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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8장
생육하고 번성하는 직분을 무시한 유다의 아들들과 충성한 다말
(찬송 269장, 구찬송가 211장)
2019-9-30, 월
37장에서 요셉이 팔린 이야기는 39장으로 이어지고 그 사이 38장에는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의 주인공은 야곱이나 요셉이라는 개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의 언약백성을 번성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어떻게 며느리가 시아버지로부터 씨를 받아서 후손을 이어가는가? 롯의 두 딸이 아버지의 씨를 받아서 각각 아들을 낳아 모압과 암몬 자손이 시작된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롯의 두 딸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정죄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정죄보다 축복이 있습니다.
1. 유다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함(1-5절)
약속의 자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갑니다(1절). 떠나간다는 것은 ‘천막을 친다, 손을 펼친다”는 뜻으로, 어떤 곳까지 천막을 치며 나갔습니다. 16절에도 유다가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할 때도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유다가 자기 며느리에게 나아가는 것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유다는 양을 치고 생존하기 위해 갔습니다. 자기 형들이 있는 지역이 아니라 아둘람까지 나아갔습니다.
아둘람이 어딘지 아시나요? 아둘람은 나중에 다윗이 도망할 때 사람을 모았던 곳입니다. 다윗 왕이 자기 왕국을 위해 백성들을 모은 곳입니다. 여기에 상징적인 것이 있습니다. 유다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나중에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이 사람을 모으던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는 자의 딸과 잠을 잤습니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그는 아이 세명을 낳았습니다.
2. 다말이 유다의 아들들과 결혼함(6-11절)
유다는 큰 아들 엘의 아내로 다말을 취했습니다. 그녀도 가나안 여인입니다. 엘은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7절). 그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아들이 없이 남편이 죽으면, 그 사람의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도록 정했습니다. 그 자녀는 형의 이름으로 가문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형이나 동생의 문제가 아니라 그 조상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가문 전체를 번성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1) 하나님이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파괴한 죄와 심판
그런데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은 형수와 잠자리를 할 때에 자기의 씨를 그냥 땅에 쏟았습니다. 9절에 “땅에 설정하매” “설정한다”의 원래 뜻은 ‘파괴한다’, ‘파괴시킨다’, ‘부패하게 한다’ 입니다. 이 한 단어를 사용해 이야기를 쓴 성령께서는 오난을 굉장히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 ‘샤하트’라는 단어는 창세기 앞 쪽에서 두 군데만 나옵니다. 첫째로, 6장과 9장 노아의 시대입니다. 땅이 부패하므로 (6:11) 하나님께서 그 땅을 멸하셨습니다(6:13). 두번째, 13, 18, 19장에 소돔에 대해 쓴 말입니다. 소돔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하셨습니다”( 19:13).
하나님이 번성하게 한 거룩한 씨를 오난은 부패하게 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야곱의 씨요 이삭의 씨요 아브라함의 씨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의 씨입니다. 아내의 몸속에 뿌려야 할 씨를 땅에 뿌려서 부패시켰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는 사명을 저버렸습니다.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함으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10절). ‘형도 악함으로 죽였다’. 똑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 다 가나안 땅의 음란, 물질 숭배 거기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침실에서 무엇을 해도 아무도 모릅니다. 침실에서 하는 것은 내 자유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침실에서 우리가 하는 것, 우리의 자유가 아닙니다. 그래서 로마교에서는 피임 자체를 금하고 있는데 너무 극단적이죠. 그렇지만 그 취지 자체를 우리가 아주 귀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성의 즐거움과 자손 번성을 분리시키는 세속적 흐름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땅과 사람은 복입니다. 그러나 땅과 사람을 섞으면 안됩니다. 땅은 요즘으로 치면 직장입니다. 남자들이 직장에서 온 에너지를 소진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아내를 사랑할 기력이 없는 것, 이게 문제 아닙니까? 직장 동료들과 고객들에게 에너지를 다 쏟은 다음, 집에 들어 올 때는 자기 자녀들에게 줄 에너지가 없습니다. 오난이 씨를 땅에 쏟은 것과 뭐가 다릅니까? 그런 행동은 여호와의 복을 파괴합니다. 우리 모두 각성해야 합니다. 울부짖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주신 에너지, 아내에게 쏟게 해주세요. 주위 여성들에게 쏟지 않고 아내에게 쏟게 해주세요. 나에게 주신 에너지, 우리 가정에 먼저 쏟게 해주세요. 우리 가정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땅에다, 직장에다 쏟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파괴시키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죽이신 것은 하나님의 예언적 심판입니다. 무엇에 대한 심판입니까? 유다에 대한 심판입니다.
