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제와의 두 번째~]
기온이 영하 십 도를 오르내린다. 겨울 날씨가 옷을 겹겹이 껴 입게 한다. 얼굴은 눈만 내놓은 채 감싼다. 12월의 추위가 집밖에 다니는 발길을 돌리게 한다. 제대로 된 겨울을 맞이한다.
열 시간의 비행기 탑승이다. 두 아이와 함께 귀국하는 설렘은 비좁은 자리를 잊게 한다. 일 년 만에 부모와 형제를 만나게 된다. 유럽에서 이십 여 년을 생활한 처제다. 아무 연고도 없는 외국에서 어떻게 지낼 것이냐며 눈물로 이별을 한 지 오래다. 어버이와 동기간의 걱정을 뒤로 하고 결혼을 하였다. 직장 생활과 자녀 교육을 같이 하면서 교민 사회의 본보기가 되어 간단다.
바쁜 연말이지만 직장의 배려를 받아 한 달의 휴가를 얻었다. 인천 공항을 통해 한국 땅을 밟았다. 사는 나라와 계절이 달라 발을 내딛자 장갑과 모자는 필수품이다. 핫 팩은 덕탬이다. 공항에서 이곳까지 연결되는 교통편이 있다. 밤 늦은 시간 차편을 갈아 타고 내리는 반복을 줄이고 곧장 목적지에 닿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짐 꾸러미는 아이 둘이 챙겨 준다. 안고 끌고 옮기는 짐이 지치게 만든 지난날이 떠오른다.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있나. 훌쩍 자란 아이들이 나를 이끈다. 새벽에 이 도시에 도착한다. 손끝이 오그라들고 콧물이 흘러내린다. 안경은 하얗게 김이 서려 시야를 막는다.
드디어 본가에 도착하였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 문을 연다. 선잠에 깬 노모가 가늘게 눈을 뜨고 세 사람을 맞이한다. 잠깐의 인사와 포옹은 긴 여행으로 지친 몸을 녹였다. 몇 시간의 깊은 잠은 시차 적응에 제격이다.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잠자는 만큼 에너지를 보충해 주는 일등 요소는 없다.
처제 마중을 간다. 가족이 우리 집으로 찾아온다. 낮 기온조차 영하의 날씨다. 대중 교통편을 이용해 온다. 도착지에 승용차를 세워 두고 그들을 기다린다. 눈동자만 내놓은 두 조카가 먼저 다가왔다. 뒤이어 처제도 뒤따른다. 두 팔을 벌리고 가볍게 안는다. 아가였던 조카들이 처제보다 머리 하나가 솟아 있다. 지난날 길을 가다가 드러눕거나, 물건을 바닥에 던지는 것은 예사였다. 두 아이를 돌보는데 가는 곳마다 뒷 정리가 필요했다. 혼자 힘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몇 년 사이에 달라졌다. 어른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 함께하는 나날이 기대된다.
저녁은 삶은 돼지고기가 상에 오른다. 한국식이다. 배추 속잎으로 쌈이 겹들여진다. 겉을 살짝 구워 겉바속촉이다. 쌀밥과 함께 차린 밥상에 젓가락질이 계속된다. 입에 맞는지 밥 한 그릇을 비운다. 한국의 밥이 맛있단다. 출국할 때 5인용 전기 밥솥이 첫 번째 구매 물품이란다. 유자 차와 커피를 골라 마신다.
