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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6. 어린 양이 인을 떼심
(4) 일곱 번째 인의 개봉
⑬ 일곱 대접을 쏟음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세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네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계시록16:1~21)
마지막 재앙(2)
마지막 재앙의 일곱 대접이다. 우리가 이 기사를 보면서 생각할 것은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계시록을 읽고 해석함에 있어서 물질적이고 역사적이고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결과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 예언들은 전혀 성취되지 않고 언제 될지 모르는 사건으로 항상 미루어져 있는 일이다. 자세히 읽어보면 이런 사건이 만일 물리적으로 일어난다고 하면, 이 땅위에는 아무도 사람이 살 수 없게 된다. 물질적이고 물리적으로 해석한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원자폭탄이 떨어지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안에서 살아난다는 것은 기대하기가 참 어렵다. 물론 우리가 믿음 안에서 전통적인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못하실 것이 있겠는가 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러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때 그 안에 신실한 사람이 한명도 없어서 다 죽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이 문제를 단순하게 물질적이고 물리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해석한다는 것은 아주 모호하고 애매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원칙을 우리가 생각하고 계시록을 보는 것이 좋다.
일곱 대접의 사건들은 이미 8장 이하에서 나왔던 말이 다시 되풀이 되는 것이다. 계시록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는데, 11장까지와 12장부터 마지막까지의 둘로 갈라져 있다. 11장까지는 개요라고 할 수 있고, 12장부터는 각론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사건이 중복되어 나오는 것은 첫 번째 부분에서는 대략적인 것만 이야기하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자세히 이야기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두 번 반복되고 있다.
3. 일곱 대접을 땅에 쏟아 부음 (마지막 재앙과 큰 음녀)
<첫째> 땅에 쏟음(8:7 참조)
지난번에도 첫째 나팔을 불 때, 둘째 나팔을 불 때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첫째 천사가 대접을 땅에 쏟았다는 것은 8장 7절에 있는 말씀과 같은 말이다. 땅과 수목 삼분의 일이 해함을 받더라고 말했다. 여기서는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고 했다. 이것은 8장 7절의 좀 더 깊은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땅과 수목의 삼분의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말인가? 땅과 수목의 삼분의 일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우상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독종(헌데, 부스럼)이 났다는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짐승의 표시가 났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왜냐하면 짐승을 경배하는 사람들은 결국 짐승의 표가 나게 된다.
무당들은 어디에 가도 표가 난다. 또 도살장에 있는 사람도 어디가 표가 나도 표가 난다. 화장터에 있는 사람도 가서 보면 얼굴에 표가 난다. 술집에 있는 사람을 보면 표가 난다. 자기가 종사하고 있는 어떤 것의 표가 나게 되어있다. 초등학교 선생님을 보면 길에 지나갈 때 저 사람은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것이 보인다. 옷 입고 다니는 것을 보아도 표가 난다. 가방 하나 들고 가는 사람 보면 그 사람은 목사이다. 표가 난다. 또 장로들이 들고 다니는 표가 있다. 그것을 보면 저 사람은 장로구나 하는 표가 난다. 뭔가 거기에 열중하고 있으면 그 표가 나게 되어있다.
짐승에게 경배하고 표를 받는 사람들은 그 표가 보이지 않는 표라 하여 그 표가 뭔가, 666이 뭔가 하여 그것을 지금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냥 표시가 난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저주하고 있는 사람의 표가 난다. 옛날에 어디에 가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있는 대부분의 모든 사람이 말씀을 듣고 얼굴이 아주 밝아졌는데 두 사람만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뒤에 앉아있는 것이다. 얼굴이 새까만 사람을 유심히 보았는데, 흑인인 것도 아니고 조선 사람인데도 얼굴이 새까맣게 되었다. 그 시간이 약 1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시간에 말씀을 듣고 우리 춘천의 형제들은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그 얼굴이 새까맣게 되었던 두 사람은 결국 나를 CCC에서 나가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주 특이하게 그날 내 눈에 보였다. 사람의 마음은 얼굴에 표가 나기 마련이다.
독한 헌데가 난다, 부스럼이 난다는 것은 피부병은 보기에 징그러운 것이므로 징그러운 모습이 나온다는 말이다.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보면 짐승도 두 종류이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고 땅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었는데, 땅에 쏟았으니 땅에서 올라온 짐승일 것이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의 특색은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였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세상 권세를 의미하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종교를 의미한다고 했다. 사상적이고 영적이고 종교적이고, 용처럼 말하더라고 되어있었다.
