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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일요일 준수의 기원과 역사
# 증언 주이트
“왜 그리스도인들이 첫날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가는 아직도 문제로 남아 있다. …모든 학자들은 한 가지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즉 첫날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부활의 기념일로 축하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일요일을 지키는 것은 부활사건에다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발생과정을 정확히 설명하기란 용이하지 않다. 옛부터 인정되고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일요일 예배와 같은 관습이 그 정확한 기원에 대해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83
일요일을 주일(主日)로 옹호하는 대표적인 현대 신학자인 주이트(Jewett)자신이, 자신이 주일(主日)로 옹호하고 있는 일요일이 왜, 어떻게, 그리고 언제 주일(主日)이 되고 예배일이 되었는지 근거와 기원을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정직한 증언이다. 그러나 참으로 그의 말대로 그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모르면서 지키고, 모르면서 옹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거의 온 세상 사람이 일을 쉬거나 예배하는 일요일이 까닭 없이 그렇게 되었을 리가 없다. 다음에 그 이유와 과정을 성경과 역사에서 살펴서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부당한 부활의 기념
주이트가 제시한 궁색한 이유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요일 예배의 근거라고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것은 성경적으로 인정될 수 없는 논증이다. 그 이유를 복습을 겸하여 아래와 같이 다시 요약해 본다.84
가. 신약 성경에는 매주[일요일] 혹은 매년[부활절] 단위로 부활을 기념하라는 말씀이 일체 없다. 새로운 제도인 성만찬, 침례, 세족예식에 관하여 명백한 명령이 있는 것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나. 신약 성경에는 일요일을 “부활의 날”이라고 부른 적이 결코 없고, 언제나 “안식후 첫날”혹은 “매주일 첫날”(고전 16:2)로 불렀다. 그리스도교 문서에서 일요일이 “부활의 날”로 명명(命名)된 것은 3세기 뒤의 일로서 매주 일요일을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정착시키는 일이 부자연스러웠음을 알려준다.85
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지상 봉사를 끝낸 사건이 아니었다. 돌아가시기 직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10)는 선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지상 봉사의 끝을 알리셨다. 또한 하늘에서의 봉사 시작은 오순절로서 부활하신 당일이 아니었다. 성경은 부활을 날짜로 기념해야 할 아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다.
라. 부활하신 날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나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하여 모두 와서 함께 예배하자”는 말씀이 아니었고,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 28:10)는 활동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일체 예배나 거룩함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셨다.
마. 부활을 성만찬과 연관하여 일요일의 의의를 부여하려고 하는데, 일요일에 성만찬을 거행할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이유도 없고, 시작부터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마 26:20~29; 고전 11:18~23). 성만찬은 부활의 기념이 아니라,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고전 11:26)이다.
바. 부활절―일요일의 발단이 된 유월절도 본래는 부활하신 일요일에 기념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1월[Nisan] 14일이 해당되는 어느 날이나 준수 했다. 그것은 본래 그리스도의 수난(受難)의 기념이었지 부활을 기념한 것이 아니었다.86
사. 일요일 준수에 관한 초기의 기록들인 서기 135년경의 바나바 서신이나 서기 150년경의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의 기록에 보면, 일요일이 부활의 기념이기보다는, “여덟째 날”로 “또 다른 세상의 시작”87을 대표한 창조의 첫날88임에 의의를 두었음을 보게 된다.
아. 십자가에 죽으심은 성만찬으로 기념하듯(고전 11:26), 부활은 침례로 기념하도록 성경에 명시되었다(벧전 3:21; 롬 6:5).
이상의 몇 이유들을 보더라도 일요일 준수가 부활에 기초했다는 논증은 성경적인 것도 아니고 역사적인 것도 아니며 논리적인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에 그 근거와 기초가 있는 것인가? 주지(周知)된 대로 성경에는 그 근거나 기원이 없으므로 성경 밖의 역사에서그것들을 찾을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 그 기원과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일요일 예배 외에도 성탄절로 일컬어지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이 성경에서 기원(起原)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총회(서기 49년경) 당시
사도 바울의 이방선교로 야기된 교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소집된 제 1차 그리스도교 세계 총회격인 예루살렘 회의의 결의사항을 살펴보자.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장애가 된 할례 등 의식들은 폐지하기로 결의했어도 안식일 준수 여부는 처음부터 문제로도 거론되지 않았다(행 15장). 같은 성전이나 회당에서 같은 안식일에 같은 성경[구약]을 사용하여 예배한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 사이의 차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여부와 침례, 성만찬 등 의식 외에는 두드러진 것이 없었다.