2) 유다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
유다에게는 셋째 아들이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죽을 때 셋째 아들 셀라는 아직 어렸습니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말했습니다. “기다려라, 셋째 아들이 자랄 때까지 친정에서 기다리라”. 속으로는 어떻게 해요?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아버지가 악합니다. 죄의 결과로 아들 둘이 죽었다면 뭘 두려워해야 하죠?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죄는 두려워하지 않고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셋째 아들이 죽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보다 먼저 할 일은 그가 죄짓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 대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죄를 짓지 않도록 이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남보다 뒤지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학교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예배 드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학교에서 선생님께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유다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유다가 가나안 여인 가운데서 자기 아내와 며느리를 얻은 것 때문에 왔습니다. 그것에 대해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유다는 살려 두시고 다말 또한 살려 주었습니다. 유다의 가정에는 셀라와 유다와 다말만 남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했죠? 그런데 그 창녀가 누구죠? 바로 며느리 다말입니다.
3. 다말이 유다를 속여서 임신함(12-23절)
1) 다말이 창녀로 변장하여 유다를 통해 임신(12-19절)
유다는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양털을 깎기 위해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갔습니다. 며느리 다말이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창녀로 가장하여 길가에 앉았습니다. 자기가 출산해서 가문을 이어가고 하나님 나라를 이어가야 하는데 유다가 그의 셋째 아들 셀라가 어른이 되었지만 다말 자신을 셀라에게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4절).
유다는 그 창녀에게 들어갔습니다(16절). 며느리인 줄 몰랐습니다. 유다는 가나안 땅의 문화, 음란 문화 속으로 점점 들어갑니다. “내가 너에게 들어가고 싶다. 오늘 밤 자자” 하니까 다말이 화대, 돈을 달라 하죠? 유다는 그녀에게 나중에 염소가 새끼를 놓으면 그 새끼를 주겠다 합니다. 외상으로 침실을 같이 하게 됩니다. 다말은 약조물을 요구했습니다. 담보물을 말합니다. 도장과 도장의 끈과 지팡이를 담보물로 받았습니다. 도장은 자기 존재의 상징입니다. 지팡이는 그 사람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다말은 그 후에 바로 창녀의 옷을 벗고 과부의 옷으로 갈아 입었습니다.
2) 유다가 그 창녀를 찾았으나 찾지 못함(20-23절)
유다는 이제 때가 되어 와서 빚진 것을 갚으려고 그 창녀를 찾아왔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창녀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에 창녀는 없습니다”. 여기서 창녀(22,23절)는15절에 나온 창녀와는 다릅니다. 여기 창녀는 이방 우상 신전의 여사제를 말합니다. 우상 신전의 여사제는 음란도 행했습니다. 우상숭배와 음란이 겹친 것입니다. 이 단어 속에서 유다는 우상숭배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이방 신전에 가서 우상숭배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방 신전의 여사제와 관계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4. 다말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축복(24-30절)
1) 다말의 의로움: 생육하고 번성하려는 다말의 거룩한 열정(24-26절)
세달 후에 유다는 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신의 며느리가 행음하여 임신했습니다”. 이에 유다는 말했습니다.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나중에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에서는, 레위기 21장 9절에서 이렇게 음란을 행한 사람은 벌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불 사르라”고 했습니다. 또 신명기 22장 21절에서는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그때 다말이 대답합니다. “이 물건 임자를 통해서 임신하였습니다”. 26절에 유다는 대답합니다. “그는 나보다 옳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않았다” 하고 자기 잘못을 인정합니다. 만약 다말을 죽인다면 그녀와 음행한 자신도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에게 다말을 주지 않은 것, 그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음란의 죄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2)음란의 죄를 넘어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열망의 복
창세기의 관점을 잘 보십시오. 우리가 보기에는 음란이 더 큰 죄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을 큰 며느리에게 주지 않은 죄를 더 큰 죄로 말합니다.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이 씨를 땅에 쏟았습니다. 앞으로 자녀를 낳아도 자기 이름이 아니라 형의 이름으로 계승될 것이니까 자기 아내가 된 형수에게 씨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큰 죄여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지금 유다도 그 죄를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말을 보고 옳다고 합니다. 다말이 창녀의 모습을 하고 시아버지와 잠자리를 한 것을 옳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음란 죄입니다. 하지만 다말에게 옳은 것, 의로움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이어가는 거룩한 소명을 감당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말은 죄인이지만 유다보다는 옳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흘러서는 안됩니다. 물론 당연히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음란은 용납할 수 업습니다. 