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장 51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6장 56절)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내친 김에 오솔길을 따라 조선대학 뒷산으로 접어들었다.
등반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오르는데, 꽃들이 예쁘게 저마다 자랑스럽게 고개를 내민 숲길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정갈한 정원 안을 거니는 느낌을 주었다.
광주의 분위기가 대체로 그러하듯 깔끔 떠는 주부가 꼭 손님맞이 대청소를 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앞서 가는 분은 신이 나서 양팔을 휘두르다시피 하며 뛰어올라가고,
뒤 따라오는 분은 암말기환자인지 뼈만 남은 몸으로 쌍지팡이 짚고 간신히 비틀거리며 발을 내딛는다. 깃대봉에 올라서니 또 다른 도시풍광이 시원하게 전개된다.
심호흡을 하며 운동기구에도 올라타 보았다.
새들의 밝게 지저귀는 소리가 시원한 바람소리와 함께 여기가 도시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잠시 잊게 해준다.
문득 이곳이 이미 세상을 떠난 내 친구가 입버릇처럼 말 하던 그 조선대 뒷산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섬찟한 느낌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갑자기 주변풍광도 비가 오려는 듯 어둡게 느껴졌다.
신학원에서 만난 내 친구 춘기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다니다 뒤늦게 군대를 갔다.
그는 군복무 중 소위 말하는 5.18 때 광주에서 진압군으로 있었다.
친구는 조선대 뒷산에서 공수부대의 총공세에 밀려 총에 맞아 죽은 시민군의 시체를 들것에 실어 나르는 임무를 맡았다.
이미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시체를 담은 들것을 앞쪽에서 들고,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버티며 산길을 내려오자면 시신이 아래로 쏠리면서 발이 친구의 등짝에 툭 하고 소리를 내며 닿는다.
그때 자신도 모르게 악! 하는 비명이 튀어 나온다고 했다.
마치 시신이 발로 말을 거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친구는 그 때의 기억이 끔찍하다며 누구든지 무좀방지용 흰색 무등양말을 못 신게 했다.
그 이유는 산자락 나무등걸 옆에 편안하게 누운 시신의 옷차림이 아침 출근길이었는지 새 양복에 새하얀 와이셔츠, 그리고 새 구두에 흰 무등양말을 받쳐 신고 있었다는 것이다.
등산하며 상쾌했던 기분이 친구의 끔찍한 기억 때문에 뭉개지면서,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기분전환도 할 겸 예술영화만 상영하는 광주극장에 들어갔다.
마침 ‘오월애’라는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금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뒤쪽 벽에 붙어 서서 영화를 보았다. 돈을 걷어 주먹밥을 해서 시민군들에게 날라다주었던 시장아주머니들이 등장하는 초입부분에서부터 나는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30여 년 전의 사건과 기억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그분들의 신산한 삶의 속내를 영화가 아니라면 어떻게 감히 들여다 볼 엄두를 낼 수 있을까 싶었다.
어쭙잖은 추측도 불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빠져 내내 서서 보면서도 다리 아픈 줄을 모를 정도로 영화는 사람을 빨아들이며 인간의 깊은 곳을 건드리고 있었다.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각광받지 못한 사람들의 굴곡지고 평범한 일상이 이렇게도 사람을 울리다니.
영화가 끝나서 얼굴을 수습하고 영화관을 나오니 관객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럼 그 큰 영화관에 나 혼자 서서 영화를 봤단 말인가?
아니 이 좋은 영화를 나 혼자 보고 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탄식이 절로 나왔다.
5.18민주항쟁은 벌써 광주시민에게 조차도 잊혀져 가는 존재란 말인가?
영화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그 놈의 금전적 보상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병들게 해 버렸다. 모두들 돈만 주면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니 감당하기 힘든 치명적 사건을 겪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찢고 마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를 위해 또 짐승으로 변한 군인들의 손에서 고향인 광주시민의 소중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살과 피를 쏟고 목숨을 바친 그 분들의 희생은 영원히 살아남아 호시절인 오늘을 만든 것이다.
물론 피해자들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고통스러운 기억과 함께.
하지만 영화에서 보듯 고통 받는 피해자들에게서도 역사의 발전에 한 몫을 했다는 자부심은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일상은 흐르는 시간과 함께 모든 걸 변화시켜버린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체험과 기억은 영원히 가슴 속에 새긴 듯 남아있다.
그리고 대를 이어 계승된다.
1990년 대 초, 충북 진천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사목할 때였다.
예비군 훈련에 동원되어 갔다가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를 들었다.
파출소의 지서장이란 사람이 안보교육을 한답시고 비상시 경찰의 역할에 대해 소개하면서, 불순분자나 사상이 불온해서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미리 정한 장소에 소개시켜 놓았다가, 상황이 더 위급해지면 처형해서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것이 경찰이 맡은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손을 들고 물어보았다.
제가 명단에 올라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미리 확인해 줄 순 없느냐고.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다고.
물론 예비군들 앞에서 엎지른 물을 담느라고 혼비백산하여 곤욕을 치루는 지서장의 얼굴을 지켜봐야했지만 마음은 참담했다.
소위 쥐꼬리만 한 권력이라도 쥔 자들의 국민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러하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사실 그 마을에서는 과거 보도연맹이라 하는 이름이 붙어 애매하게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는 것을 쉬쉬하는 가운데 알게 되었고,
그 중 대장이라 불리는 사람은 오히려 뼈만 분지르고 본보기로 살려두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휘둘려온 역사를 살은 우리 민족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행된 학살의 기억이 민중들의 DNA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유사시 언제든지 저항의 에너지로 솟아오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친구는 광주에서의 충격적 경험이 내면의 상처로 남아 있다가, 결국 신학대학원에 다니며 교회제도권을 향한 분노로 터져 나왔다.
민중들이 이렇게 개보다 못한 죽음을 당하는데 밥이나 먹으려고 사제노릇을 하는 거냐고 교회를 향해 울부짖었다.
신학교는 5월 광주를 겪은 친구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의 제도권을 향한 분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교회를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하고야 말겠다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찌 보면 당시 표적이 된 몇몇 고위사제들은 애매하게 분노의 희생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회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서도 미처 깨어있지 못해 치른 대가는 혹독했다. 내 친구는 신학원을 졸업하고 1년 만에 울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당시 동지였던 우리들도 20년 동안 친구의 별세미사를 드리며, 각자 나름대로 친구의 그 죽음의 의미를 소화시키느라고 몸부림치는 세월을 살았다.
친구의 짧은 삶과 죽음은 내 가슴에, 그리고 당시 동지들의 가슴 속에도 영원히 살아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세월이 30년이 흘러 해군기지 건설에 저항하는 제주도민들과 강정마을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또 다시 우리는 무수한 역사의 선각자들의 살과 피를 마시며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절감한다.
예수님이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서 영원한 삶을 살라는 말씀은 너희도 나처럼 자신의 살과 피를 약자들을 위해 내어 놓으라는 뜻으로 본다.
자신의 살과 피를 내주어 세상을 살리는 생명으로 내놓은 예수님의 영원한 삶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2천 년 동안 역사를 통해 반복되면서 인류를 일깨우며 지속된다.
예수님을 닮은 수많은 민초들도 자신의 살과 피를 역사의 제단에 내어놓아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아간다.
지금 제주도 구럼비 해안가에는 영원한 생명의 삶에 동참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