안식일은 이방인과 유대인,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구별하는 조건이 결코 아니었다. 총회 의장이었고 초대교회 지도자인 야고보와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은 훨씬 후인 서기 58년경, 사도 바울에게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 중에 “수만명이 … 율법에 열심있는자라”(행 21:20)고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본부였던 예루살렘 교회가 안식일 대신 일요일 준수에 앞장섰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89
예루살렘 멸망(서기 70년) 이후
구약(단 9:26, 27)과 복음서(마 24:15, 16)에 다같이 예언된 예루살렘의 대파멸이 참으로 안식일을 폐지하고 일요일을 준수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가? 예루살렘에서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마 24:20)는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요단 동편 펠라(Pella) 지방에 정착했다는 사실이 4세기 역사가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 315~403)에 의하여 확인되고 있다. 그들은 “본래의 예루살렘 신앙 공동체의 직계 후손”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예루살렘 멸망 이후 오랫동안 안식일을 비롯하여 할례까지 준수했음을 보아, 예루살렘 멸망이 안식일 준수에 특별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음을 확인 시켜준다.90 예루살렘 멸망 후에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Vespasian · 69~79)은 산헤드린 의회와 대제사장 제도는 폐지하고 성전에서의 예배는 금했으나,91 안식일 준수 자체를 법으로 금하지는 않았다.
바르―코케바 반란(A. D. 132~135) 이후
예루살렘 멸망 이후로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회당에 참석하여 안식일에 예배한 사실과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회당의 기도문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을 저주하는 문구까지 첨가한 실례가 있다.92 그러나 서기 132년 로마 황제 하드리안(Hadrian · A. D. 117~138)이 예루살렘에 로마의 주신인 쥬피터(Jupiter)의 신전을 건립하려는 계획에 항거하여, 자신을 메시야로 자처하는 지도자 바르―코케바(Simeon Bar―Kokeba)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대반란은 안식일 역사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일개 군단의 전멸 등 로마군의 막심한 손실과 함께 유대인만도 58만 명의 인명 피해를 내면서93 135년까지 3년간 계속된 이 반란으로 예루살렘은 다시 한번 폐허가 되었고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축출되어 출입조차 금해졌다. 유대인들에 대한 로마 사람들의 증오는 극에 달하였으며, 유대교를 불법화하고 그들의 종교의식 자체를 사형을 벌칙으로94 엄금하였음을 유대인의 고전[탈무드]에서 찾을 수 있다.
“로마 정부는 칙령을 발하여 그들이 토라[모세 오경 등 구약 성경]를 연구하지 못하게 하였고, 자식들에게 할례를 베풀지 못하게 했고, 안식일을 모독하도록 했다.95
로마 정부는 서기 70년의 반란 이후 유대인들에게는 특별 과세(課稅)를 부과했고,96 반유대문서들이 쏟아져 나왔으며,97 특별히 유대인의 안식일 준수와 할례를 미신 행위로 간주하고 혹평했다.98 이런 상황에서 지금까지 유대교의 한 분파로 알려져 온 초기의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로 오인(誤認)되어, 무고한 증오와 핍박의 대상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바르 코케바 반란사건으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된 이러한 여건에서 그리스도교가 취할 수 있었던 자구책(自救策)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다르다는 것을 변증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사명을 의식하고 나선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교 지식인들이 2세기에 대량으로 출현한 그리스도교 변증교부(辨証敎父)들인 것이다. 그들은 로마제국에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변증서를 써서 상신하는 한편,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대인의 신앙과 문화를 경멸하고, 안식일과 할례를 정죄하는 활발한 활동과 변론을 계속했다.99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미 예루살렘 총회에서 사도들이 폐지한 할례는 물론,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의심없이 준수해 온 안식일까지도 유대교의 관습으로 돌려 거기서 벗어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회당 참석을 금지했고, 그들은 모함하고 당국에 고발하는 등 적대 행위가 증가되었다.100
로마교회와 일요일의 기원
유대인에 대한 로마 제국의 증오가 더욱 피부로 느껴진 곳은 역시 수도인 로마였다. 동시에 이방인 신자가 다수였던 로마의 그리스도교회는101 핍박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하여는 유대교에서 철저히 분리되어야 할 강박감(强迫感)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괄목할 만한 두 사람이 비슷한 때 로마교회에 등장했다. 하나는 순교자로 알려진 교부 저스틴(Justin Martyr · c. 100~165)이요, 또 다른 하나는 영지주의(靈知主義) 이단자로 낙인찍힌 마르시온(Marcion · d. 160)이었다. 그는 자신의 부도덕한 과거 때문에 구약과 구약의 하나님, 유대인과 안식일을 증오하였다.