종교적으로 사람이 잘못되면, 아주 보기가 흉해지고 징그러워지는 것이다. 교리적으로 무장된 사람들을 보면, 상식 밖의 일을 하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한다. 기독교 2000년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그 안에서 교리를 수호한다든지 종교를 지킨다고 하여 저질러놓은 일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면 상상이 안되는 일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짓을 한 것이다.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고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어떤 교리를 잘못 믿었다 하여 사람을 잡아다가 죽였다. 일반 상식으로 생각하면 저런 사람은 죽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인데 단지 어떤 교리가 틀렸다는 것이다. 이단이라 하여 잡아다가 죽였는데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고 쇠기둥에 매달아 놓고 불을 질러서 죽였다. 그 외에도 수 없는 잔인한 방법을 통해서 죽였다. 이것은 그냥 사람이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종교가 잘못되면 보기가 흉한 문둥병 같은 것이 된다. 나는 이 말을 보면서, 악하고 독한 헌데가 났다는 것이 잘못되면 이렇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이 거룩한 옷을 입고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다.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는 지옥으로 가거라’하고 불을 질렀다.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한 사람의 시체를 300년 후에 꺼내서 그 뼈를 놓고 다시 종교재판을 하여 이단으로 정죄를 했다. 이런 것은 일반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예수를 죽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무슨 악한 일을 하여 그러느냐?’ 했더니, 네가 무슨 악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참람함으로 인함이라는 것이다. 일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일반 상식으로는 나쁜 일을 하고 악한 일을 해서 이 사람은 도저히 우리 사회에서 같이 살 수가 없을 때 사형을 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악한 일도 아니고 자기들을 해하는 일도 아니고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인데, 단지 자기들의 종교적인 신념에 반대된다 하여, 자기들의 종교적인 교리에 반대되기 때문에 죽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참람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말이다. 자기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다는 말이다. 사람으로서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아놓고 이 사람들이 모두 다 고개를 흔들면서 지나가기를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라 하던 사람의 모습을 봐라”하고 저주하며 지나갔다. 이것이 정말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악한 독종(헌데)이라고 생각한다. 문둥병자가 온다고 하면 가기 싫을 것이다. 눈도 못쓰게 되고 코도 못쓰게 되고 입술도 못쓰게 된다. 사람 입술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데 입술이 없으면 사람이 얼마나 징그러운지 모른다. 내가 서울에서 입술 없는 사람을 봤는데 아마도 화상을 입은 것 같다. 코도 없어지고 입술도 없어져버렸다. 치아만 나와 있는데 사람이 그렇게 징그러울 수가 없다. 보통 때는 밥 먹고 말하는 것 밖에 하지 않지만 입술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인 줄을 그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의 표는 종교적 인간의 어떤 표라고 할 수 있다.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종교는 커지면 반드시 세상 권세와 야합을 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커지려면 또 야합을 해야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커지지를 못한다. 로마교회나 영국교회나 독일교회의 국교들을 보면 세력이 극대화되기 위해서 국교화가 되었던 것이다.
첫째 대접이 바로 거기에 쏟아졌다. 땅과 수목 삼분의 일이 사위워지더라고 한 것이 땅이 아니고 나무가 아니고,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무가 죽는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겠는가? 사람이 문제이다.
<둘째> 바다에 쏟음(8:8-9 참조)
둘째 대접을 바다에 쏟았다고 한다. 이것은 8장 8절부터 9절까지에서 바다에 떨어지니 바다 생물들이 죽고 배들이 다 죽더라고 되어있다. 여기서는 더 자세하게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고 말했다. 이것은 짐승의 통치 하에 있는 자들의 모습이다.
바다는 권력을 가진 짐승이 있던 곳이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고 말할 때 바다는 세상을 상징하고, 세상은 세상 권력을 상징한다. 그 세상 권력의 밑바탕과 본질은 ‘피’라는 것이다. 나라를 세우려면 죽이지 않고 나라를 세울 수가 없다. 왕이 되려면 저절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많이 죽여야 왕이 된다. 어느 왕이든지 그렇지 않고서는 왕이 될 수가 없다. 세상의 본질은 지금은 굉장히 크고 화려한 것 같지만 원래는 무엇으로 세워졌는가? 남의 피로 세워졌다. 예수 나라는 자기의 피로 세워졌지만 세상 나라는 남의 피로 세워졌다. 공산주의의 깃발이 빨간 깃발이다. 그것은 피를 의미한다. 피의 혁명을 의미한다. 북한에서 나온 피바다라는 연극이 있다. 어떤 세상의 권세가 땅위에 서려면 피가 없이는 설 수가 없다는 말이다. 전쟁을 해야 된다. 왕정의 역사를 보면 부자간에도 죽이고 살리는 경우가 있고, 형제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사촌간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왕이 되기 위해서는 사촌을 죽이고, 왕이 되기 위해서는 동생을 죽이고 형을 죽이고, 왕이 되기 위해서는 아들도 죽인다. 단종애사가 그런 것이다. 세상의 근본은 피다.
