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도 복성은 존재하고 일본에서도 단성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건은 이유가 있지요. 그 '맞아죽을 각오로 쓴 한국비판'이란 책을 쓴 양반이 성씨에 대해서 뭘 제대로 알고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엉터리가 많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원래 성씨는 귀족계층만이 가지고 있던 특권이었습니다. 뭐,,일본이나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긴 하지요. 세계적으로 성은 일반 평민은 원래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력 가족집단의 이름이 성(姓)으로 고착이 된 것이죠. 예를 들어 제 이름이 서주영인데 이것은 서(徐)라고 불리는 가족 집단의 '주영'이라는 구성원을 일컫는 것입니다. 즉 '서씨 집단의 주영'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徐라는 명칭을 쓰는 가족 집단이 이것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에 혈통이 같지 않은 이종 집단과의 구분을 위해 성 바로 앞에 지역 이름을 덧붙이게 됩니다. 이것이 본관이죠.
이 본관은 한국에서는 고려 때 완비가 되는데 신라 말 혼란기에 각지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유력집단의 수장들이 자기 임의대로 성을 가지든지, 아니면 왕실에 공을 세우거나 협력한 댓가로 왕에게 성을 수여받았습니다.(물론 이 본관개념이 고려조 때 처음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이 처음 출현하는 시점부터 집단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지역명이나 가족집단보다 상위집단의 명칭을 덧붙이기도 했죠. 하지만 요즘 씨성 체계의 본관개념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을 보자면 고려조때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예컨데 성을 사여받는 것은 왕에게 집단으로써의 인정, 즉 공인을 받는 것이어서 상당한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기존에 성을 가지지 못했다가 성을 새롭게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때 성을 가지는 기준으로는 기존에 유명한 성(왕성이나 유력 귀족의 성씨)을 빌려오거나 혹은 당시에 문화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식 유행에 따라 중국의 유명한 성을 차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좀 더 세련되고 권위있는 양식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양상은 적긴 하지만 일본에도 있었습니다. 그런 고로 당시 일본보다는 한국이 중국과 교통이 잦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 그 글을 쓴 양반의 설명대로라면 한국의 삼대 3중의 하나인 박씨가 중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것과 김씨의 숫자가 중국에서는 극소수라는 사실을 어떻게 반박할 것인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중국에서 사용되는 성이 한국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한국에서 사용되는 성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새로 성을 받은 사람들의 세력이 큰 만큼 그 후손의 수가 늘어나기 쉬운 것과는 반대로 기존에 성을 가지고 있던 집단 중 신라 말의 혼란기를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점차 도태되어 그들의 성은 쇠퇴하게 되었죠. 그래서 한국의 고대에 있었던 을지씨니 하는 성들은 점점 자취를 감춥니다.(기존에 있던 성 중에 복성이 많은 까닭은 해당 지명을 성으로 삼거나 혹은 자기가 속한 상위집단의 명칭을 성으로 삼는 경우인데 이 경우는 지명이나 상위집단 명칭이 한 글자로 표기가 되지 않아 -음차 명칭이든지 아니면 복합어- 2글자로 표기를 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 조선조가 들어서고 고려조의 본관제를 혁파해 각지의 본관을 몇개 대성으로 통합하면서 현재의 본관제가 정립되었고 이때 성을 획득하는 평민이 있거나(이 부분은 제가 확실히 기억이 나진 않습니다.) 이후 조선 후기의 공명첩이나 족보 매입을 통해서 성을 획득하는 부농들이 가세하면서 일반 평민들도 양반들이 쓰는 성을 점차적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기존에 양반들이 사용하는 권위있는 성들은 단성이요, 복성은 주로 고구려 계통에서 나타나긴 하지만 조선 때 까지 큰 세력을 갖고 있진 않아 이들의 성은 소수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선우씨나 사공씨 등이 있는데 이들의 연원이 고구려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에서도 초기에 성을 사용하는 것은 고대의 한국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도 단성이 있기도 하고 복성이 있기도 합니다. 