유대인을 미워하던 당시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심각한 영향을 미쳤던 그의 이단적인 가르침 가운데는 “안식일에 관한 하나님의 작정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이 날에 금식”102하라는 강조도 있었다. 로마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출교시키기는 했지만, 그의 가르침에 일치하게, 본래 즐겁게 잔치하던 안식일을 슬프게 금식하는 날로 정하여 역대의 감독[교황]들은 이를 법으로 강행했다.103 아무리 엄격한 유대 종파들도 안식일에는 절대 금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좋은 음식을 넉넉히 장만하여 잔치를 즐겼었다.104
초기의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안식일을 즐겁게 잔치하는 날로 보냈으며, 실제로 안식일에 금식을 강요한 로마 교회의 처사에 대해 동방의 교회들과 암브로스(Ambrose · d. 397) 감독, 당시의 밀라노(Milan) 교회 등 서방의 중요한 교회들도 이를 적극 반대했다.105 안식일을 금식일로 만든 로마 교회는 그 날에 행하던 성만찬이 금식을 깨뜨린다는 명목으로 그것마저 금함과 동시에 종교적인 모임도 제한하기에 이르렀다.106
“잔칫날이요 기쁨의 날이며, 종교적인 축제일이었던 안식일을 금식하는 날이요 슬퍼하는 날이요, 종교적인 아무 집회도 없는 날로 바꾸어버린 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에 대한 숭경심(崇敬心)을 버리도록 강요하기 위해 로마 교회가 취한 구체적인 방편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실천사항은 안식일의 금식이 지난 후에 일요일을 기쁨과 축제의 날로 드높여지게 했다.”107
19세기 루터교의 교회사가인 네안더(Augustus Neander)는, “동방 교회에 서는 안식일에 금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이었다”108고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서방 교회의 여러 교회들 특히 로마 교회와 스페인 교회는 유대인과 유대주의자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안식일을 금식하는 날로 지키도록 이끌어 나갔다.”109 로마교회의 이러한 적극적인 노력으로 안식일은 점점 어두운 그늘 속에 가려지고 일요일은 가광을 받는 축제일로 부각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태양의 날
주이트(Jewett)의 말처럼 2세기의 교부 저스틴(Justin Martyr)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억지로라도 그의 군주인 황제(Antonius Pius)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110 로마제국이 혹성신(惑星神)들 가운데 최고 신으로 높이기 시간한 태양을 위해, “태양의 날”[일요일 · the day of the Sun]이라는 명칭을 그의 변증서에서111 제일 먼저 사용한 그리스도교 저자112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저작에서 안식일을 철저히 부정하고 경멸하는 한편 일요일을 그리스도인의 예배일로 격상(擊賞)시키는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시킨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113 아래에 인용된 일요일 성수론자 주이트(Jewett)의 설명은, 그전까지 이교도의 숭배 대상이었던 태양이 어떻게 그렇게 쉽사리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 중심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Sunday)이란 말을 사용하게 되자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 말이 빛을 상징하는 표현이라는 입장에서 해석하기 시작하였다.…창조 기사를 설명하는 데도 일요일이란 말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일 첫날에 빛을 만들었다는 것과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던 것이다. 찬란한 영광 중에 승천한 후 그리스도는 지금 그의 진리로 우리를 비추고 있고 영원토록 우리의 빛이 되기 위해 재림하실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가 일요일에 재림한다는 전통이 세워지자,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에 서서 기도를 하되 동쪽과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했다.…기원 4세기 이래 일요일이란 명칭은 그리스도교의 용어가 되어 있었다.”114
이러한 주이트의 설명은, “밤의 어두움을 쫓는…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기도들이 드려진다”115는 2세기 말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트(Clement · A. D. 150~215)의 진술로 뒷받침된다. 그리고 “해뜰 때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기도하고…해질 때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도할 것”116을 권면한 3세기 칼다고의 감독 키프리안(Cyprian · d. A. D. 258)의 기록과도 잘 어울린다. 일반 자연신교(自然神敎)에서 태양을 숭상하게된 과정과 흡사한 우상숭배적인 예배 현상이다.
로마 교회와 부활절―일요일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성력(聖歷) 1월[니산 · Nisan] 14일, 곧 유월절(逾越節) · Passover)을 그리스도의 수난(受難) 기념과 무교절의 영적 의미를(고전 5:6~8) 새 언약에 연관시켜 오랫동안 준수해 왔다(고전 11:23~26). 그러나 유대인의 제 1차 반란(A. D. 70)과 제 2차 반란(A. D. 132~135)이후, 유대인에 대한 로마 제국의 증오가 심각해지고 마침내는 유대교가 불법 종교가 되자, 안식일 준수와 함께 이와 같은 유월절 수난기념도 그리스도인을 유대인으로 오해시키는 구실이 되어 여기에서 벗어나려는 심리가 크게 작용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안식일 대신 일요일 준수에 앞장선 것이 로마 교회였듯이, 유월절 수난행사 대신 부활절을 확립시키는 일에도 로마 교회가 앞장을 섰다. 그리하여 2세기 중엽에 이르러 1월 14일 유월절 수난기념일 대신에 유월절 다음에 오는 일요일을 부활절―일요일(Easter―Sunday)로 날짜를 바꾸어 준수하려는 시도가 노골화되자 이를 반대하는 동방의 교회와 큰 충돌을 빚게 되었는데 이것이 이른 바 부활절―일요일 논쟁(Easter―Sunday Controversy)이다.117
부활절―일요일을 반대한 편은 주로 사도 요한이 죽기까지 봉사한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로서 요한의 제자로 순교자가 된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카프(Polycarp · A. D. 155)를118 비롯하여 에베소의 이름난 감독 폴리크라테스(Polycrates · A. D. 130~196) 등이 있었다. 이에 맞선 로마교회의 감독은 식스투스(Sixtus · 116~126)를 시작으로,119 아니케투스(Anicetus · 154~165), 빅토르 I세(Victor I · 189~199)로120 이어졌다.