“죽은 자의 피 같이 되니”. 바다에 쏟으니 그 본질이 확 드러나게 된 것이다. 본색이 드러났다는 말이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제왕들의 얼굴에는 죽은 자의 피가 발라져 있다. 제왕들을 볼 때 화려하고 영화롭게 본다면 속아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 얼굴에서 죽은 자들의 피를 봐야 된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을 올바르게 보는 것이다.
<셋째> 강과 물 근원에 쏟음(8:10-11 참조)
셋째가 강과 물 근원에 쏟았다고 한다. 이것은 8장 10절부터 11절까지에 있는 말의 내용이다. “피가 되더라”, 쑥이 되더라?. ”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는 뜻이다. 피 흘린 자는 그 피를 다시 마신다는 뜻이다. 사람은 정상적으로는 물을 먹고 살아야 된다. 그런데 피를 흘렸으니 피를 마신다는 것은 구약의 사상이다. 이런 언어들이 모두 구약성경에 나오는 언어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배경으로 하여 쓰여진 말들이다. 자기들은 평상적으로 할 수 있는 말들이다.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제단이 말하기를”이라고 했는데 결국 순교자의 말이라는 뜻이다.(6:9-10,8:3 참조) 죽임을 당한 자들의 말이라는 뜻이다.
마시는 물이 피가 됐다는 것은 일상적으로 피를 마시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마실 것인가, 아니면 이 피를 마실 것인가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자기 피를 우리에게 주어서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해서 흘리는 피다”하고 잔을 마지막에 주었다. 그러나 세상의 권세는 자기 피를 주는 것이 아니고, 남의 피를 자기가 뺏어 먹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것이다.
<넷째> 해에 쏟음(8:12 참조)
넷째가 대접을 쏟으니 해에 쏟아지더라. 8장 12절에 보면 해와 달과 별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더라고 되어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해와 달과 별 삼분의 일이 만일 물리적으로 어두워지는 것을 가정하면 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다 얼어 죽는다. 지금 태양의 삼분의 일이 식어져버린다면 우리는 다 죽어버리고 만다. 지금 지구 온난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오존층이 뚫어져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기 때문에 적도의 물이 뜨거워지고 식지 않아서 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녹는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해의 삼분이 일이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냉장고 속에서 살겠는가, 냉동고 속에서 살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라고 했다. 불로 사람을 사르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냉동 창고에 들어간 놈이 어떻게 훼방을 하겠는가? 이것은 물리적인 문제라고 볼 수 없다. 살아있으니 훼방하는 것이지 죽은 놈이 어떻게 훼방하겠는가? 해가 만일 십분의 일만 어두워진다 하더라도 지구상에서 살아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그들의 영광이 사라질 것이라는 뜻이다. 태양(해)은 영광이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라는 말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그 영광이 사람을 오히려 사르고, 사람을 없앤다는 말이다. 사람을 없앤다는 말이 꼭 육체를 없앤다는 말만이 아니라 사람의 인격을 완전히 살라버리는 것이다. 권력에 매여 눈이 어두운 사람들을 보면 어찌하든지 권력만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답지 않게 산다. 요즘에는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권력을 얻을 때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별로 없지만 옛날의 권력 투쟁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을 죽이고 얻는 것이었다. 이는 그들의 영광이 그들 자신을 인간 세계에서 말살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격을 말살시키는 것이고 사람을 짐승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다섯째> 짐승의 보좌에 쏟음(9: 참조)
다섯째가 짐승의 보좌에 쏟았다고 한다. 차츰 차츰 내려와서 마지막에 짐승의 보좌로 간다. 짐승의 왕좌로 나갔는데 이것은 9장에 있는 말씀의 재현이다. 하늘에서 별 하나가 떨어졌는데 그것이 무저갱의 사자라고 하고, 무저갱으로부터 황충이 올라왔더라고 되어 있었다. 이 황충이 쏘는 것이 전갈이 쏘는 것처럼 아프더라고 되어있었다.
그 나라가 어두워지더라.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어두워지더라. 이것은 흑암의 권세가 드러났다는 뜻이다. 세상의 권세를 섬기는 것을 가리켜 흑암의 권세라고 했다.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세상은 자기가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더욱더 하나님을 훼방하는 법이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법이다. 황충이 쏘더라. 전갈이 쏘는 것 같이 사람에게 고통을 주더라고 되어있었다.
