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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아버지의 충만이신 아들을 영화롭게 하심
2012년 12월 16일(일)
(요16:12~15)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지난번 말씀에 이어서 오늘은‘아버지의 충만이신 아들을 영화롭게 하심’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그 영이 오시면 무엇을 하시는가’를 말한다. 지난 번에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책망(責望)’이라는 말은 “깨우쳐서 확신하게 한다.”는 말로서 아담의 지식과 상식으로 알고 있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성령은 그것을 교정(校訂)하실 것이다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죄나 의나 심판은 틀린 것이고 실제 안에서 본 죄와 의와 심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깨우쳐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신성과 인성의 연합으로 완결되는 신성한 생명의 분배(分配)는 구속 받은 인성 안으로 과정을 거친 그 영이 오심으로써 이루어지고, 그 영은 구속받은 인성 안에서 세상을 책망하여 바르게 하시며, 진리(실제)의 영으로서 그는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하여 아버지의 충만이신 아들을 알게 하여 영화롭게 하신다.
오늘 두 번째는‘성령이 오시면 무엇을 하시는가?’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창조의 목표는 신성한 생명의 분배(分配) 즉 하나님의 생명을 사람의 속에 분배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으니까 그 안에는 생명이 분배되어야 한다. 흙에는 씨를 뿌려야 밭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신성한 생명을 분배해야 하나님 나라가 된다. 창조의 목표는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사람에게 더 나아가서는 만유에게 분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분배(分配)다. 대통령이나 왕처럼 자기가 뭘 한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분배하는 것인데 이것을 ‘하나님의 통치’라고 한다. 신성한 생명의 분배는 창조의 목표다.
어떻게 해서 신성한 생명을 분배할 수 있는가? 흙과 씨는 완전히 성질이 서로 다른데 씨가 흙에 뿌려져서 밭이 된다. 하나님과 사람은 전혀 성질이 다른데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전혀 다른 인간 속에 심어질 수 있냐는 것이다. 이것이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씨와 흙의 연합’여기에서 밭이 생긴다. 씨와 흙이 연합하면 밭이 생기고 거기서 열매가 맺히고 곡식이 나서 사람이 먹게 된다. 마찬가지로 신성과 인성이 연합하면 거기서 하나님의 모든 일이 다 일어난다.
하나님은 홀로 스스로 무엇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런 연합을 통해서 자기를 표현하시고 나타내신다. 홀로 하실 것 같았으면 진작 다 했을 것이다. 만일 씨가 자기 혼자 스스로 싹도 나고 잎도 나고 열매를 맺을 것 같으면 흙이 필요 없지만 씨는 아무리 좋은 씨라도 밭에 뿌려지지 않고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씨와 마찬가지로 그 씨가 사람 속에 연합되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가 될 수 있다.
이 씨는 어디로 들어와야 하는가? 구속받은 인성 안으로 들어온다. 인간에게 들어오시려고 사람을 창조했지만 사람은 선악과를 먹고 빗나가서 사람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비어있어야 하는데 차버렸고 지금까지 못 들어오고 있다.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밭을 구했는데 다른 잡초가 들어찼기 때문에 씨를 뿌려도 안 되니까 씨를 뿌리려면 갈아 엎어서 원상으로 회복해야만 씨를 뿌릴 수 있다. 원상으로 회복하는 일, 잡초가 들어차 있는 것을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수 있는 밭으로 다시 만드는 것, 원위치로 되돌리는 것, 이것이 구속(救贖)이다. 물건을 살 때는 돈을 주고 산다. 그런데 가서 되물리면 물건은 주고 돈은 도로 찾아오는데 이것이 구속이다.
어디에 하나님의 생명이 떨어질 수 있고 연합할 수 있는가? 구속 받은 인성 안이다.
왜 모든 사람에게 안 되는가? 구속이 없기 때문이다.
왜 모든 밭에 씨를 뿌려도 안 되는가? 갈아 엎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구속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구속 자체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씨를 뿌리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씨, 그 생명은 그냥 온다고 되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이 생명이 사람과 연합을 하려면 연합할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들이 세상에 와서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구속을 이루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도 거기서 과정을 거쳐서 사람과 연합할 수 있는 형태로 바꿔진 것이다. 사람 속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게르마늄이라는 원소가 있는데 우리 몸에 아주 좋고 필요한 것이지만 광물이라서 우리 몸 속에 바로 들어갈 수 없어서 먹어도 소용이 없다. 건강식품 중에 게르마늄이 들어간 것이 왜 비싸냐하면 광물로서의 게르마늄이 식물로서의 과정(유기화)을 거쳐야 우리 몸 속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게르마늄을 식물에 줘서 식물이 흡수하면 식물이 흡수한 게르마늄은 우리 몸 속에 들어올 수 있는 유기화된 게르마늄이 된다. 그냥 게르마늄은 비싸지 않지만 한 번 이런 과정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다. 하나님의 생명도 사람 속에 바로 들어올 수 없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 사람과 연합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참 많다. 사람과 사람끼리도 정말 원수가 져서 도저히 연합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있는데, 몇 년 후에 연합이 되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양쪽 다 과정을 거쳐서 보들보들해져서 만나니까 그렇다. 이게 과정을 거치는 일이다.
옛날 땜질하는 것을 보면 함석(겉에 아연을 입힌 철판)에 다른 것을 납으로 붙이는데 그냥은 붙지 않는다. 붙이려고 하는 부위에 황산을 부으면 함석 표면이 싹 녹는 그 때 납을 가지고 붙이면 둘이 붙는다. 이것도 둘이 연합을 하기 위해서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왜 싸우고 연합이 안 되냐? 그것은 과정을 안 거쳐서 그렇지 누구든지 과정을 거치면 다 연합이 된다. 교회에서는 그런 과정을 다 거치고 있으니까 교회 와서 살다보면 다 연합이 된다. 세상에서는 같은 사건을 만나도 이런 정해진 과정을 통과하지 않기 때문에 연합이 안 되고 시간이 지나 갈수록 원수가 더 깊어지지만 교회 안에서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오늘은 잘 못 만나지는 사이라 하더라도 내일은 만나질 수 있고 내일은 안 되더라도 모레는 만나질 수 있다. 영원히 원수 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 때 가서 너무 미안하지 않게 지금 잘 하기 바란다.
‘구속받은 인성’이것도 과정을 거쳤고,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역시 예수라는 한 육신 안에 와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둘이 합할 수 있게 되었다. 과정을 거친 인성과 과정을 거친 신성 둘이 합하면 그것이 하나님과의 연합이고 이 연합 안에서 신성한 생명이 분배된다. 씨도 마찬가지로 그냥 뿌려지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거쳐서 밭에 뿌려진다. 처음에 나무에 달려 있을 때는 그냥 뿌려질 수 없고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흙 속에 들어가서 발아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고 있다.