논쟁은 계속되었으나 유대인에 대한 로마인들의 증오심 때문에 시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 로마 교회는 오랫동안 준수되어 온 안식일과 유월절 수난 기념일 대신 매주 일요일과 매년 부활절―일요일을 그리스도교의 예배일과 명절로 확립시키는 일을 쉽사리 수행 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321년 로마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e)의 주재로 개최된 역사적인 니케아 종교회의(the Council of Nicaea) 칙령(勅令)에 포함된 감독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하여 동방에 있는 교회들도 유대인과 함께 하지 말고, 로마 교회와 같은 날을 부활절로 기념하라고 명령함으로써 오랜 부활절―일요일 논쟁에서 로마 교회가 승리했음을 공인했다.121 이러한 일련의 배경 때문에 부활절을, “로마 교회―부활절”(Roman―Easter)이라고 부르기에 이른 것이다.122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교의 최대 명절이 된 부활절[Easter―Sunday]의 진상은 무엇인가? 영어로는 “이스터”(Easter), 독일어로는 “오스턴”(Ostern)으로 불리는 이 명절은 그 근원을 전혀 성경에 두고 있지 않음을 교부들의 기록과 부활절―일요일 논쟁 역사를 살펴보면 당장에 알 수 있다. 다음은 5세기의 교회사가 소크라테스(Socrates · d. 450)의 증언이다.
“이스터[부활절] 축제가 준수되었다는 지적이 신약 성경이나 사도 교부들의 기록 어디에도 없다.…주님이나 그의 제자들이 이것[부활절]이나 다른 축제를 명하신 적이 없다. 이스터[부활절]도 많은 다른 관습이 그렇게 수립된 것처럼 교회가 [이교]의 옛 용도를 바꾸어 영구하게 한 것으로 돌려진다.”123
고대 앵글로 · 색슨족들이 섬겨온 봄의 여신“오스타라”[Ostara 혹은 Eostre]를 위하여 베풀어졌던 다산(多産)을 비는 봄의 축제(祝祭)가 “이스터”이다. “동쪽(Ost)에서 태어나 땅에 새 생명을 가져오는 봄의 태양”124을 상징하기도한 이 여신은 “부활절 달걀”이나 “부활절 토끼”가 드러내듯 왕성한 생식(生殖)과 다산(多産)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 봄의 여신 “오스타라”[혹은 Eostre]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고대 가나안의 다산(多産)의 여신 아스다롯(Astarte)125과 흡사한 비종교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삿 2:13; 10:6; 삼상 7:3, 4; 왕상 11:5, 33). 가나안의 여신 아스다롯은 고대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사랑과 다산의 여신인 “이슈타”(Ishtar)와 같은 존재임이 밝혀졌다.126 “여하튼 그리스도교의 부활절은 크리스마스의 경우처럼, 고대 이교의 축제를 대신한 것임이 분명한 것으로 여겨진다.”127
로마 교회와 크리스마스
부활절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최대 명절이 된 크리스마스 역시 앞서의 일요일이나 부활절―일요일처럼 태양 숭배와 연관된 이교의 축제일이었음이 이교의 고대 문헌에서 확인된다. 크리스마스의 근원이 된 이교의 절기는 라틴어로, “디에스 나탈리스 솔리스 인비크티”(dies natalis solis invicti)였는데 그 뜻은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생일”이었다.128
“동지(冬至)가 지난 후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고 정복할 수 없는 항성[태양]이 다시 흑암을 이길 때인 ‘새로운 태양’의 생일인 12월 25일을 축하하도록 매우 일반적인 준수가 요청되었다.” 129
다수의 학자들에 의하여 거듭 확인되듯이, 예수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선택한 것은 이교의 행사였던 ‘정복할 수 없는 태양’의 축제가 그 당시 대단히 화려하게 축하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음이 점차적으로 확실해졌다.”130 그리하여 4세기의 달력[Philocalian Calendar · A. D. 354]에는 12월 25일이 아예 “정복할 수 없는 자의 생일”로 명명(命名)되어 있었으며, “로마 가톨릭교회는 [페르샤의 태양신교인]미드라 종교(Mithraism)와 겨룰 목적으로 12월 25일을 택한 것으로 믿는다”131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실제로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축하한 것이 로마 교회였음을 밝히는 달력도 발견되었고,132 로마 가톨릭교회 의식(儀式) 학자에 의해서도 거듭 확인되고 있다.
