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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 9333 ♧ 이름: 김영배 ( 남 ) ♧ 2012/6/30(토) 17:12 (MSIE9.0,WindowsNT6.1,Trident/5.0) 59.187.206.151 1366x768 ♧ 조회: 434 | |
추억의 순간들(2) 내소속인 부대가 파병부대로 결정되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66년 그 당시...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그러나 임진왜란 때도.병자호란 때도 우리나라엔 백성들이 살았고.그 당시 백성들은 적군과 맞해 싸웠다. 왜놈들과...뙤놈들의 칼 아래 죽어가면서도 부녀자들 까지도 싸웠다는 사실을... 그러나 60년대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 허덕이던 그 때에, 월남에 "못가겠다"하고 버티던 나를 찾아오신 둘째 형님이 나에게 하시던 말씀, "총칼을 들고 싸워야만이 전쟁이 아니다.그보다 더 심한게 배고픔을 이기는거야. 경제도 전쟁이다.부모님 계시고 형된 입장에 동생을 전쟁터로 보내야 하는게 어찌 형제간의 道理겠니...우리가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는게... 每歲月 이런 가난을 後代에게 넘겨 줄 수는 없는거다.또 말해서 경제도 전쟁이다." 형님의 말씀에"월남에 안간다"는 결사의 마음을 접고 나라의 부름에 응 하기로 했다. 형님은 나에갠 늘 살아있는 바이블이다.형님 이지만 참 존경스럽다. 그후, 살아 돌아와야 한다는 목적이 팽배해진 나는 5개월이 넘는 교육을 열심히 받았다."훈련 받을 때의 땀 한방울이 전쟁시 피 한방을임을 명심하고.." 중앙청에서 환송 행사와 종로통 시가행진을 마친뒤, 여의도에서 가족들과 마지막 면회가 실시됐다. 내 둘째 형님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못난동생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더 남기기 위해 온 정성을 다 - 했다. 중대원을 거의 다 불러내 같이 찍었고 어제의 시가행진 때의 사진만 합해도 필름만 50 여통을 쓰신 분이다.(근데 그 많은 사진들을 내가 다 분실 했으니...) 이후,월남에는 매년 5만명의 한국군이 주둔해 총 30만명이 넘는데 그들이 월남에 가기전 한국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동생의 모습을 담기위해 봉분서주 하며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어주신분은 내 형님말고 "온리" 그 누구도, 전 - 혀 없다.
좌측이 앨범에도 없는 황음주하사 1소대 향도. 키가큰 부산 사람. 작전 명칭이 기억안나는 작전때,차이산에서 철수 하던중,나와 나란히 내려오는데, 속칭, 죽음의 계곡에 이르러 바위들로 이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둘이선. 쉽사리 뛰여내리기 어려운 큰바위에... 뛰여 내리려는 착지 지점을 가늠하기위해 밑을 내려다 보던 순간 따당.땅!! 소리와 함께 황하사는 높이 3미터에 바위에서 밑으로 쌀가마니 떨어지듯 "철퍼덕!!"쳐 박혔다. 그 때,동기 조종학 전우가 뒷쪽 산위를 보니 석양에 비치는 검은 그림자가 있어서 지체없이 M.1을 겨누자 중대장이 고함을 질렀다. "쏘지마라!!아군일 수도 있다.!!" 입대전에 주먹깨나 썼고 통신병겸,중대장 경호원였던 종학이는 같은 사이클로 들려 오는"3중대,와지선으로 전원 철수 완료"란 무전기 소리를 들었고 상황판단이 중대장 보다 빠른 사람이다.중대장의 제지 명령도 끝나기전에 발사. 황하사를 저격했던 VC는 바위 위에서 직선으로..떨어지고... (그 때, 그 vc를 사살하고 몇정의 화기를 노획한 공로로 종학이에게 충무무공 훈장이 나왔었다.) 황하사 뒷통수로 들어간 두발의 총알은 두발이 다 이마로 뚫고 나왔고.철모가 저 아래 바위 아래로 한참을 굴러가던 소리...(지금도 그 소리가 들리는듯 하다.) 그 때,황하사와 나란히 있던 나를... VC가 겨눴더라면,나는 지금 동작동 땅속에 있을 것이다.황음주 26묘역 803번에 있음. 좌측 두번째가 47년생,내동생 춘배.66년 4월8일에 지원 입대.논산 훈련소를 마치고 부관학교를 1등으로 졸업,육본에서 근무했다.가족들이랑 나를 면회와서.같이 찰칵- 동생은 제대후, 70년 초,사고로 타계했다.채명신장군 말씀대로. 전쟁터에 있는 사람만 죽는게 아니라"는 말씀이 증명됐다. 세번째가 김정관 하사.2중대 태권도 교관이기도 하다. 태권도 교관도 총알을 더킹으로 피하지 못하고 작전중 한방에 즉사. 26묘역 1114번에 있다. 위에 네명중 현재 나만 살아있다. 뒷쪽에 보이는 천막이.여의도 에서의 당시 우리의 숙소였었다.