짐승의 보좌는 결국 짐승의 통치이다. 짐승의 통치는 어린양의 통치와 대비되고 반대되는 통치를 의미한다. 이것은 세상의 권력을 의미한다. 권력이 통치하는 세계 안에서는 흑암의 권세가 통치하는 것이고, 흑암의 권세가 통치할 때는 사람들은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짐승의 보좌 통치 안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훼방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이 가득하더라는 말이 나오는데 짐승 자체가 어린양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하나님하면 무시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훼방하는가? 하나님이 어린양으로 보이기 때문에 훼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사자 이상의 것으로 보이면 어떻게 하나님을 훼방하겠는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엄청나신 분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세상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어린양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고 하나님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것이다. 그러므로 무시하는 것이다.
왜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을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사자들과 호랑이들이 무시하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을 훼방하게 될 것이고, 이 세계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짐승의 통치를 통해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섯째> 큰 강 유브라데에 쏟음(9:14 참조)
여섯째가 대접을 쏟았는데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았다고 한다.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이것은 9장 14절의 여섯째 나팔의 성취에 속한 문제이다. 큰 강 유브라데에 묶인 네 천사를 풀어놓았다. 이 네 천사는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된 자들이다. 마병대의 수는 2만만(2억)이라고 9장 14절에 되어있다. 그리고 그 마병대의 권세는 입과 꼬리에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어떤 군대나 병력으로 생각을 하는데 군대의 권력이 입과 꼬리에 있을 수가 있겠는가? 이것도 여러 가지로 연구하느라고 탱크냐 미사일이냐 생각하기도 하고, 뒤로 나가는 포도 있고 앞으로 나가는 포도 있는데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권세가 입과 꼬리에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세상에서 생각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삽경>
그리고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하고 말한다. 겉으로 보면 그냥 물리적이고 역사적인 어떤 것에 대한 심판인 것처럼 보이는데, 늘 가다보면 마지막에는 뭐가 나오는가? 영적인 것으로 들어간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이것은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한다.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고 되어있다.
이 유브라데 강은 어떤 강인가? 바벨론의 경계 지역에 있는 강으로 이 강이 그때 당시의 고대사에서 강대국들의 각축장이었다. 이 강을 중심으로 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그 강을 차지한 자가 이기는 자가 되는 각축장이었다. 이 '아마겟돈'이라고 하는 장소 자체가 마찬가지로 큰 전쟁터이다. 요시야왕이 애굽왕 바로느고에게 살해된 곳도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왕하23:). 아마겟돈이라는 말은 하마겟돈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마겟돈산(Αρ-μαγεδων)이라는 뜻이다. 마겟돈산이 전쟁 지역이라고 한다. 나사렛 남방에 있는 곳이라고 말하고, 느브갓네살로부터 시작해서 나폴레옹까지 온갖 서구의 열강의 영웅들이 전부 여기를 스쳐갔던 곳이고, 여기서 격전을 벌려 결국 승부를 겨루었던 장소라고 한다. 이것이 최후의 결전장이니까 종말론적 결전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짐승과 어린양의 종말론적 결전장이 여기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이 된다. 열강의 각축장이기 때문이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나와서 천하의 왕들을 전쟁을 위해서 모으더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옛날에 어떤 분이 해석한 것을 들었다. 강물이 마르면 육군이 그냥 갈 수가 있다. 옛날 이야기이니까 중국이 개방되기 전이다. 지금은 분홍색이지만 공산주의가 새빨갈 때인데, 어떤 분이 지금 실크로드를 따라서 중공에서 길을 닦고 있다고 한다. 그 길을 무엇 하려고 닦는가? 성경의 이 예언이 성취되기 위해서 닦고 있다는 것이다. 2억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 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국의 군대가 아마겟돈으로 모여들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때 들을 때는 그럴 듯했다. 주은래가 우리 한국 전쟁에 임할 때 무력으로 보면 미국에 비교할 수가 없지만 2억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능히 가능한 일이다. 인해전술로 완전히 한반도를 덮겠다는 말이다. 그 인해전술에 미국도 할 수 없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 말과 2만만의 군대와 비교하니 딱 맞는 말이다. 마지막 날에 중국에서 2억의 군대가 실크로드를 따라서 유브라데 강을 건너서 중동으로 몰려들겠구나. 왜 중동으로 몰려드는가? 여기에 대해 여러 사람이 재미있는 말을 한다. 사해바다 속에 무진장한 천연자원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땅위에 있는 지하자원들이 고갈될 때 그 마지막 지하자원이 매장된 곳이 사해 밑이라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전 세계가 전부 그곳으로 모여서 전쟁을 하게 될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사해라는 곳이 그렇게 심오한 것이 묻혀있는 곳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그런 전쟁이 일어날지 안일어날지는 잘 모르겠다. 석유가 끝나고 나면 뭘 찾아서 올지도 모르겠다. 요즘 들으니 사해 밑에 있는 찌꺼기가 엄청난 비료의 자원이 된다는 말도 있고 여러 가지 말이 있다. 기독교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런 것에 대해 굉장히 연구를 많이 했다. 나는 그런 것은 잘 모른다.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서 왕들이 모였다는 것은 종말적인 각축장이 될 것이다. 마지막에 결국은 누가 승리하는가? 어린양의 나라가 승리하는가, 짐승의 나라가 승리하는가를 판가름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쟁은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고>-자기 옷을 지키라
그래서 경고를 하고 있는데,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이런 큰 전쟁이 나서 3차 대전이나 4차 대전이 일어나서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이 다 터지면 자기 옷을 깨끗하게 입으나 안입으나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제사장이라고 죽지 않겠는가. 목사라고 죽지 않겠는가. 신부라고 죽지 않겠는가. 거룩한 사람이라고 죽지 않겠는가.