# 증언 가톨릭
“평화가 이룩된 후 로마 교회는 이교도들이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이교의 축제에서 돌아서도록, 흑암의 정복자인 ‘무적(無敵)의 태양’ 미드라(Mithras)를 영광스럽게 하는 같은 날인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임시적인 생일로 제정하는 것이 편리한 것을 발견했다.”133
로마제국과 태양 숭배
일정한 종교가 없었던 로마 사람들에게 태양은 자연숭배의 대상으로 걸맞았다. 「옥스포드 교회사 사전」에 의하면, 로마에서 공식적인 태양숭배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67년 페르샤의 태양신인 “미드라”(Mithras)가 소개되면서부터였으며, 2세기 말에는 콤모두스(Commodus · A. D. 180~192) 황제에 의하여 황실의 종교가 되기 이르렀다.
그런데 “아버지”(father)로 불리우는 제사장들에 의해 집행되는 태양신교(Sun Cult)의 의식이 그리스도교의 성례전들과 너무도 흡사하여, 당시의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사단이 그리스도교의 성례전을 그들이 모방하도록 미리 알려줬다고 할 정도였다.134
이토록 2세기에 들어서면서, 특별히 황제들과 군인 및 고관들의 사적(私的)인 종교가 된 페르샤의 태양신은 “무적(無敵)의 미드라 태양”(Sol Invictus Mithra)으로 불리우며 로마제국의 국교로 발돋움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적(公的)으로는 엘라가발루스(Elagabalus · 218~222) 황제가 국교의 대상으로 드높인 태양신(Sol Invictus Elagabal)을 장엄한 신전들에서 숭배하고 있었다.135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 로마는 이미 혹성신(惑星神)의 이름을 딴 오늘날의 요일 명칭을 쓰고 있었음이 고대 문서들에 의해 밝혀졌다.136 2세기에 이르러 이 혹성 요일의 명칭은 더욱 확산되었고, 당시는 혹성에 포함되어137 토성일[토요일 · the day of Saturn] 다음인 둘째 날에 배정되었던 “태양의 날” 곧 일요일(the day of the Sun)이 2세기 초엽138 토성일을 제치고 첫 자리로 나오게 된 것은139 태양숭배가 고조되던 시대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교도들은 일요일에 공식적인 태양 숭배의식은 행치 않았지만 목욕을 금하고 휴식하고 잔치하는 날로 보냈음을 2세기의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 · 160~225)의 기록에서 찾게 된다.140
2세기 중엽에는 이미 태양의 날[日曜日]을 첫째날로 하는 오늘과 같은 일[태양], 월[달], 화[화성], 수[수성], 목[목성], 금[금성], 토[토성] 등 혹성요일이 확립되어 있었다.141 그래서 로마의 초기 교부였던 저스틴(Justin Martyr)이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과 다르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하여 서기 155년경 로마 황제[Pius]에게 변증서를 올리면서, 세 번씩이나 “태양의 날”을 거론하면서 이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한데 모여 집회하는 습관에 관한 말을 하여 태양을 숭배하던 황제의 환심을 사려고 한 배경을 알게 된다.142
로마 교회와 일요일 준수와 태양 숭배
이상과 같은 역사적 증거를 통하여 확실하게 된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즉 서기 135년에 끝난 바르―코케바(Bar―Kokeba)의 반란을 게기로 유대교가 하드리안 황제에 의하여 불법 종교가 되고 구약 성경[토라] 연구와 할례와 안식일 준수가 금지되자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구별되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했다. 특히 로마 교회는 이 일에 앞장을 서서,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일을 시도했다.
❍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그 때까지 함께 준수해온 안식일을 로마 사람들이 선호(選好)한 “태양의 날”[일요일]인 첫째 날로 옮기기 위해 동방교회들의 반대를 외면하고 안식일에 금식을 강요하고 성만찬을 금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143
❍ 초기의 그리스도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유월절 수난과 새 언약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켰던 1월[니산] 14일 대신 날짜를 무시한 채, 유월절 이후의 첫 “태양의 날”[일요일]을 부활절―일요일로 제정하고 동방교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를 관철시켰다. 일요일과 함께 부활절[이스터] 자체가 태양과 관련된 이교도의 축제였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 당시에 이미 민속신앙이 된 “무적의 태양”의 생일인 12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일컫는 크리스마스와 일치시켜 태양신이 누리고 있던 영광을 그리스도에게 전환시키는 계기를 삼았다.