근친상간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나안 땅에나 있었던 일입니다. 이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야기하시는 것은 그것이 죄인데도 유다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죽여야 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 주는 교훈은 무엇이 더 큰 죄이고 무엇이 우리에게 더 큰 의로움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윤리적 기준도 다 지켜야 합니다. 지키지 못하면 회개하고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직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씨를 이어가는 이 사명을 다하지 않는다면 큰 죄입니다. 실컷 개나 키우고 고양이나 키우고 자녀는 한 명도 낳지 않는다면 큰 죄입니다. 젊음을 낭비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들을 하나님은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와가 아이를 낳지 않으면서 할머니가 되어도 예쁜 몸매를 가지도록 창조하셨습니까? 임신해서 펑퍼짐 해지고 출산해서 몸매가 망가지는 여성들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이어가는 사명을 다하는 여성들은 귀합니다. 이 사명을 무시한 유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을 하나님은 나쁘다고 말씀하십니다. 인류의 씨를 낭비하며 땅을 부패하게 한 자들을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다말에게는 하나님께서 칭찬하고 있습니다. 다말의 심정을 한번 이야기해볼까요? “내가 이 땅에 여자로 태어났다. 더구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며느리로 들어 왔다. 이제 나도 아브라함의 씨, 그것을 잇고 싶다”. 시아버지의 씨를 받은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거룩한 열정은 칭찬받을 일입니다.
한편 다말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지 않은 성급함은 비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분이므로 다말의 열망을 귀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다말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음행을 통해 생육하고 번성한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도적적이어야 하지만 도덕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손가락질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 죄악 가운데서도 거룩한 열망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면 깨끗한 옷을 입고 단정하게 교회에 나와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 나라의 열망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가정을 세우기 위해,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지 않고, 오히려 에너지를 직장이나 자기 쾌락을 위해 다 쏟아버린 사람의 사악함은 훨씬 더 큽니다.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하셨습니다. 에너지를 가정에다 쏟으십시오. 에너지를 가정에다 쏟은 다말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비록 범죄했더라도 범죄는 잘못이지만 심정의 흐름을 보십시오. “내가 이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이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을 해야겠다. 나도 그 복을 받아야겠다. 이 복을 내게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지 않습니까? 야곱의 열망이 있지 않습니까? 장자에 대한 열망, 내가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복 받고 싶습니다 하는 열망.
3) 다말에게 주신 축복: 쌍둥이의 출생과 둘째 아들 베레스(27-30절)
예정된 사람,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예정된 축복의 자녀에게는 비록 죄인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이 거룩한 영 가운데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출산을 하는데 쌍둥이로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거룩한 백성을 갖고 싶어하는 이 다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다시 또 롯의 경우처럼, 둘째 딸이 아버지에게 들어가서 두번째 간음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한번의 간음으로 충분하다 하셔서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편법을 썼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정 가운데 아들 두 명을 주셨습니다. 다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태어날 때 두 아이가 서로 먼저 나오려고 싸우고 있는 거에요. 그러다가 한명이 먼저 손을 내밀었어요. 산파는 그 아기 손에 붉은 실을 감았어요. 이게 큰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손이 엄마 몸 속으로 쑥 들어갔습니다. 막상 태어날 때는 다른 아이가 먼저 나왔습니다. 동생이 먼저 나왔어요. 조산원이 뭐라고 그래요?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원문에는 ‘터뜨림을 터뜨리느냐” 하고 두 번 나옵니다. 터뜨린다는 것은 베레스 입니다. “베레스를 베레스 하느냐?” 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습니다. 누가 이 이름을 지어 주었는지 분명히 말하지는 않습니다. 일부러 주어를 쓰지 않아서. 어쩌면 하나님께서 베레스라는 이름을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레스는 번성하여 뻗어 나간다는 뜻도 있습니다. 거룩한 백성의 생육과 번성을 거부하는 유다와 그의 아들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이 이방 여인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앞으로 성경의 번성 이야기에서 베레스는 굉장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24, 46장, 민수기 26장, 역대상 2장에서도 베레스가 아주 강조되고 있습니다. 바로 야곱입니다. 형에게 준 축복을 자기가 받기 위해, 형과 싸워서라도 복을 가져왔던 야곱. 싸운 것은 잘못이지만 하나님의 축복,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싸웠던 야곱. 그러나 “이 축복이 뭐가 중요한가? 팥죽 한 그릇 먹는 것이 중요하지” 하며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영적 축복을 팔았던 에서와 다른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베레스의 피가.