구속받은 인성이 필요한 이유가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구속받은 인성이 필요하고, 하나님에게는 구속받은 신성이 필요하다. 구속받은 인성과 구속받은 신성이 서로 연합하면 그 때 신성한 생명 즉 하나님 생명의 분배가 일어난다.
이런 연합된 생명 안에서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오늘은 예수 즉 아들을 영화롭게 한다. 이 영은 진리의 영이고 실제의 영이다. 오늘 말씀은 진리의 영-성령이다. 14장에서는 ‘보혜사 성령’이였는데 그것은 위로자 즉 우리 옆에서 우리를 돕는 자, 나를 변호해 주는 자라는 뜻으로서 오늘은 ‘진리의 성령’으로 보혜사와는 다르다. 알고 보면 한 분이지만 임무를 두 번 얘기하는 것이다.‘보혜사’라는 이름을 가졌을 때는 우리를 보호하고 위로하는 자고‘진리의 성령’했을 때는 실제의 영이라는 뜻이다.
실제의 영은 결국 구속받은 인성 안으로 구속받은 신성이 연합해서 실제의 영이 되기 때문에 그 때는 모든 진리 안으로 인도해서 아버지의 충만이신 아들을 영화롭게 한다. 이런 과정이 없이는 아들을 모르니까 아들을 알아 볼 수도 없고 알아보지 못하니까 영화롭게도 할 수 없다. 나사렛에서 나온 청년이 이렇고 저러고 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 아들이다, 정말로 메시야다!’라고 알아졌으면 사도들이 도망쳤겠는가! 3년을 따라 갔어도 몰랐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희가 지금 모르는 것은 이 실제의 영이 없어서 그렇다. 그런데 내가 가면 실제의 영으로 다시 올 것인데, 실제의 영이 오면 아들을 너희들이 알아보게 될 것이고, 아들이 얼마나 영화로운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가‘아들이 정말 영화롭구나!’이렇게 알아지는 것은 내 일반 상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의 영이 나에게 와서 알려주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지금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예수라는 사람이 굉장한 사람으로 각색(脚色)이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굉장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동양에서까지 성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심지어는 레닌 같은 사람도‘예수가 온다면 내가 모자를 벗겠다’라는 말을 했다는데 이것은 기독교에 의해서 각색된 예수를 말한다. 당시의 초라한 예수를 보고 누가 그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겠는가!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었다.
제자들이 그렇게 못 했다는 말은 모든 인류가 아무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빛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현미경(顯微鏡)이 오기 전까지는 세균이 우리 눈에 안 보였다. 세균이 발견된 것이 백 몇십 년 밖에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상식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세균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결정적으로 갈라진 것이 이 세균학이다. 세균이 발견되면서 ‘병이 이래서 오는구나! 이 세균 때문에 오는구나!’한 것을 알게 되었다. 눈에 안 보이니까 우리가 눈을 빤히 뜨고도 모르다가 현미경이 들어오니까 우리가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진리의 성령이 오면 예수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예수를 아는 일은 우리가 그냥 수능 시험 보듯이 공부해서 그렇게 아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가 모르지만 내 안에 실제의 영이 와서 내게 그것을 깨우쳐 주니까 아는 것이지 그냥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아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 진리의 영이 아들을 영화롭게 함
진리는 진실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진실이 없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되었다. 그러니까 진실은 없는 것이다. 여우가 사람이 되었다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은 거짓이다. 진실은 생명에 속한다.
진리의 영이 아들을 알게 하고 영화롭게 한다. 진리라는 말을 철학적으로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다. 진리는 그냥 진실이다.
세상에는 진리가 없다. 요즘 진실이라고 ‘믿어주세요! 나는 뭘 하겠습니다! 나는 뭘 하겠습니다!’해주겠다는 것이 너무 많다. 그것 다 기억하고 있으려는지 모르겠다. 물론 노트에 써 놓겠지만 5년 동안 그것을 다 하려면 큰일이다. 너무 너무 많아서 한 두 가지도 실현하기가 어려운데 너무 많아서 무슨 수로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 같으면 딱 한 가지만 말할텐데 그것도 하기가 어려울텐데 말이다. ‘세상에는 진실이 없구나! 코미디가 하는 소리구나!’그렇게 들어야지 그것을 진실로 믿었다가는 다음에 가면 그 사람들을 ‘왜 약속하고 못했냐’고 욕한다. 그렇게 욕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적당히 듣는 것이 낫다. 괜히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욕할 필요가 있겠는가!
세상에는 아예 진실이 없다. 왜냐하면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되었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령 눈이 밝아서 선악과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사람은 선악을 아는 일에는 하나님 같이 되었다. 전능한 입장에서는 사람이 하나님 같지 않지만은 다른 일에는 몰라도 선악을 아는 일에는 하나님 같이 되었다.
사람들이 선악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전능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선악을 아는 일에는 하나님이 안 가르쳐 줘도 내가 하나님 같이 되었으니까 하나님 보다 더 잘 안다. 내가 내 힘 내 능력으로 안 되는 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내가 선악을 더 알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선악을 알려주는 사람은 너무 많고 세상 어디를 가도 선악을 다 알려 준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학교 가면 선생님이, 직장에 가면 상사가 가르쳐 주고, 사방에서 가르쳐 주니까 선악을 알려고 굳이 하나님을 믿거나 성경을 볼 필요가 없다.
하나님같이 되었기 때문에 진실은 없다. 사람이 하나님같이 되었으니까 사람 자체가 거짓이 아닌가? 그러니 진실이 없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은 진실이던데?’ 이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된 사람이다, 하나님같이 된 사람에게는 진실이 없다’ 이렇게 알고 생각하면 된다. ‘
‘대통령을 고르는 몇가지 항목, 어떤 사람을 대통령으로 골라야 하는가’를 써놓은 한겨레 신문 기사를 누가 나한테 이메일로 보내줘서 읽어보니 ‘진실하냐 진실하지 않냐, 과거 역사가 어떠냐’를 검증해 봐야 한다고 적혀 있길래 속으로 ‘좋은 소리 하고 있네!’라고 생각했다. 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되었는데 뭘 검증하고 말고 할 것이 있는가! 우리가 이것을 모를 때는 그 하나 하나를 다 검증해야 한다. 또 검증한다고 다 똑같이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검증이 된다. 왜? 내 안에 있는 선악과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 대로 다 다르니까 검증하려고 나서면 다 틀리다. 똑같은 일을 놔두고 한 쪽에서는 ‘옳다 진실하다’고 그러고 한 쪽에서는 ‘틀렸다, 거짓말이다’라고 그런다.