이토록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일요일 준수가 이교의 태양숭배와는 전적으로 무관(無關)하다는 아래와 같은 주이트(Jewett)의 변명은 어떤 면에서도 진실하지 않다.
# 증언 주이트
“태양숭배는 먼 태고로부터 있었던 일이며 그리스도교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유대인의 일주일 중 첫날이 태양숭배하는 이교와 어떤 특별한 관계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 일요일에 예배드릴 때 그들은 그날을 ‘일요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144
# 변증
실제로 그리스도교 신앙이 당시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하면서, 태양을 향해 기도하는 등 그리스도인의 각종 종교 의식이 태양숭배와 직접 관련되자, 그리스도인들은 태양숭배자(Sun―worshiper)라는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다. 2세기말의 서방 라틴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에 대해 변명을 해야 했으며,145 5세기 초의 로마 교황 레오 I세(Leo I · d. 461)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태양을 숭배하고 있는 것에 공격을 가하기에 이르렀다.146 또한 6세기 초의 알렉산드리아 교부였던 유세비우스(Eusebius · c. 500)도 이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일찍이 하나님에 의하여 엄격히 금지된 태양숭배는(신 4:19; 17:3) 인류의 역사만큼 오랜 우상숭배이다. 고대 셈족들은 “솨마슈”(Shamash)라는 신으로, 이집트 사람은 “라”(Ra), 또는 “아톤”(Aton)신으로, 페르샤 사람은 “미드라”(Mithras)로, 헬라와 로마 사람은 “아폴로”(Apollo) 신의 이름으로 섬겼다. 일요일, 크리스마스 등 그리스도교의 축일들도 태양숭배와 연관된 관습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진은 아톤신을 경배하는 이집트의 아켄―아톤(Akh―en―Aton) 왕과 왕후.
# 증언 교회사
“나는 태양을 숭배하고 그것을 향해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 해가 뜰 때 그들은 기도하면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한다. 이런 일을 태양숭배자나 이교도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을 떠나서 이교도들과 어울려 이 일을 한다.”147
콘스탄틴 황제의 일요일 휴업령(A. D. 321)
앞에서 언급한대로 2세기에 들어서면서 로마인들의 태양숭배열이 높아지고, 혹성요일의 둘째 자리에 있던 “태양의 날”[일요일 · dies Solis]이 “토성의 날”[토요일 · dies Saturni]을 제치고 첫째 날이 되는 등148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었다. 바로 같은 때에 유대인의 제 2차 반란으로 로마 제국에 의하여 불법종교가 된 유대교와 구별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던 그리스도교, 특히 로마 교회가 앞장 선 서방 교회는 동방 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로마의 태양숭배 분위기를 수용(受容)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음을 확인했다.
때마침 동서로 나뉘었던 로마 제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콘스탄틴(Constantine · d. 337) 대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내려 종교자유를 허용하는 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잇달아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온갖 특전을 제공하는 일련의 정치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의 더할 나위 없는 환심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황제는 321년 3월 7일 다음과 같은 역사적인 칙령을 내렸다.
“존경스러운 이 태양의 날에 모든 판사들과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장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휴업하도록 하라. 그러나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하늘이 마련해 준 혜택을 상실하지 않도록 씨를 뿌리거나 포도나무를 재배함에 있어 그토록 적합한 때가 없는 수가 있으므로 적기(適期)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이 날에 완전히 자유롭게 농경(農耕)에 종사하도록 하라.”149
콘스탄틴 황제가 휴업하도록 명령한 날의 대상인 “존경스러운 태양”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황제 자신을 포함한 로마인들이 섬겨온 “무적(無敵)의 태양” 곧 “미드라”(Mithras) 태양신이었다.150 국내에서 발간된 「기독교 대백과 사전」에도 이 사실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 증언 대백과
“그리스도교 시대 초기에 로마 제국에서, 특히 로마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수많은 동방 종교들 가운데 하나가 페르샤로부터 수입된 미드라 종교[Mithraism]였다. 미드라는 태양신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미드라 종교는 일요일을 성일로 간주했다. 이러한 이교적인 종교의 추종자들이 이 날을 숭배한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일요일을 제국의 휴일로 선정하는 데 공헌하였다.151
「대영 백과사전」에도 일요일이 세계적인 휴일이 된데 대해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 증언 대백과
“유세비우스[Eusebius · 260~340]에 의하면 일요일을 합당하게 준수하도록 하는 법을 최초로 제정한 사람은 콘스탄틴인데, 그는 전 로마 제국이 일요일을 규칙적으로 축하하도록 명령하였다.”152
“서기 321년 그 [콘스탄틴]가 일요일을 일반적인 공휴일로 선포했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과 이교도를 함께 마음에 두었다.”153 “태양의 날은 이교도 추종자들에 의하여 숭배를 받았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도 영광을 받았으므로, 이로써 이교와 그리스도교의 상충하는 관계를 연합시킨 것이 황제의 정책이었다.”154
“[콘스탄틴] 황제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그리스도께 예배하고 이교도들은 그들의 태양신을 섬기는데, 두 조교의 예배의 대상이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었다.”155
콘스탄틴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피박하는 대신 종교 자유를 베푸는 등(313년) 관용책을 써서 그리스도교를 통일된 제국을 유지하려는 그의 정책에 이용했다. 321년 3월 7일에 선포한 최초의 일요일 휴업법은 그리스도교를 이교와 화합시키려는 그의 성공적인 정책의 본보기이다. 사진 (상)은 이교도였던 그가 공중에 나타난 십자가를 힘입어 그의 적수였던 막센티우스(Maxentius)를 물리쳤다는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 전투 광경이며, 타원의 사진은 로마에 있는 그의 거대한 조각상의 얼굴 부분이다. 사진 (하)는 콘스탄틴 황제가 예수께서 장사된 무덤으로 생각되는 곳에 짓도록 한(335년) 예루살렘의 성 분묘교회이다.
