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지은이 : 이종학(李種學, 1361~1392), 인재유고(麟齋遺稿)
깊고 외진 곳에 있는 월정사 원각도량이라 맑기만 하구나.
햇살 비치어 깃대에 그림자 지고 바람 불어 풍경 소리 들리네.
스님은 벌써 견성(見性) 했을텐데 난 아직 속세 정 잊지 못하여
붓 잡아 시 짓고 나서 고개 돌려 서울 바라보노라.
月精幽絶處 圓覺道場淸
日照幢幡影 風傳鐘磬聲
他應能見性 我尙未忘情
把筆題詩罷 回頭望玉京
擧世誰知足(거세수지족)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제 분수를 차리랴
浮生自有涯(부생자유애)
뜬구름 같은 인생에는 절로 끝이 있는 법
즉사卽事 /이종학 (李種學)
귀양 가는 몸이 편안하게 누웠노라니
/ 客去還高臥
띳집 처마 끝에 해가 벌써 기울었네
/ 茅簷日已斜
새로 시 지어 겪은 일이나 기록하고
/ 新詩唯記事
아득한 꿈마다 집으로 돌아가곤 하네
/ 幽夢便歸家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제 분수를 차리랴
/ 擧世誰知足
뜬구름 같은 인생에는 절로 끝이 있는 법
/ 浮生自有涯
마음속에 느껴지는 바가 많아
/ 心中多所感
하인 불러 또 차 달이라 시키네
/ 呼僕且煎茶
이종학(李種學) : 1361(공민왕 10) ∼1392(태조 1)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문(仲文), 호는 인재(麟齋)입니다.
이곡(李穀)의 손자이며,
이색(李穡)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명위장군(明威將軍) 권중달(權仲達)의 딸입니다.
1374년(공민왕 23) 성균시에 합격하고, 1376년(우왕 2)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제수되었고, 그 뒤 관직이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에 이르렀습니다.
초록(한국어)
인재 이종학은 고려말엽의 혼란했던 정치 상황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는 당대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인 목은 이색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우왕 사후 창왕과 공양왕조에서 목은이 김저 사건과 윤이·이초 사건으로 곤경을 당하자
부친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또한 그는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하고 고려 왕조가 기울어 가자
순군옥에 투옥되고 함창에 유배되는 등 시련을 겪으면서 결국 移配 도중 교살당하게 되었다.
고려말엽의 문학사에서 그는 항상 소외당하여 왔다.
이종학이라는 본인의 이름보다는 평생을 목은의 아들로 일컬어졌고,
또 포은의 충절에 가려져 이종학의 충성과 절개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가 남긴 상당한 분량의 유배시들은 그 뛰어난 문학성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한시사에서 언급되지 않거나 혹 언급은 되더라도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 유배시의 사적 흐름에서 그의 시는 초기에 등장했던 가장 중요한 작품들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그의 문집 『麟齋遺稿』에 남겨진 113제 123수의 시는 그같은 비극적 삶의 결과물이다.
그의 유배시는 전라도 平陽[順天]과 충청도 常山[鎭川]에서 유배를 당했을 때 지은 시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의 격조는 전반적으로 유배지에서의 쓸쓸함과 고독, 유배인으로서의 좌절과 비개감을 드러낸 것이 주를 이루고,
기타 자연에 대한 동경과 은일적 삶의 추구, 사대부로서 갖는 경세제민의 포부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중에서도 특히 유배지에서의 쓸쓸하고 고독한 심경과
관직에 대한 미련 및 그에 따른 좌절감을 다룬 시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종학의 유배시의 詩品을 悽?으로 규정하고 그 미감을 고찰해 보았다.
특별히 유배시, 그중에서도 悽?의 미에 주목했던 것은
『麟齋遺稿』를 구성하고 있는 시들이 대체로 유배시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 유배시야말로 이종학의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