요즘 세상이 하도 그러니까 정말 사람들이 헷갈리겠다.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계속 하다보면 앞뒤가 바뀌어진다. ‘콩이 먼저냐 팥이 먼저냐, 콩이 먼저냐 팥이 먼저냐, 콩이 먼저냐 팥이 먼저냐’하다보면 내가 콩부터 시작했는지 팥부터 시작했는지 모르게 된다.^^ 말들이 하도 많다보니 그런 식으로 되어버린다. 머리써서 복잡하게 할 것도 없고, 그것을 가지고 누가 옳으니 그르니 할 필요도 없다. 내가 몇 사람하고 토론을 해봤는데 도저히 안 먹혀들어간다. 나와 아주 친한 우리 형제인데도 도저히 안 먹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거 틀렸다. 아무리 해봐도 목만 아프고 입만 아프지 이것은 안 될 일이구나!’라고 알아진다.
그러니까‘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같이 되었다’ 이렇게 알면 아주 간단하지만 그것을 자기 머리로 구별해서 자기 머리, 자기 지식, 자기가 아는 것이 더 옳다고 맨날 아무리 해봐도 안된다. 내가 우리 형제들한테 이야기해도 안 되는데 누가 되겠는가! 다른 일에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사람인데 이 문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보고 ‘이야~ 이거 정말 하나님같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여러분은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저를 믿지 않은가! ^^ 그런데도 선악에 관한 문제가 개입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하나님 같이 된 것이 분명하고 그렇게 되니까 진실이 없다.
여우가 만일 사람이 되었다면 그가 하는 모든 짓은 다 거짓이다. 옛날 일본 동화에 백년 된 여우가 사람 되었다는 식의 그런 이야기가 많은데 다 거짓말이다. 진실은 생명에 속한 것이다. 여우가 사람이 되면 생명이 달라진 것이니까 여우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해도 생명이 틀렸으니까 거짓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선악과의 지식 안에서 안다고 하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여 바르게 하시고, 이제 진실 안으로 인도하여 그 안에서 아들을 알게 하고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진실(眞實)은 아들을 알게 하는 빛이요 지혜다.
아담이 선악과의 지식 안에서 안다고 하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여 깨우쳐 바르게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진실 안으로 인도해서 아들을 알게하고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현미경은 세균을 보게 하는 빛인 것처럼 진실은 아들을 알게 하는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들이 없기 때문에 진실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아들이어야 될 것인데 하나님같이 되어버렸으니까 진실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이신 아들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진리의 영이 오셔야만 그 아들을 비로소 알아볼 수 있다.
2) 그 영은 죽고 다시 사셨으므로 진실 안으로 인도함
그 영은 진실이시다. 예수는 거짓인 아담을 대표해서 죽으시고 진실인 새 사람을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다. 거짓을 끝내시고 진실로 오신 것이다. 세상에서는 죽고 진실인 아버지 앞에서는 살아나셨다. 죽고 다시 사셨으므로 그에게는 거짓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우리를 진실 안으로 인도하여 아들을 영화로우신 분으로 알게 하신다. 아들은 진실 안에서 영화로우시다.
왜 그 영은 진실한가? 죽고 다시 살았기 때문에 진실하다.
예수는 거짓인 아담을 끝내기 위해서 죽었다. 예수의 죽음은 거짓인 아담은 끝내고 진실인 새 사람을 위해서 다시 살아났다.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은 세상을 정리(整理)한 것이다. 옛 생명안에서 거짓을 끝내고 새 생명 안에서 진실을 가져왔으니 이것은 혁명(革命)이다.
정치적인 혁명은 어떤 혁명이라도 100% 동조(同調)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조하지 않는 무수한 사람을 짓밟고 죽여야만 그 혁명이 가능하니까 무섭고 잔인한 것이다. 이란과 같은 중동지역에서는 자기들끼리 맨날 총들고 싸우고 있는데 그것은 다 혁명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이만하기 다행이다. 혁명세력이 우리 나라 안에 들어오면 안 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혁명세력은 조금만 들어와도 숫자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주 적은 숫자의 나치당이 독일 전체를 그렇게 만들었고, 얼마 안되는 볼세비키 당원들이 소련을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혁명이란 것은 대다수가 처음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몇 사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게 무섭다.
이런 세계를 끝내고 진실인 새 사람을 위해서 다시 살았으니까 이것은 혁명이다! 이 혁명은 총칼로 하는 정치적인 혁명과 다르게 인간의 신성(인격)을 혁명하는 것이고 인간 자체를 바꿔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니까 이것이 진정한 평화다.
세상의 혁명은 인간은 그냥 그대로 놔두고 어떤 제도만 바꾸는 것이니까 자연히 반대자와 찬성자가 생기게 되어 사람이 죽게 되지만 이것은 사람 자체의 인격을 바꾸는 것이지 누구를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꿔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화되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왜 싸우는가? 사람은 그대로 있는데 세상만 바꾸려고 하니까 싸우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사람을 바꿔서 세상을 바꾸니까 바꿔진 사람들부터 차차 변화되면 싸움이 일어날 일이 없다. 우리 대구교회부터 차차 변화되어 바꿔지면 조용하게 바꿔진다. 사람이 바꿔져서 세상이 바꿔지는 것이니까 누구와 총칼로 전쟁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바로 옛 사람을 끝내고 새 사람을 위해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다. ‘아담을 끝내고 그리스도로 왔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거짓을 끝내고 진실로 오신 분이라는 말이다. 세상에서는 죽고 진실이신 아버지 앞에서는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죽고 다시 살았으니까!
그러므로 우리를 진실 안으로 인도하여 영화로우신 아들을 알게 하실 것이다. 진실 안에 있어야만 진실을 알게 되지 진실 밖에서는 진실을 알 수 없다. 물 속에 들어가야 물 속에 있는 것을 보게 되지 물 바깥에서 물 속에 있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진실이라는 판 속에 들어가야 우리는 진실하신 이를 알 수 있다.
노름판이나 섰다판 아니면 요즘 돌리는 곳에 가서 거기서 ‘누가 진실한가?’를 알아보고 있으면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거기서는 진실하지 않은 사람, 눈을 잘 속이는 사람이 장땡이다. 그렇지 않은가? 유명한 놀음쟁이들은 화투짝이 천장에 붙었다 발바닥에 붙었다 그런다고 하니 이것은 마술처럼 눈을 속이는 것이다. 몇 장씩 돌려주는데 자기는 장땡이를 들고 앉아서 다른 사람에게 구땡이를 주면 구땡이를 가진 사람은 ‘내 위에 또 있겠는가?’ 싶어서 계속해서 돈을 찌르다가 마지막에 미소를 지으면서 딱 꺼내 놓으면 장땡이가 위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놀음판의 기술자다. 아주 전문적인 놀음꾼들이 있다.
놀음판에 가서 ‘양심이 있느냐 없느냐, 진실하냐 아니냐’하면 그 사람이 잘못된 사람이다. 놀음판에서는 어떻게 하면 잘 속이는가? 잘 속이는 사람이 왕이다. 진실이 없는 데서 진실을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진실이 없는 세상에서 적당한 것을 찾아야지 아주 진실한 것을 찾으려면 아주 골치 아프고 인생이 힘 든다. 라스베가스 놀음판에 가서 진실한 사람을 찾으려고 해 보라! 그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런데 거기서 거짓말 하는 사람을 찾으려면 너무 너무 쉽다. 왜냐하면 다 그렇기 때문이다.
