 때렸잖아?”
“그건 인정해. 대신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이긴 후로 나를 그 이상 많이 때리고 골렸잖아?”
그 말에 덕구는 대은이를 마주 볼 수 없었어. 대은이의 말은 옳았거든. 대은이는 생각이 깊고, 자기 생각을 분명히 말할 줄 아는 좋은 친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 어쩌면 이번 반장 선거에서 손을 들 때 자기에게로 넘어온 아이가 대은이 같기도 했거든. 그 후로 덕구는 대은이를 괴롭히는 일이 싹없어졌지.
“덕구야, 나 오늘 수업 마치고 우리 고모 집에 간다.”
“네가 고모 집에 가는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같이 가자는 말이야. 너희 집 이웃에 우리 고모집이 있어.”
“누구네 집이지?”
“동근이라고…….”
“아하, 그 집이 너네 고모집이냐?”
대은이는 덕구와 같이 걷는 것이 즐거운지 방글거리며 발걸음이 가볍다. 덕구도 처음으로 대은이와 같이 걷는 것이 싫지 않았지. 갈림길에서 손을 흔들던 대은이는 “고모!” 하고 부르며 대문도 없는 집안으로 들어갔어. 잠깐 멈추어 서 있는 덕구 앞에 대은이가 걱정을 담은 얼굴로 나타났다.
“고모집에 아무도 없어.”
“들에 나간 모양이다. 우리 집에 같이 가!”
그 뒷날 대은이는 웬 쪽지를 덕구 손에 쥐어주며 수줍게 웃으며 달아났다. 펼쳐보니 편지였다. 어제 점심을 같이 먹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담긴 짤막한 내용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받아보는 편지.
5
덕구와 대은이는 어느덧 5학년이 되었지. 그들은 사이좋은 친구로 자라가고 있었다. 들판이고 언덕배기고 보리가 누렇게 익었어. 학교에서는 ‘보리베기 가정실습’이란 이름으로 집에서 일손을 도우라고 했지. 바빠진 농촌에서는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말이 생겨나듯 바쁜 때 학생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집안일을 돕게 하는 가정실습을 애타게 기다렸고, 환영했다.
“덕구야, 보리 베면서 손가락은 자르지 마라라.”
“대은아, 보릿짐 너무 많이 지고 다니지 말라. 골병든다.”
이렇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지가 엊그제였지. 덕구가 학교에 등교했더니
“대은이가 죽었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어. 덕구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설마!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대은이가 죽었다는 말은 사실이었어. 같은 마을에서 다니는 아이들의 전하는 이야기에 덕구의 가슴은 천길 낭떠러지로 철버덕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지. 그러고 보니 대은이가 5학년 올라와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지 기운이 없어보였던 것 같아. 얼굴색도 누렇게 변했고. 무슨 큰 병이었을까? 그렇지만 가정실습 들어갈 때는 기운이 넘쳐 보였는데.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정리해 보니까 대은이는 맹장이 걸렸단다. 병원에 곧장 갔으면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 건데 대은이 어머니가 무당이어서 굿을 했더래. 마귀야 물러가라 징을 치며 밤새도록 굿을 했더래. 대은이가 아파서 뒹구는데 병원에는 데려가지 않고 곧 낫는다며 참으라고 했더래. 그래서 대은이는 어머니를 잘 못 만난 탓에 어린 나이에 초등학교를 다니다 말고 불쌍하게 저승으로 끌려갔다.
대은이의 빈 자리는 한참 동안 그대로였고, 그 자리는 억울하게 떠난 대은이의 슬픔을 되살리곤 하였지. 그렇지만 6학년이 되고는 대은이의 기억이 차츰 흐려지게 되고 중학생이 되고는 옛날이야기로 남은 잊혀진 친구가 되었지 뭐야.
6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50년이 넘자 덕구는 직장에서 퇴직을 하였어. 옮겨 다니던 철새 생활을 접고 그리운 고향으로 되돌아왔지. 곧 초등학교 동기들의 모임에도 가입하였다.
“야, 덕구가 들어오니 우리 모임에 힘이 실리는 것 같아.”
“맞아, 평석이 지섭이 두 친구를 보내고, 그냥 모임을 깰까도 의논했었네. 이제 노망 들 때까지 계속 모이세. 하하.”
“그런데 우리 동기들이 벌써 둘이나 저 세상으로 가다니 안타깝네.”
“둘이 뭔가? 초등학교 때 죽은 대은이까지 합하면 여섯이나 천당으로 갔네.”
덕구는 대은이의 이름을 듣자 여섯이 죽었다는 소식보다 더 가슴이 철렁했다. 맞아. 나에게는 대은이라는 친구도 있었지. 세월에 묻혀 잊혀졌던 친구! 안타깝다는 듯 덕구는 친구들을 둘러보며 조용히 말했다.
“참 그때 대은이는 맹장염인데 그 어머니의 판단착오로…….”
“아냐! 나는 그것 보다 죽은 원인이 다른 데 있다고 본다네.”
말을 중간에 끊고 진수가 주위를 둘러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선배 중근이 아는가?”
“알지. 눈이 부리부리하고…….”
“맞아. 학교 오가면서 대은이를 얼마나 많이 때렸는지 모르네. 어떤 때는 구덩이를 파서 흙으로 묻기도 하고 참 악질이었지.”
“그런데 왜 부모님에게나 선생님에게 이르지 않고?”
“지금이야 세월이 흘러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그때는 그 선배 서슬이 시퍼래서 보복이 두려워 오죽해야 대은이 자신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겠는가? 날마다 맞다시피 했는데 골병 아니 들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죽은 원인이 맞아서 골병이 든 것이라고 본다네.”
7
“쓩! 도령아! 다시 지금 세계로 되돌아왔다. 일어서라.”
할아버지의 말에 도령이가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 틈에 길가 바위에 앉아 있었다. 도령이는 엉덩이를 털면서 할아버지 따라 일어섰다.
“할아버지! 그런데요. 4학년 때랑 5학년 때도 반장하셨어요?”
“물론이지. 그건 그렇고 할아버지의 남자친구 이야기를 들으니 어떤 생각이 들어?”
“그건 요…….”
할아버지는 도령의 입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 것인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였다. 해가 떠오르는지 높은 산봉우리에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동화가 실린 아동문예 2013. 11,12월호)
첫댓글 어린 시절 친구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돌아오는 것은 나이를 먹은 탓일까요? ㅎㅎㅎ
제 졸작도 다 실어주시고! 이럴 줄 알았으면 신경을 더 쓸 걸 그랬습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