단성의 경우는 한자의 쓰임 중 훈차, 즉 뜻을 중시해 사용하는 원래의 한자 사용방식대로 성을 씁니다. 원래 한자의 한 글자만으로도 어떤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단어가 되기 때문에 성을 사용할 때 단성이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일본 중세 초입 때 유력 무사집단인 (源)씨와 평(平)가 대표적입니다. 물론 천황의 사여 성씨라 이 경우와 완전히 일치하진 않지만요) 물론 이 경우 복성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주로 고대의 경우로 2개의 단어가 사용되어 복합적 의미를 가진 형태인데 이 경우는 꽤나 특수한 경우인 셈입니다. 일본 고대는 한반도에서 3국의 이주민이 5~6세기에 대량 이주를 하면서 국가로 성장하던 시기라 전쟁이 잦아 가족집단이 해체되거나 혹은 다시 결성하는 과정에서 자기 집단을 제대로 나타내기에 단성이 곤란한 경우가 있기도 해서 복성을 사용하기도 하죠. 하지만 이 경우는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리 흔치 않은 경우입니다. 참고로 전국 시대에 이런 경우가 적용되는 성씨들이 제법 되는데 어떤 분야로 성공하는 집단의 성씨가 주로 이 경우에 속합니다.
보통 주류로 사용되는 것은 복성 중에서도 가차, 즉 한자의 음을 빌려 고대 한국어, 그러니까 일본 고대에 사용된 언어를 한자로 옮겨 적는 것이죠. 물론 위에서 설명한 단성의 경우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경우는 고대 한국어를 훈차로 해서 의미부여된 한 글자를 성으로 사용하는 경우이고, 이번 경우는 고대한국어의 소리음가를 성으로 삼는데 표기수단이 한자밖에 없어서 할 수 없이 복성으로 남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중국 이외에 한자를 쓰는 나라 대부분에서 나타납니다. 특히 중국과 다른 언어체계를 사용하는 유목민의 경우는 대부분이 복성이죠. (한국이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한자사용이 일찍 정착되면서 한자를 자국어의 표기수단만으로 활용하기보다 자국문화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서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1글자 1소리지만 일본은 그렇지가 않아서 1글자 다수 소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본래 성은 귀족의 전유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일반 평민은 이름만 있고 성은 없었는데 이것이 메이지 유신 시기에 이르러서 백성들의 호구를 파악하여 근대적 조세수입을 확실히 하기 위해 임의로 성을 부과하면서부터 백성들도 성을 가지게 됩니다. 이때 성을 부여한 방식은 집 주변 환경이나 아니면 지명(주로 동네 이름), 혹은 직업에서 유래한 단어를 성으로 삼게 됩니다. 이를테면 대나무골 둘째집 @@ 라는 식이죠. 그래서 이런 성들은 한개의 글자로는 표현이 되지 않았고 또한 상황에 따라 임의로 만들어 일관성이 없었습니다.(그래서 단성이 나올수가 없게되는 셈입니다.) 즉 우연의 일치로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이 같은 성을 공유하는 일은 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에는 성이 10만개 정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간혹가다가 성은 같은데 혈연관계가 아니라면 메이지 유신 때 성을 만들었을 당시 우연의 일치로 성이 같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본에서 대부분의 성은 이런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가 아닌 사람들은 극히 소수지요.(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유력가문인 경우입니다.) 즉 이들의 성은 어떻게 보자면 유서깊은 형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글쓴 양반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단성이 많아 한국은 자주성이 없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현재의 유럽에 있는 사람들 역시 자주성이 없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의 성은 대부분 그리스, 로마시대의 성을 자국어로 변형해서 읽거나, 혹은 기독교의 성서에 나오는 유명인의 이름(유대인이거나 로마인)을 따서 성이나 이름을 삼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자주성 운운은 그런 터무니없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쓰잘데기 없는 트집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