믿고 복종할 일
오늘 다말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중요한 말씀 두 가지를 보았습니다. 첫째,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해주어야 합니다. 좋은 대학에 가서 출세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력서는 그런 식으로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몇 살에 첫 아들을 낳았고 그 이후에 아들 몇 명을 더 낳으면서 거룩한 백성이 번성했다” 이렇게 써야 합니다.
우리도 가정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에너지를 가정에 쏟읍시다. 정력을 아내나 남편, 그리고 자녀들에게 쏟아야 합니다. 직장에서 소진하는 것,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빨리 심판하실 것입니다. 심판을 통해서 돌이키기 위함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이런 식으로 계속 자녀를 두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노아의 물 심판이 있었듯이 다른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청년 남녀들이 그러한 세계관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다말처럼 차라리 죄를 짓더라도 작은 죄를 지어야 합니다. 큰 죄를 지으면 안됩니다. 음란, 근친상간은 두려운 죄이지만 그러나 그 가정을 덮치는 더 무서운 재앙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번성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다말은 축복을 취했습니다. 그녀의 아들 베레스의 후손 가운데서 다윗 왕이 태어났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태어났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조상에 이 이방 여인 다말이 나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다말의 죄악을 덮어 주셨습니다. 그녀를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악한 유다도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받아들여 주셔서 그 후손에서 왕이 나오게 했고 그리스도의 가문 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 누구도 자기 가문을 자랑하지 못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을 학살하는 유대인 가운데 누구도 자기들이 의롭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이 말씀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말씀이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을 전해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자에게는 비록 그가 죄 가운데 있지만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결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의로움 가운데 있는 것이 우리의 복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이렇게 의롭게 키울 때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에 헌신할 때, 필요한 양식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너무 부해서 타락하지 않도록, 너무 가난해서 비굴하지 않도록 적절하게 자족하게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우리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떠나가(1절), 나아가(16절)
떠나가(1절), 나아가(16절)는 ‘나타’입니다. ‘천막을 친다’, 또는 어떤 것이 ‘손을 펼친다’는 뜻입니다. 자손이 펴져 나가는 것에도 쓴 말입니다.
<참고> 9절, 설정하다(샤하트)
오난이 남자의 씨를 땅에 쏟은 것을 ‘설정하다’(샤하트) 고 했습니다. 이 샤하트라는 단어는 창세기 앞쪽에서 두 군데 밖에 안 나옵니다. 6장과 9장에 나오는데 땅이 심히 파괴됐다, 노아의 때에 땅이 아주 악해서 사람들이 심히 악해서 땅 전체를 악하게 만들었다, 음란과 폭력,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해서 땅 전체를 지구 전체를 악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시켰다, 사람이 자기 마음이 악하고 세상을 악하게 만들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셨다, 이 모두에 대해서 쓰는 말이 샤하트입니다. 하나님이 홍수로써 세상을 멸망시키기 전에 사람이 먼저 자기 자신을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멸망시키고 세상 전체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하나님은 세상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두번째 샤하트는 어디에 나오냐 하면 13, 18, 19장에 나오는데 전부 소돔에 대해 쓴 말입니다. 소돔을 하나님께서 샤하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마지막에 세번째로 나오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하나님께 샤하트, 멸망, 죄악됨, 멸망되어가는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구별하셔서 거룩한 백성의 씨가 번성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오난은 이 거룩한 씨를 부패하게 했습니다. 노아 홍수와 소돔의 불심판이 오난에게 임했습니다.
<참고> 다말과 라합
다말 이야기는 라합과 비슷한 합니다. 이방 여인이며
창녀(창녀로 가장한 여성)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인 자녀들이
나옵니다. 30절에 베레스의 형의 손에 붉은 실을 묶었다고 합니다. 기생 라합도 자기 집에 빨간색 실로 표를 해놓았는데 (여호수아
2:18) 두 곳 다 ‘사나아’ 라는 단어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