콘스탄틴의 정책과 일요일 휴업령의 진상
콘스탄틴의 개종(改宗)은 명목적(名目的)이었으며, 그는 평생 태양숭배자였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에도 고대 희랍과 로마의 태양신인 아폴로(Apollo)를 높이기 위해 주화(鑄貨)를 만들어냈으며 죽기까지 이교[태양신]의 대제사장의 칭호[Pontifex Maximus]를 썼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이교를 동시에 유지하려는 정책을 썼다.156 이러한 콘스탄틴 황제가 휴업하도록 명령한 날은 부활을 기념하는 그런 성일(聖日 · holy day)이 아니라, 운동경기나 오락을 즐기는 세속적인 휴일(休日 · holiday)에 불과했다.
태양의 이름으로 휴식을 명령한 이교적인 정책을 교호 l지도자들이 오히려 추진하고 환영한 까닭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불법 종교가 된 유대교와 구별되기 위하여, 로마 제국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저의(底意)였다. 그러나 313년 밀라노 칙령에 따라 신앙의 자유가 허락되고, 명목적인 개종을 거친 콘스탄틴 황제는 성직자들에게 병역과 납세의 의무를 면제하고 사법상의 특혜, 하사금 지급 등 엄청난 특권을 부여하고, 교회의 사유재산과 유증(遺贈)까지도 허락하는 등 정치적 배려가 깊어지자 그리스도교는 금새 현실에 눈이 어두워진 퇴폐적인 정치 종교로 탈바꿈하고 말았다.157 성직 매매가 시작되고, 성직 쟁탈을 위한 정치적 수단이 동원되어 366년 로마교회 감독 다마수스(Damasus)를 선출할 때는 폭력배들이 동원되었고, 415년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성직에 나섰던 히파티아(Hypatia)가 폭력배에게 맞아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158
일요일의 주일(主日)로 옹호하는 주이트(Jewett)도, “콘스탄틴이 일요일을 휴일로 지정한 것은 여기[일요일]에 대한 이교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을 기술적으로 결합”시킨 것임을 인정하고, “그의 칙령은 주일(主日) 성수의 발달과정에서만 획기적인 사건이 되지 않고, 그의 정치적 영특성을 기념하는 기념비도 될 수 있”159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것이 참으로 주일(主日) 성수(聖守)의 발달과정인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는 하나님의 명령은 외면하고, 속(俗)된 휴일로 지정한 콘스탄틴의 명령에 따라 일요일의 성수(聖守)하는 것이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양심일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 제 1차 세계 총회인 니케아 종교회의(A. D. 325)도 콘스탄틴 황제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화려하게 열렸고 황제 자신이 임석하여 개회사를 하기에 이르렀다.160 그리고 동서교회가 부활절―일요일의 날짜 문제로 이견을 보이자 황제는 즉시 로마 교회를 편들어, 모든 감독들로 하여금,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고대 교회”의 관습을 따르도록 명령하는 등161 세속의 황제가 교회 우에 군림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결국 200년 이상 계속된 로마 제국의 핍박을 “죽도록 충성”(계 2:10)함으로써 이긴 그리스도의 교회는, 종교의 자유와 온갖 호의를 베풀면서 타협을 시도한 콘스탄틴 황제의 정책에 쉽사리 넘어간 것이다. 이것이 일요일이 안식일을 대신하게 된 역사적 반증이다.