진실이 있는 곳에 가야 진실을 찾을 수 있다. 그 영은 죽고 다시 사셨기 때문에 우리를 진실 안으로 인도한다.
3) 그 영은 스스로 말하지 않음으로 진실 안으로 인도함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다. 스스로 말한다. 자기 생각뿐이다. 근원이 없이 각자 자기 생각만을 말한다. 근원이 있다면 거짓의 아비가 있을 뿐이다(요8:44). 그러므로 그의 행함은 모두 거짓이다. 그에게는 생명이 없고 지식만 있다. 지식 안에 있고 진실 안에 있지 못하다.
그 영은 스스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하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고, 보내신 이도 없고 보냄을 받은 자도 없다. 선악과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니까 나를 보내실 자도 없고 내가 누구에게 보냄을 받을 일도 없이 스스로 다 자존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스스로 말한다’는 말은 스스로, 자기 자의(自意)로 말한다는 것이니까 자기 생각뿐이다. 어떻게 나온 줄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니까 각자 자기 생각만 말할 뿐이고 근원이 없다.
사람이 무슨 말을 할 때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 참 중요하다. 어떤 근원에서 저 말을 하고 있는지, 공산주의적 근원에서 말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적 근원에서 말을 하고 있는지, 말은 같은데 근원은 다를 수가 있다. 정치에서도 공산주의자들도 같은 말을 하고 자유 민주주의자도 같은 말을 하니까 겉의 말만 보면 구별할 수 없고 근원을 알아야 구별된다.
요즘 사람들은 근원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내가 말을 해 보니까 근원은 잘 모르고 표면만 아니까 안다고 할 수 없다. 근원이 없이 각자 자기 생각만 말한다. 근원이 있다면 무엇이 있는가? 거짓의 아비가 있을 뿐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지적하셨다. 8장 84절에 보니까 ‘너희는 거짓말 하는 자에게서 났다.’ 그게 누군가? 아담이라는 말이 아닌가? 아담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단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너희 아비는 마귀다’이 말은 ‘너희 아비는 거짓말하는 자다.’이다. 사람을 보고 하나님 같이 된다고 했으니까 그 보다 더 큰 사기가 어디에 있겠는가?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큰 사기는 없다. 여우보고 ‘내가 주는 이 감자를 먹으면 너는 사람이 된다.’ 이 말처럼 거짓말이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완전히 사기꾼이다. 그래서 거짓의 아비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의 행함은 모두 전부가 다 거짓이다. 그 사람의 근원이 어딘가 이다. 사람이라는 것이 근원이 어딘가에 따라서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하는 것이다. 근원은 딱 하나이지만 말은 여러 가지다. 왜냐하면 말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다. 이런 형편에 가면 이렇게 말하고 저런 형편에 가면 저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둘이 다른가? 그게 아니고 말은 다르지만 사람은 그 사람이고 근원은 똑 같은 근원이다. 우리가 말을 들을 때 근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말 자체를 가지고 이것이 진실이냐, 거짓이냐 이렇게 볼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보면 다 근원이 없다. 선악이 근원이니까 근원을 찾아봐도 선악과뿐이다.
선악과가 무엇인지 모를 때는 선악이 근원인 줄 알면서 ‘저것은 옳고 이것은 그르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선악과가 무엇인지 알고 나면 그렇게 보지 않게 된다. ‘아! 저것은 선악과에서 나오는구나!’ 이렇게 알게 아닌가. 그러면 그 선악과는 누구에게서 왔는가? 사단 즉 거짓의 아비에게서 왔다. 그에게는 생명은 없고 지식만 있다. 생명이 없단 말은 명령하는 자가 없다는 말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다 줄이 연결되어 있는데 이 사람에게는 생명은 없고 지식만 있다. 지식 안에 있고 진실 안에 있지 못하다. 그 지식 안에 있다는 말은 선악을 아는 지식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영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듣는 것을 말한다(요3:32,8:40참).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과정을 거치셨다. 그리고 보내심을 받았다(요14:16,26참). 듣고 말씀하시므로 진실하시다. 그러므로 스스로 말하지 않고 진실-실재 안으로 인도하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
그러나 그 영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듣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무엇을 듣고 말하는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과정을 거치셨으니까 근원이 있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오면 ‘나는 아버지께로 와서 아버지께로 간다느니, 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느니, 나는 듣는 것을 말한다느니’ 이런 말을 하는데 이것은 근원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나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왜 이렇게 ‘나는 아버지께로 와서 아버지께로 간다느니, 나는 듣는 것을 말한다느니, 나는 보내심을 받았다느니’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세상이 그와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듣고 말하면 진실하다. 듣고 말하면 진실하단 말은 옆에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내가 옮기면 진실하다는 그런 말이 아니고 근원이 있으면 진실하다는 말이다. 군대에서 어떤 사람이 상부의 명령(命令)을 받고 왔으면 진실하지만 내가 이 사람에게서 말을 듣고 저 사람에게 옮기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 내가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판단을 해서 옮기는 것이니까 옮길 때마다 달라지는 것이다. 똑 같은 사건을 옮기는데 옮길 때마다 달라져서 맨 끝에 가면 엉뚱한 것이 되어서 둘이 싸움을 붙이니까 가능하면 말을 안 옮겨야 한다. 자기가 옮겨도 ‘그 사람이 말한 마음’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말’대로 옮긴다. 말대로 옮길 때는 내 마음을 섞어서 옮기지 그냥 스피커처럼 옮기는 법은 없다. 녹음기는 진실하지만 사람의 말은 진실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 생각이 거기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로 내 생각을 거기에 포함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안 그렇다. 자기 생각을 포함하지 않고서 말을 할 수 있는가!
듣고 말한다는 말은 근원이 있다는 말이다. 스스로 말하지 않고 실제 안으로 인도하여 아들을 영화롭게 한다. 결국 스스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아들을 영화롭게 한다. 우리도 진실해야 아들을 영화롭게 할 수가 있다.
4) 그 영은 진실하심으로 장차 올 일들을 알려 주심
예언은 진실의 귀결이다. 엉뚱한 생각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것도 아니다. 사필귀정인 것이다.
네 번째는 그 영이 진실하기 때문에 장차 올 일들을 알려 준다. 여기 보니까 ‘내가 장래의 일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고 했다. 예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진실의 귀결이다. 예언을 그냥 꿈에 받는다든지, 환상 속에서 받는다든지 청각을 통해 듣는다든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고 특별히 기독교 가운데 그런 것이 굉장히 많은데 사실은 성경 자체가 다 예언이다. 성경은 명령이기도 하고 예언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도 예언, 예언 이라고 많이 듣다보니까 기독교인들 속에는 예언은 남이 못 듣는 어떤 것이 어디서 들려오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예언은 진실의 귀결이다.