그런데 마지막에 보면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이렇게 말한다. 다시 인격으로 돌아온다. 이것을 보면 이 문제들을 물리적으로 해석할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인격과 관계이고 우리 생명과 관계되는 문제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성경을 읽으면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들은 전부 이스라엘 나라를 중심으로 한 예언으로 옛날에 성취된 것이 많이 있다. 그래서 그대로 신약도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신약에 올 때는 이미 그 시대를 벗어난 것이다. 이미 경륜이 바꾸어졌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경륜 자체가 구약의 경륜에서 신약의 경륜으로 바꾸어졌다는 말은 물리적이고 시간적이고 공간적이고 역사적인 경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영적이고 인격적인 경륜으로 바꾸어진 것이다. 시대가 바꾸어졌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로 다니엘서나 에스겔서와 비슷하게 써있는 것 같지만 경륜이 바꾸어진 것에서 써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꼭 이사야처럼 예레미야처럼 에스겔처럼 예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상 자체가 달라졌다. 흑백TV 시대에서 칼라TV 시대로 바꾸어진 것처럼, 진공관 시대에서 트랜지스터 시대로 바꾸어진 것처럼, 물질적이고 시간적이고 공간적이고 역사적인 세계에서 인격적인 세계로 옮아왔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구원은 최종적으로 인격 안에 있는 것이지 물질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땅이 바꾸어져서 전부 에메랄드로 깔리고 황금이 깔린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이 아니다. 이 땅위의 사람들이 하나님 사람이 되는 것이 마지막 구원이다. 토질이 변하여 콩 하나를 심었는데 만개가 나왔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경륜의 전환 후에 온 것이니까 우리는 무엇을 보든지 간에 새로운 경륜 안에서 봐야 된다. 하나님이 지금 인류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가, 어디에 목표를 두고 이끌어 가는가를 봐야 한다. 불이 떨어져서 죽고 사는 것에 목표를 두면 계시록을 꼭 구약처럼 해석하게 된다. 써진 방식은 구약에 있는 예언서들과 아주 흡사하게 쓰여졌다. 다니엘서와 제일 많이 같고 에스겔서와 같은 곳에서 발췌한 것이 많기 때문에 방식은 그런 방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내용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하나님 목표는 사람에게 있다.
<일곱째>-공기 중에 쏟음(사탄의 영역)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오더라고 한다.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온다는 말은 ‘성전의 보좌’라는 뜻이다. 성전의 보좌는 통치의 보좌가 아니라 ‘표현의 보좌’이다. 4장에서 나온 보좌는 통치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성전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통치에서 성전으로 바꾸어졌다는 말이다. 성전으로 바꾸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표현을 위한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 표현이다. 성전의 표현 그것이 바로 예수가 된 것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그 말은 물질로 만들어졌던 그 표현인 성전이 ‘사람이 되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다.
요한복음에서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겠다"(요2:19) 하니,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요2:20)고 말했다. 사도 요한이 그때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로 뒤에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라는 한 인격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예수라는 인격을 묘사해 놓은 것이 바로 성전이고 성막이다. 거꾸로 말하면 성막과 성전이 육체화된 것이 예수이다. 그것은 하나님 표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표현이다.