“콘스탄틴은 이 때에 옛 신앙과 새 신앙의 예배자들을 한 종교로 연합시키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 그의 모든 법령들과 고안들은 두 종교의 혼합을 촉진시키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합법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순화된 이교와 온건한 그리스도교를 함께 녹이려 했다.…‘태양의 날’이 일반적인 휴일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명령은 그의 입장을 대표한 것이다.…그리스도교와 이교를 뒤섞고 혼합한 그의 일을 가장 쉽게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일요일 휴업령인 것이다”162
오늘날처럼 거의 온 세상이 일요일에 쉬게 된 것은 이상과 같은 역사적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휴식하며 예배한 경위에 대하여 자신이 일요일 성수론자인 주이트(Jewett)는, “일요일에 일을 하지 말고 쉴 것을 제일 처음으로 분명히 언급한 저자는 [2세기 말의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 · 서기 200년경)이”라고 밝힌 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 증언 주이트
“이야기는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콘스탄틴의 칙령과 함께 시작된다. 그 칙령이 공포되자 많은 사람들은 주일날[일요일]의 꽤 많은 시간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을 알았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게으름이란 과중한 노동과 같이 정신적 수양에 해로울 수 있는 것이다.
북아프리카 칼타고 출신의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신자들에게 일하지 말라고 가르친 최초의 교부이다.
성경에는 일요일에 일하지 말고 예배하라는 말씀이 일체 없으므로 그 근거를 인간의 전통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의식적인 행위만 증가시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대해 구약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엄격한 금령들을 빙자하여 쉬라는 요구에다 종교적 열성과 의무를 지우려 하였다. 그치고 일요일의 휴식에 대한 이 법은 시민법의 지지까지 호소하였다.163
그리스도교회의 공식적인 일요일 준수
주이트의 솔직한 증언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공식적으로 쉬게 된 것은 전적으로 콘스탄틴의 일요일 휴업령 때문이며, 쉬는 시간적 여유를 이용하여 그 때 그 때 이런 저런 종교 행사를 덧붙여 온 것이 오늘날의 일요일 예배의식인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부채질한 사람이 바로 가이사랴의 감독으로 콘스탄틴 황제와도 가깝게 지낸 교회사의 비조(鼻祖) 유세비우스(Eusevius of Caesarea · c. 260~340)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와전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유세비우스는 안식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음을 다음의 인용에서 보게 된다.
“우리[교회]는 안식일에 관한 모든 의무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다 주의 날[主日]로 옮겼는데, 이는 이 날이 유대인의 안식일보다 더 권위가 있고, 높이 존경을 받고, 순서에서도 첫 번이고 더 영예롭기 때문이다.”164
이 토록 참람되고 모독적인 뒷받침들을 통하여 촉진되어 온 교회 내에서의 일요일 준수가 마침내 364년경에 열린 라오디게아 종교회의(Council of Laodicea)에서 공식적으로 인준되기에 이른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화하여 안식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하며, 그날에 반드시 일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날[일요일]을 특별히 존중히 여겨, 그리스도인으로서 가능하면 이 날에 일하지 말라. 그런데도 만일 그들이 유대화한다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받을 것이다.”165
이상과 같은 사실은 1910년 1월 25일 교황 피우스 10세(Pius X)로부터 “사도적인 축복”(Apostolic Blessing)을 받은 「회심자를 위한 가톨릭 교리 문답서」에서 아래와 같이 확인되고 있다.
문 : 어느 날이 안식일인가?
답 : 토요일이 안식일이다.
문 : 우리는 왜 토요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는가?
답 : 가톨릭교회가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에서 그 존엄성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옮겼기 때문이다.166
진상이 분명해졌다. 로마 황제[콘스탄틴]는 제국 내의 이교와 그리스도교를 정치적으로 연합시키는 일을 위해 일요일을 활용하였고, 로마 교회는 정치적인 권익을 제공하는 일요일을 발판으로 회심하지 아니한 이교도들을 그리스도교에 입문(入門)시켜 마침내 중세기를 지배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지(立地)를 확보한 것이다.
이리하여 일요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제안한 최초의 교부인 터툴리안(Tertullian · d. 225)으 l말고,167 안식일에는 일하고 일요일에는 쉬라고 결의한 최초의 회의인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의 결의와, “존경스러운 태양의 날”에는 일하지 말라는 최초의 법인 콘스탄틴의 칙령을168 따르기 위해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니라”(출 20:11)고 이유까지 밝혀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명은 유린해도 되는가? 그것이야 말로, “너희 유전[傳統]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마 15:3)하는 경우가 아닌가? 이에 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직설적인 증언을 아래에 인용한다.
# 증언 가톨릭
“만약 당신이 성경만을 따른다면 당신은 토요일[안식일]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날이야말로 하나님께 거룩히 지켜지도록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시하셨기 때문이다. 일요일을 지킴으로써 비가톨릭신자들은 1800년간 성경의 제도가 아닌 가톨릭교회의 전통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신자들처럼 토요일[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이 점에서 그들의 덜미를 잡고 있는 것이다.169 성경만을 신앙의 유일한 지침으로 주장하고 있는 개신교회는 일요일 준수에 대한 아무 보증이 없다. 이 점에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만이 일관성이 있는 개신교이다.”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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