진실이 아닌 예언이 있다고 생각을 해 보라. 예를 들면 92년 10월 28일이라는 예언은 진실의 귀결이 아니라 어디서 그것을 들었다. 그 때 그 사람들은 얼마나 확신을 가졌었는가 하면 내가 아는 사람으로부터 얘기를 들었는데 형님이 목사인데 동생에게 와서 ‘빨리 정리를 해라. 곧 휴거를 하게 될텐데 농사를 짓고 있으면 뭐하냐’하고 자기 자녀들은 중학생이었는데 전부 퇴학을 시키고 찾아왔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형님! 무엇을 보고 그렇게 확신을 합니까?’하니까 ‘내가 확실하게 내 손바닥에 두 번이나 92.10.28 이라고 써진 것을 봤다’는 것이다. 멀쩡한 목사이고 인물도 아주 잘 생긴 사람이다. 그리고 시시한 교단 목사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교단의 목사이다. 그리고 족보 없는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 때부터 예수를 믿어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이니까 이 예언이라는 것에 사람들이 너무너무 속는 것이다.
예언은 진실의 귀결인데 사람들이 그 진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 진실을 깨우쳐 주는 것이 예언이다. 따라서 예언은 엉뚱한 생각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먼저 깨달은 선각자(先覺者)들이고 이 사람들을 보고 예언자(預言者)라고 한다. 하늘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알기 전에 먼저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이 아닌 것을 안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는데 사필귀정을 먼저 알았다는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이 종결지을 때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아는 사람도 있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럴 때 영어가 필요하다. 라디오로 영어 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일본이 곧 패망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영어를 못 듣는 사람들은 일본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줄 알고 큰 낭패를 봤다.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이제는 안 되겠구나’하고 도장을 찍은 것이 친일파가 되고 말았다. 예언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사필귀정이다. 그 당시 ‘일본이 곧 망한다.’ 하는 것은 예언이었지만 그것은 하늘에서 들은 소리이거나 꿈꾸다 들은 소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실의 영은 모든 일을 알고 계신다.
진실한 사람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다. 말세론 같은 것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진실의 영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진실한 사람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다.‘내일 지구가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사람은 진실한 사람의 말이다. 진실하기 때문에 내일을 염려하지 않고 말세론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말세론에 끌려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로또복권이나 당첨되었으면~’하는 것이 있다. 갑자기 횡재가 하고 싶다거나 갑자기 기상천외한 축복을 받고 싶다든지 하는 사람들이 말세론을 좇아 다니지 정상적인 사람이나 진실한 사람은 그런 곳에 가지 않는다. 그런데 모두 다 진실한 세계에서는 뭔가 잘 안되고 뭔가 진실하지 않은 곳에 가야 되는 노름이라도 해서 뭔가를 따고 싶은 그런 심리의 사람들이 가는 것이다. 내가 봐서 그렇다든지 들어서 그렇다든지 하는데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보이고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들린 것이다. 그러니까 진실한 사람은 말세론 같은 것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
그 전에도 말한 적이 있는데 충주에 있을 때 여학생 두 명이 와서 나에게 하는 말이 ‘어디에 예언을 잘 하는 권사님이 있는데 가보려 한다’는 것이다. 뭐하려고 가보려고 하느냐고 하니까 장래 일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장래 일이야 학교 졸업하고 나면 결혼할 것이고 빤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하니까 ‘왜 목사님은 갈 필요가 없느냐’고 해서 ‘나는 내일 일이 빤하다. 내가 예수 안에 있는데 빤한 것 아니냐. 그래서 나는 그런 곳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 아이들이 거기에 갔다 왔는지 안 갔다 왔는지 모르겠는데 뭔가 불안하니까 그렇다. 어려운 시대가 될수록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
이번에 어떤 사람이 나와서 12월21일에 뭔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12월 21일에 뭔일이 일어나면 제일 억울한 사람이 누구겠는가? 대통령 당선된 사람이 제일 억울하다. 이 추위에 가서 고생해서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이 되었는데 21일에 쾅하면 올라 앉아보지도 못하고 내려오게 되니 제일 억울하다.
말세론에 끌려 다니는 사람을 보면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다.
주님은 진실하시므로 자기에게 닥쳐 올 일을 아시고 장차 올 일들을 제자들에게 일러주셨다.
진실은 곧 예언이다.
주님은 진실하시기 때문에 자기에게 닥쳐올 일을 알았다. 자기 삶을 자기가 알고 있으니까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을 알고 있다. 귀신스럽게 알았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삶을,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어떤 사람들 속에 와서 살고 있는가를 알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안다는 말이다. 그럴 것이 아니겠나? 거짓말하는 세상 속에 와 있다는 것,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하지만 경배하지 않는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다.’ 그것을 일러준 것이다.
진실이 곧 예언이니까 예언자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5) 그 영은 진리 안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심
진리가 없는 종교와 세상의 어둠 속에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예수를 죽였다.
세상은 선악을 아는 지식 안에서 지혜를 가지고 있었고, 유대 종교는 율법과 전통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5번째는 ‘그 영은 진리 안에서 그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 하는 것이다. 진리가 없는 종교와 세상의 어둠 속에서 예수를 알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예수를 죽였다. 예수와 원수가 져서 죽인 것이 아니라 예수를 몰라서 죽였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저들이 몰라서 그렇습니다.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저들이 알지 못해 그렇습니다.’했는데 몰랐다는 것이다. 왜 모르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없으니까 어둡고 어둡기 때문에 보이지 않아서 하나님 아들을 알아볼 수가 없으니까 자기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캄캄한 곳에 매여서 나를 어떻게 알아보겠느냐! 당연히 못 알아 볼 것이니까 나를 죽일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진리가 없는 종교 그 어둠 속에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예수를 죽였다.
세상은 선악을 아는 지식 속에서 지혜가 충만한 곳이다. 유대공회, 유대종교의 지도부 그 곳은 다 유명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얼마나 지혜가 많은 사람들이 모였겠는가! 성경지식도 많을 것이고 지혜도 많을 것이고 율법과 전통 안에서 그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선악을 아는 지식 속에서 자기들대로 다 지혜로운 사람들이고 유대종교는 율법과 전통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만이 확실한 선민이고 하나님은 우리만 아는 하나님’이라고 아주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지혜와 믿음은 세상 안에 꽉 차있다. 희랍인을 대표로해서 고린도전서에서는 “헬라인은 지혜를 찾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구한다”고 말했다. 헬라인은 세상 즉 선악을 아는 지식을 말하는데 그 지식 안에서는 지혜를 찾는다. 그런데 유대종교에는 율법과 전통이 있으니까 믿음을 위해서 표적을 찾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길이었으니까 전혀 알아 볼 수 없다. 선악을 아는 지식의 길도 아니고 유대종교의 길도 아니니까 예수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보내신 이가 없으므로 들을 곳이 없고 받을 것이 없었다.