아들이라는 말은 표현이라는 개념이다. 아버지라는 말은 실재라는 개념이고, 아들이라는 말은 표현이라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분을 가리켜 말하고, 아들은 보이는 분을 가리켜 말한다. 그 보이는 것은 아버지의 어떠함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표현이다. 생명의 어떠함은 그 열매에 달려있다. 우리가 무슨 씨를 심던지 그 씨를 보고 열매를 기다리기 때문에 심는 것이다. 열매는 그 씨의 표현이다. 열매는 그 씨의 아들이다.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의 열매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표현들이 되는 것이다. 심판의 보좌에서 행정의 보좌에서 통치의 보좌에서 성전의 보좌로 옮겨왔다. 표현의 보좌로 옮겨왔다. 이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말하기를 “되었다(γενονεν, it has occurred)” 하고 말했는데, 이 “되었다”는 말이 성경 가운데 두 번 나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는 말이 나왔었다. 이 “다 이루었다”(요19:30)는 말은 성취했다는 말로 다 해석을 하는데 이것은 ‘종말’이라는 뜻이다. ‘끝이다, 끝났다’는 뜻이다. 텔로스하는 말은 종말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하는 말은 텔로스라는 말을 썼다. 텔로스 텔레우(-τελος-τελεω), 테테레스테이(τετελεσται)라고 해서 ‘종말이다, 끝이다(end, complete, fulfill, bring to an end)’라는 뜻이다.
계시록에 있는 “되었다”는 말은 종말이라는 말이 아니고 ‘to happened, to became’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일어났다,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진짜로 이 말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성전의 보좌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성전의 보좌가 나타난 것 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통치의 목표는 행정과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표현에 있다. 행정과 통치도 자신의 표현을 위한 것이다. 왜 심판을 하는가? 왜 열방을 다스리는가? 전부 하나님 자신의 표현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한 다음에 마지막은 성전을 지었다.
다윗을 통해서 아니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어서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한 민족을 이루고 국가를 이루어 사방을 다 평정한 다음에 성전을 짓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성전을 짓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기를 표현하는데 있다. 창세기 1장 26절은 이것을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갈망이고 목표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 통제하는 원칙에서 읽어야 된다. 무엇을 써놓았든지 어떻게 써놓았든지 간에 그것은 전부 다 방법이고, 목표는 자기를 표현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자기를 표현함에 있어서 무엇이 필요한가? 사람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한 인격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통제하는 이상을 가져야 된다. 하나님은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구나. 자기를 표현하는 것에 절대적으로 한 인격이 필요한 것이구나. 그때 성전이 필요하다. 성전이 없을 때 불도 있었고 바람도 있었다. 그러나 불이나 바람보다는 성전이 낫고, 성전보다는 한 인격이 낫다. 하나님은 인격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한다.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성전의 보좌로부터 나오면 이제 희망이 있는 것이다. 통치의 보좌로부터 나올 때는 순전히 심판밖에 없다. 성전의 보좌로부터 나올 때는 심판과 동시에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다. 성전은 하나의 건축이다. 하나님 자신은 영원토록 동일하게 존재하시지만 그분을 위한 표현은 영원토록 발전하는 것이다.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불로 보일 때도 그분이시고, 바람으로 보일 때도 그분이시다. 성전으로 보일 때도 그분이시고, 성막으로 보일 때도 그분이시다. 예수 안에 보일 때도 역시 그분이다. 교회 안으로 보일 때도 역시 그분이다.
그분은 영원토록 동일하시지만 표현은 계속해서 달라져 왔다. 바람에서 물로 불로, 성막에서 성전으로 예수로 교회로 계속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표현은 영원하다. 왜냐하면 그 표현은 항상 부족하기 때문이다. 온전하지를 않기 때문에 그 표현은 영원토록 계속해야 된다. 왜 오늘 교회가 필요한가? 그것은 바로 이 표현의 영원성 때문에 교회가 필요하다. 어느 한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표현이 된다 하더라도 그 한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고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온 인류가 다 필요한 것이다.
성전의 보좌로 옮겨왔다는 것은 희망이 있는 것이고, 성전의 보좌로 옮겨오기까지 모든 심판이 이루어졌으므로 이제부터는 심판과 더불어 건축이 이루어지고 그 마지막에는 건축이 완성되어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 바꾸어지게 된다. 성전의 보좌에서 요한계시록 22장에 가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 바꾸어지게 된다. 새 보좌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새 보좌는 사실은 한 보좌의 발전이다. 4장에 있는 보좌가 지금 성전의 보좌가 되고, 성전에 있는 보좌가 어린양과 하나님의 보좌가 된다. 모든 것이 성숙해 간다고 볼 수 있다.