우리 4형제.좌측이 큰형님(병인생.채장군님과 동갑 10년전 타계) 두번째가 나. 세번째가 동생.맨 우측이 셋째 형님.57년입대 군번 1022..... 당시 둘째 형님은 나를 여러 근사한 포즈를 잡게하고 사진을 찍었다. "동생을 기회가어쩌면 마지막 일 수도 있으니까."형님은 차고 있던 세이코 시계를 끌러주셨고 선 글라스도 나에게 줬다.나는 그달에 탔던 봉급과 전출비 등을 어머님께 드렸을때, 우리나라 돈이 필요없는 나와. 나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식구들이 얼싸 앉고 울었다. 형님은 나를 폼 잡게 하고는 위의 모습을 몇번이고 눈물을 글썽이며 찍었다. "청파동 큰집 넷째가 전쟁터에 간다"고 친척들이 마지막?으로 면회를 오셨었다. (내가 살아서 귀국해 보니 친척들 집마다 거실에..위에 내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마다 뒷면에 형님이 적어 놓으신 당시의 날짜. 면회가 끝나고 약 2일간 군장을 다시 꾸렸다.그리고 우리는 영등포 역에서"다시는 고국에 못 돌아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부산행 기차를탔다. 최현득: 3부두까지 들어가는 월남행 기차가 있었고 바다엔 거대한 군수송선 3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8전투단과 함께 십자성 본대도 같이 간걸로 기억이 됩니다 46년전의 시간여행을 떠나는것 같습니다 대단한 형제들의 가족사랑이 알알이 베여 있습니다.정성들여 보관한 귀한 자료를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07/01-07:25]- 참전인: 위의 최전우님이 올린 댓글이 워낙 쌈박하여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올리신 글이나 사진을 보고있는 분들도 최전우님과 같은 생각으로 댓글을 준비하고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이 땅에 살다가신 우리 조상들도 지금 우리가 사는 것과 하나 다름없이 살다가셨습니다. 아내와 자식에 대한 걱정, 병든 아비와 떠나는 형제 걱정으로 머리를 싸매고 한 세상을 살다 간 것입니다. 한치 앞을 모르는 우리 인생사라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다 아는 방식대로 살다 갑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입니다. 헌데 우리는 인생에 별다른 무엇이 있는 줄 알고 허둥대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07/01-08:47]- 황진순: 오랫만에 집의 컴에 앉아 선배님 글과 그림보니 눈물이 나오네요..7차 32제대 기갑 1중대 동기 4명중 부인호일병은 안케전투시 행방불명,탄약고폭발로 고국으로 후송온 이덕조일병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2년전에사망, 남은2명 포항의정복암전우와 저도 고엽제로 고생하고 있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군요..그시절 생각하며잘 보았습니다.먼저가신 선후배 전우님 명복을비오며... -[07/01-08:51]- 박재영 : 그 하나 하나 순간들이 이제는 모두" 추억의순간 "들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시절을 다시 생각하며 선배 전우님의글 읽고 또 읽었습니다 -[07/01-09:15]- 안흥종: 김영배 고참전우님의 글을 읽으면서 전장에서 생사의 차이는 백짓장 차이 갔습니다. 건강하게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만족해야할 것입니다. -[07/01-09:44]- 참전인: 오래 전에 읽은 윈스턴 처칠의 자서전에 이런 글이 있었던 걸 기억합니다. 