스스로의 생각대로 말한 것이다.
진실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곡해하고 죽였던 것이다.
진실이 없으면 곡해하게 된다.
왜 이렇게 캄캄하게 되었나? 보내신 이가 없으므로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으니까 스스로 생각대로 말한다. 들려오는 말도 없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자기 속에 있는 생각밖에 없다. 라디오가 들리지 않으니까 일본이 지금 망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본이 망하는지 안 망하는지 자기 속에서 어떻게 계시가 있겠는가! 아님 일본이 8월 15일 망한다고 알려주겠는가! 그러니까 다 자기 생각대로 한다. 선악을 아는 지식 안에는 자기 생각뿐이고 여기는 진실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을 알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저 놈이 하나님 모독한다’고 곡해했다.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아들을 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고 곡해(曲解)해 버렸다. 진실이 없으면 곡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하는 말마다 곡해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진실하지 않다. 그러면 남의 말을 다 곡해해서 다르게 해석해 버린다. 본인의 생각과 관계없이 자기대로 생각해서 곡해해 버린다. 이런 사람은 골치 아픈 사람들이다. 진실이 없으면 곡해하게 된다.
그러나 진실이신 그 영이 오시면 진리 안에서 참 하나님 아들을 사람들에게 알려 그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오로지 그 영의 가르치심을 통해서만 아들을 아는 것이다. 진리 안에서 아들은 영화로우시다.
그러나 진실이신 그 분이 오시면 진리 안에서 참 하나님 아들이신 그 분을 사람들에게 알려서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오로지 그 영의 가르침 안에서만 아들을 아는 것이지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 아들을 아는 것은 아니다. 진리 안에서 아들은 영화로우신 분이지 거짓 안에서는 아들은 영화로울 수가 없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진리 안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
인간의 상식과 지혜안에서 누가 십자가에 못박힌 로마의 죄수요, 신성한 유대교의 이단자를 하나님 아들로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알고 전파하는 사람들은 미쳤거나 아니면 그 영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인 것이다.
인간의 상식과 지식 안에서 누가 십자가에 못박힌 대로마제국의 죄수, 신성한 유대교의 이단자를 하나님 아들로 알아 볼 수 있겠는가? 그럴 사람이 없다. 인간의 상식과 지혜, 선악을 아는 지혜 안에서는 세계를 지배하던 대로마제국의 죄수이고 하나님과 가장 가깝다고하는 신성한 유대교의 이단자인 그 분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어떻게 알아 보겠는가! 무엇으로 하나님 아들이라고 알아 보겠는가?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전파하는 사람들은 미쳤거나 아니면 그 영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이거나 둘 중에 하나다. 세상의 상식이나 세상의 종교 안에서는 이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새 술에 취했다. 미쳤다’는 말을 사도들은 들었는데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까 들을 만하다. 우리가 당연히 알 수 있는 것을 전파하는 사람 같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공자님 제자들이나 석가모니 제자들 보고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참 지혜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의 제자들 보고는 미쳤다고 한다.
6) 그 영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지고 아들의 영광을 나타냄
진리의 영은 예수의 영이다. 예수가 진실이시기 때문에 그 영 또한 진실이시다. 그 영은 과정을 거친 예수의 영이다. 창조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신 성령은 우리 생명이 되시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과정을 거치셨다. 그러므로 그 영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의 이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신다.
그 영은 아들의 모든 것을 가지고 아들의 영광을 나타낸다. 진리의 영은 예수의 영이다. 예수가 진실하시기 때문에 그 영도 진실하다. 사람은 진실하지 않는데 그 영은 진실할 수가 없다. 사람과 그 영은 하나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분리해서 그렇지 나와 내 영을 어떻게 분리하겠는가! 내가 진실하면 내 영도 진실하고 내가 거짓되면 내 영도 거짓되다. 그 영은 과정을 거친 예수의 영이니까 진실한 영이다. 창세기 1장 2절에 창조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신 성령은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더라.” 하던 그 영으로서 우리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안에서 과정을 거쳤다. 그 영 그대로 사람 속에서 생명이 된다면 창조할 때 아예 사람 속에 그 영이 들어갔을 것인데 바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과정을 거쳐야만 인성과 결합할 수 있다. 사람도 구속 안에 있어야 되고 그 영도 구속을 통해서 과정을 거쳐야 된다. 그러므로 그 영은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아들의 이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시므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다.
‘예수 없는 영이나 성령’ 이것은 참 황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예수를 전혀 모르는데 교회나 기도원에서 갑자기 무슨 영을 받았다고 성령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아주 문제이다. 예수는 모르는데 무슨 영을 받았다고 한다. ‘아~ 이것은 직행열차네! 번개불에 콩 볶아먹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예수를 모르는데 어떻게 예수의 영이 오겠는가! 사도들은 예수를 안 사람들이다.
아들의 이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셔야만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 이름으로 와야 그 분을 영화롭게 한다.
“아버지께서 소유하고 계신 모든 것은 내 것이라" 하셨다.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은 아들의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로부터 아들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 영은 아들의 모든 것을 받아서(이해해서) 아들을 알려주신다(14).
‘아버지께서 소유하고 계신 모든 것은 내 것이다.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에게 알리리라’ 고 말씀하셨다. 내 것은 다 아버지 것이고 아버지 것은 다 내 것이다.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은 아들의 것이다. 이 말은 이건희씨가 가진 모든 것은 이재용씨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이 아들의 것인 이유는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이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해서 실제화 되기 때문에 아버지의 모든 것은 아들의 것이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모든 것은 우리 것이 된다’이렇게 말할 때는 우리 안에 그것이 실제화 될 때는 다 내 것이 되고 실제화 되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다.
그 영은 아들의 모든 것을 받아서 우리에게 아들을 알려 주시는 분이니까 그 영은 아들과 분리된 영이거나 따로 따로 있는 영이 아니다. 나하고 내 영이 따로 있지 않는 것처럼 그 영과 예수는 따로 있는 분이 아니다. 이것을 이론적으로 분리하여 독립성을 보장하려 하다보면 삼신론(三神論)이 되어버린다. 아버지-하나님이라는 신과 아들-하나님이라는 신과 성령-하나님이라는 신이 있게 되어서 삼신론이 되어버리는데 이것도 이단이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 영은 아들의 모든 것을 받아서 아들을 알려주는 분이다. 내 영 외에 누가 나를 더 잘 알겠는가? 또 나 외에 내 영을 누가 더 잘 알겠는가? 그러니까 내 영은 다른 사람 앞에 가서 나를 알려주게 되고 나는 또 다른 사람 앞에 가서 내 영을 알려주게 된다. 내 영과 나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영은 아들의 모든 것을 ‘받아서’아들을 알려주신다. 진실의 영이 아니면 우리에게 아들을 알려줄 수 없다.