산책도 할 겸 바닷가를 찾았다. 멈추지 않고 부는 바람은 코끝을 시리게 한다. 여러 가지 형상의 조형물에는 색깔마저 다양한 조명이 눈에 들어온다. 성탄절을 앞두고 한 해를 마감하는 분위기를 더해 준다. 남매끼리 또 셋이 번갈아 짝을 지어 사진을 담는다. 가끔 몰아치는 바닷바람은 머물러 있는 발걸음을 내딛게 만든다. 사진기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는다. 폰 액정이 한 곳에 머물러 있다. 바닷가 물이 얕은 곳은 하얀 얼음이 보인다. 달빛에 반사된 덩어리가 손에 잡혔다. 팔과 다리가 따로 내닫는다. 근처 찻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거리 조명에 바다 물결이 거울을 비친듯하다. 가로등 밑에는 긴 코트 차림의 남녀는 몸집이 큰 사람처럼 뒤뚱뒤뚱 걸어간다. 카페에서 내려다 보는 해안 풍경은 두 눈동자의 거리를 좁힌다. 멀리 등대 불빛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길 안내 본래의 역할에 충실하다. 인생 항로를 엿본다. 차가운 날씨 속에 목을 감싸는 차 한잔은 넉넉함으로 끌어 안는다. 가족끼리 서로에게 입가 웃음을 머물게 하는 말을 주고 받는다.
자동차 창문에 입김이 하얗게 부딪친다. 발가락 끝을 오므려 힘을 모은다. 찬 바람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추위에 쫓겨 집으로 향한다. 조카 녀석이 편의점을 찾아간다. 오늘 저녁에는 컵 라면 먹는 것으로 한국에서 체험을 즐긴단다.
조카가 가만히 앉아 있지 않는다. 힘 자랑하듯 방바닥에 엎드려 팔 굽혀 펴기를 한다. 최고라며 엄지 손가락을 펴 보이자 이번에는 짐 볼을 가져온다. 거실 바닥에 등을 걸친 채 머리를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한다. 쉬지 않고 이어진다. 짧고 긴 시계 바늘이 나란히 포개어진다. 작은 방 문이 닫히는 소리를 낸다.
어쩌면 이번 방문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지난 봄에 수술을 한 노쇠한 어버이와 시간을 보낸다. 한 번 떠나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얼마간이라도 누릴 수 있는 공간을 함께 한다. 전국의 명소를 찾아다니는 관광과 더불어 추억 쌓아간다. 갑자기 낮아진 기온은 면역력이 떨어진 몸을 자꾸만 밀어낸다. 스스로 짐이 될까 봐 함께하는 시간을 줄인다. 차가운 바람마저 더해진다. 예년의 기온으로 맞춰지는 날을 기다려본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려 하나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던가. 어버이와 자식의 사랑은 셈 법이 없다. 흐려지고 저물어 가는 석양을 어찌할 수 없다. 해 떨어진 오늘을 되돌릴 수 없다. 누구든 제한된 시간을 쓴다.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는가 달렸다. 처제의 방문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 준다. 공동 관심사의 의견에 손바닥을 마주친다. 노후 걱정 없는 인생 설계를 이끌어 간다. 차츰 눈꺼풀이 내려온다. 큰 방 문을 슬그머니 닫는다.
제한된 시간에 하루하루 일정이 쌓여간다. 차곡차곡 돌탑을 올려가듯 정을 담는다. 바다와 산, 강이 모두 곁에 있다. 세계 여느 관광지를 둘러봐도 한국만큼 울림이 닿는 곳이 없단다. 출국 날이 가까워질수록 해 보고 싶은 것이 많다. 한 달이 짧게 다가온다. 이것 저것 사 모은 물건에 가방 지퍼가 닫히지 않는다. 두 손을 마주 잡고 마음의 여유를 가져본다.
지난번 귀국때보다 얼굴색이 밝아졌다. 마음을 누르는 솥뚜껑 같은 짐짝을 벗어 다행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허공으로 두 손을 휘젓는 날이 많았던 모양이다. 멀리 타국에서 혼자 떨어져 지내면서 마음이 멍들었다. 동서양의 만남에 부부 갈등이 깊다. 처제 손을 맞잡는다. 가볍게 어깨가 흔들리고 흐느낌이 전해진다. 두 팔을 벌려 낙엽이 내려앉듯 등을 토닥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