시가전을 하면서 오른쪽을 수색해 나가던 병사는 얼마를 못 가 적탄에 전사하고, 왼쪽길로 가던 병사는 시가전 중 죽을 일 없이 무공까지 세우고 오래오래 명(命)대로 살아 마침내 침대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들 두 병사가 자의적으로 오른쪽 왼쪽을 택하여 진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전한 윗사람의 명(命)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왼쪽길의 병사는 늙어서 오른쪽 길 병사의 묘를 찾아갔을 겁니다. 묘비 앞에 들고간 꽃을 놓고 말했겠지요. <자네 지금 누워 있는 자리가 원래는 내가 누워있을 자리였는지 모르네. 그동안 잘 있었나?>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겠지요. -[07/01-09:52]- 김영배: 최현득 전우님! 이제와서 후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 재작년 늦게서야 미국에서 오랜 실험끝에 인정한 4개질병중에 하나인 심장질환으로 수술한 저는, 지금 고전중입니다.담당의사 말로는, "수술은 했지만 다 - 낫지는 않는다.항상 조심하고 약은 계속 드셔야.." 실질적으로 수술후는 경과가 좋지만,통증으로 고생을 덜 - 하는 거지.95% 낫는게 아니라는. 저는 지난날에 어떡하던 월남엘 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심장병외에 고엽제와 관계없는 전우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참 부럽습니다. -[07/01-12:57]- 김영배: 참전인님! 항상 좋은 댓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26묘역 722번에 있는 이만생 전우도 내 옆에서 눈 위부터 머리가 날아가 즉사. 말씀대로 저는 지금도 26묘역에 가면, (김영배 왔습니다.원래는 이 자리에 내가 누워있을 자리 였는지도 모르는데,vc가 나란히 있던 전우를.겨눠서... 전우가 날 살린 셈이지.고맙고 미안하고..그때,vc가 날 겨눴더러면.전우와 내가 위치가 바뀌였을게요.) 묘비를 쓰다듬으며 중얼중얼 거립니다. 낼은 오후 시간맞춰 보훈병원에 가고.모레는 국군묘지에 갑니다. -[07/01-13:16]- 김영배: 황진순. 박재영.안흥종 전우님!댓글 감사합니다. 저는 6.25 사변과 1.4 후퇴때 피란 다녔던 그 때를 대부분 기억을 합니다.월남서 작전시 예측할 수 없는 장소에서 습격을 받아서 상황이 벌어지거나 계곡 건너에 vc가 빤히 보이는데 갈수없는 지형일 때,지원받은 아군포가 머리위로 지나가자 무섭게 바로 코앞에서 포가 터지거나 Vc가 쏜 박격포에 포연과 화약냄새 하늘로 올라갔다가 쏱아지는 흙먼지...상황이 끝났을 때,비참한 광경...아군이던 적군이던 말짱하게 죽은 사람 없고... 중상을 입은 전우들을 보고 달려가 응급처치 해주며 불쌍해서 애처롭게 울기도 하고.( 뭐 울 사이도 없이 급해서.) 살아온게 다행이라곤 하지만 죽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은 다행이 아니잖습니까!전사자와 부상자를 실은 헬기가 타타타!!소리내며 정글위로 사라질 때의 기막힌 심정들이...살아서 본대에 돌아 왔을 때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면 다들...웁니다. -[07/01-13:52]- 백동기: 전우님의 글을 보면서 어려운 시대때를 회상케 되는데 그땐 종합병원에서도 환자 식사가 따로 없었던 때라 입원을 하면 병수발 하는 사람이 함께 병원에 가 공동취사장 같은 곳에서 밥을 지어 환자에게 멱엿던 때라 당시 우리나라 실정 역시 요즘 아프리카 보다 못하였던 상황이 아니였는가 봅니다.