갑자기 어디서 불이 떨어졌다든지 무엇이 떨어져서 성령을 받았다고 난리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영은 영이겠지만 예수의 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영이 있기는 많이 있는가 본데 나는 잘 모르겠지만 많이 있으니까 무당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영이 없으면 작두 위에서 어떻게 춤을 추겠는가? 어떤 영이 와야 되는 것이지 제 정신으로 사람 생각으로는 못한다. 그런 것을 보면 없다고 할 수는 없고 있기는 있는가 본데 그것이 아들의 영은 아니라는 것이다.
a). 하나님의 영광이신 아들로 알려 줌
⑴ 거짓말하는 자를 이기신 분으로
아들은 만유 안에서 비할 바 없이 영화로우시다. 누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연약함으로 마귀에게 유린당한 인성을 가지고 그 마귀를 물리치고 전능자가 되어 다시 아버지 안으로 가신 분이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이신 아들로 알려준다. 왜 하나님의 영광이신 아들로 알려주는가? 거짓말하는 자를 이기셨기 때문이다. 아들은 만유 안에서 비할 바 없이 영화로운 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연약함으로, 마귀에게 유린당한 인성을 가지고 그 마귀를 물리치고 다시 전능자가 되어서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누가 있냐는 것이다. 우리는 마귀를 이길 때 마귀보다 더한 지혜가 있어야 되고 마귀보다 더한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서 능력 있는 목사님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 마귀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목소리도 커야하고 갖추어야 될 것이 많다. 소리를 질러야 나가지 그냥 조용히 했는데 귀신이 나갔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다. 목소리 작은 사람은 성령 받아봤자 귀신 못 쫓아낸다.
아들은 만유 안에서 비할 바 없이 영화로운 분이시다. 왜? 쇠방망이나 철퇴, 하나님의 불같은 능력을 가지고서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인간성을 가지고 마귀를 물리쳤으니까 비할 수 없이 영화로운 분이다. 우리는 영광이 철퇴나 불벼락에 있는 줄 알았고 그것이 영광인 줄 알았는데 예수께서 마귀를 물리칠 때 보니까 40일이나 금식하고 주리실 때였다. 40일 동안 주리시면 무슨 힘아리가 있겠는가? 죽지 못해 살고 있는 형편일텐데 그런 상태에서도 마귀를 이겼다는 것이다. 이 말은 연약한 인생을 가지고 마귀를 이겼기 때문에 그래서 영화롭다는 것이다.
그를 보고 우리는 다시 전능자(全能者)라고 한다. 처음에 천지 창조를 하신 이를 전능자라고 했는데 천지를 창조하신 이는 전능자지만 마귀를 물리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마귀를 물리치시는 자가 전능자시다. 그러므로 예수는 전능자가 되어서 아버지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이제는 다시 천지창조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런 전능자는 지금 숨어 있어도 괜찮다. 그런데 문제는 마귀를 전멸 시킬 전능자가 필요한데 예수는 바로 그런 전능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모든 것을 다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마귀를 물리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대통령도 한가지만이라도 확실하게 해주는 사람이라면 괜찮다. 지금 대통령도 다들 못했다고 말들이 많은데 나는 한두 가지는 확실하게 잘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여당이여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처음부터 도장 찍은(투표)사람이니까 끝까지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이다. 한두 가지 잘한 것이 있다. 미국에서 온 사람 말을 들어보니까 미국에서는 인기가 좋고 잘한다고 생각한다는데 국내에서는 몇 가지 잘못한 것이 있어서 인기가 없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잘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빵도 주고 떡도 주고 다 하는가?
그것이 아니라 그 분의 전능성은 마귀를 이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⑵ 신성한 모든 것을 인격화(실제화)하신 분으로
아들은 진실하심으로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지셨고(형상화), 그 영은 이것을 받아서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아들은 영화로우시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실제화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고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히1:3).
두 번째는 신성한 모든 것을 인격화(실제화)하신 분이다.
왜 그는 영화로운 분이신가? 신성한 것이 아무리 있으면 뭐하겠는가! 하늘에 신성한 것이 많고 하나님에게도 신성한 것이 많지만 그것이 실제화가 안 되면 소용없다. 그런데 이것을 실제화 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가 영화로운 분이다.
아들은 진실하심으로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지셨다.(형상화) 그렇다면 아버지의 모든 것을 어떻게 가졌는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형상화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형상화한 분이다. 형상화 하면 가진 것이다.
예를 들어 내 머리 속에 좋은 그림을 가지고 있지만 그 좋은 그림은 내 머리 속에만 있지 실제로 표현될 수 없다면 그것은 내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갈 수도 없다. 그런데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 놓는 사람 그 사람이 화가다. 나는 내 마음속에는 있어도 그림으로 그릴 수 없으니까 나는 실제화를 못 시키는데 어떤 사람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그림으로 그려 내니까 이것이 바로 마음을 실제화 시키고 형상화 시킨 것이다.
나도 좋은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좋은 노래라는 생각만 있을 뿐이지 곡이 나오지 않는데 어떤 사람이 내 맘에 딱 맞는 곡을 만들어 낸다면 이것이 바로 곡을 형상화 한 사람이고 내 마음의 노래를 형상화 시킨 사람이다. 그 사람은 모든 걸 가진 사람이고 부유한 사람이다. 내 속에 마음만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고 그것을 곡으로 적어 낼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이 풍부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면 예수는 누구인가?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시화(可視化)시킨 사람이다. 가시화란 볼 수 있게 형상화(形象化)시켰다는 뜻이니까 아들은 영화로우시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실제화(實際化)하셨다. 그러므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고 그 본체의 형상이시다”(히1:3)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이 놀라운 것이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형상화했다. “자고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요1:18) 이렇게 말한 것은 가시화시켰다는 말이다.
옛말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림을 못 그리는데 마음이 있으면 뭣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보고도 못 그린다. 나보고 사람을 보고 사람을 그리라고 하면 그 사람 같이 그릴 수가 없다. 그 사람처럼 못 그리고 다른 것이 되어 버리는데 어떤 사람은 딱 그 사람처럼 그린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는가? 형상화 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림을 못 그리기 때문에 아무리 눈 뚫어지게 보고 그려도 그렇게 안 그려져서 형상화를 못 시킨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 형상화시켜 내놓는 사람은 부자로 따진다면 나와 소유한 것이 다를 것 같다. 그런 사람은 모든 걸 보면 그렇게 사진이 찍힐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눈으로 보기는 보는데 그리려고 하면 못 그리겠다. 내가 제일 못하는 것이 그림 그리기다. 이상하게 안 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실제화하신 분이니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고 본체의 형상이시다.(히1:3)
아들이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지셨다는 것은 만유에게서 보여진 모든 것을 인격화하셨고,
구약에 나타난 모든 형상과 그 말씀들을 실제화하셨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고 감춰진 모든 신성한 것들을 실제화하신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모든 것을 가지셨다. “아버지 것은 내 것이다. 아버지에게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다”이 말의 뜻은 만유에게서 보여진 모든 것을 인격화했다, 그 분 안에서 모든 것이 인격화 됐다는 뜻이다. 나무도 인격화 되고, 물도 인격화 되고, 바위도 인격화 되고, 다 인격화 됐다는 것이다.