이 음성 속에서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이런 말이 나온다.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이런 말이 나왔다. 그리고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상하더라”고 되어있다. 한 달란트라는 말은 약 34kg에 해당되는 무게로 시멘트 푸대보다 큰 것이 떨어진다는 말이므로 한방 맞으면 죽는 것이다. 시멘트 푸대가 20kg이다.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의 큰 성이 바벨론인가, 아니면 예루살렘인가? 이런 문제이다. 11장 8절에 보면 그것이 예루살렘 같이 보인다.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하던 성이 바로 이 큰 성이다.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계11:8) 이렇게 아리송한 말씀을 했다. 이렇게 아리송한 말씀 속에 예루살렘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때 당시에 누가 조금 예루살렘에 대해서 말을 잘못하면 당장에 훼방하였다. 모가지가 날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다. 거룩한 성이 망한다든지 갈라진다든지 하는 소리를 했다가는 죽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두 증인이 분명히 죽임을 당한 자리는 예루살렘이다. 그런데 그것이 예루살렘 같이 보인다.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하던 성이 바로 이 큰 성이다.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예루살렘이라는 그 성이 거룩한 성이 소돔도 되었고 애굽도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겉으로 볼 때는 예루살렘으로 있는데, 그 내용을 영적으로 보니 소돔이기도 하고 애굽이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이미 다 세상이 돼버렸다는 뜻이다.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이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라고 말했는데 세 갈래로 갈라졌다는 말은 다 쪼개져서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뜻이다. 바벨론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잔을 받으니까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고 성이나 산악도 다 없어지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바벨론과 옛 예루살렘이 처음에는 구별되어 있는데, 뒤에 가면 점점점점 서로 섞여져서 이것이 옛 것이 없어지고 새 것이 나오게 된다.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고, 예루살렘도 무너지는데 만국의 성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이 소돔도 되고 애굽도 돼버렸는데 다른 곳이 뭐가 되겠는가. 그것은 당연하다.
성과 산악도 없어지더라고 했는데, 성은 사람이 쌓아서 높게 만들어 놓은 것이고, 산악은 여기서는 어떤 언덕 같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즉 높은 것이 다 없어졌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그 높은 것 때문에 울룩불룩했다. 지금도 세상을 보면 높은데 있고 낮은데 있어 울퉁불퉁하다. 그날이 돌아오면, 성전에서 나오는 소리가 나올 때 성전의 보좌로부터 소리가 나올 때 그날에는 높은 곳도 낮은 곳도 다 없어진다는 뜻이다. 교회가 처음에는 높고 낮다. 처음에 교회 안에 들어올 때는 높고 낮다. 그런데 성전의 보좌의 통치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면 그때는 성이나 산악이 다 없어진다. 아무개 성도 없어지고 아무개 산도 없어지고 성이 다 무너진다. 처음에는 다 자기 성들이 있다. 벽돌로 쌓은 성도 있고 화강암으로 쌓은 성도 있고 토담으로 쌓은 성도 있고 여러 가지 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런데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이 성들이 다 무너진다. 산악도 다 무너진다. 큰 우박이 떨어져서 찌그러지니 그런 것 같다.
어린양의 표현! 어린양 하나님의 표현! 이 하나님의 표현 앞에서 모든 것은 다 없어진다는 뜻이다. 옛 예루살렘도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고 성이나 산악도 다 없어지고 어린양의 표현 앞에 모든 것은 사라진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그 세계를 기다리고 있다. 마치 스룹바벨에 태산이 평지가 되듯이 오늘 우리가 어린양의 표현 앞에 어린양 하나님의 표현 앞에 세상 만국이 평지가 되도록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세상 상식으로 보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고 안될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막막하다는 사람도 있고 아리송하다는 사람도 있고 혼란스럽다는 사람도 있고 머리가 어지럽다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가 나온다. 왜 그런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린양이 호랑이를 이겼다, 사자를 이겼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니까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살고 우리 안에서 그 생명이 살아서 나올 때보면 분명히 만국이 지배될 것이라는 것이 보인다. 왜냐하면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듯이 내 앞에서 불거져 있던 많은 성들이나 산악들이 어린양의 표현 앞에서 평지가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큰 성을 가지고 나에게 쫓아왔다. 그 성에는 대포 구멍도 있고 총 구멍도 있다. 망원대도 있어 눈을 부라리고 왔다. 나도 대포를 만들어서 같이 쏘아야 되는가. 내가 대포를 만든 것을 보고는 저쪽에서는 더 큰 것을 만들 것이다. 내가 칼을 하나 만들어 놓으면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가지고 쫓아올 것이다. 즉 싸움은 싸움을 일으키고 싸움은 싸움을 일으킨다. 그런데 어린양 하나님이 딱 표현되면 이상하게 그 대포 구멍이 다 소용없어진다. 대포 쏠 일이 없어진다. 이 말이 이런 의미인 것 같다. 오늘날 세상의 일반 상식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가 체험을 해보면 어린양만이 승리하는구나, 평지를 만드는 것은 어린양 하나님이지 결코 호랑이가 아니구나를 우리가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재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더욱 훼방하더라는 것이다. 이 재앙들을 보면 이것이 물리적인 재앙이라고 볼 수 없다. 물리적인 재앙 같으면 벌써 다 죽어서 훼방할 힘도 없고 훼방할 사람도 없다. 공동묘지에 가보면 훼방도 없고 원망도 없다. 공동묘지에 있는 사람도 옛날에 살았을 때는 하나님을 훼방했을 것이다. 무시하고 멸시했을 것이다. 요즘 공동묘지에 가보니 조용하다. 돌처럼 조용하고 바위처럼 조용하다더니 아무 말이 없다. 이것은 물리적인 문제라고 볼 수 없다. 영적인 문제이다.