그러다 보니 베트남전에 파병을 시켰고 이를 요즘 50대들 까지도 이해를 못하는것 같습니다. -[07/01-18:41]- 백동기: 조금전에도 동작동 현충원을 가 산책을 하고 왔는데 주 산책 코스는 정문 사무실 뒷쪽 산으로 올라 숫놈 은행고목 밑으로 계속가는 코스로 가다보면 박대통령 산소앞 산중간 도로 따라 유골발굴단 입구로 하여 정문으로 나옵니다.김영배 전우님 만나 점심이나 같이 합시다.추어탕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하는집 알고 있는데 안내할께요. -[07/01-19:01]- 김영배: 백동기 전우님 말씀대로 그 당시는 외국에 나가서 일하는 우리나라 인부들의 품삯이 젤 하위 였다고 했습니다.사실 아프리카人들보다 못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천대도 받았다는데...우리의 인력이 독일 광부와 간호사 부터 시작해 월남의 건설 그리고 괌도 진출과 사우디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대우가 좋아 진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월남에서 현대와 한진 같은 회사는 우리 참전병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 그일이 계기가 되어 중동 진출도 하고 돈도 많이 벌었는데, 지금쯤,두 회사가 월참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사은을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저역시 현충원 사무실 뒷쪽으로 올라가면 우측으로 가면 현충원 근무자 가족 아파트 가는 길이고 좌측으로 가면, 박통 묘소지나 육탄 10용사 기념탑 아래로 내려 옵니다. 반대로 가는 경우도 있구요. 추어탕요?! 좋아 합니다.백전우님이 本글을 올리실 때,제가 댓글로 약속 시간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 드리지만 제가 대접을 하겠습니다. -[07/01-23:32]- 최덕종: 어제 고향 같다가 오는길에 안흥찐빵으로 유명한 안흥에 30포 1진으로 같이 참전했던 윤용식전우가 있어 같이 점심 식사하고 왔습니다. 윤전우는 30포 소속이면서 28연대 수색중대에 관측병으로 파견 나가 있었는데 요즈음 심장병으로 두번이나 수술을 하였는데 건강이 아주 안좋아 보였습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차다면서 얼굴도 많이 야위여서 안타까웠습니다. 김영배님도 건강 신경쓰시기 바랍니다. -[07/02-09:24]- 김영배: 갑장 최덕종 전우님! 저는 보통 걸음으로 평지는 오전내내.그리고 오후에..계속 걸어도 괜찮은데 10도 이상 언덕에는.... .조금만 가도 숨이 찹니다.그래서 등산은 못 합니다.원래는 두달에 한번씩 외래 진료를 받고 처방약을 받아 오지만,그 안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진료를 받으러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다른병도 그런 종목이 있지만...)심장병은 90~95% 이상 낫는게 아니랍니다.그러니까 죽는 그날까지 조심하면서 약을 먹어야 된다는...오늘도 병원엘 갑니다. -[07/02-09:56]- 심상수: 오랜 가뭄이 이재 장마비에 밀려나고 이재 비피해가 다시 메스컴 뉴스로 들려옵니다 장마비에 피해는 없으신지요 아파트에사는 저는 피해는 없습니다.월남을 떠날때 어머님께 좋은부대로 전출간다고 속이고 월남땅에 도착하여 첫편지를 고국의 어머님전에 올렸을때 어머님께서는 새벽기도를 매일 오리가 넘는 산 고개길을 넘어 교회를 찾으신다는 소식에 받아든편지를 눈물로 잃었든 기억이 선배님 형님에대한 말씀과 마지막이 될지몰라 하셨든 형제에의예 표료 차고있던 시계와 선글라스를 선배님께 주셨다는 내용들에 제마음을 뭉클합니다. -[07/06-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