(지금 수요일 레위기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 알 것인데) 구약에 나타난 모든 형상들 즉 레위기에 여러 가지 형상이 나오는데 그 형상과 그 말씀들을 다 실제화했다는 뜻이다. 예수라는 한 사람으로 성막을 보면 그것이 전부 예수인 것이다. 보이지 않고 감춰진 모든 신성한 것들을 실제화 하신 분이니까 그 분은 참 실제이시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며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골2:9,10).
그러므로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천상천하에 유일하시다(골1:15참).
(인간은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도록 지음 받았다. 그래서 오늘날 과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에 거하시고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해졌다고 한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을 형상화 하기 위해서 지어졌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것은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형상화 할 존재다. 만물가운데 왜 사람이 가장 귀중한가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형상화 할 수 있는 존재는 유일하게 사람 뿐이다. 다른 동물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다른 동물이 사람보다 못 한 것이 아니라 이 부분에서 못하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할 수 있는 이 능력이 사람한테만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인간은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오늘날 과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이 과학이다. 수학(數學)을 왜 하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 수학을 공부한다. 보이는 것만 하려면 산수(算數)만 하면 된다. 동양에서는 보이는 것만 계산하는 산수 밖에 없지만 서양에서는 수학을 연구해서 과학을 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고 있다. 이런 기능이 사람한테 원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수학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과학자까지 못되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수학을 해서 과학을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든다.
그 사람 머리 속에 있는 것을 생각해가지고 만든 것이 컴퓨터다. 컴퓨터를 쓰다보면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는 것은 빙산에 일각에 불과하지만“야~ 참 잘 만들었다”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알고 만들었는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했을 때 보면 이미 만들어 놨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생각을 딱 보이게 만들어 놨다. 이것이 사람의 놀라운 점이다.
‘하나님을 형상화 한다’는 이것이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다’이 말이다. 우리가 만일 그 분을 형상화한다면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다. 얼마나 풍부하겠는가! 모든 것을 볼 때마다 다 자기로 소화가 되고 다 자기로 해석이 되니 부족함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아담의 상식 안에서 불행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내가 이 사람(하나님을 형상화 할 사람)으로서 보면 아름다운 것을 형상화 할 수 있다. 우리가 ‘이것은 불행이야’이렇게 생각한 것도 내가 그것을 형상화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면 거기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형상화 할 수 있다.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못 잡으니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뜻을 컴퓨터처럼 딱 치면 나올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면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무엇을 보던지, 어떤 것을 보던지, 다 그렇게 자기가 인격화 시킬 수 있다면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참 놀라운 존재이다. 정말로 놀라운 존재이다. 컴퓨터 만드는 것만 봐도 사람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컴퓨터 만드는 것보다 하나님을 형상화 할 수 있으면 더 놀라운 수준이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신성의 모든 온전한 것들이 전부 육체로 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해졌다.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것이야 말로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는 것이다.
여러분도 그 안에서 지금 조금씩이라도 된다. 전에는 전혀 안되던 것이 조금씩이라도 여러분 속에서 해석이 되어서 실제가 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그 안에 깊이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그 분과 더욱더 연합되면 연합 될수록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해졌다.
인간은 예수 안에서 비로소 충만에 이르게 된다. 충만(充滿)이라는 말은 온전하다는 말이다. 여러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천상천하의 유일한 존재들이고 대단히 귀중한 존재이니까 남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렇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존재를 무시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형상화 할 수 있는 존재를 무시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는 죄 없다 하지 아니 하리라” 우리는 천상천하의 유일한 분들을 다 모시고 같이 살고 있다.
오늘도 옆에 앉아 있는 모든 분들이 모두다 천상천하에 유일하신 분들인데 우리가 이렇게 유일하신 분들과 같이 일생동안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아멘 박수 짝짝짝) 정말 자랑스럽지 않은가? 맨날 거짓말만 하고 살 것이고 내가 참 말한다고 했어도 결국 거짓말 하고 살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을 만나서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져서 우리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형상화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간증은 왜하는가? 그래서 하는 것이다. 순모임에서 그런 얘기하니까 재미가 있는 것이다. 거짓말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선거 연설도 한 달 동안 들으니 맨날 똑같은 소리를 한다. 하도 똑같은 소리를 하니까 아무리 참말이라고 해도 참말로 안 들린다.
우리는 만나면 다 실제를 얘기한다.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우리가 인격화해서 말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의 것을,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보이도록 하는 것이니까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고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전부 다 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 과학자들이다.
b). 아버지의 충만이신 아들로 알려 줌
보이지 아니하는 아버지는 보이는 아들을 통하여 충만(성취)하시다. 궁극적인 본질은 실제화로 충만에 이른다.
보이지 아니하는 아버지는 보이는 아들을 통해서 충만(성취)하시다. 궁극적인 본질은 실제화 되었을 때 충만한 것이다. 하나님이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실제화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충만하신 분이라고 할 수가 없지만 우리가 실제화함으로써 하나님은 더욱 충만하신 분이 되시고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해진다.
예수께서는 친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라”“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 하셨으며,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요1:14) “자고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요1:18)고 했고 바울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골1:9),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를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우리에게 이제 별로 문제가 안 된다.
사도 요한이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 이렇게 말해도 이제 문제가 안되고
자고로 하나님이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냈다.”이렇게 말해도 맞는 말이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이렇게 말해도 맞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본체의 형상이시다.” 이렇게 말해도 맞는 말이다. 모두 다 맞는 말이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 실제화 되어야 이 말이 맞는 말이 되는 것이지 아니면 이 말이 맞는 말인지 아닌지 모른다.
이와 같이 만유가 그 진실 안에서, 그를 통하여, 그를 위하여 실제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예수-그 영은 아버지의 충만으로 오시며, 그 오심을 받는 자는 그 안에서 함께 충만하여지는 것이다(골2:10참).
이와 같이 만유가 그 진실 안에서 그를 통하여 그를 위하여 실제화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 영은 아버지의 충만으로 오시며 그 오심을 받는 자는 그 안에서 함께 충만하여진다.
우리가 예수 만난 것이 복이고, 예수를 아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하여질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복인 것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날마다 거짓 속에서 거짓말을 하고 살 사람인데 실제 안에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형상화 할 수 있는 이런 놀라운 축복 안으로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새로운 판으로 우리를 옮겨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진실 안으로 옮겨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영원한 생명 안으로 우리를 옮겨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안에서 참 말을 하고 살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으로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거짓말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는 자리에서 참 말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는 자리로 우리 인생을 옮겨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판 안에서 우리가 참 말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고 그 참 말을 더욱 전파해서 온 세상 속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