왜 이 성경을 썼는가? 이 말을 함으로써 어떤 사람은 회개를 하기 때문에 썼다. 돌아서기 때문이다. 누가 돌아서는가? 하나님 백성은 재앙이 내리면 돌아선다. 그것이 다른 점이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보면 빌빌한다든지 모른다든지 캄캄하다느니 내가 왜 대구교회 가는지 모르겠다느니 하면서 주일마다 오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재앙이 내리면 그 사람은 딱 돌아선다. 어려움이 생기면 돌아선다. 그것이 특색이다. 그런데 바깥사람 이방인은 어떻게 하는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생길수록 훼방한다. 그러면 좋으면 찬송하는가? 좋으면 찬송하면 되는데 그렇지도 않다. 좋으면 또 하나님을 무시한다. 좋을 때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나쁠 때는 원망하고 훼방한다.
세상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 백성을 건져내자고 이 예언을 쓴 것이다. 그 속에서 어물어물한 상태에서 건져내자고 거룩하게 구별해내자고 이 말을 쓴 것이기 때문에 한쪽에서는 회개하고 열매가 맺혀서 추수가 되고, 한쪽에서는 점점 더 훼방을 해나간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읽을 때 이스라엘 백성과 바로를 보면 재앙이 내리면 내릴수록 바로는 더욱더 강성해지고 더욱더 강팍해졌다고 한다.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일부러 강팍하게 할까? 바로의 마음을 좀 유순하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좋은 말로 보내주지 왜 그렇게 강팍하게 했을까? 하나님이 강팍하게 했다기보다도 그것은 강팍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일이 발생하면 바로는 더욱 강팍하게 되어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면 더욱 강팍해지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면 찬양하는 사람도 생긴다. 우리 개인 안에서도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와 내가 어떤 경우에 돌아오는가를 자세히 생각해 보면 내가 하나님 백성일 때 돌아온다. 그리고 하나님 백성은 그 음성을 듣는다. 책망을 들어도 아버지 말로 들린다. 그런데 이방인은 그 말로 들리지 않기 때문에 돌아올 수 없다. 그래도 하나님 백성이라고 명부에 올라온 것만 해도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른다. 언젠가는 회개할 시기가 있지만 등록도 해놓지 않으면 아예 회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지금 등록을 시키지 않아 명부가 없다. 그 명부는 없지만 여러분 모두 실제적인 명부에는 등록이 되어있다. 만일에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돌아올 수가 있다. 왜? 명부에 있기 때문이다. 한번 봤기 때문에 돌아올 수가 있다. 그런데 못 본 사람은 돌아올 수가 없다. 교회 안에서도 이것을 역력하게 볼 수가 있다.
일곱째 대접이 쏟아졌는데 오늘 다 하지 못하겠고, 17장 18장은 바벨론의 멸망, 심판에 대해서 기록되어있다.
[기 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환란 중에서도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멸망 중에서도 자기 백성을 추수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엄청난 비밀을 알게 하여 주시고 세상의 본질, 우리가 가서는 안될 본질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들의 멸망을 보는 것은 그들의 종국을 보는 것이고 오늘 계시된 모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지 그 백성을 부르시고 있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듣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님! 당신이 열매를 거두시기 위해서 땅에 찾아오시고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가 추수하는 수확물이 되기를 원하고 첫 열매가 되기를 원하고 아버지 상에 드려지는 제물이 되게 되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